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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STOP! SMOKING』
뚜르게네프 — 「쌍둥이」
뚜르게네프의 『산문시』(Стихотворения в прозе)에 요즘 우리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 적는다.

나는 쌍둥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 생김새며, 표정이며, 머리카락 색깔이며, 신장이며, 체격까지 쏙 배놓은 듯이 닮았지만,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부터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Я видел спор двух близнецов. Как две капли воды походили они друг на друга всем: чертами лица, их выражением, цветом волос, ростом, складом тела и ненавидели друг друга непримиримо.

그들은 분노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도 같았다. 불덩이처럼 격한 얼굴을 서로 가까이 들이대는 표정도 같았다. 서로 눈알을 번득이며 노려보는 그 눈도 같았거니와, 그 험상궂은 욕지거리도, 그 음성도, 그리고 그 욕설을 내뱉는 일그러진 입술 모양도 역시 같았다.

Они одинаково корчились от ярости. Одинаково пылали близко друг на дружку надвинутые, до странности схожие лица; одинаково сверкали и грозились схожие глаза; те же самые бранные слова, произнесенные одинаковым голосом, вырывались из одинаково искривленных губ.

나는 참다 못해, 그중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Я не выдержал, взял одного за руку, подвел его к зеркалу и сказал ему:

「차라리 이 거울 앞에서 욕설을 퍼붓게나……. 어차피 자네에겐 마찬가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이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니 말이네」

— Бранись уж лучше тут, перед этим зеркалом… Для тебя не будет никакой разницы… но мне-то не так будет жутко.

— 김학수 옮김, 「쌍둥이」(Близнецы, 『투르게네프 산문시』, 2007), 104쪽.
『자유의 적들』(2011)

- 한국 유일의(또 있으면 좀 알려주셔요) 보수(?) 논객(?), 군대 갔다온 사람들의 친구, 전원책 책이 나왔는데 안 볼 수가 있나요. 제가 경제 사정이 안 좋아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어짜피 변호사인 저자도 (팟캐스트 하는 사람들처럼) 책 장사 하려고 쓴 건 아닐겁니다.

- 저자가 자기의 생각을 토막토막 꼼꼼하게 정리하고, 또 그걸 위해 독서를 했다(고 믿는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간접 인용인지 직접 인용인지 밝히진 않지만)는 것이 칭찬받을만 하다고 본다. 좌파니 보수니를 떠나서 자기 생각을 이렇게 광범하게 정리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 나는 또한 이 책에 실린 글이 아주 솔직하다고 본다.(유명한 사람들 이름을 아무런 평가 없이 불러제끼지만, 그정도 잘난체는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 위인들이 거론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그리 오래 할 수 없었을 거다.

- 보수주의자(정의가 어렵지만 일단 이런 의미로 쓰자)에게 현실은 모순적이다. 이 모순적이란 건 좌파가 현실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화두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 보수주의자는 있는 그대로의 모순적인 현실을 모순적인 각각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국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헌법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저자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그래서 글 단락들이 서로 논리를 이루지 않아 설득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나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을 가진 ‘생명주의자’지만, 육식(肉食)을 포기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다. 사랑이 미덕임을 늘 자각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혐오를 굳이 감추고 싶지 않은 원류(源流) 도덕주의자다. 거기에다 초월적 힘을 믿는 이신론자(理神論者)다. 무엇보다도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다. 보수주의자가 혁명을 꿈꾸다니! 그러니까 나는 ‘모순(矛盾)’이다.
— 서문
- 보수주의자는 모순을 그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배후를 캐는 좌파 내지는 지식인들을 배척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좌파를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로 여기고, 혐오한다.

- 그럼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을 따르는가? 대세와 현실론을 따르며, 권력과 힘을 따른다. 원리를 창조하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과 위인들의 권위를 따른다.(이 책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

- 전원책이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국가를 최고 가치로 삼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재외국민들은 국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줄 필요가 없다는 식. 그가 군필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런 생각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점에서 매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내국인에 대한 관점은 같다. 복지를 저주하고 불평등을 옹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좌파로 분류된다. 히틀러 조차 좌파로 분류된다.(히틀러를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좀 있던데 관련이 있는 듯)

그래서 라디오방송에서 한미FTA에 대해 자신의 견해는 없고 절차상의 문제와 중우정치를 걱정하는 희한한 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 국가라는 기준이 있는 그는 다수결도 무시한다. 국가주의는 달콤하지만 독이 있다.

- 이런 종류의 책은, ‘와 국가, 사회, 철학, 역사 없는 분야가 없네, 전원책 짱’ -> ‘전원책은 보수주의자고 좌빨은 무덤으로 가라네’ -> ‘와 나도 보수주의자. 보수주의 만세, 원책이형이 이렇게 말했어’ 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인터넷 보면 이미 몇명 있는 거 같다… 좌빨 역시 방대한 분량의 책을 보고 권위에 놀라 되는 경우가 있는 거 같다)

전원책이 근성가이라면 이 책의 약점을 보완해서 비슷한 책 한권 더 쓸 거다.

- 계속 보려니까 시간도 아깝고 해서 덮습니다. 대중에게 내놓는 책은 종교 경전이 아닌 다음에는 일관된 주제로 친절하게 끌어가는 게 예의인 거 같습니다. 너무 광범위하게 사상적 기반을 건드리다 보니 저도 읽기 질리고 또 내용의 품질 관리도 안 된 거 같네요. 전원책이 변호사고 하니까 헌법을 화두로 책을 쓰면 좋을 거 같습니다.

- 생각해보니까 전원책의 책이라도 읽으려는 생각을 스스로 하는 자칭 보수가 있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것일테죠. 아무튼 이 책에 대한 평을 보면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순수하지만 자기 스스로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겠죠.
『오래된 미래』(2007)

‘공식 한국어판’이란 딱지를 붙여 삼성 계열사(비공식)에서 펴낸 만이천원짜리 양장본 『오래된 미래』를 보고 착찹한 생각이 든 건 나 뿐만 아닐 것이다.
만약 어떤 책을 읽고나서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할 지 모른다면…
독서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읽어야 할 책을 모르면 독서인 내지는 지식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동네 도서관
자기 책을 모두 맡겨놓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동네마다 있다면 어떨까?

책 관리하기도 좋고.(자기 책은 다른 책과 독립적으로 50권까지 1년 대여 가능 조항 같은 게 있으면 귀찮은 일 없을 듯) 어짜피 자기 안 보는 책은 남들이 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이 많이 쓰면 학교 독서 숙제라던가 쉽게 할 수 있고, 만약 자기 동네에 전공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거다.

이사갈 땐 다른 동네 도서관으로 트랜스퍼하던가 찾아가면 되고.

문제는 인기 있는 책들은 쉽게 상하고, 분실 위험이 있다는 거. 맡기는 사람은 거의 기증이라고 생각해야 겠다; 
책의 특성
이 책들이 만약 책이 아닌 다른 매체로 발표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줄까? 진중한 무게감과 폭발적인 폭로성, 비밀스러운 정보가 담겨있을 듯한 모습. 이것이 책이 아직 가지고 있는 매체로써의 개성아닐까?



실제 출판된 책은 아니지만 아래의 이미지들은 책이라는 소재에서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2009)

겉핥기 맛집 여행기보다 이런 전문적인 여행기가 귀하다. 또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도 소중하다. 그러나 내용에는 약간 불만이다.

전문가들이 세미나까지 하면서 준비했다는데 교육 현장이아니라 대형도서관 위주로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지나간다. 세미나 발제까지 했다는 사람들이 정작 방문할 도서관 홈페이지는 안 가봤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짜임새있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대한 인상을 각자가 중복해서 적었다. 정보 채널도 제한되어 있다. 인터뷰 등의 방법도 괜찮을텐데 가이드가 한 말만 복창한다.

이런 여행기에는 당연히 각 도서관을 조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 소개가 우선이다. 하다못해 도서관 전경을 찍은 사진 하나씩은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결국엔 아쉽게도 인상만 적고 지나가는 한국 서점의 겉핥기 여행기들과 큰 차이가 없는 책이 된 거 같다. 저자들이 최일선에서 독서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아쉽다.

한편으로는 수입된 서양 문화들이 한국에서 자리 잡은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매일 같이 마시는 커피만 봐도 그렇다. 고종이 커피 마신 게 1896년이라는데, 10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드립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국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들의 권한이 제한된 것인지, 그들이 경직되어 있어서 그런 건 지, 돈이 없어서 그런 모습인 지는 잘 모르겠다.

월간 우리교육」 2008년 4월호부터 11월호까지 실린 기사를 묶은 것이다. 
池田大作全集 100
『Don't Vote It Just Encourages the Bastards』(2010)

http://www.groveatlantic.com/default.aspx#page=isbn9780802119605


http://blog.daum.net/dcknsk/8730691
『How to Disappear』

http://www.frankahearn.com/
2010년 6월 3일, 목요일에 버린 책
  1.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수정증보판, 2쇄, 민중서림, 1986년 1월 25일 발행), 정가 7,5000원! 두번째로 사용한 이희승 사전. 90년대까지만 해도 완전 필수품이었는데, 요즘은 국립국어원도 책으로 사전을 안 내고, 인터넷으로만 서비스하는 세상.
  2.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 New Edition(지금은 5판까지 나와서 3판으로 불림, 하드커버, 1990) 아마도 한국에서 재인쇄한 것인 듯. 1991년 2월 5일 구입. 5판까지 나온 마당에 볼 일이 없을 거 같다.
『언어와 비극』(1989)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강연 모음집이다. 1984~88년 사이 주로 와세다대학 문학연구회(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에서 이루어진 15개의 강연과 인터뷰들은, 그 형식 때문인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던 『은유로서의 건축』(隠喩としての建築)(1979)이나 『탐구 1』(探究I)(1986)보다 쉽게 읽힌다. (사실은 이 책들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었다) 옮긴이도 이 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 책은 강연문이나 인터뷰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저작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고진 자신이 쓴 최고의 고진 해설서라고 해도 좋다.) 둘째, 이 책은 본래 ‘글’이 아니라 ‘말’이었기 때문에 글로 썼다면 생겼을지 모르는 자기검열이 최소화되어 있어서, 당시로서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사고들(이를테면 제4기, 제5기에서 본격화될 사고의 단초들)도 날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 한마디로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 ‘종합선물세트’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느 걸 먼저 골라 읽든지 관계가 없다.
— 옮긴이 후기, 513쪽.

그럼에도 일반인이 보기엔 현학적인 내용이 여전히 많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코의 소설이 필독도서가 되는 한국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일 수도) 그러나 그 현학이 사실 그리 또 전문적인 건 아니다. 더 읽어봐야 주장과 면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학문적 파편들을 단초삼아 적극적으로 내성(內省)하고, 그 속에 자기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인 거 같다. 그 과정에서 서양사상은 그저 생각의 실마리일 뿐이므로, 그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학구열 높은 한국이라면 이 정도의 작업을 할 인물 정도야 흔할 거 같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두번째로 이 책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옮긴이다. 원문에 없는 주와 틈틈이 ‘보충’이라는 이름으로 본인의 해설을 실었다. 또 그 주석과 해설이 일반적인 비평과는 달리 매우 가볍다는 것이 특징이다.(비주류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기존 문단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쓴 거 같다) 그쪽을 잘 몰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옮긴이 조영일은 젊은(?) 문학 비평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거 같다. b라는 출판사 역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 같다.

1장에 나오는 니체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가라타니 고진 자신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뭔가 장황하게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나오는 얘기들은 대충 수긍이 가지만, 가라토니 고진의 핵심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뭔가 내외(內外)와 관련된 고민인 거 같다.

니체는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개개의 글들이 모순적입니다. 니체의 글쓰기에서는 어떤 주장이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에 의해 끊임없이 넘어가는 형태로 텍스트가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정리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 10~11쪽.

맘에 드는 챕터 몇 개만 읽고 도서관에 돌려주고, 다음엔 좀더 특정한 주제를 다룰 거 같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日本近代文学の起源)(1980)이나 『일본정신의 기원』(日本精神分析)(2002) 같은 책을 읽어야 겠다. 아예 조영일의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2008)을 읽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문학 비평 부분은 비교적 내용이 명료하다. (1장 「소세키의 다양성」(漱石の多様性), 5장 「에도 주석학과 현재」(江戸の注釈学と現在) 등) 내가 조금 기본지식을 갖고 있는 부분이 나오니, 가라타니 고진의 이해가 일반적이지 않고, 표피적인 부분(그러니까 깊이 설명하지 않은)이 있어서 글을 읽는 데 방해된다. 『은유로서의 건축』을 보면 주류 학계에서 자신을 배척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이 나오는데, 그럴 거 같기도 하다. 표류하는 글쓰기는 데리다를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패턴 같다.(이런 분들은 한국에도 있다)

대화에서 파생되는 변화하는 의미에 천착하는 것도 이 계통 사람들의 특징인데, 과연 대화라는 것을 그렇게만 이해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연극 등의 예술에서 발생하는 대화 등은 꼭 그렇게 이해할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들뢰즈와 데리다로 해석하려는 것이 이 사람들의 경향이다. 한국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자신이 시간을 들여 저술한 연구를 너무 간략하게 이야기해서, 감질만 난다. 처음에 말했던 이 책의 장점이 바로 단점이 된 셈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어렸을 떄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꽤 자주 봤다. 영어 공부에 좋다고 해서 영어판을 정기구독한 적도 있을 뿐 아니라, 공공장소나 휴게실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런 내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다음 기사를 읽은 후였다.

그건 독일 전범을 이스라엘 첩보국이 수십 년 추적해서 체포해 온 후, 법정에 세웠다는 굉장히 긴박한 첩모물이지만 매우 부드럽고 감상적으로 쓰여진 글이었다.

읽을 때는 이스라엘 놈들은 이렇게까지 정의를 세우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부럽게 읽었는데,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정부가 독일 전범을 처단할 권한이나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또 이 첩보물은 자체는 국제 불법 폭력 납치극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범죄극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그리도 감상적이고 호의적으로 실을 수 있던 것일까? 그 뒤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다른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에게 해가 되는 선전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출판산업 구조 변화

ASSIOMA라는 일본어 블로그에서 옮겨온 표인데,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의 상황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왼쪽의 표가 매우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한국의 출판 산업은 한국 답지 않게 분업이 매우 잘 이루어져 있다. 인쇄소 따로 제본소 따로, 창고도 따로! 이건 일본을 통해 출판 산업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출판 분업 전통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업자들이 모두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현재 한국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무시무시하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 분업이 발달한 산업은 대부분 일본 영향을 받았다. 봉제업('시다바리'), 건설업('노가다'), 법조계에서부터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출판업계 내에서도 그간 중간과정을 없애고 과정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왔는데, 이루어진 건 거의 없다. 이를테면 CTP를 시장에 내놓으려고 줄기차게 노력하는 집단이 있지만, 필름 교정 과정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Color Management 하는 사람을 아마추어 취급하는 게 현실.

워낙에 한국 시장이라는 게 이상하게 돌아가긴 하지만, (우리 민족이 유별나서라기 보다는, 우리 기업과 정부가 유별나서 그렇다) 결국 이북과 독자의 직접 만남, 제본된 책의 판매 부진 등을 우리도 겪을 테고, 표의 오른쪽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융의, 주로 이부영(1932~)이 쓴,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새롭게 이해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세월 혹은 경험은 감정을 좀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

한편 융은 실제 업무를 하는 의사의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에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기 전엔 평생가도 이해 못 할 부분이 있는 것만 같다. (융을 비판할 때 가장 난해한 부분도 이거 같다)

융에 관한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어렸을 때 외삼촌(문리대도 다니고 확실히 지식인이었던 듯)이 보던 미국 전기 작가의 책 번역이었는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책이 안 좋다.

이부영 같은 해설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는 의사로서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특수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 이런 해설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아마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전문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과 한국인을 위해 해설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그들의 공부가 매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미국의 학문을 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입을 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치하기 그지 없다. 어릴 때 읽었던 김용운부터해서 최근의 이런 저런 사람들... 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 에세이에 실린 아이디어들은 참으로 동심의 세계다.
당분간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당분간 ㈜알라딘커뮤니케이션(대표이사 조유식)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라딘용으로 제작한 플러그인과 이 블로그 글들의 알라딘 링크도 곧 삭제하겠습니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지하철을 오래 탈 일이 있어서 얇은 책을 꺼내 들었다. 7년 전(;;;)에 산 책세상 문고. 지하철을 생각하면 책은 더 작게 (일본의 문고판처럼) 나오면 좋겠다. 그러려면 책 장정에 값을 메기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가격을 메길 수 있어야 하겠지.

그렇다면 근대 과학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가설을 허용치 않는’ 뉴턴 물리학 이래 근대 자연과학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이다. 대포알의 무게, 화약의 양, 발사의 각도, 바람의 세기 등을 알면 대포알이 어디에 떨어질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다. 이런 능력 덕분에 우리는 거대한 댐도 다리도 세웠고 우주선도 쏘아 보냈다. 그렇다면 앞에서 본 제사장과 주류 경제학자들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과연 제사장은 인간의 죄, 신의 진노, 그로 인한 풍흉이라는 결과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만약 그가 흉년의 원인으로 내세운 ‘인간의 타락’설이 그렇게 신통한 법칙이라면¶그는 흉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의 풍기 문란 상태와 늘어나는 환락 업소의 숫자만을 보고도 미리 흉년을 예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다면 “더 타락하면 흉년이 들 것이니 자제하자”고 가르쳐주어 흉년을 미연에 방지해줄 일이지 막상 흉년이 닥친 뒤에야 그런 소리를 해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비슷한 의문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시장 질서가 그토록 어김없는 과학적 철칙이라면 왜 그들은 위기 직전까지도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다가 위기가 온 다음에야 이구동성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일본이나 한국 경제의 모습이 교과서적인 시장 경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언제 비밀이었던가? 그런데 모든 게 잘되어가던 때에는, 그런 차이야말로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아시아 발전 국가의 독특한 장점이라는 주장이 횡행해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별 말이 없거나 부화뇌동하기까지 했었다. 그러고 보면, 주류 경제학이 본격적으로 과학성을 표방하기 시작한 20세기를 통틀어 경제학자들이 경제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한 적이 있기는 했던가? 과문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 「책을 옮기게 된 동기」, 9~10쪽.

1997년에, 또 2000년에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시장 개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시장 개혁 ‘때문’이 아닐까? 1997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벌 기업들이 단기로 차입한 외자가 지나쳤기 때문인데, 이는 김영삼 정권 당시 재벌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기 위해 원칙 없이 행하던 금융 자유화와 탈규제의 결과가 아닌가? 또 2000년에 경기가 위축된 데에는 몇 년간의 구조 조정 과정에서 고용 창출을 위해¶대규모 투자를 할 만한 대기업들이 사라졌거나 위축당했으며, 은행들이 금융 구조 개혁의 덫에 걸려 몸을 사리는 바람에 기업들이 자금 경색으로 고통받았던 것이 최소한 원인의 일부가 아닌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시장 개혁을 완수해야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실레는 있는가?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 길에 들어선 멕시코 같은 나라들은 시장이라는 낙원에 도달했는가? 아니면 불평등과 경제 불안정의 지옥에 빠져버렸는가? 결국 우리는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까지 시장 경제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시지포스처럼 곤두박질을 쳐야 하는가? 시장 실현이 인간 경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책을 옮기게 된 동기」, 13~14쪽.


이 책은 폴라니(Karl Polanyi, 1886~1994. 헝가리 경제학자로 소개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때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저작은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로 썼다)의 선집이다:
  • 「Our Obsolete Market Mentality」(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Commentary, Vol. 3, 1947)
  •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이 책에서는 '거대한 변환'으로 옮겼으나 후에 역자가 '거대한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낸다)(1944), 6장과 11장.
  • 「Marxism Re-stated」(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1934, 미발표 원고)
  • 「Introductory Notes to Karl Marx's "Political Economy and Philosophy"」(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1933~1935, 미발표 원고)
  • 「Syllabus of a Lecture on marxian Philosophy」(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1933~1935, 미발표 원고)
  • 「A Chrisitian View of Marxism. A Critique」(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관점: 비판)(1933~1935, 미발표 원고)
  • Neue Erwägungen zu unserer Theorie und Praxis」(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Der kampf, 1925)
  • 「Universal Capitalism or Regional Planning」(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The London Quarterly of World Affairs, 1945)
  • Karl Polanyi-Levitt(폴라니의 딸, 1923~), Marguerite Mendell, 「Karl Polanyi: Biographical Sketch」(칼 폴라니 약전)(Telos, no. 73, 1987)
이런 선집은, 지은이의 연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개략적인 방향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준다.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폴라니의 주요 논지는 현재 자유시장의 허구성을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인 듯하다.

도표나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전반적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숫자놀음을 많이 하지않는 편이다. 오히려 이들은 철학자에 가까운 거 같다.

또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지식인인 만큼, 고전과 역사에 대한 교양이 있고, 이를 자주 인용한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고의 기반인 듯 하다. 요즘은 이런 글을 글을 만나기 어렵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2-1. 『거대한 전환』 6장

그런데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해서는 이런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 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폐허가 될 것이다. 구매력의 양과 사용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 비록 사람들은 ‘노동력’도 똑같은 상품이라고 우겨대지만, 일하라고 재촉하거나 마구 써먹거나 심지어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어쨌건 그 특별한 상품을몸에 담은 인간 개개인은 반드시 영향을 입게 마련이다. 이런 체제 아래서, 인간의 노동력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인간’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화적 제도라는 보호막이 모두 벗겨진 채 사회에 알몸으로 노출되고 결국 쇠락해간다. 그들은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동하는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된다. 자연은 그 구성 원소들로 환원되어버리고, 주거지와 경관은 더럽혀진다. 또 강이 오염되며 군사적 안보는 위협당하고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된다. 마지막으로, 구매력의 공급을 시장 기구의 관리에 맡기게 되면 영리 기업들은 주기적으로 파산하게 될 것이다. 원시 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 부족이나 과잉은 경기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시장,¶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올 결과를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Now, in regard to labor, land, and money such a postulate cannot be upheld. To allow the market mechanism to be sole director of the fate of human beings and their natural environment, indeed, even of the amount and use of purchasing power, would result in the demolition of society. For the alleged commodity "labor power" cannot be shoved about, used indiscriminately, or even left unused, without affecting also the human individual who happens to be the bearer of this peculiar commodity. In disposing of a man's labor power the system would, incidentally, dispose of the physical, psychological, and moral entity "man" attached to that tag. Robbed of the protective covering of cultural institutions, human beings would perish from the effects of social exposure; they would die as the victims of acute social dislocation through vice, perversion, crime, and starvation. Nature would be reduced to its elements, neighborhoods and landscapes defiled, rivers polluted, military safety jeopardized, the power to produce food and raw materials destroyed. Finally, the market administration of purchasing power would periodically liquidate business enterprise, for shortages and surfeits of money would prove as disastrous to business as floods and droughts in primitive society. Undoubtedly, labor, land, and money markets are essential to a market economy. But no society could stand the effects of such a system of crude fictions even for the shortest stretch of time unless its human and natural substance as well as its business organization was protected against the ravages of this satanic mill.

— 62~63쪽.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1944), 제6장, 「자기 조정 시장 그리고 허구적 상품: 노동, 토지, 화폐」(The Self-Regulating Market and the Fictitious Commodities: Labor, Land, and Money) 중에서

굉장히 예언적인 문구;;;

‘보수적’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돈 이외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중시하는 것.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말이 반대로 쓰이고 있다. 이 ‘전통적 가치’에 ‘사장 말은 무조건 따를 것’, ‘법과 윤리를 무시하고 돈을 벌 것’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장 말에 대한 순종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테일러주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전통적인 가치를 사회에 현현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매우 보수적이다.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 더 보수적인 형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원문과 대조해서 보니 굉장히 성의있는 번역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강조 표시가 원문과 차이가 난다. (위의 인용문 참조) 원문의 이탤릭, 따옴표를 모두 작은 따옴표로 옮겼고, 거기다가 한국어 문장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도 작은 따옴표를 붙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악마의 맷돌’)

또 be 동사에 붙어있는 강조를 한국어 형용사로 옮기기도 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are’가 강조된 것을 번역문에서는 ‘필수적’을 강조) ‘이다’를 강조해서 어색하게 보였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원문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영어의 이탤릭체나 일본어의 가타카나 표기 등이 갖는 활자 뉘앙스의 차이를 현대 한국어에서는 표현하기 어렵다. (국민학교 때 외래어는 가다카나처럼 고딕체로 쓰라고 배우기도 했었습니다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책을 보면 산업 발전 단계의 도식을 너무 도식적으로 강조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어쩌면 200년 전 사건이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신화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은 어떤 사람이 고용주가 아닌 피고용자인 한에서만 그를 부르는 기술적 용어다. 따라서 노동 조직은 시장 경제 체제 조직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노동 조직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결국 위의 결론은 시장 경제 체제의 발전에 따라 사회 조직 자체의 변화가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사회는 이제 모든 면에서 경제 체제의 부속물이 되어버렸다.

labor is the technical term used for human beings, in so far as they are not employers but employed; it follows that henceforth the organization of labor would change concurrently with the organization of the market system. But as the organization of labor is only another word for the forms of life of the common people, this mean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market system would be accompanied by a change in the organization of society itself. All along the line, human society had become an accessory of the economic system.

— 66쪽.

앞에서 영국 역사의 종획운동(enclosure)의 약탈과 산업혁명에 수반된 사회적 파국을 비교했었던 것을 상기해보자. 일반적으로 개발은 사회적 혼란을 대가로 얻어진다. 그 혼란이 너무 크다면 공동체는 그 과정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는 그 변화 과정이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또 그 효과가 덜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규제하여, 영국이 스페인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에 빠지지 않게¶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산업혁명의 충격에서 영국의 인민들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자생적 진보에 대한 맹신이 사람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가장 선구적인 이들조차 규제 없는 무제한의 사회 변동을 향해 광신도들처럼 열광적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민중들의 삶에 나타난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이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의 활동을 둔화시켰던 사회 보호의 반작용이 없었다면 인간 사회는 괴멸된 뻔했다.

We recall our parallel between the ravages of the enclosures in English history and the social catastrophe which followed the Industrial Revolution. Improvements, we said, are, as a rule, bought at the price of social dislocation. If the rate of dislocation is too great, the community must succumb in the process. The Tudors and early Stuarts saved England from the fate of Spain by regulating the course of change so that it became bearable and its effects could be canalized into less destructive avenues. But nothing saved the common people of England from the impact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A blind faith in spontaneous progress had taken hold of people's minds, and with the fanaticism of sectarians the most enlightened pressed forward for boundless and unregulated change in society. The effects on the lives of the people were awful beyond description. Indeed, human society would have been annihilated but for protective countermoves which blunted the action of this self-destructive mechanism.

— 66~67쪽.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일까. 정부와 전경련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풍요를 누리게 될까? 자유시장은 과학적 진리일까?

왜 우리는 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질 수록 경제를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게 되는 걸까?

글들이 매우 철학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난 그래서 폴라니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거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내용 역시 전통 가치로의 회귀로 정리될 수 있다.) 기회가 있으면 『거대한 전환』 을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재밌는 현상은 주로 이 책을 최근에(2009년에) 읽으신 분들이 칼폴라니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거대한 전환>이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거대한 전환>이 아직 나오지 않았거나 너무 두껍고 비싸서 우선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전환>이 이 <전세계적 시장경제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의 책을 팔기 위해 전략적으로 출판됐다는 음모를 제기 해 볼 수 있습니다.
— http://smislife.egloos.com/3384705

2-2. 『거대한 전환』 11장

폴라니는 19세기 역사를 자유시장주의의 확장과 이에 대항하는 법률제도의 이중적 운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의 변형인 듯 한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과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 그 자체도 자기 조정 시장의 파괴적 효과를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Paradoxically enough, not human beings and natural resources only but also the organization of capitalistic production itself had to be sheltered from the devastating effects of a selfregulating market.)(72쪽)은 좀 지나친 비아냥 같은 느낌이 든다.

영란은행과 관련된 서술이 나오는데, 중앙은행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책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중산 계급은 막 생겨나고 있던 시장 경제의 담지자들이었다. 이들의 사업상의 이익은¶대체로 생산과 고용 창출에 관한 전체의 이해와 일치했다. 경기가 좋아지면 모두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부동산 소유자들은 지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시장이 확장되면 투자가 활발해졌다. 한 나라에서 사업가들의 공동체가 왼국인들과 경쟁하여 성공하면 외환 가치도 안정되었다. 다른 한편, 시장 경제 때문에 노동자의 건강이 착취당하고, 가족의 삶이 파괴되고, 주거 지역이 폐허가 되고, 삼림이 벌거숭이가 되고, 강이 오염되고, 직업 기술의 수준이 형편없어지고, 민속 전통이 무너지고, 주거 양식이나 예술 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걸쳐 이윤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많은 사회적 삶의 형식이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에 종사하는 계급은 거기에 내포된 위험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중산 계급은 이윤이 사회 전반에 혜택을 준다는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믿음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바로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바람직한 삶에 있어서 생산의 확장만큼이나 필수적인 다른 이익들에 관한 한 수호자의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서 다른 계급들이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중산 계급처럼 비싸고 복잡한 특수 용도의 기계를 쓰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대체로 토지 귀족과 농민에게는 민족의 군사력을 지키는 임무가 떨어졌는데, 군사력의 질은 여전히 국토와 사람들에 좌우되었다. 한편 노동자들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보편적인 인간의 이해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The middle classes were the bearers of the nascent market economy; their business interests ran, on the whole, parallel to the general interest in regard to production and employment; if business was flourishing, there was a chance of jobs for all and of rents for the owners; if markets were expanding, investments could be freely and readily made; if the trading community competed successfully with the foreigner, the currency was safe. On the other hand, the trading classes had no organ to sense the dangers involved in the exploitation of the physical strength of the worker, the destruction of family life, the devastation of neighborhoods, the denudation of forests, the pollution of rivers, the deterioration of craft standards, the disruption of folkways, and the general degradation of existence including housing and arts, as well as the innumerable forms of private and public life that do not affect profits. The middle classes fulfilled their function by developing an all but sacramental belief in the universal beneficence of profits, although this disqualified them as the keepers of other interests as vital to a good life as the furtherance of production. Here lay the chance of those classes which were not engaged in applying expensive, complicated, or specific machines to production. Roughly, to the landed aristocracy and the peasantry fell the task of safeguarding the martial qualities of the nation which continued to depend largely on men and soil, while the laboring people, to a smaller or greater extent, became representatives of the common human interests that had become homeless.

— 72~73쪽.

고전에서 현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부분 번역이 조금 이상한 듯)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보통선거가 보편화되고 노동 계급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한편 사업에종사하는 계급은 법 제정을 일방적으로 좌우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이 산업에서 쥐고 있는 주도권에 정치적 권력이 내포되어 있음을 각성하게 되었다. 권력과 영향력이 이처럼 기묘하게 특정 영역으로 나뉘어도 시장 체제가 큰 긴장이나 무리 없이 계속 작동하는 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By the turn of the nineteenth century—universal suffrage was now fairly general—the working class was an influential factor in the state; the trading classes, on the other hand, whose sway over the legislature was no longer unchallenged, became conscious of the political power involved in their leadership in industry. This peculiar localization of influence and power caused no trouble as long as the market system continued to function without great stress and strain

— 74쪽.

이렇게 마법처럼(?) 19세기가 일단락된다. 내가 현재 사회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한데, 이런 동질감은 폴라니의 글들이 전반적으로 주관적인이기 때문인 거 같다.

3-1.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익은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전체 사회의 이익을 대표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 원동력이 된다. 계급은, 그 이익이 구체적 상황에서 전체의 이익과 일치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변형시켜 다른 계급의 이익까지 충분하게 포괄할 수 있을 때에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 80쪽.

인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파시즘은 도덕적 물질적 퇴보라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로 나아감으로써 돌파구를 열려 한다.

— 81쪽.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3-2. 「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고전파의 대표자들의 지혜를 빌려 이 새로운 과학이 인간 사회 자체의 법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정치경제학을 받아들였다는¶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삶의 철학이 사실은 그 경제 체제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상가였다. 이러한 연관을 볼 때,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단지 부르주아적 경제 조직에 대한 과학뿐만 아니라 현실의 경제 조직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의 삶의 철학은 단지 일개 과학—아무리 중요한 과학이라 하러다로—의 결과물이 아니라 분명히 그 과학이 다루고자 하는 사실들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의미는 시장 경제 이론과 더불어 현실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는 그 과학이 제공하는 교의와 원리 없이는 결코 현실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자면, 현실에 근거가 될 기초가 없었더라면 그 과학은 의미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82~83쪽.

여기서 부르주아 사회의 근본적인 역설이 드러난다. 인간의 노동이 사적 소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드러날수록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의 여러 조건이 갖는 비인간성이 더욱 자기 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존재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자본이 노동이라지만 자본가는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반면, 노동자는 그럴 수 없다. 공산주의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려난 노력은 인류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밟아야 할 다음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적 존재(generic being)이기¶때문이다. 고립된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적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은 사회 안에서다. 인간은 이러한 사회적 활동 안에서만 비로소 충만하게 인간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와 필요는 비록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해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욕구, 감각, 필요의 대상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할 때에만 인간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관계된 모든 일들이 그렇듯, 이또한 물질적 현존의 생산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여러 조건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러한 조건들이 인간성과 모순 관계에 빠진 것이다.

— 84~85쪽.
sure marxist.

3-3.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

3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한 내용을 (아마도 강의를 위해) 폴라니가 정리한 것들이다. 몇몇 부분의 주장은 나에게도 익숙하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마르크스주의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처럼 입에 올려진 적이 많고, 또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됐던 사상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의심이 된다. 폴라니의 글 역시 너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내가 마르크스의 대표작이라는 『자본론』 1권의 역자 서문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남들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ㄷ. 계급의 역할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새로운 소유 체제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 수단들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기득권 때문에 과거에 묶여 있는 소수는 배제된다). 이것이 피지배 계급이 승리하는 이유이다. 피지배 계급은 현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없는 모든 계급의 지도자가 된다. 계급 이익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이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계급 이익은 오로지 전체의 지도자가 될¶능력이 있을 때에만 성공적인 것이 된다(이것이 희생을 수반할 수도 있다).

— 87~88쪽.

(4) 경제학

마르크스적인 ‘사회학’이란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학은 단지 특정한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 88쪽.

(5) 변증법적 유물론 : 마르크스라기보다는 엥겔스. 체계가 없고〔판독 불능〕 자연에 대한 언급은 불명료하다. 물리학 및 화학 그리고 천문학에의 〔판독 불능〕는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인간 정신과 사회에 대한 언급은 명백한 진리이며 매우 중요하다.

ㄱ. 부정을 통한 인간 정신의 운동(인간은 스스로 본성을¶부인할 수 있다).

ㄴ. 변화의 급작성. 전환점으로서의 악.

ㄷ. 인간 생활이 물질적 사실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이는 유물론적인 관점은 아니다. 재화의 분배는 생활의 비물질적인 측면이다.

ㄹ. 사회 계급들의 행동에서 이론과 실천의 동일성. 질량 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역사의 중심 요소인 의식의 임무다. 계급 의식은 임무와 사명에 대한 의식이다. 전체에 대한 준거가 계급 의식에 녹아 있다.

— 88~89쪽.

엥겔스는 싫어하는 듯. 이런 관점은 아래에도 이어진다.

3-4.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관점: 비판」

④ … (마르크스주의 사상 전체를 표현할 때 ‘유물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객관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이들은 그의 공리들을 충분히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면서 철학적 유물론이 마라크스주의의 기초라고 오해한다)

— 89쪽.

⑬ 마르크스의 해석은 ‘종교적’인가 아니면 철학적 유물론(경제적 기계론……)의 성격을 띠는가?

— 93쪽.

ㄴ. 노동이 상품이 되었다. 그 대가로, 고용주는 사람들이 새 시대의 신기한 새 물건들을 사고 싶어 일을 하도록 꾀어 내는 데 충분할 만큼만 주었다.


ㄷ. 자본주의는 사회 안에서 개인들의 모든 책임 있는 관계를 무너뜨리고 생계와 복지에 대한 배려를 던져버렸다. 사회제도들은 큰 압력하에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한 세대 만에 자본주의적 형식들이 인간 사회에서 승인된 형식이 되어버렸다.

— 90쪽.

ㄹ. 자본가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보다 훨씬 더 성스러운 영역에서 기능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교회는 입막음의 대가로 돈을 받고 이 조직적인 강도질을 영원히 성스럽게 했다. ‘국가’는 냉정한 ‘지도자’들의 ‘중립적’ 기구라는 미신이 생겨났다. 비단 상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척도로서의 시장. 사회과학에 대한 멸시. 자연과학 같은 ‘안전한’ 영역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


경제학 책들을 보면 마치 현재의 일을 미리 예언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⑦ 사람들의 월급 봉투를 갉아먹으며 기생하는 자본이 일단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생산에 주인-노예 관계가 확립됨. 개척할 변방의 팽창이 끝나버린 나라에서 ”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아!”라는 구호는 이제 쟁기를 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총을 들어 ‘너의 생득권’, 즉 강제 노동을 지켜내라는 뜻이 되었다. 기계 일에 접근할 기회가 없는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훈련된 인간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 91쪽.

⑧ … 사실 다음과 같은 인간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제 몫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냄새 감지기와 촉각 표시 장치는 물론, 시각과 청각, 미각을 갖춘 통제 장치, 두 팔과 두 버팀대가 달린 틀거리로서, 잘 움직이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먹여야 할 입도 씻어야 할 피부도 살아야 할 삶도 없는 그런 인간 말이다. 아무래도 하느님은 신성 질서 회사(Divine Order Comany)의 중역회의에서 계속 보내온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중역회의는 골치 아픈 영혼이라는 것을 몸에 지닌 아이들이 계속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며 짜증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조정될’ 때까지 자본가들은 차선책을 취해햐 했다. 즉 노동자들의 인간적 요소가 자기 실현이나 공동체 같은 마음속의 희망을 지향하지 않고 딴 데로 향하도록 그들이 상대해야 할 용과 괴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허물어진 집 위로 밤새 떠돌아다니는 유령들을 그려내야 했다. 또 사람들을 먼 곳으로 보내 그 용들과 싸우도록 훈련시켜야 했고 그중 일부는 낯선 땅 그 도깨비들과의 싸움을 지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제 자신들 휘하의 사이비 인간들에게서 인간적 삶을 완전히 분쇄해버렸으니 해외에 있는 경쟁자들을 쓸어뜨릴 차례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진정한 국제주의의 도래라고 갈체를 보냈던 독점제들은 세계를 독점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실제로 국제적인 규모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을 그 합당한 제자리로, 즉 허구의 세계로 보내면서도 ‘건강하게 단련된’ 몸은 우리의 위대한 서양 문명과 그 영광스러운 미래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원리다.

— 91~92쪽.

⑨ … 생활 수단¶은 희소할 때에만 이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민중들에게는 생활 수단을 얻을 기회가 가로막혀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위험할 정도의 풍족함을 가져다주었지만 풍요가 판을 치면 이윤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 92~93쪽.

⑩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꾸리는 ‘삶’의 성격. ‘콩나물 교실에서 받는 교육’ 혹은 ‘뒷골목 문화’ 그 이상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은 집을 가져야 한다고 우긴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간주될 것이다. 자신의 생산물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장사를 망치고 결국은 자신의 장사도 망치는 짓이 된다.

⑪ 필요 욕구는 이 사회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천사들을 집합시켜 자본주의를 관리하게 한다 해도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충분한 수의 경찰과 구사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정부가 좀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제안이 진지하게 나오기 시작하면 산업계의 우두머리들은 곧바로 일어선다.

— 93쪽.

여기까지 읽어보니 완전 마르크스주의 책인데;;; 왜 정부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까? 내가 공안 책임자였다면 책세상 출판사는 문 닫았을 듯.

⑭ … 상층 계급의 현실주의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에 반영된다. ‘집단적 안보’는 국내 정치에서 취하는 정책이며 ‘제국의 단결’은 험악한 국제 정치에서 택하는 정책이다.

— 94쪽.

⑮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

— 94~95쪽.

⑯ 이에 대한 대안은 민주주의, 그것도 영구적인 민주주의로 조직된 사회주의다.

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우려는 완벽한 사회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현재의 사회가 파괴되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95쪽.

⑲ 새로 건설해야 할 ‘체제’에 대한 고찰. 이 체제는 인간 공동체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체제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인간 공동체에 가까운 사회를¶만드는 것보다 현재 눈앞에 닥친 문제점들을 고쳐나갈 사회를 만드는 일이 더 쉽다. 아무리 완벽한 조직이라 해도 조직이라는 형식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결코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라는 형식들이 전제 조건으로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형식들을 창출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이 땅에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으로 이 형식을 채워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거리지만, 과연 누군가가 인간 공동체에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이 형식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있는지를 보면 된다.

— 95~96쪽.

이런 형식들이 저절로 인간 공동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러한 최소 조건의 형식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조차 거부한다면 이는 인간을 반(反)종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공동체를 보장해줄(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들이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사악한 관점의 연장일 뿐이며, 사회가 바뀌려면 인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정통 교리의 가면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반(反)종교의 가장 사악한 형태의 하나이다. 이는 잠재적 인격체, 즉 공동체적 인격체인 인간을 폄하할 뿐만 아니라, 대중이 ‘변화한다면’ 사회 구조를 깨지 않고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완벽하게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셈이다. …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악마와 싸울 때 기도서만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 96~97쪽.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오늘 배달된 책 (2009/04/17 금)
  • 플라톤, 박종현 옮김, 『플라톤의 네 대화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서광사, 2003)
  • 월간 『수퍼레시피』(㈜레시피팩토리), 2009년 4월호
『뉴레프트리뷰』

어느새 나와있었군요.

별로 좋은 느낌은 안 듭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여태까지 잡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있다가 이제와서 외국 잡지 수입이라니. 국내 잡지는 아마 시장이 더 줄겠죠.

한국은 더더욱 수렁으로 빠질 거 같은 예감. 좌파 이론도 수입하는 한국의 외제병이란.

p.s Monthly Review도 번역판이 나온 게 있었군요. 근데 1번 나오고 끝.
『번영의 비참』(Misère de la prospérité)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http://www.signandsight.com/features/687.html>
요즘 이 책이 자주 언급되길래 도서관에서 빌렸다.

빠스깔 브뤼크네흐(Pascal Bruckner, 1948~) 책은 예전에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Les ogres anonymes)를 읽었는데, 나는 한국 아마추어 환타지 작가의 단편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정치 상황을 순발력 있게 묘사해서 우리나라까지 흘러왔겠거니 했는데, 영화로 만들어진 『비터 문』(Lunes de fiel) 같은 작품도 쓴 데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에세이스트라니 어색하다. 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IEP de Paris, 파리정치학원) 교수에다 여러 출판사와 잡지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출판사(저자가 편집인이기도 한) 홈페이지에 책의 일부가 공개되어 있다:
약간은 현학적인 에세이라서 속도를 내서 대충 읽었다. 예전엔 나도 이런 식의 글을 쓰고 싶어했었는데, 요즘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책이 읽힌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현 사회의 소득의 불평등은 부조리하다. (1장, 이 부분이 가장 널리 인용되는 듯) 오히려 봉건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국적 제약회사의 시장 진출이 쉽게 무산되는 경우도 있듯이,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악도 아니고, 미국이 절대적인 제국도 아니다. (제국주의를 할 문화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역시 프랑스 책!) 지식인들 역시 이런 환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변절한 기회주의자 뿐 아니라 부르디외 조차도!) 게다가 토론은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진행되며,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소비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온갖 신앙과 이데올로기가 대거 붕괴되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활력을 과시하는 게 있다면 그건 경제다. — 서론, 11쪽

서문의 이 말은 '자본주의'나 '시장'이라는 헛된 목표를 쫓는 기업가들을 조롱하는 말인 동시에, 자본주의를 적으로 상정하는 좌파들이 헛된 타도 대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책이 2002년에 씌여진 걸 생각하면, 시대를 보는 훌륭한 눈이라는 생각도 드나,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각각의 상황별로 판단하라는 익숙한 주장은 타당하지만,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비판받을 구석이 많다.

『백치・타락론 외』

2009년 2월 8일 일요일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1906~1955)의 대표작 9개를 옮긴 책. 1989~1991년에 筑摩書房에서 간행한 文庫版『坂口安吾全集』(전 18권)을 저본으로 삼았다. (그 뒤에 '決定版'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전집을 또 출간했다. 이전에 있던 전집으로는 冬樹社판이 있다.)

작품 선정 기준은 책의 말미에 실린 가상 인터뷰와 연표를 참조해 볼 때, 1946년에 발표해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타락론」(堕落論), 「백치」(白痴)은 대표작으로, 「바람박사」(風博士)(1930), 「한바탕 마을 소동」(村のひと騒ぎ)은 파스론(Farce)에 입각한 초기 작품으로, 「어디로」(いづこへ),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私は海をだきしめてゐたい)는 그의 방랑기과 그 극복을, 「돌의 생각」(石の思ひ)은 작가의 가정사에 관한 이야기,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1947)는 결혼 후 말년의 대표작으로 고른 듯 하다.

작품의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 참 좋다. 유년시절에 읽었으면 팬이 되었을 듯. 일본 문학이 최근에야 한국에 정상 유통되고 있다. (『상실의 시대』의 대성공 때문인 듯) 내 윗세대는 일본어 책을 그냥 읽었을 테고. 일본 문학에 어중간하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쉽다.

작가가 프랑스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읽으면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생각이 났다. 작가의 필명 '안고'(安吾)는 중학교 때 교사가 어둡다고 부쳐준 별명 '暗告'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유난했던 모양. (본명은 炳五(へいご). 병오(丙午, へいご)년에 태어난 다섯째라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책 여백에 각 작품의 제목이 적혀있지 않아 찾아보기 불편하다.

『계몽주의의 기원』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1990년대 중반쯤에 한국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안 겪어서 이 모양 이꼴이네 하는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이 근대화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같은 질문은 전혀 안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저 매판과 수탈당하는 민중이 있을 뿐이다. 왜 민중은 자신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가진자를 쫓는가?

난 그 이유가 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사고를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다는 거. 그건 누가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혹은 반대로 한국은 사상이 없어서 그런건지도;;;

이러한 한국 사상(?)의 연원은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 연원을 밝히려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근대화 기준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지만, 서구의 근대화를 공부해야 한국 사회를 이해 혹은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그래서 관련된 주제인 거 같아 무작위로 고른 책이다;;;; 서두가 좀 이상하다;;;

앞에 조금 읽었는데,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중세와 근대에 대한 석학의 통찰, 내가 원하던 것.

이 책이 사상사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서구의 근대를 다루는 책은 대부분 산업혁명, 자본주의, 국가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내밀한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다. 철학사 책의 경우도 각 철학가(?)의 주장과 그 타당성, 논쟁 등에 집중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앞으로도 이런 사상사 류의 책을 좀 봐야할 듯. (강유원 영향을 받고 있는 건가?)

피터 게이(Peter Gay, 1923~)가 1966년에 쓴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2권 중, 첫번째 책인 「The Rise of Modern Paganism」 만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자 역시 2권 「The Science of Freedom」이 번역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p.s 유명한 인터넷 서평가(?)가 지은이 이름(Gay)가지고 장난친 걸 서평이라고 올렸던데, 황당하다.


추리소설과 SF소설은 왜 같은 코너에 있을까?
서점에 가면 추리소설과 SF소설이 같은 코너에 있는 경우가 많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쟝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 기분나빠하기도 했었는데...

DCInside 미스터리 갤러리에 올라오는 글들의 쟝르를 보니까 이해가 간다.

  • 미스테리 -> 초자연 현상, 알려지지 않은 과학기술 -> SF
  • 미스테리 -> 미결 사건, 범행 동기 -> 추리물

당연히 미결 사건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과학기술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여기다가

  • 추리물 -> 황당 사건 -> 유머, 엽기
  • 추리물 -> 범인의 이상심리 -> 공포물

까지 나온다... 아니 이게 게시판 주내용이다;;;

그러니까 SF와 추리가 붙어있는 건 당연한 걸지도?
나의 독서 역사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고 나도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서 역시 매우 개인적인 경험인 거 같다.

1.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책들은 대부분 10대에 만났다: 『엔트로피』, 『색채심리학』,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장자』(안동림) 그리고 물리 교과서(Halliday, Resnick 등) 정도가 기억난다.

내용보다는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내가 감동 먹고 학교 교사나 주위 어른들에게 저 책들의 내용을 물어도 뭐 뾰족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부터 세상 좀 우습게 보기 시작한 듯?)

그 뒤에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좋은 책이나 요긴한 정보를 주었던 책, 추억에 남는 책(이성에게 선물로 받았다거나)이 없는 건 아닌데,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싶은 책은 없다.

책 내용보다 그냥 10대 때 본 책이 기억에 남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본 TV 만화가 평생 남는 거처럼. 저 책들을 지금 다시 본다고 좋아라 할 거 같지도 않다.

2.

20대 초반 대학에서 남들 다 읽는 책들을 읽기도 했는데, 머리에 남은 건 없다.

우선 내용은 없고 너무 감정에 치우친 책들이 많았다. '미제는 나쁜놈이다'같은 내용.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거꾸로 보는 세계사』 따위) 원서 자체가 정치적인 색이 짙은 경우도 있었다. '철학책'이라고 돌아다니는 것이 쏘련이나 중공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만든 것이니 뭘 제대로 배우기는 불능. (쿨가이의 대명사 진중권도 그때는 쏘련 미학책 번역)

이런 종류의 책(최근 생각나는 건 우석훈)이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고, 그런 책들의 저자(유시민이라던가)가 지금도 인기 있는 걸 보면 무슨 불량식품처럼 인간이 언제나 갈구하는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번째로는 정확하게 읽지 못 했다. 기초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크고, 당시 번역 수준을 비롯한 학문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도 했다. (학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조용히 교수실에 앉아 있어서 나같은 사람이 알 수 없었을 듯)

적당한 독서 지도(?)를 해줄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었던 것도 이유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선생에게 맞추는게 더 빠른 일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제대로 책 읽고 산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사회가 왜 이모냥인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3.

오히려 어떤 책을 읽었나보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첫번째는 명상(?)하며 읽는 법. 끈질기게 선교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글에 환상을 더하면 무궁한 해석이 나온다. 종교 경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역사, 철학책, 문학작품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옳다고 보기 어려운 독법이다. 잘 모르시는 분들께는 70년대 미국의 신비주의 책들을 추천한다, 『요가난다』 정도. (종교를 가지고 계시다면 이미 실천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두번째는 희곡 읽는 법. 연극을 배우면서 희곡은 연극이 될 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古代)로 갈 수록 서사문학은 책이 아닌 공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글이 실제 의식(儀式)의 단면이나 메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공연을 떠나 소설로만 본다면 그 가치의 10분의 1도 못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어찌보면 이게 공부하는 방법일 것이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다, 말 그대로 공부 중이다. 정말 매우 늦게 알게 되었다. 그 시초는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였다. (책 자체는 비추) 책 첫머리에 고전적인 삼단논법(모든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비판이 짧게 언급되는데, 그걸 읽고서부터 논리와 현실세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거 같다. 언어 논리(?)라는 게 기계적일 거 같으면서도 주관적인 아리송한 세계다. 아무튼 이쪽으로는 지금도 고민 중이다. 내가 컴퓨터 때문에 형식논리에 너무 익숙했던 것도 이걸 늦게 알게 된 원인이 된 거 같다.

마지막은 상품으로서의 책, 잠깐 편집자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책이나 글과 관련된 일은 이전에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보니 책에 대한 관점이 180도 바뀌었다. 책은 철저하게 편집자가 생산해내는 상품으로, 작가는 그저 재료 중에 하나일 뿐이다. 책의 내용은 순수한 작가의 의도도 아니고, 필요에 따라 가감될 수 밖에 없다. 독자는 책이 하나의 상품임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마치 TV 비평하듯) 상업적인 출판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책은 정치적인 도구인 경우가 많았다. 책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 뒤로 책을 구입해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 현저하게 줄었다.

4.

나는 문학작품은 잘 안 읽는다. 정보 전달량이 적으니까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소설은 가끔 열심히 보기도 하는데, 순전히 재미로 본다.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반이상은 무협지나 SF소설. 재미까지 없는 소설도 있다. 이문열, 확성영이 재미있는가?)

시는 거의 안 본다. 소설은 재미라도 있는데 시는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김소월 정도만 진짜 시인거 같고, 윤동주, 기형도만 해도 짧게 쓴 산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나는 시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미탑재된 거 같기도)

나는 왜 시를 모를까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는데,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나요? 같은 얼빠진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시를 100번 읽으라던가, 마음 어쩌고 하는 알 수 없는 말들 뿐이었고. 내 마음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에 시가 없었다는 생각. (한민족의 혼을 일깨울 수 있는 진정한 문학은 안 나타났어! 뭐 이런 거랑 통할 수도) 한국의 문학을 만든 작가들이 일제 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한국 문학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거 같다. (오히려 대중가요(랩이라던가)가 더 한국 문학에 접근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쪽 책들도 늦게 보기 시작했다.

5.

그래도 내가 즐겨 읽었던 작가들을 고백해보자면:

우선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을 즐겨 읽고 자란 것이 잡다한 지식을 갈구하는 바탕이 된 거 같다. (이 팀이 일본 거를 많이 베꼈다는 걸 알고 급실망하기도 했지만)

다음으로 은근히 김용옥 영향을 많이 받았다. 꾸준하게 글을 써서 대중에게 학문세계를 소개하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다. (근데 이분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자기 생각이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직 없다가 답인 거 같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중이신 듯)

글쟁이 중에는 고종석을 좋아한다, 뭔소린지 도시 모르겠는 기사가 난무하는 언론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다. (아이디어도 살짝 마음에 들고)

막스 베버에 충격 먹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집요해? (난 막스 베버가 꼴통 보수 우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객관적으로 썼다고 본다. 내가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약간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정치성향은 한나라당 골수분자인데 사회에 대한 글은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매일같이 황거를 향해 절할 거 같은 사람인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같은 거)

이부영(정신과 의사)도 기억난다. 융이나 프로이트를 번역판 책만 봐서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 사람 글을 통해 기준을 삼는다. (한국사람이 공부해온 걸 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마땅히 구체적인 책들을 적시(敵視)해서 글을 썼어야 하는데, 읽은 책들 생각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고 해서 여기서 마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왜 자기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썼는지 알 것도 같다.)

근데 대충 정리한다고 정리하긴 했는데 큰 의미는 없는 듯. 시간이 흐른 뒤에 볼 추억거리 정도? 그냥 내가 그때 그랬지 정도 생각할 수 있는 마일스톤으로 생각하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2008년 9월 18일 토요일

이거 분명히 한국의 독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일텐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인기가 상승하니 무리해서 옮긴 것일 듯.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한국판에서 한국의 상황과 거리가 있는 「나의 독서일기」를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런 책을 그대로 옮겨왔으니, 지은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서문에 아마 나오겠지?

지은이가 인기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비싸다. 일본 원서 가격보다 비싸니 앞으로는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책은 일본어로 읽어야 할까?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다치바나 다카시를 처음 접했을 때,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한 것을 정리해도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그 뒤로 약간 팬이 된 듯하다. 뭐 근데 다치바나 다카시는 동대에 문춘 출신이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이 책은 「주간문춘」(週刊文春)의  「나의 독서일기」(私の読書日記) 코너에 연재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연재물을 묶어서 출간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1. 『ぼくはこんな本を読んできた—立花式読書論、読書術、書斎論』(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1999) — 1992~1995년 연재분
  2. 『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내가 읽은 책・재미없는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경이의 속독술)(2003) — 1995년 11월 30일~2001년 2월 8일자 연재분
  3. 그리고 이 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ぼくの血となり肉となった五〇〇冊 そして血にも肉にもならなかった一〇〇冊)(2007) — 2001년 3월 15일~2006년 11월 2일자 연재분
이 3권 모두 단순히 「나의 독서일기」를 묶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은이의 독서관을 적은 인터뷰나 글이 앞에 실려있다. 이 내용도 나름 길어서 서비스가 좋다는 인상이 든다. 이 책에도 240페이지(30~272쪽)나 할애되어 있다!

이 「나의 독서일기」는 일종의 신간소개이기 때문에, 한국 출판시장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한국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책에서 '나의 독서일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모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미디어, 2001)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왜 이번 판은 이 부분을 그대로 옮겼는지 불만이다. 일본 출판 시장 탐색을 위해서? 두고 볼 일이다)

1부 「피가 되고 살이 된 500권, 피도 되고 살도 되지 못한 100권」은 지은이의 서재인 '고양이 빌딩 안에서 마이크를 달고 서가 앞을 걸으면서 눈앞에 있는 책들의 추억을 마구 늘어놓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적으로 제작된 것이지만 '나중에 꼼꼼히 손을 대었다.'(11쪽)

앞서 발간된 『ぼくはこんな本を読んできた—立花式読書論、読書術、書斎論』『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이 두 권의 책 이름을 일본어로 적은 것은, 한국에는 이 두 권이 하나의 책으로 합본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의 1부는 많은 양의 책을 읽는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전달하기 위한 내용이 많았는데, 이번 책은 내용은 중복되는 게 많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과 감정, 개인사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동거 얘기도 나옴;;; 책에 18금 딱지 붙여야 할 듯? 간행물 윤리위원회는 일을 한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간문춘을 그만 둔 이유를 '책을 더 읽고 싶어서'라고 적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좀 더 자세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자들이 시간이 쫓기면서 건성건성 아는 척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독서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참지 못했던 거 같다.

취재에서는 듣는 이야기 중에 잘 모르는 게 나와도 음~, 음~, 하며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듣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대목은 나중에 서둘러 조사합니다. 다음 사람을 취재할 때는 서둘러 조사한 설익은 지식을 꽤나 오래전부터 알아온 지식인 양 상대에게 던지면서 취재를 더욱 심화시켜 갑니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할 수 있는 능력, 즉 '반가통(半可通) 능력'을 익혀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9쪽)

어쨌든 반가통이라면 기본적인 일은 굴러가는 곳이 저널리즘 세계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도 마음도 망가져 버려서, 반가통이라도 큰소리만 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역겨운 인간들이 저널리즘 세계에는 너무 많습니다.
'내 자신이 반가통에 불과하다.'라는 자각이 있으면 아직 가능성이 있지만은, 그런 자각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가통 세계 저편에 있는 '전가통(全可通)' 인간에 대한 존경심도 없을 뿐더러 스스로도 전가통 인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져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거죠. (49쪽)

심히 공감되는 이야기. (뒤에 자신이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출력비(입력대 출력의 비율)가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9쪽)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24세부터 34세까지의 10년간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를 쓰기 이전의 10년간이라 할 수 있다.
이 10년간은 약간의 출력물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시간을 입력에 바친 시기였다. (13쪽)

달리 표현하자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이후, 그 연장선상에서 한 작업은 대부분 형편 닿는 대로 부득이하게 한 일이었다. (중략) 지적인 내용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이전에 부지런히 축적했던 자산을 까먹으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쪽)

내가 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자위해보자;;; 뭐랄까 자신의 직업과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치관. 일본식인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보수적인 느낌도 든다.

그가 대학생 때 읽은 책들 목록을 보니 벌써 30년 이상 전 이야기고, 지금에 그 책들이 다시 출판된다면 과연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상계(?) 또는 출판시장도 은근히 많이 바뀐다. 한편으로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인기를 끈 책이 많은데, 일본 출판 시장과 한국 출판 시장의 공명이 일어난 것도 흥미있다. (따라한 거 겠지)

번역자가 언급된 책들의 번역판 제목을 확인하지 않은 거 같다. 예를 들어 Thor Heyerdahl(1914~2002)『Kon-Tiki ekspedisjonen』(Kon-Tiki Expedition)(1948)의 경우 국내에 '콘티키호 탐험기'(32쪽)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국립도서관 자료를 검색해 보면 모두 '콘・티키' 또는 '콘티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다치바나가 문춘을 그만 둔 뒤에도 생계를 꾸릴 수 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일본 잡지사에서 기사를 구입해주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물론 '자유기고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런 시장은 그리 발달해있지 않다.

또 일본 잡지는 널리 알려진 작가들에게 높은 고료를 주며 기사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해외 취재 같은 것. 한국에서 작가들이 신문 지상에 정치 얘기를 써대는 게 이런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학가가 아닌 기사를 작성하는 라이터에 대한 대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문춘에 재직하던 무렵, 문필가로서 '선생'이라 지칭되는 사람은 소설가뿐이었습니다. 논픽션 작가로서 '선생'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만년의 오야 소이지 정도였죠, 아마. 《주간문춘》에 톱 기사거리를 파는 일을 하던 가지야마 도시유키 같은 사람은 인기 작가가 된 뒤에도 문춘 사내에서는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조금 윗세대 편집자들로부터 기껏해야 동료 취급을 받았을 뿐, 대다수는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37~38쪽)

이러한 상황은 곧 바뀐다.

이런 상황이 급속히 변한 것은 주간지 등장에 의해서입니다. 주간지에는 연재소설도 있었지만 연재소설만으로는 주간지를 팔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매력적인 특집 기사가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쪽이 훨씬 중요합니다. (39쪽)

이러한 현장의 연장선상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문예춘추》(1974년 11월호)의 「다나카 카쿠에이 연구」였습니다. 그 당시 선전 문구에 "잡지 저널리즘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조사를 바탕으로"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39쪽)

다치바나의 성공 역시 그러한 조류와 관련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일본 출판계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치바나가 학사입학한 동경대 철학과를 그만 둔 배경에 당시 학생운동이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만든 것, 즉 창작물'을 싫어합니다. 나도 한때는 픽션을 쓰겠다는 뜻을 품은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창작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서 처음 한 일이 주간지 취재, 그러니까 리얼한 세계 그 자체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 이면으로부터 그리고 정면으로부터, 또 삐딱한 시선으로부터도 샅샅이 검증해내는 그런 일이었잖습니까?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 점차 리얼한 세계의 재미에 눈을 떠간 겁니다. 그와 함께 창작물의 세계가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픽션의 세계, 창작의 세계는 밑바닥이 너무 얕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것은 아무리 애써봤자 빈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구상력과 상상력이 그만큼 빈약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70쪽)

사람이 만든 '창작물의 세계' 이외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크게 말하자면 첫째는 자연세계입니다.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자연세계 전체 말입니다.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의 세계입니다. 또 한가지는 인간 혹은 인간집단이 만들어낸 사회적 존재물 전체입니다. 사회과학의 대상이 되는 것 전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70쪽)

나는 포퍼를 좋아하고 대단히 열심히 읽었어요. (중략) 내가 생각하는 '사회과학, 인간과학, 역사학 등의 대상세계 전부'는 포퍼의 '세계2' 및 '세계3'과 미묘하게 겹치면서도 또 미묘하게 다른 것입니다. (71쪽)

내가 말하는 '리얼한 세계'란 말하자면 '신께서 지으신 자연세계' 플러스 비코가 말하는 '인간이 만든, 그러므로 인간 인식에 적합한 객관세계'를 말합니다. (73쪽)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다치바나가 일본의 무교회파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기독교를 상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니 그 영향이 적지 않은 거 같다.

우리 귀에까지 들리는 일본 필자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거 같다. 그래야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는 거 같고. 그러나 그 보수성에도 각각의 다양한 방향성 같은 게 있다.

일본 책들을 읽다 보면 사상을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서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사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언제나 든다. 일본 문화 혹은 언어의 특징인 거 같기도 하고. 반대로 한국은 너무 감춰놓아서 알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 어쩌면 언어로서 단순하게라도 왜곡을 무릅쓰고 정리하고 그 의미를 보충하는 것이 발전의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코의 정신이 모든 인문과학을 떠받치고 있다는 이야길 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자연과학과 기술도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비코 철학의 정수는 뭔가 하면 "진리는 만드는(짓는) 곳에 존재한다(verum ipsum factum)."(혹은 만들지(짓지) 않는 한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현대과학과 현대기술을 그 근저에서 떠받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요컨데 자연과학은 실험정신, 즉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기술이란 것도 '우선, 만들어보자.'라는 호모 파베르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모두 "verum ipsum factum" 정신 위에서 진행됩니다. 현대문명의 바탕을 데카르트 정신이 아니라 비코 정신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86쪽)

다치바나는 지식인이나 학자라기보다 르뽀라이터이다.

개인적인 경험담이 주를 이루다보니 좀 질린다. 대충 훑어보고 접는 게 좋을 거 같다.

1부에서 소개하는 책들이 대부분 좀 유행이 지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를 참고할 일도 없을 듯. 어쩌면 이 책은 일본책 어떤 걸 번역할까 고민하는 출판업자를 위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참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이 서평을 쓰기 적당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팀블로그 형식으로 신간 위주로 서평을 쓰면 출판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생각있으신 분?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책 역시 다른 쟝르의 예술처럼 감상 시기와 당시 유행이 중요한 거 같다. 다치바나가 감동 받은 책을 지금 본다고 의미있을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감동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른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감독들마다 어린시절 봤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다른 것처럼.

책 추천이라는 게 생각만큼 의미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어제 오늘 책이 잘 안 읽힌다. 선택(이를테면 강만수;;;)에 좀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해가 바뀌어도 방바닥 긁는 게 불안해서 그런 거 같다. 그렇다고 뭐 공부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2006)

일주일에 한권씩 읽어도 1년에 50권, 1000권 보려면 20년. 이거 뭐 책 읽다가 죽으란 말인 듯? 게다가 영미권 책들만 실린 거 같던데.
『STOP! SMOKING』
『뜨거운 물고기』
『멋쟁이 용과 멋쟁이 나비』

앞으로 버럭하지 않고, 멋쟁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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