[잡담] 분서갱유는 실재했는가(2)

2019.08.09한문과 중국고전

중국 고전이나 유물을 보다보면 분서갱유라는 1회적인 사건 하나만으로 육국의 문화가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최근에는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는지 여기에 항우의 방화(放火)도 한몫 했다고 추가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최근에 논어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좀 다른 생각도 하게 되었다.

1. 우선은 공자의 시점에서도 그 시기는 문화가 사라져가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서주(西周)시대의 질서는 이미 사라져가고 문헌이나 구전자료, 유물도 이미 해석이 어려워지는 시기였다. 학자나 예식을 책임지는 사람이 과거 전통을 제각각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어짜피 사회적인 의미가 퇴색하고 있던 중이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

2. 전국시대 육국의 문화라는 것은 주나라의 문화가 사라져간 자리를 각국이 경제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힘으로 문화를 채워 빛을 내던 시기였다. 문자 역시 지역의 고유한 전통을 기반으로 각자 사용하면서 역사를 기록했고, 생활과 기술, 예식 모든 면에서 각각의 문화를 꽃피운 100년 남짓한 시간일 뿐이다.

결국 육국의 문화는 빛났으나 그것이 오래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한 것은 아니고 지역 특색이 잠깐 발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한 계기 역시 칭왕과 관련한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3. 오히려 외각의 진(秦)나라가 주나라의 풍습을 따라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진이 육국을 복속하고 제도를 통일할 때는 본인들의 이러한 자부심도 분명히 작용을 했을 것이다. 진나라는 실제 역사에서도 주나라와 이어져있었다. 육국의 글과 습속이 이미 주나라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한 얘기지만 진나라가 문화를 파괴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과거의 전통을 되살려 국가적으로 보급한다는 중국 정치철학 전통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간과정인 전국시대의 문화는 쉽게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그리고 공자가 그리워했다는 서주의 문화는 과연 그렇게 찬란하였을까? 물론 공자의 시점에서 남아있는 노래나 예법 등을 보았을 때 놀랍게 여겼을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 문화를 자각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풍습의 채록이었을 것이다. 즉 본인들의 문화를 재인식한 것 역시 춘추시대 혼란 속에서 경제와 철학이 발달하자 과거의 유물을 평가하고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서주의 문화가 완벽한 황금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서구에서도 고대 문명에 대한 동경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 문화를 재발견한, 그리고 사실상 발명자로 추정되는, 공자를 더 높게 친다.

5. 『관자』는 누가 봐도 위작(僞作)이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그리고 진나라와의 전쟁이 심해지기 전인 아마 전국시대 중간쯤이라고 추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그렇다면 최소 전국시대 말기에는 이미 유묵을 비롯한 제자백가를 절충적으로 해석하여 종합하는 흐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혹은 제나라의 국력이 강했을 때 학자들이 모여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치국의 도로 제자백가의 장단점을 분석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관자』가 남았다는 것은 제자백가가 분서갱유를 넘어 생존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학문이란게 그런 절충이 가능한 것인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관자』가 대접받지 못한 것은 공자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이유가 있기도 했겠지만 그러한 절충적 속성 때문에 낮게 평가되었을 수도 있다.

6. 하지만 한대의 유학은 음양가나 농가 등과 결합된 절충된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관자』의 절충적인 속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관자』가 한대의 위작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보면 한나라 자체가 절충적인 특성이 있다. 진나라의 중앙집권적인 제도도 적당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래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후대에는 오히려 공자와 주나라 질서를 더 강조하는 복고적인 왕권강화를 주장하는 나라가 많았던 거 같다.

7. 그러고보면 놀랍게도 중국의 모든 나라는 공자를 통해 주나라의 제도를 숭상했다. 한나라가 그 시작이었으나 그성향은 오히려 약했다. 진나라 역시 주나라를 추종했다. 후대의 여러 나라들이 체제가 정비된 후에 공자를 찾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전통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가 체제 확립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