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쌍둥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 생김새며, 표정이며, 머리카락 색깔이며, 신장이며, 체격까지 쏙 배놓은 듯이 닮았지만,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부터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Я видел спор двух близнецов. Как две капли воды походили они друг на друга всем: чертами лица, их выражением, цветом волос, ростом, складом тела и ненавидели друг друга непримиримо.
그들은 분노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도 같았다. 불덩이처럼 격한 얼굴을 서로 가까이 들이대는 표정도 같았다. 서로 눈알을 번득이며 노려보는 그 눈도 같았거니와, 그 험상궂은 욕지거리도, 그 음성도, 그리고 그 욕설을 내뱉는 일그러진 입술 모양도 역시 같았다.
Они одинаково корчились от ярости. Одинаково пылали близко друг на дружку надвинутые, до странности схожие лица; одинаково сверкали и грозились схожие глаза; те же самые бранные слова, произнесенные одинаковым голосом, вырывались из одинаково искривленных губ.
나는 참다 못해, 그중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Я не выдержал, взял одного за руку, подвел его к зеркалу и сказал ему:
「차라리 이 거울 앞에서 욕설을 퍼붓게나……. 어차피 자네에겐 마찬가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이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니 말이네」
— Бранись уж лучше тут, перед этим зеркалом… Для тебя не будет никакой разницы… но мне-то не так будет жутко.
— 김학수 옮김, 「쌍둥이」(Близнецы, 『투르게네프 산문시』, 2007), 104쪽.
/책/책읽기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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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르게네프 — 「쌍둥이」 |
| 『자유의 적들』(2011) |
- 한국 유일의(또 있으면 좀 알려주셔요) 보수(?) 논객(?), 군대 갔다온 사람들의 친구, 전원책 책이 나왔는데 안 볼 수가 있나요. 제가 경제 사정이 안 좋아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어짜피 변호사인 저자도 (팟캐스트 하는 사람들처럼) 책 장사 하려고 쓴 건 아닐겁니다. - 저자가 자기의 생각을 토막토막 꼼꼼하게 정리하고, 또 그걸 위해 독서를 했다(고 믿는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간접 인용인지 직접 인용인지 밝히진 않지만)는 것이 칭찬받을만 하다고 본다. 좌파니 보수니를 떠나서 자기 생각을 이렇게 광범하게 정리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 나는 또한 이 책에 실린 글이 아주 솔직하다고 본다.(유명한 사람들 이름을 아무런 평가 없이 불러제끼지만, 그정도 잘난체는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 위인들이 거론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그리 오래 할 수 없었을 거다. - 보수주의자(정의가 어렵지만 일단 이런 의미로 쓰자)에게 현실은 모순적이다. 이 모순적이란 건 좌파가 현실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화두로 삼는 것과는 다르다. 보수주의자는 있는 그대로의 모순적인 현실을 모순적인 각각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국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헌법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저자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그래서 글 단락들이 서로 논리를 이루지 않아 설득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 보수주의자는 모순을 그저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배후를 캐는 좌파 내지는 지식인들을 배척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좌파를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로 여기고, 혐오한다. - 그럼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을 따르는가? 대세와 현실론을 따르며, 권력과 힘을 따른다. 원리를 창조하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과 위인들의 권위를 따른다.(이 책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 - 전원책이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국가를 최고 가치로 삼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재외국민들은 국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줄 필요가 없다는 식. 그가 군필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런 생각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점에서 매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내국인에 대한 관점은 같다. 복지를 저주하고 불평등을 옹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좌파로 분류된다. 히틀러 조차 좌파로 분류된다.(히틀러를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좀 있던데 관련이 있는 듯) 그래서 라디오방송에서 한미FTA에 대해 자신의 견해는 없고 절차상의 문제와 중우정치를 걱정하는 희한한 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 국가라는 기준이 있는 그는 다수결도 무시한다. 국가주의는 달콤하지만 독이 있다. - 이런 종류의 책은, ‘와 국가, 사회, 철학, 역사 없는 분야가 없네, 전원책 짱’ -> ‘전원책은 보수주의자고 좌빨은 무덤으로 가라네’ -> ‘와 나도 보수주의자. 보수주의 만세, 원책이형이 이렇게 말했어’ 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인터넷 보면 이미 몇명 있는 거 같다… 좌빨 역시 방대한 분량의 책을 보고 권위에 놀라 되는 경우가 있는 거 같다) 전원책이 근성가이라면 이 책의 약점을 보완해서 비슷한 책 한권 더 쓸 거다. - 계속 보려니까 시간도 아깝고 해서 덮습니다. 대중에게 내놓는 책은 종교 경전이 아닌 다음에는 일관된 주제로 친절하게 끌어가는 게 예의인 거 같습니다. 너무 광범위하게 사상적 기반을 건드리다 보니 저도 읽기 질리고 또 내용의 품질 관리도 안 된 거 같네요. 전원책이 변호사고 하니까 헌법을 화두로 책을 쓰면 좋을 거 같습니다. - 생각해보니까 전원책의 책이라도 읽으려는 생각을 스스로 하는 자칭 보수가 있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것일테죠. 아무튼 이 책에 대한 평을 보면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순수하지만 자기 스스로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겠죠. |
| 『오래된 미래』(2007) |
![]() ‘공식 한국어판’이란 딱지를 붙여 삼성 계열사(비공식)에서 펴낸 만이천원짜리 양장본 『오래된 미래』를 보고 착찹한 생각이 든 건 나 뿐만 아닐 것이다. |
| 만약 어떤 책을 읽고나서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야 할 지 모른다면… |
자신이 읽어야 할 책을 모르면 독서인 내지는 지식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
| 동네 도서관 |
책 관리하기도 좋고.(자기 책은 다른 책과 독립적으로 50권까지 1년 대여 가능 조항 같은 게 있으면 귀찮은 일 없을 듯) 어짜피 자기 안 보는 책은 남들이 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이 많이 쓰면 학교 독서 숙제라던가 쉽게 할 수 있고, 만약 자기 동네에 전공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거다. 이사갈 땐 다른 동네 도서관으로 트랜스퍼하던가 찾아가면 되고. 문제는 인기 있는 책들은 쉽게 상하고, 분실 위험이 있다는 거. 맡기는 사람은 거의 기증이라고 생각해야 겠다; |
| 책의 특성 |
![]() ![]() 실제 출판된 책은 아니지만 아래의 이미지들은 책이라는 소재에서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
|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2009) |
겉핥기 맛집 여행기보다 이런 전문적인 여행기가 귀하다. 또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도 소중하다. 그러나 내용에는 약간 불만이다. 전문가들이 세미나까지 하면서 준비했다는데 교육 현장이아니라 대형도서관 위주로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지나간다. 세미나 발제까지 했다는 사람들이 정작 방문할 도서관 홈페이지는 안 가봤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짜임새있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대한 인상을 각자가 중복해서 적었다. 정보 채널도 제한되어 있다. 인터뷰 등의 방법도 괜찮을텐데 가이드가 한 말만 복창한다. 이런 여행기에는 당연히 각 도서관을 조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 소개가 우선이다. 하다못해 도서관 전경을 찍은 사진 하나씩은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결국엔 아쉽게도 인상만 적고 지나가는 한국 서점의 겉핥기 여행기들과 큰 차이가 없는 책이 된 거 같다. 저자들이 최일선에서 독서 지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아쉽다. 한편으로는 수입된 서양 문화들이 한국에서 자리 잡은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매일 같이 마시는 커피만 봐도 그렇다. 고종이 커피 마신 게 1896년이라는데, 10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드립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국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들의 권한이 제한된 것인지, 그들이 경직되어 있어서 그런 건 지, 돈이 없어서 그런 모습인 지는 잘 모르겠다. 「월간 우리교육」 2008년 4월호부터 11월호까지 실린 기사를 묶은 것이다. |
| 池田大作全集 100 |
| 『Don't Vote It Just Encourages the Bastards』(2010) |
http://www.groveatlantic.com/default.aspx#page=isbn9780802119605 http://blog.daum.net/dcknsk/8730691 |
| 『How to Disappear』 |
| 2010년 6월 3일, 목요일에 버린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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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비극』(1989) |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강연 모음집이다. 1984~88년 사이 주로 와세다대학 문학연구회(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에서 이루어진 15개의 강연과 인터뷰들은, 그 형식 때문인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던 『은유로서의 건축』(隠喩としての建築)(1979)이나 『탐구 1』(探究I)(1986)보다 쉽게 읽힌다. (사실은 이 책들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었다) 옮긴이도 이 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 책은 강연문이나 인터뷰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저작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고진 자신이 쓴 최고의 고진 해설서라고 해도 좋다.) 둘째, 이 책은 본래 ‘글’이 아니라 ‘말’이었기 때문에 글로 썼다면 생겼을지 모르는 자기검열이 최소화되어 있어서, 당시로서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사고들(이를테면 제4기, 제5기에서 본격화될 사고의 단초들)도 날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 한마디로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 ‘종합선물세트’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느 걸 먼저 골라 읽든지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일반인이 보기엔 현학적인 내용이 여전히 많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코의 소설이 필독도서가 되는 한국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일 수도) 그러나 그 현학이 사실 그리 또 전문적인 건 아니다. 더 읽어봐야 주장과 면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학문적 파편들을 단초삼아 적극적으로 내성(內省)하고, 그 속에 자기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인 거 같다. 그 과정에서 서양사상은 그저 생각의 실마리일 뿐이므로, 그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학구열 높은 한국이라면 이 정도의 작업을 할 인물 정도야 흔할 거 같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두번째로 이 책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옮긴이다. 원문에 없는 주와 틈틈이 ‘보충’이라는 이름으로 본인의 해설을 실었다. 또 그 주석과 해설이 일반적인 비평과는 달리 매우 가볍다는 것이 특징이다.(비주류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기존 문단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쓴 거 같다) 그쪽을 잘 몰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옮긴이 조영일은 젊은(?) 문학 비평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거 같다. b라는 출판사 역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 같다. 1장에 나오는 니체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가라타니 고진 자신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뭔가 장황하게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나오는 얘기들은 대충 수긍이 가지만, 가라토니 고진의 핵심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뭔가 내외(內外)와 관련된 고민인 거 같다. 니체는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개개의 글들이 모순적입니다. 니체의 글쓰기에서는 어떤 주장이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에 의해 끊임없이 넘어가는 형태로 텍스트가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정리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맘에 드는 챕터 몇 개만 읽고 도서관에 돌려주고, 다음엔 좀더 특정한 주제를 다룰 거 같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日本近代文学の起源)(1980)이나 『일본정신의 기원』(日本精神分析)(2002) 같은 책을 읽어야 겠다. 아예 조영일의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2008)을 읽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문학 비평 부분은 비교적 내용이 명료하다. (1장 「소세키의 다양성」(漱石の多様性), 5장 「에도 주석학과 현재」(江戸の注釈学と現在) 등) 내가 조금 기본지식을 갖고 있는 부분이 나오니, 가라타니 고진의 이해가 일반적이지 않고, 표피적인 부분(그러니까 깊이 설명하지 않은)이 있어서 글을 읽는 데 방해된다. 『은유로서의 건축』을 보면 주류 학계에서 자신을 배척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이 나오는데, 그럴 거 같기도 하다. 표류하는 글쓰기는 데리다를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패턴 같다.(이런 분들은 한국에도 있다) 대화에서 파생되는 변화하는 의미에 천착하는 것도 이 계통 사람들의 특징인데, 과연 대화라는 것을 그렇게만 이해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연극 등의 예술에서 발생하는 대화 등은 꼭 그렇게 이해할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들뢰즈와 데리다로 해석하려는 것이 이 사람들의 경향이다. 한국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자신이 시간을 들여 저술한 연구를 너무 간략하게 이야기해서, 감질만 난다. 처음에 말했던 이 책의 장점이 바로 단점이 된 셈이다. |
| 리더스 다이제스트 |
그건 독일 전범을 이스라엘 첩보국이 수십 년 추적해서 체포해 온 후, 법정에 세웠다는 굉장히 긴박한 첩모물이지만 매우 부드럽고 감상적으로 쓰여진 글이었다. 읽을 때는 이스라엘 놈들은 이렇게까지 정의를 세우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부럽게 읽었는데,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정부가 독일 전범을 처단할 권한이나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또 이 첩보물은 자체는 국제 불법 폭력 납치극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범죄극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그리도 감상적이고 호의적으로 실을 수 있던 것일까? 그 뒤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다른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에게 해가 되는 선전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 출판산업 구조 변화 |
ASSIOMA라는 일본어 블로그에서 옮겨온 표인데,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의 상황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왼쪽의 표가 매우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한국의 출판 산업은 한국 답지 않게 분업이 매우 잘 이루어져 있다. 인쇄소 따로 제본소 따로, 창고도 따로! 이건 일본을 통해 출판 산업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출판 분업 전통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업자들이 모두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현재 한국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무시무시하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 분업이 발달한 산업은 대부분 일본 영향을 받았다. 봉제업('시다바리'), 건설업('노가다'), 법조계에서부터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출판업계 내에서도 그간 중간과정을 없애고 과정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왔는데, 이루어진 건 거의 없다. 이를테면 CTP를 시장에 내놓으려고 줄기차게 노력하는 집단이 있지만, 필름 교정 과정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Color Management 하는 사람을 아마추어 취급하는 게 현실. 워낙에 한국 시장이라는 게 이상하게 돌아가긴 하지만, (우리 민족이 유별나서라기 보다는, 우리 기업과 정부가 유별나서 그렇다) 결국 이북과 독자의 직접 만남, 제본된 책의 판매 부진 등을 우리도 겪을 테고, 표의 오른쪽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
| 융 |
새롭게 이해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세월 혹은 경험은 감정을 좀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 한편 융은 실제 업무를 하는 의사의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에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기 전엔 평생가도 이해 못 할 부분이 있는 것만 같다. (융을 비판할 때 가장 난해한 부분도 이거 같다) 융에 관한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어렸을 때 외삼촌(문리대도 다니고 확실히 지식인이었던 듯)이 보던 미국 전기 작가의 책 번역이었는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책이 안 좋다. 이부영 같은 해설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는 의사로서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특수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 이런 해설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아마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전문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과 한국인을 위해 해설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그들의 공부가 매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미국의 학문을 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입을 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치하기 그지 없다. 어릴 때 읽었던 김용운부터해서 최근의 이런 저런 사람들... 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 에세이에 실린 아이디어들은 참으로 동심의 세계다. |
| 당분간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
제가 알라딘용으로 제작한 플러그인과 이 블로그 글들의 알라딘 링크도 곧 삭제하겠습니다. |
|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지하철을 오래 탈 일이 있어서 얇은 책을 꺼내 들었다. 7년 전(;;;)에 산 책세상 문고. 지하철을 생각하면 책은 더 작게 (일본의 문고판처럼) 나오면 좋겠다. 그러려면 책 장정에 값을 메기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가격을 메길 수 있어야 하겠지.
이 책은 폴라니(Karl Polanyi, 1886~1994. 헝가리 경제학자로 소개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때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저작은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로 썼다)의 선집이다: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폴라니의 주요 논지는 현재 자유시장의 허구성을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인 듯하다. 도표나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전반적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숫자놀음을 많이 하지않는 편이다. 오히려 이들은 철학자에 가까운 거 같다. 또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지식인인 만큼, 고전과 역사에 대한 교양이 있고, 이를 자주 인용한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고의 기반인 듯 하다. 요즘은 이런 글을 글을 만나기 어렵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2-1. 『거대한 전환』 6장
굉장히 예언적인 문구;;; ‘보수적’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돈 이외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중시하는 것.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말이 반대로 쓰이고 있다. 이 ‘전통적 가치’에 ‘사장 말은 무조건 따를 것’, ‘법과 윤리를 무시하고 돈을 벌 것’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장 말에 대한 순종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테일러주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전통적인 가치를 사회에 현현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매우 보수적이다.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 더 보수적인 형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원문과 대조해서 보니 굉장히 성의있는 번역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강조 표시가 원문과 차이가 난다. (위의 인용문 참조) 원문의 이탤릭, 따옴표를 모두 작은 따옴표로 옮겼고, 거기다가 한국어 문장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도 작은 따옴표를 붙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악마의 맷돌’) 또 be 동사에 붙어있는 강조를 한국어 형용사로 옮기기도 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are’가 강조된 것을 번역문에서는 ‘필수적’을 강조) ‘이다’를 강조해서 어색하게 보였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원문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영어의 이탤릭체나 일본어의 가타카나 표기 등이 갖는 활자 뉘앙스의 차이를 현대 한국어에서는 표현하기 어렵다. (국민학교 때 외래어는 가다카나처럼 고딕체로 쓰라고 배우기도 했었습니다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책을 보면 산업 발전 단계의 도식을 너무 도식적으로 강조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어쩌면 200년 전 사건이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신화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일까. 정부와 전경련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풍요를 누리게 될까? 자유시장은 과학적 진리일까? 왜 우리는 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질 수록 경제를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게 되는 걸까? 글들이 매우 철학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난 그래서 폴라니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거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내용 역시 전통 가치로의 회귀로 정리될 수 있다.) 기회가 있으면 『거대한 전환』 을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재밌는 현상은 주로 이 책을 최근에(2009년에) 읽으신 분들이 칼폴라니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거대한 전환>이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거대한 전환>이 아직 나오지 않았거나 너무 두껍고 비싸서 우선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전환>이 이 <전세계적 시장경제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의 책을 팔기 위해 전략적으로 출판됐다는 음모를 제기 해 볼 수 있습니다. 2-2. 『거대한 전환』 11장폴라니는 19세기 역사를 자유시장주의의 확장과 이에 대항하는 법률제도의 이중적 운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의 변형인 듯 한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과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 그 자체도 자기 조정 시장의 파괴적 효과를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Paradoxically enough, not human beings and natural resources only but also the organization of capitalistic production itself had to be sheltered from the devastating effects of a selfregulating market.)(72쪽)은 좀 지나친 비아냥 같은 느낌이 든다.영란은행과 관련된 서술이 나오는데, 중앙은행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책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고전에서 현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부분 번역이 조금 이상한 듯)
이렇게 마법처럼(?) 19세기가 일단락된다. 내가 현재 사회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한데, 이런 동질감은 폴라니의 글들이 전반적으로 주관적인이기 때문인 거 같다. 3-1.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3-2. 「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
sure marxist. 3-3.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3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한 내용을 (아마도 강의를 위해) 폴라니가 정리한 것들이다. 몇몇 부분의 주장은 나에게도 익숙하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마르크스주의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다.마르크스주의처럼 입에 올려진 적이 많고, 또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됐던 사상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의심이 된다. 폴라니의 글 역시 너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내가 마르크스의 대표작이라는 『자본론』 1권의 역자 서문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남들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엥겔스는 싫어하는 듯. 이런 관점은 아래에도 이어진다. 3-4.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관점: 비판」
경제학 책들을 보면 마치 현재의 일을 미리 예언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⑩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꾸리는 ‘삶’의 성격. ‘콩나물 교실에서 받는 교육’ 혹은 ‘뒷골목 문화’ 그 이상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은 집을 가져야 한다고 우긴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간주될 것이다. 자신의 생산물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장사를 망치고 결국은 자신의 장사도 망치는 짓이 된다.
여기까지 읽어보니 완전 마르크스주의 책인데;;; 왜 정부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까? 내가 공안 책임자였다면 책세상 출판사는 문 닫았을 듯.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
| 오늘 배달된 책 (2009/04/17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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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레프트리뷰』 |
어느새 나와있었군요. 별로 좋은 느낌은 안 듭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여태까지 잡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있다가 이제와서 외국 잡지 수입이라니. 국내 잡지는 아마 시장이 더 줄겠죠. 한국은 더더욱 수렁으로 빠질 거 같은 예감. 좌파 이론도 수입하는 한국의 외제병이란. p.s Monthly Review도 번역판이 나온 게 있었군요. 근데 1번 나오고 끝. |
| 『번영의 비참』(Misère de la prospérité) |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http://www.signandsight.com/features/687.html> 빠스깔 브뤼크네흐(Pascal Bruckner, 1948~) 책은 예전에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Les ogres anonymes)를 읽었는데, 나는 한국 아마추어 환타지 작가의 단편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정치 상황을 순발력 있게 묘사해서 우리나라까지 흘러왔겠거니 했는데, 영화로 만들어진 『비터 문』(Lunes de fiel) 같은 작품도 쓴 데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에세이스트라니 어색하다. 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IEP de Paris, 파리정치학원) 교수에다 여러 출판사와 잡지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출판사(저자가 편집인이기도 한) 홈페이지에 책의 일부가 공개되어 있다:
현 사회의 소득의 불평등은 부조리하다. (1장, 이 부분이 가장 널리 인용되는 듯) 오히려 봉건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국적 제약회사의 시장 진출이 쉽게 무산되는 경우도 있듯이,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악도 아니고, 미국이 절대적인 제국도 아니다. (제국주의를 할 문화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역시 프랑스 책!) 지식인들 역시 이런 환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변절한 기회주의자 뿐 아니라 부르디외 조차도!) 게다가 토론은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진행되며,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결국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소비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온갖 신앙과 이데올로기가 대거 붕괴되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활력을 과시하는 게 있다면 그건 경제다. — 서론, 11쪽 서문의 이 말은 '자본주의'나 '시장'이라는 헛된 목표를 쫓는 기업가들을 조롱하는 말인 동시에, 자본주의를 적으로 상정하는 좌파들이 헛된 타도 대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 책이 2002년에 씌여진 걸 생각하면, 시대를 보는 훌륭한 눈이라는 생각도 드나,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각각의 상황별로 판단하라는 익숙한 주장은 타당하지만,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비판받을 구석이 많다. |
| 『백치・타락론 외』 |
2009년 2월 8일 일요일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1906~1955)의 대표작 9개를 옮긴 책. 1989~1991년에 筑摩書房에서 간행한 文庫版『坂口安吾全集』(전 18권)을 저본으로 삼았다. (그 뒤에 '決定版'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전집을 또 출간했다. 이전에 있던 전집으로는 冬樹社판이 있다.) 작품 선정 기준은 책의 말미에 실린 가상 인터뷰와 연표를 참조해 볼 때, 1946년에 발표해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타락론」(堕落論), 「백치」(白痴)은 대표작으로, 「바람박사」(風博士)(1930), 「한바탕 마을 소동」(村のひと騒ぎ)은 파스론(Farce)에 입각한 초기 작품으로, 「어디로」(いづこへ),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私は海をだきしめてゐたい)는 그의 방랑기과 그 극복을, 「돌의 생각」(石の思ひ)은 작가의 가정사에 관한 이야기,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1947)는 결혼 후 말년의 대표작으로 고른 듯 하다. 작품의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 참 좋다. 유년시절에 읽었으면 팬이 되었을 듯. 일본 문학이 최근에야 한국에 정상 유통되고 있다. (『상실의 시대』의 대성공 때문인 듯) 내 윗세대는 일본어 책을 그냥 읽었을 테고. 일본 문학에 어중간하게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쉽다. 작가가 프랑스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읽으면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생각이 났다. 작가의 필명 '안고'(安吾)는 중학교 때 교사가 어둡다고 부쳐준 별명 '暗告'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유난했던 모양. (본명은 炳五(へいご). 병오(丙午, へいご)년에 태어난 다섯째라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책 여백에 각 작품의 제목이 적혀있지 않아 찾아보기 불편하다. |
| 『계몽주의의 기원』 |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1990년대 중반쯤에 한국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안 겪어서 이 모양 이꼴이네 하는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이 근대화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같은 질문은 전혀 안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저 매판과 수탈당하는 민중이 있을 뿐이다. 왜 민중은 자신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가진자를 쫓는가? 난 그 이유가 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사고를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다는 거. 그건 누가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혹은 반대로 한국은 사상이 없어서 그런건지도;;; 이러한 한국 사상(?)의 연원은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 연원을 밝히려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근대화 기준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지만, 서구의 근대화를 공부해야 한국 사회를 이해 혹은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그래서 관련된 주제인 거 같아 무작위로 고른 책이다;;;; 서두가 좀 이상하다;;; 앞에 조금 읽었는데,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중세와 근대에 대한 석학의 통찰, 내가 원하던 것. 이 책이 사상사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서구의 근대를 다루는 책은 대부분 산업혁명, 자본주의, 국가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내밀한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다. 철학사 책의 경우도 각 철학가(?)의 주장과 그 타당성, 논쟁 등에 집중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앞으로도 이런 사상사 류의 책을 좀 봐야할 듯. (강유원 영향을 받고 있는 건가?) 피터 게이(Peter Gay, 1923~)가 1966년에 쓴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2권 중, 첫번째 책인 「The Rise of Modern Paganism」 만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자 역시 2권 「The Science of Freedom」이 번역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p.s 유명한 인터넷 서평가(?)가 지은이 이름(Gay)가지고 장난친 걸 서평이라고 올렸던데, 황당하다. |
| 추리소설과 SF소설은 왜 같은 코너에 있을까? |
DCInside 미스터리 갤러리에 올라오는 글들의 쟝르를 보니까 이해가 간다.
당연히 미결 사건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과학기술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여기다가
까지 나온다... 아니 이게 게시판 주내용이다;;; 그러니까 SF와 추리가 붙어있는 건 당연한 걸지도? |
| 나의 독서 역사 |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고 나도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서 역시 매우 개인적인 경험인 거 같다. 1.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책들은 대부분 10대에 만났다: 『엔트로피』, 『색채심리학』,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장자』(안동림) 그리고 물리 교과서(Halliday, Resnick 등) 정도가 기억난다. 내용보다는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내가 감동 먹고 학교 교사나 주위 어른들에게 저 책들의 내용을 물어도 뭐 뾰족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부터 세상 좀 우습게 보기 시작한 듯?) 그 뒤에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좋은 책이나 요긴한 정보를 주었던 책, 추억에 남는 책(이성에게 선물로 받았다거나)이 없는 건 아닌데,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싶은 책은 없다. 책 내용보다 그냥 10대 때 본 책이 기억에 남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본 TV 만화가 평생 남는 거처럼. 저 책들을 지금 다시 본다고 좋아라 할 거 같지도 않다. 2. 20대 초반 대학에서 남들 다 읽는 책들을 읽기도 했는데, 머리에 남은 건 없다. 우선 내용은 없고 너무 감정에 치우친 책들이 많았다. '미제는 나쁜놈이다'같은 내용.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거꾸로 보는 세계사』 따위) 원서 자체가 정치적인 색이 짙은 경우도 있었다. '철학책'이라고 돌아다니는 것이 쏘련이나 중공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만든 것이니 뭘 제대로 배우기는 불능. (쿨가이의 대명사 진중권도 그때는 쏘련 미학책 번역) 이런 종류의 책(최근 생각나는 건 우석훈)이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고, 그런 책들의 저자(유시민이라던가)가 지금도 인기 있는 걸 보면 무슨 불량식품처럼 인간이 언제나 갈구하는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번째로는 정확하게 읽지 못 했다. 기초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크고, 당시 번역 수준을 비롯한 학문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도 했다. (학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조용히 교수실에 앉아 있어서 나같은 사람이 알 수 없었을 듯) 적당한 독서 지도(?)를 해줄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었던 것도 이유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선생에게 맞추는게 더 빠른 일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제대로 책 읽고 산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사회가 왜 이모냥인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3. 오히려 어떤 책을 읽었나보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첫번째는 명상(?)하며 읽는 법. 끈질기게 선교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글에 환상을 더하면 무궁한 해석이 나온다. 종교 경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역사, 철학책, 문학작품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옳다고 보기 어려운 독법이다. 잘 모르시는 분들께는 70년대 미국의 신비주의 책들을 추천한다, 『요가난다』 정도. (종교를 가지고 계시다면 이미 실천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두번째는 희곡 읽는 법. 연극을 배우면서 희곡은 연극이 될 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古代)로 갈 수록 서사문학은 책이 아닌 공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글이 실제 의식(儀式)의 단면이나 메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공연을 떠나 소설로만 본다면 그 가치의 10분의 1도 못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어찌보면 이게 공부하는 방법일 것이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다, 말 그대로 공부 중이다. 정말 매우 늦게 알게 되었다. 그 시초는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였다. (책 자체는 비추) 책 첫머리에 고전적인 삼단논법(모든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비판이 짧게 언급되는데, 그걸 읽고서부터 논리와 현실세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거 같다. 언어 논리(?)라는 게 기계적일 거 같으면서도 주관적인 아리송한 세계다. 아무튼 이쪽으로는 지금도 고민 중이다. 내가 컴퓨터 때문에 형식논리에 너무 익숙했던 것도 이걸 늦게 알게 된 원인이 된 거 같다. 마지막은 상품으로서의 책, 잠깐 편집자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책이나 글과 관련된 일은 이전에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보니 책에 대한 관점이 180도 바뀌었다. 책은 철저하게 편집자가 생산해내는 상품으로, 작가는 그저 재료 중에 하나일 뿐이다. 책의 내용은 순수한 작가의 의도도 아니고, 필요에 따라 가감될 수 밖에 없다. 독자는 책이 하나의 상품임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마치 TV 비평하듯) 상업적인 출판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책은 정치적인 도구인 경우가 많았다. 책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 뒤로 책을 구입해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 현저하게 줄었다. 4. 나는 문학작품은 잘 안 읽는다. 정보 전달량이 적으니까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소설은 가끔 열심히 보기도 하는데, 순전히 재미로 본다.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반이상은 무협지나 SF소설. 재미까지 없는 소설도 있다. 이문열, 확성영이 재미있는가?) 시는 거의 안 본다. 소설은 재미라도 있는데 시는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김소월 정도만 진짜 시인거 같고, 윤동주, 기형도만 해도 짧게 쓴 산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나는 시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미탑재된 거 같기도) 나는 왜 시를 모를까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는데,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나요? 같은 얼빠진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시를 100번 읽으라던가, 마음 어쩌고 하는 알 수 없는 말들 뿐이었고. 내 마음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에 시가 없었다는 생각. (한민족의 혼을 일깨울 수 있는 진정한 문학은 안 나타났어! 뭐 이런 거랑 통할 수도) 한국의 문학을 만든 작가들이 일제 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한국 문학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거 같다. (오히려 대중가요(랩이라던가)가 더 한국 문학에 접근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쪽 책들도 늦게 보기 시작했다. 5. 그래도 내가 즐겨 읽었던 작가들을 고백해보자면: 우선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을 즐겨 읽고 자란 것이 잡다한 지식을 갈구하는 바탕이 된 거 같다. (이 팀이 일본 거를 많이 베꼈다는 걸 알고 급실망하기도 했지만) 다음으로 은근히 김용옥 영향을 많이 받았다. 꾸준하게 글을 써서 대중에게 학문세계를 소개하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다. (근데 이분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자기 생각이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직 없다가 답인 거 같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중이신 듯) 글쟁이 중에는 고종석을 좋아한다, 뭔소린지 도시 모르겠는 기사가 난무하는 언론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다. (아이디어도 살짝 마음에 들고) 막스 베버에 충격 먹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집요해? (난 막스 베버가 꼴통 보수 우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객관적으로 썼다고 본다. 내가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약간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정치성향은 한나라당 골수분자인데 사회에 대한 글은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매일같이 황거를 향해 절할 거 같은 사람인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같은 거) 이부영(정신과 의사)도 기억난다. 융이나 프로이트를 번역판 책만 봐서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 사람 글을 통해 기준을 삼는다. (한국사람이 공부해온 걸 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마땅히 구체적인 책들을 적시(敵視)해서 글을 썼어야 하는데, 읽은 책들 생각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고 해서 여기서 마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왜 자기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썼는지 알 것도 같다.) 근데 대충 정리한다고 정리하긴 했는데 큰 의미는 없는 듯. 시간이 흐른 뒤에 볼 추억거리 정도? 그냥 내가 그때 그랬지 정도 생각할 수 있는 마일스톤으로 생각하자. |
|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
2008년 9월 18일 토요일 이거 분명히 한국의 독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일텐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인기가 상승하니 무리해서 옮긴 것일 듯.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한국판에서 한국의 상황과 거리가 있는 「나의 독서일기」를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런 책을 그대로 옮겨왔으니, 지은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서문에 아마 나오겠지? 지은이가 인기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비싸다. 일본 원서 가격보다 비싸니 앞으로는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책은 일본어로 읽어야 할까?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다치바나 다카시를 처음 접했을 때,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한 것을 정리해도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그 뒤로 약간 팬이 된 듯하다. 뭐 근데 다치바나 다카시는 동대에 문춘 출신이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이 책은 「주간문춘」(週刊文春)의 「나의 독서일기」(私の読書日記) 코너에 연재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연재물을 묶어서 출간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 「나의 독서일기」는 일종의 신간소개이기 때문에, 한국 출판시장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한국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책에서 '나의 독서일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모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미디어, 2001)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왜 이번 판은 이 부분을 그대로 옮겼는지 불만이다. 일본 출판 시장 탐색을 위해서? 두고 볼 일이다) 1부 「피가 되고 살이 된 500권, 피도 되고 살도 되지 못한 100권」은 지은이의 서재인 '고양이 빌딩 안에서 마이크를 달고 서가 앞을 걸으면서 눈앞에 있는 책들의 추억을 마구 늘어놓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적으로 제작된 것이지만 '나중에 꼼꼼히 손을 대었다.'(11쪽) 앞서 발간된 『ぼくはこんな本を読んできた—立花式読書論、読書術、書斎論』과 『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이 두 권의 책 이름을 일본어로 적은 것은, 한국에는 이 두 권이 하나의 책으로 합본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의 1부는 많은 양의 책을 읽는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전달하기 위한 내용이 많았는데, 이번 책은 내용은 중복되는 게 많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과 감정, 개인사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동거 얘기도 나옴;;; 책에 18금 딱지 붙여야 할 듯? 간행물 윤리위원회는 일을 한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간문춘을 그만 둔 이유를 '책을 더 읽고 싶어서'라고 적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좀 더 자세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자들이 시간이 쫓기면서 건성건성 아는 척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독서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참지 못했던 거 같다. 취재에서는 듣는 이야기 중에 잘 모르는 게 나와도 음~, 음~, 하며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듣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대목은 나중에 서둘러 조사합니다. 다음 사람을 취재할 때는 서둘러 조사한 설익은 지식을 꽤나 오래전부터 알아온 지식인 양 상대에게 던지면서 취재를 더욱 심화시켜 갑니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할 수 있는 능력, 즉 '반가통(半可通) 능력'을 익혀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9쪽) 심히 공감되는 이야기. (뒤에 자신이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출력비(입력대 출력의 비율)가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9쪽) 내가 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자위해보자;;; 뭐랄까 자신의 직업과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치관. 일본식인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보수적인 느낌도 든다. 그가 대학생 때 읽은 책들 목록을 보니 벌써 30년 이상 전 이야기고, 지금에 그 책들이 다시 출판된다면 과연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상계(?) 또는 출판시장도 은근히 많이 바뀐다. 한편으로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인기를 끈 책이 많은데, 일본 출판 시장과 한국 출판 시장의 공명이 일어난 것도 흥미있다. (따라한 거 겠지) 번역자가 언급된 책들의 번역판 제목을 확인하지 않은 거 같다. 예를 들어 Thor Heyerdahl(1914~2002)의 『Kon-Tiki ekspedisjonen』(Kon-Tiki Expedition)(1948)의 경우 국내에 '콘티키호 탐험기'(32쪽)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국립도서관 자료를 검색해 보면 모두 '콘・티키' 또는 '콘티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다치바나가 문춘을 그만 둔 뒤에도 생계를 꾸릴 수 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일본 잡지사에서 기사를 구입해주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물론 '자유기고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런 시장은 그리 발달해있지 않다. 또 일본 잡지는 널리 알려진 작가들에게 높은 고료를 주며 기사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해외 취재 같은 것. 한국에서 작가들이 신문 지상에 정치 얘기를 써대는 게 이런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학가가 아닌 기사를 작성하는 라이터에 대한 대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문춘에 재직하던 무렵, 문필가로서 '선생'이라 지칭되는 사람은 소설가뿐이었습니다. 논픽션 작가로서 '선생'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만년의 오야 소이지 정도였죠, 아마. 《주간문춘》에 톱 기사거리를 파는 일을 하던 가지야마 도시유키 같은 사람은 인기 작가가 된 뒤에도 문춘 사내에서는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조금 윗세대 편집자들로부터 기껏해야 동료 취급을 받았을 뿐, 대다수는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37~38쪽) 이러한 상황은 곧 바뀐다. 이런 상황이 급속히 변한 것은 주간지 등장에 의해서입니다. 주간지에는 연재소설도 있었지만 연재소설만으로는 주간지를 팔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매력적인 특집 기사가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쪽이 훨씬 중요합니다. (39쪽) 다치바나의 성공 역시 그러한 조류와 관련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일본 출판계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치바나가 학사입학한 동경대 철학과를 그만 둔 배경에 당시 학생운동이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만든 것, 즉 창작물'을 싫어합니다. 나도 한때는 픽션을 쓰겠다는 뜻을 품은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창작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서 처음 한 일이 주간지 취재, 그러니까 리얼한 세계 그 자체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 이면으로부터 그리고 정면으로부터, 또 삐딱한 시선으로부터도 샅샅이 검증해내는 그런 일이었잖습니까?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 점차 리얼한 세계의 재미에 눈을 떠간 겁니다. 그와 함께 창작물의 세계가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픽션의 세계, 창작의 세계는 밑바닥이 너무 얕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것은 아무리 애써봤자 빈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구상력과 상상력이 그만큼 빈약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70쪽)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다치바나가 일본의 무교회파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기독교를 상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니 그 영향이 적지 않은 거 같다. 우리 귀에까지 들리는 일본 필자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거 같다. 그래야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는 거 같고. 그러나 그 보수성에도 각각의 다양한 방향성 같은 게 있다. 일본 책들을 읽다 보면 사상을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서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사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언제나 든다. 일본 문화 혹은 언어의 특징인 거 같기도 하고. 반대로 한국은 너무 감춰놓아서 알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 어쩌면 언어로서 단순하게라도 왜곡을 무릅쓰고 정리하고 그 의미를 보충하는 것이 발전의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코의 정신이 모든 인문과학을 떠받치고 있다는 이야길 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자연과학과 기술도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비코 철학의 정수는 뭔가 하면 "진리는 만드는(짓는) 곳에 존재한다(verum ipsum factum)."(혹은 만들지(짓지) 않는 한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현대과학과 현대기술을 그 근저에서 떠받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요컨데 자연과학은 실험정신, 즉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기술이란 것도 '우선, 만들어보자.'라는 호모 파베르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모두 "verum ipsum factum" 정신 위에서 진행됩니다. 현대문명의 바탕을 데카르트 정신이 아니라 비코 정신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86쪽) 다치바나는 지식인이나 학자라기보다 르뽀라이터이다. 개인적인 경험담이 주를 이루다보니 좀 질린다. 대충 훑어보고 접는 게 좋을 거 같다. 1부에서 소개하는 책들이 대부분 좀 유행이 지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를 참고할 일도 없을 듯. 어쩌면 이 책은 일본책 어떤 걸 번역할까 고민하는 출판업자를 위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참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이 서평을 쓰기 적당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팀블로그 형식으로 신간 위주로 서평을 쓰면 출판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생각있으신 분?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책 역시 다른 쟝르의 예술처럼 감상 시기와 당시 유행이 중요한 거 같다. 다치바나가 감동 받은 책을 지금 본다고 의미있을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감동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른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감독들마다 어린시절 봤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다른 것처럼. 책 추천이라는 게 생각만큼 의미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
| 요즘 |
|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2006) |
일주일에 한권씩 읽어도 1년에 50권, 1000권 보려면 20년. 이거 뭐 책 읽다가 죽으란 말인 듯? 게다가 영미권 책들만 실린 거 같던데. |
| 『STOP! SMOKING』 |
| 『뜨거운 물고기』 |
| 『멋쟁이 용과 멋쟁이 나비』 |
앞으로 버럭하지 않고, 멋쟁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