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어떻게 명성을 얻었으며 집단의 성격은 어떠하였는가?

2019.07.09한문과 중국고전/논어와 공자

공자는 객관적인 인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있지만 그 행적에 대해서는 종교적 숭배 대상인 예수보다도 연구되어진 것이 없다. 예수는 기록이 없어도 서구에서 당시 정치·문화적 환경에 대한 연구가 폭넓게 진행되고 예수의 인생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실제 존재했던 공자가 어떤 사람이었을 것인지에 대한 연구는 마치 주공(周公)의 꿈을 기다리듯 각자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보다 더 심한 반발을 가져왔다. 공자에 대한 급진적인 언급은 사회의 격변기에만 잠시 가능한 정도였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조차 공자에 대한 강한 비판은 건국 초기에 잠깐 허용되었을 뿐 현재는 오히려 공자를 국가 사상의 중심적인 인물로 다룬다.

공자로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배경을 입혀야 하고 어떻게 해야 역사적 실존성을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인가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공자는 어떻게 명성을 얻었는가?

전통적인 설은 공자가 비록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를 꾸준히 하여 차근차근 인정을 받아 세력가의 눈에 들어 일하다 높은 관직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특출난 기술이나 정치적 배경이 없이는 높은 관직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출세라는 것도 권력자의 가신이 되는 것이었다. 선택을 잘못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권력 다툼 속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논어에는 제자들의 순위를 매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공자 역시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런 배경도 없는 공자가 그것도 30이라는 당시 늦은 나이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실하게 장부 정리를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명성을 얻는 것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춘추시대 노나라는 이상적인 국가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귀족들 간의 다툼이 치열했던 시대로 말하고 있다.

공자는 어떤 재주가 있었길래 명성을 얻은 것일까?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한 이야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널리 알려져있듯이 공자의 명성 중 하나는 禮와 관련된 것일 것이다. 예식의 정확한 복원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자를 찾았다는 이용주의 주장이 있다.(「공자는 ‘무신(귀)론자’인가?」, 2005)

공자는 어떻게 유랑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공자 집단의 특성도 모호하다. 그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십의 사람들이 공자와 함께 전국을 주유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공자 이전에 역사에서 이것이 가능했던 사람은 진문공 밖에 없다. 진문공은 일국의 공자(公子)로서 망명을 하고 가신들이 그 뒤를 쫓은 것인데, 출신배경이 낮은 공자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집단은 그 지역 군대의 공격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자는 노나라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후대에는 보통 이것을 간신의 모함으로 말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압력이 강하고, 여러 국가로의 유랑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것을 정쟁에서 진 후에 이루어진 정치적인 망명으로 보면 조금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수도 있다. 비약하면 공자 역시 이런 압력이 나올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 예를 들면 귀족 세력 제압을 위한 일종의 쿠데타라던가를 계획했을 수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해서 지도했다는 해석이 많지만, 공자의 제자들을 보면 어떤 일관된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재주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임기응변에 강한 특성이 있다. 공자에게서는 기본적인 경전 교육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자들의 출신 또한 다양하다. 이것은 계명구도의 맹상군을 연상시킨다. 맹상군 역시 국군(國君)으로 추존된 왕자(王子)로 공자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계급질서를 중시하는 유가의 주장과 달리 공자의 집단은 맹상군의 집단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이질적이고 당시 사회의 계급질서와 반하는 부분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십년넘게 스승을 따라 같이 유랑했다는 점도 의문스럽다. 이것은 공자의 집단이 단순히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 결사 또는 정당과 비슷한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제자들간의 경쟁과 급격한 분파 역시 학술이나 종교 집단이라기보다 정치 집단의 성격에 가깝다. 어쩌면 사제관계가 아니라 공자를 회장으로 모시고 있는 상당히 자유로운 클럽이었을 수도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간에 형제애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조직이 수직적인 것도, 수평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왜 공자가 집권하면 전국이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인가? 이것은 종교적 특성을 띤 정치 집단의 특징일 것이다.

공자의 말년에 이어지는 유력정치인들의 방문도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있지만 본인은 조용히 있는 현대의 정치계파 보스의 모습과 통하는 면이 있다. 송시열이 벼슬을 마다한 것도 공자의 이러한 처세를 따른 것 아닐까?

권력과의 관계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달리 공자가 행한 예는 상명하복의 성질이 있었다. 논어 향당편에서 다루는 공자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권력에 의연한 강직한 충의지사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백성의 부담을 늘리는 일을 불쾌하게는 여기지만, 군주의 명령이라면 아버지를 죽이는 일 빼고는 다 한다.(그러나 역사에서는 이 원칙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간신이나 윗사람의 말에 토를 다는걸 불쾌하게 여기는 문화는 유가 속성의 일부일 지도 모른다.

공자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서, 일은 일대로 정확히 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시의 예라는 것은 자기보다 높거나 낮은 작위를 가진 사람들을 접대하는 외교관계를 포함하므로, 이에 능숙한 공자는 크게 유명해졌을 수도 있다. 공자의 치적으로 알려진 제나라에게서 영토를 돌려받은 것도 이러한 외교기술, 즉 예에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의 능력은 외교술?

어쩌면 공자는 지금으로 치면 외교전문가에 가까운 모습일 수도 있다. 당시는 크고작은 봉지들이 널리 있었으므로, 외교가 매우 빈번하게 다중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무력보다 외교적인 방법으로 소국을 겸병해 가는 것이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의 상황일 수도 있다. 즉 공자의 기술이 매우 유용했던 시대일 수도 있고, 공자는 그 과정을 가속화 시키는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국가 관계가 안정되어 있던 주나라 시대에는 공자는 자리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주공이 그 국가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를 맡았을 것이다. 주공의 시대에는 공자의 시대처럼 여러 나라의 외교관계에 머리를 쓰고 국력을 탕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상상하던 주공의 외교는 옆나라가 형제처럼 찾아와 즐겁게 잔치를 벌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공자가 능한 것으로 알려진 예, 군사, 역사, 음악에 대한 지식은 행정술인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이것의 적극적인 활용은 외교술이며, 이 외교술은 국가간의 관계 유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유가와 경쟁적인 위치인 것으로 알려진 도가가 ‘老莊’을 높이는 것은, 유가 즉 공자의 특징이 ‘少緊’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우리의 생각과 달리 유가는 적극적인 통치 활동에 힘썼던 것이며, 이것이 법가로 나타난 것이다. 오행에서 왜 禮가 젊은이와 같은 火로 대표되는가? 그것은 유가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며 노는 것 또한 유가의 특징이다.

공자의 후계자로 알려진 맹자에게 일국의 안위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맹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라기보다 공자가 무력이 아닌 외교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유지하는 전문가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자가 정명을 앞세운 것도 이것이 행정 뿐만 아니라 외교술의 기본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가가 먼저일까? 유가가 먼저일까?

논어를 보면 관직에 대한 추구도 강하게 드러나지만, 반면 관직을 얻지 못했을 때의 마음가짐도 자주 언급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도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흔히 도가를 탈속적인 것으로 떠올리지만, 춘추시대 도가의 문헌으로 분류되는 책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주질서와 사회질서, 인체질서를 도식화하지 사회에서 떠나있는 상황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들다.

어쩌면 노장(老莊)을 공자의 앞으로 둔 것은 후대의 일이고 탈속적인 도가의 성격을 만든 것은 바로 공자일 수도 있다. 또한 도가의 특징은 논리의 엄밀성이다. 철학 발달의 단계로 보자면 이것은 공자보다 후대에 발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유가의 대척점, 묵가

춘추전국 말기에 가장 유행한 것은 공묵이라고 한다. 그런데 묵가 집단의 성격에 대한 것은 지금 전해져 온다. 위계질서가 잘 조직되어 있었고, 방어용으로만 사용했다지만 전투 능력이 있었다. 또한 평등한 분배를 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공자 집단의 성격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묵가와 대비되는 성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군대식은 아니었지만 공자를 중심으로 상당히 잘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어떤 층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어쩌면 학문 전달의 층위가 아니라 조직적인 층위였을 수도 있다.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고 설득하는 방법으로 원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 역시 자기가 제자들보다 더 맛있는 밥을 따로 더 많이 먹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같이 동고동락하며 같은 스승을 따르는 단체가 어떻게 보수적일 수 있었을까? 오히려 다양한 계층의 제자가 찾아왔기 때문에 사회적인 신분 차이가 공자의 집단 내에서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점에서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종교 집단들과 차이가 크다.

그리고 전투능력이 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수레몰기와 활쏘기에 모두 능했으며, 협상능력도 있었다. 사실 무력의 뒷받침 없이 외교를 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협상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지식과 기존 권력과의 커넥션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묵가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분이 있을 때만 전쟁을 하고, 그것도 가능하면 외교적인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원칙이 있었을 것이다. 오기가 증자 문하를 떠났다고 하지만 그 기본은 역시 증자에게서 배운 공자의 학설이었다. 손자 역시 인화(人和)와 부전(不戰)을 강조한 점에서 공자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가의 본질은 유랑

즉 공자와 묵자 모두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모두 유랑무사집단, 즉 용병집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논어에 보면 죽음(死)에 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철학적인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죽음을 가깝게 생각한 거 같다. 공묵이 유랑무사집단이었다는 주장은 이미 노신에 의해서 주장되기도 했다.(「流氓與文學」, 1931)

용병이라는 것이 의외로 인류사에 일찍 등장한다. 집단이 전문 군인을 유지하기 힘들 때는 대가를 주고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아마도 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형태로 바뀌게 되는 거 같다. 이것은 경제 규모의 성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랑이라는 경험이 유가를 형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악기를 잘 다루는 것도 유랑 집단의 특성인 경우가 많다. 또한 공자가 제사의 전문가라면 제사는 일년중 몇회만 일어나는 특수한 일이며, 씨족 단위에서는 씨족 대표의 장례가 가장 큰 행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장례 절차와 상속에 대한 것이 유가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장례와 상속, 이것이 유가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

유가가 보수적인 예의를 강조했지만 의외로 농업에 관한 언급이 적은 것은 이러한 유랑적인 특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공자와 제자들을 사제관계이고 공자가 학교를 운영했다고들 말하지만, 그렇게보기에는 수업료나 공자에게 주는 대가 같은 것이 명확하지 않다. 결식아동 안회는 어떻게 수업료를 지불했는가? 반대로 공통적인 재정을 고민한 듯한 흔적은 많다. 즉 학교는 아니고 일종의 공동체였고, 학교였다고 해도 수업료가 아닌 자발적인 기부로 운영되고 회계도 학생이 맡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공자를 완성된 어떤 것으로 볼 필요 없이 유랑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후대에 미친 영향

재미있는 것은 공묵 이후로 이러한 집단적인 활동을 보인 세력은 역사에 반란군 말고는 없다. 이후에 등장하는 세력들은 모두 친정부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군사력도 자치적인 수준에서만 유지하며 이 또한 국가를 위해 사용한다. 도교나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공자의 세력이 묵자의 세력보다 더 친정부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공묵 중에서 공자의 사상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증자나 자사가 공자 학파의 대표적인 학맥이 된 것도 다른 것보다 이들이 더 비폭력적이고 친정부적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나마 있던 유가의 강골들은 진나라와 진한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었다. 주나라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시대는 이미 그럴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적용하려는 방법을 찾아서 중국 역사의 하나의 흐름을 생성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끊어진 전통을 쫓기 위해 책을 연구하다 학문을 세웠고,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할 근거를 찾다보니 유심적인 인을 강조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 실제 적용에서는 관중과 묵자에 필적하는 외교술과 전투기술 또한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범위를 넓혀가며 생각하다 보면 후대에 나온 삼국지 같은 소설에서 문신과 무신의 경계가 모호하고 전쟁에서 외교가 병행되며 궁중은 물론이고 진중에서도 가무가 있는 파티가 자주 열렸던 것에 대해 유가의 종합적인 성격이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즉 한대에 이루어진 학문과 문화의 상당 부분을 논어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의 난세를 평정하려는 이상론자가 아니라 공자 자체가 춘추전국과 떨어질 수 없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나온 외교행정과 전쟁술의 대가였을 수도 있다.

부록: 공자의 스승은 누구인가?

흔히 유가가 스승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고 하나, 정작 공자 자신은 스승에 대한 언급도 없고 그리움을 표출한 적도 없다. 수백년 전의 주공에 대한 그리움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후대에 강조하는 스승에 대한 존경은 각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이라기보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를 향한 종교적인 숭상에 가까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역시 당대의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크게 받긴 하였을 것이다. 남아있는 역사에서 누가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가? 내 생각엔 관중이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다만 관중은 현실정치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후대에 미친 학문적 영향은 공자보다 낮다. 관중에 대한 공자의 비판적 평가 역시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의 경영에 대한 관념은 관중이 앞섰으나 그 깊이는 공자만 못하다고 본 것이고, 그 핵심적인 차이로 상정한 것이 仁일 것이다. 또한 관직이 관중만큼 높지 않은 것에도 만족한 이유도 仁에 근거할 것이다.

좀 넓게 보면 제환공과 관중이 첫번째 패권국이 되었기 때문에, 국경을 맞댄 노나라에서 공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제환공과 관중의 시대를 여는 사건이었던 제환공을 칼로 위협한 사건이 바로 노나라 장군 조말(曹沫)에 의한 것이었다. 노나라 역시 이때부터 절치부심을 했을 것이며, 국력을 키우기 위해 학문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역사에서도 어느 한 나라가 강해지면 주변의 나라도 그에 대응해 국력이 강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논어에 등장하는 제나라와 관련된 사건들 역시 그 무게를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

국가들이 발전하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공자 외에도 공자에 필적하는 인물이 동시대에 여럿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석가모니 역시 비슷한 사상과 유명세를 가진 세력이 근처에 6개(육사외도)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