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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
2009/03/02 :: 『뉴레프트리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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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떄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꽤 자주 봤다. 영어 공부에 좋다고 해서 영어판을 정기구독한 적도 있을 뿐 아니라, 공공장소나 휴게실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런 내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다음 기사를 읽은 후였다.

그건 독일 전범을 이스라엘 첩보국이 수십 년 추적해서 체포해 온 후, 법정에 세웠다는 굉장히 긴박한 첩모물이지만 매우 부드럽고 감상적으로 쓰여진 글이었다.

읽을 때는 이스라엘 놈들은 이렇게까지 정의를 세우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부럽게 읽었는데,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정부가 독일 전범을 처단할 권한이나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또 이 첩보물은 자체는 국제 불법 폭력 납치극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범죄극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그리도 감상적이고 호의적으로 실을 수 있던 것일까? 그 뒤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다른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에게 해가 되는 선전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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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IOMA라는 일본어 블로그에서 옮겨온 표인데,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의 상황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왼쪽의 표가 매우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한국의 출판 산업은 한국 답지 않게 분업이 매우 잘 이루어져 있다. 인쇄소 따로 제본소 따로, 창고도 따로! 이건 일본을 통해 출판 산업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출판 분업 전통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업자들이 모두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현재 한국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무시무시하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 분업이 발달한 산업은 대부분 일본 영향을 받았다. 봉제업('시다바리'), 건설업('노가다'), 법조계에서부터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출판업계 내에서도 그간 중간과정을 없애고 과정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왔는데, 이루어진 건 거의 없다. 이를테면 CTP를 시장에 내놓으려고 줄기차게 노력하는 집단이 있지만, 필름 교정 과정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Color Management 하는 사람을 아마추어 취급하는 게 현실.

워낙에 한국 시장이라는 게 이상하게 돌아가긴 하지만, (우리 민족이 유별나서라기 보다는, 우리 기업과 정부가 유별나서 그렇다) 결국 이북과 독자의 직접 만남, 제본된 책의 판매 부진 등을 우리도 겪을 테고, 표의 오른쪽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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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지이 아사리(藤井麻里) 지음, 『(듣기만 해도 문법이 정리되는) 일본어 문법 무작정 따라하기』(무작정 따라하기 일본어 5, 길벗 이지톡, 2008) / 1,7820원.
  • 도올 김용옥 지음, 『논어한글역주 1』(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 통나무, 2008) / 2,3400원.
『일본어 문법 무작정 따라하기』는 일본어 공부 좀 해보려고 샀다. 유명한 교재들(다락원, 시사, 나가누마 등등)은 학원용 교재 같고 해서, 문법 위주로 설명되어 있는 책을 골라봤다. 일본어 공부는 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다.

『논어한글역주 1』은 논어를 제대로 읽겠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구입했다. 과문해서인지 아직 남에게 추천할만한 논어 번역본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사기 전에도 교보문고에서 시중의 번역본을 훑어봤지만 구입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없다. 민족문화추진회 강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 대부분이 논어를 해석할 수 있고, 선교사가 세운 대학에 서당이 생기는 마당에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긴 영어 고전도 잘 번역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논어한글역주 1』 역시 좋은 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김용옥 특유의 장황한 이야기로 책 부피만 늘인 거 같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이후로 책값도 많이 올랐다. 조금 있으면 70이 되는 김용옥이 13경(사서삼경은 고려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번역에 나선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제대로 맺음하지 못 한 전과들이 있기 때문에 결과는 두고 봐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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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주로 이부영(1932~)이 쓴,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새롭게 이해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세월 혹은 경험은 감정을 좀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

한편 융은 실제 업무를 하는 의사의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에 내가 정신과 의사를 하기 전엔 평생가도 이해 못 할 부분이 있는 것만 같다. (융을 비판할 때 가장 난해한 부분도 이거 같다)

융에 관한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어렸을 때 외삼촌(문리대도 다니고 확실히 지식인이었던 듯)이 보던 미국 전기 작가의 책 번역이었는데, 이건 지금 생각해도 책이 안 좋다.

이부영 같은 해설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는 의사로서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특수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 이런 해설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아마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전문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과 한국인을 위해 해설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그들의 공부가 매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미국의 학문을 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입을 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치하기 그지 없다. 어릴 때 읽었던 김용운부터해서 최근의 이런 저런 사람들... 교수의 정년 퇴임 기념 에세이에 실린 아이디어들은 참으로 동심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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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알라딘커뮤니케이션(대표이사 조유식)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라딘용으로 제작한 플러그인과 이 블로그 글들의 알라딘 링크도 곧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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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지하철을 오래 탈 일이 있어서 얇은 책을 꺼내 들었다. 7년 전(;;;)에 산 책세상 문고. 지하철을 생각하면 책은 더 작게 (일본의 문고판처럼) 나오면 좋겠다. 그러려면 책 장정에 값을 메기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가격을 메길 수 있어야 하겠지.

그렇다면 근대 과학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가설을 허용치 않는’ 뉴턴 물리학 이래 근대 자연과학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이다. 대포알의 무게, 화약의 양, 발사의 각도, 바람의 세기 등을 알면 대포알이 어디에 떨어질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다. 이런 능력 덕분에 우리는 거대한 댐도 다리도 세웠고 우주선도 쏘아 보냈다. 그렇다면 앞에서 본 제사장과 주류 경제학자들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과연 제사장은 인간의 죄, 신의 진노, 그로 인한 풍흉이라는 결과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만약 그가 흉년의 원인으로 내세운 ‘인간의 타락’설이 그렇게 신통한 법칙이라면¶그는 흉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의 풍기 문란 상태와 늘어나는 환락 업소의 숫자만을 보고도 미리 흉년을 예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다면 “더 타락하면 흉년이 들 것이니 자제하자”고 가르쳐주어 흉년을 미연에 방지해줄 일이지 막상 흉년이 닥친 뒤에야 그런 소리를 해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비슷한 의문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시장 질서가 그토록 어김없는 과학적 철칙이라면 왜 그들은 위기 직전까지도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다가 위기가 온 다음에야 이구동성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일본이나 한국 경제의 모습이 교과서적인 시장 경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언제 비밀이었던가? 그런데 모든 게 잘되어가던 때에는, 그런 차이야말로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아시아 발전 국가의 독특한 장점이라는 주장이 횡행해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별 말이 없거나 부화뇌동하기까지 했었다. 그러고 보면, 주류 경제학이 본격적으로 과학성을 표방하기 시작한 20세기를 통틀어 경제학자들이 경제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한 적이 있기는 했던가? 과문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 「책을 옮기게 된 동기」, 9~10쪽.

1997년에, 또 2000년에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시장 개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시장 개혁 ‘때문’이 아닐까? 1997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벌 기업들이 단기로 차입한 외자가 지나쳤기 때문인데, 이는 김영삼 정권 당시 재벌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기 위해 원칙 없이 행하던 금융 자유화와 탈규제의 결과가 아닌가? 또 2000년에 경기가 위축된 데에는 몇 년간의 구조 조정 과정에서 고용 창출을 위해¶대규모 투자를 할 만한 대기업들이 사라졌거나 위축당했으며, 은행들이 금융 구조 개혁의 덫에 걸려 몸을 사리는 바람에 기업들이 자금 경색으로 고통받았던 것이 최소한 원인의 일부가 아닌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시장 개혁을 완수해야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실레는 있는가?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 길에 들어선 멕시코 같은 나라들은 시장이라는 낙원에 도달했는가? 아니면 불평등과 경제 불안정의 지옥에 빠져버렸는가? 결국 우리는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까지 시장 경제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시지포스처럼 곤두박질을 쳐야 하는가? 시장 실현이 인간 경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책을 옮기게 된 동기」, 13~14쪽.


이 책은 폴라니(Karl Polanyi, 1886~1994. 헝가리 경제학자로 소개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때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저작은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로 썼다)의 선집이다:
  • 「Our Obsolete Market Mentality」(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Commentary, Vol. 3, 1947)
  •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이 책에서는 '거대한 변환'으로 옮겼으나 후에 역자가 '거대한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낸다)(1944), 6장과 11장.
  • 「Marxism Re-stated」(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1934, 미발표 원고)
  • 「Introductory Notes to Karl Marx's "Political Economy and Philosophy"」(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1933~1935, 미발표 원고)
  • 「Syllabus of a Lecture on marxian Philosophy」(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1933~1935, 미발표 원고)
  • 「A Chrisitian View of Marxism. A Critique」(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관점: 비판)(1933~1935, 미발표 원고)
  • Neue Erwägungen zu unserer Theorie und Praxis」(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Der kampf, 1925)
  • 「Universal Capitalism or Regional Planning」(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The London Quarterly of World Affairs, 1945)
  • Karl Polanyi-Levitt(폴라니의 딸, 1923~), Marguerite Mendell, 「Karl Polanyi: Biographical Sketch」(칼 폴라니 약전)(Telos, no. 73, 1987)
이런 선집은, 지은이의 연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개략적인 방향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준다.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폴라니의 주요 논지는 현재 자유시장의 허구성을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인 듯하다.

도표나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전반적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숫자놀음을 많이 하지않는 편이다. 오히려 이들은 철학자에 가까운 거 같다.

또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지식인인 만큼, 고전과 역사에 대한 교양이 있고, 이를 자주 인용한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고의 기반인 듯 하다. 요즘은 이런 글을 글을 만나기 어렵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2-1. 『거대한 전환』 6장

그런데 노동, 토지, 화폐에 관해서는 이런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 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폐허가 될 것이다. 구매력의 양과 사용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 비록 사람들은 ‘노동력’도 똑같은 상품이라고 우겨대지만, 일하라고 재촉하거나 마구 써먹거나 심지어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어쨌건 그 특별한 상품을몸에 담은 인간 개개인은 반드시 영향을 입게 마련이다. 이런 체제 아래서, 인간의 노동력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인간’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화적 제도라는 보호막이 모두 벗겨진 채 사회에 알몸으로 노출되고 결국 쇠락해간다. 그들은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동하는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된다. 자연은 그 구성 원소들로 환원되어버리고, 주거지와 경관은 더럽혀진다. 또 강이 오염되며 군사적 안보는 위협당하고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된다. 마지막으로, 구매력의 공급을 시장 기구의 관리에 맡기게 되면 영리 기업들은 주기적으로 파산하게 될 것이다. 원시 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 부족이나 과잉은 경기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시장,¶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와 경제 조직이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악마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어떤 사회도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올 결과를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Now, in regard to labor, land, and money such a postulate cannot be upheld. To allow the market mechanism to be sole director of the fate of human beings and their natural environment, indeed, even of the amount and use of purchasing power, would result in the demolition of society. For the alleged commodity "labor power" cannot be shoved about, used indiscriminately, or even left unused, without affecting also the human individual who happens to be the bearer of this peculiar commodity. In disposing of a man's labor power the system would, incidentally, dispose of the physical, psychological, and moral entity "man" attached to that tag. Robbed of the protective covering of cultural institutions, human beings would perish from the effects of social exposure; they would die as the victims of acute social dislocation through vice, perversion, crime, and starvation. Nature would be reduced to its elements, neighborhoods and landscapes defiled, rivers polluted, military safety jeopardized, the power to produce food and raw materials destroyed. Finally, the market administration of purchasing power would periodically liquidate business enterprise, for shortages and surfeits of money would prove as disastrous to business as floods and droughts in primitive society. Undoubtedly, labor, land, and money markets are essential to a market economy. But no society could stand the effects of such a system of crude fictions even for the shortest stretch of time unless its human and natural substance as well as its business organization was protected against the ravages of this satanic mill.

— 62~63쪽.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1944), 제6장, 「자기 조정 시장 그리고 허구적 상품: 노동, 토지, 화폐」(The Self-Regulating Market and the Fictitious Commodities: Labor, Land, and Money) 중에서

굉장히 예언적인 문구;;;

‘보수적’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돈 이외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중시하는 것.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말이 반대로 쓰이고 있다. 이 ‘전통적 가치’에 ‘사장 말은 무조건 따를 것’, ‘법과 윤리를 무시하고 돈을 벌 것’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장 말에 대한 순종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테일러주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전통적인 가치를 사회에 현현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매우 보수적이다.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 더 보수적인 형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원문과 대조해서 보니 굉장히 성의있는 번역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강조 표시가 원문과 차이가 난다. (위의 인용문 참조) 원문의 이탤릭, 따옴표를 모두 작은 따옴표로 옮겼고, 거기다가 한국어 문장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도 작은 따옴표를 붙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악마의 맷돌’)

또 be 동사에 붙어있는 강조를 한국어 형용사로 옮기기도 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are’가 강조된 것을 번역문에서는 ‘필수적’을 강조) ‘이다’를 강조해서 어색하게 보였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원문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영어의 이탤릭체나 일본어의 가타카나 표기 등이 갖는 활자 뉘앙스의 차이를 현대 한국어에서는 표현하기 어렵다. (국민학교 때 외래어는 가다카나처럼 고딕체로 쓰라고 배우기도 했었습니다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책을 보면 산업 발전 단계의 도식을 너무 도식적으로 강조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동감이 좀 떨어진다. 어쩌면 200년 전 사건이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신화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은 어떤 사람이 고용주가 아닌 피고용자인 한에서만 그를 부르는 기술적 용어다. 따라서 노동 조직은 시장 경제 체제 조직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노동 조직이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결국 위의 결론은 시장 경제 체제의 발전에 따라 사회 조직 자체의 변화가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사회는 이제 모든 면에서 경제 체제의 부속물이 되어버렸다.

labor is the technical term used for human beings, in so far as they are not employers but employed; it follows that henceforth the organization of labor would change concurrently with the organization of the market system. But as the organization of labor is only another word for the forms of life of the common people, this mean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market system would be accompanied by a change in the organization of society itself. All along the line, human society had become an accessory of the economic system.

— 66쪽.

앞에서 영국 역사의 종획운동(enclosure)의 약탈과 산업혁명에 수반된 사회적 파국을 비교했었던 것을 상기해보자. 일반적으로 개발은 사회적 혼란을 대가로 얻어진다. 그 혼란이 너무 크다면 공동체는 그 과정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는 그 변화 과정이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또 그 효과가 덜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도록 규제하여, 영국이 스페인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에 빠지지 않게¶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산업혁명의 충격에서 영국의 인민들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자생적 진보에 대한 맹신이 사람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가장 선구적인 이들조차 규제 없는 무제한의 사회 변동을 향해 광신도들처럼 열광적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민중들의 삶에 나타난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이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의 활동을 둔화시켰던 사회 보호의 반작용이 없었다면 인간 사회는 괴멸된 뻔했다.

We recall our parallel between the ravages of the enclosures in English history and the social catastrophe which followed the Industrial Revolution. Improvements, we said, are, as a rule, bought at the price of social dislocation. If the rate of dislocation is too great, the community must succumb in the process. The Tudors and early Stuarts saved England from the fate of Spain by regulating the course of change so that it became bearable and its effects could be canalized into less destructive avenues. But nothing saved the common people of England from the impact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A blind faith in spontaneous progress had taken hold of people's minds, and with the fanaticism of sectarians the most enlightened pressed forward for boundless and unregulated change in society. The effects on the lives of the people were awful beyond description. Indeed, human society would have been annihilated but for protective countermoves which blunted the action of this self-destructive mechanism.

— 66~67쪽.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일까. 정부와 전경련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풍요를 누리게 될까? 자유시장은 과학적 진리일까?

왜 우리는 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질 수록 경제를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게 되는 걸까?

글들이 매우 철학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난 그래서 폴라니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거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내용 역시 전통 가치로의 회귀로 정리될 수 있다.) 기회가 있으면 『거대한 전환』 을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재밌는 현상은 주로 이 책을 최근에(2009년에) 읽으신 분들이 칼폴라니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갖고 <거대한 전환>이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거대한 전환>이 아직 나오지 않았거나 너무 두껍고 비싸서 우선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전환>이 이 <전세계적 시장경제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의 책을 팔기 위해 전략적으로 출판됐다는 음모를 제기 해 볼 수 있습니다.
— http://smislife.egloos.com/3384705

2-2. 『거대한 전환』 11장

폴라니는 19세기 역사를 자유시장주의의 확장과 이에 대항하는 법률제도의 이중적 운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의 변형인 듯 한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과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 그 자체도 자기 조정 시장의 파괴적 효과를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Paradoxically enough, not human beings and natural resources only but also the organization of capitalistic production itself had to be sheltered from the devastating effects of a selfregulating market.)(72쪽)은 좀 지나친 비아냥 같은 느낌이 든다.

영란은행과 관련된 서술이 나오는데, 중앙은행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책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중산 계급은 막 생겨나고 있던 시장 경제의 담지자들이었다. 이들의 사업상의 이익은¶대체로 생산과 고용 창출에 관한 전체의 이해와 일치했다. 경기가 좋아지면 모두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부동산 소유자들은 지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시장이 확장되면 투자가 활발해졌다. 한 나라에서 사업가들의 공동체가 왼국인들과 경쟁하여 성공하면 외환 가치도 안정되었다. 다른 한편, 시장 경제 때문에 노동자의 건강이 착취당하고, 가족의 삶이 파괴되고, 주거 지역이 폐허가 되고, 삼림이 벌거숭이가 되고, 강이 오염되고, 직업 기술의 수준이 형편없어지고, 민속 전통이 무너지고, 주거 양식이나 예술 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걸쳐 이윤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많은 사회적 삶의 형식이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에 종사하는 계급은 거기에 내포된 위험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중산 계급은 이윤이 사회 전반에 혜택을 준다는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믿음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바로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바람직한 삶에 있어서 생산의 확장만큼이나 필수적인 다른 이익들에 관한 한 수호자의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서 다른 계급들이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중산 계급처럼 비싸고 복잡한 특수 용도의 기계를 쓰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대체로 토지 귀족과 농민에게는 민족의 군사력을 지키는 임무가 떨어졌는데, 군사력의 질은 여전히 국토와 사람들에 좌우되었다. 한편 노동자들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보편적인 인간의 이해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The middle classes were the bearers of the nascent market economy; their business interests ran, on the whole, parallel to the general interest in regard to production and employment; if business was flourishing, there was a chance of jobs for all and of rents for the owners; if markets were expanding, investments could be freely and readily made; if the trading community competed successfully with the foreigner, the currency was safe. On the other hand, the trading classes had no organ to sense the dangers involved in the exploitation of the physical strength of the worker, the destruction of family life, the devastation of neighborhoods, the denudation of forests, the pollution of rivers, the deterioration of craft standards, the disruption of folkways, and the general degradation of existence including housing and arts, as well as the innumerable forms of private and public life that do not affect profits. The middle classes fulfilled their function by developing an all but sacramental belief in the universal beneficence of profits, although this disqualified them as the keepers of other interests as vital to a good life as the furtherance of production. Here lay the chance of those classes which were not engaged in applying expensive, complicated, or specific machines to production. Roughly, to the landed aristocracy and the peasantry fell the task of safeguarding the martial qualities of the nation which continued to depend largely on men and soil, while the laboring people, to a smaller or greater extent, became representatives of the common human interests that had become homeless.

— 72~73쪽.

고전에서 현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부분 번역이 조금 이상한 듯)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보통선거가 보편화되고 노동 계급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한편 사업에종사하는 계급은 법 제정을 일방적으로 좌우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이 산업에서 쥐고 있는 주도권에 정치적 권력이 내포되어 있음을 각성하게 되었다. 권력과 영향력이 이처럼 기묘하게 특정 영역으로 나뉘어도 시장 체제가 큰 긴장이나 무리 없이 계속 작동하는 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By the turn of the nineteenth century—universal suffrage was now fairly general—the working class was an influential factor in the state; the trading classes, on the other hand, whose sway over the legislature was no longer unchallenged, became conscious of the political power involved in their leadership in industry. This peculiar localization of influence and power caused no trouble as long as the market system continued to function without great stress and strain

— 74쪽.

이렇게 마법처럼(?) 19세기가 일단락된다. 내가 현재 사회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한데, 이런 동질감은 폴라니의 글들이 전반적으로 주관적인이기 때문인 거 같다.

3-1.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익은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전체 사회의 이익을 대표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 원동력이 된다. 계급은, 그 이익이 구체적 상황에서 전체의 이익과 일치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변형시켜 다른 계급의 이익까지 충분하게 포괄할 수 있을 때에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 80쪽.

인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파시즘은 도덕적 물질적 퇴보라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로 나아감으로써 돌파구를 열려 한다.

— 81쪽.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3-2. 「경제학 철학 수고 소개」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고전파의 대표자들의 지혜를 빌려 이 새로운 과학이 인간 사회 자체의 법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정치경제학을 받아들였다는¶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삶의 철학이 사실은 그 경제 체제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상가였다. 이러한 연관을 볼 때,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는 단지 부르주아적 경제 조직에 대한 과학뿐만 아니라 현실의 경제 조직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의 삶의 철학은 단지 일개 과학—아무리 중요한 과학이라 하러다로—의 결과물이 아니라 분명히 그 과학이 다루고자 하는 사실들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의미는 시장 경제 이론과 더불어 현실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는 그 과학이 제공하는 교의와 원리 없이는 결코 현실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자면, 현실에 근거가 될 기초가 없었더라면 그 과학은 의미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82~83쪽.

여기서 부르주아 사회의 근본적인 역설이 드러난다. 인간의 노동이 사적 소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명쾌하게 드러날수록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의 여러 조건이 갖는 비인간성이 더욱 자기 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존재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자본이 노동이라지만 자본가는 노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반면, 노동자는 그럴 수 없다. 공산주의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려난 노력은 인류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밟아야 할 다음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적 존재(generic being)이기¶때문이다. 고립된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적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은 사회 안에서다. 인간은 이러한 사회적 활동 안에서만 비로소 충만하게 인간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와 필요는 비록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해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욕구, 감각, 필요의 대상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할 때에만 인간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관계된 모든 일들이 그렇듯, 이또한 물질적 현존의 생산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여러 조건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러한 조건들이 인간성과 모순 관계에 빠진 것이다.

— 84~85쪽.
sure marxist.

3-3.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강의 교안」

3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한 내용을 (아마도 강의를 위해) 폴라니가 정리한 것들이다. 몇몇 부분의 주장은 나에게도 익숙하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마르크스주의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처럼 입에 올려진 적이 많고, 또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됐던 사상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의심이 된다. 폴라니의 글 역시 너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내가 마르크스의 대표작이라는 『자본론』 1권의 역자 서문도 다 못 읽었기 때문에 남들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ㄷ. 계급의 역할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새로운 소유 체제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 수단들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기득권 때문에 과거에 묶여 있는 소수는 배제된다). 이것이 피지배 계급이 승리하는 이유이다. 피지배 계급은 현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없는 모든 계급의 지도자가 된다. 계급 이익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이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계급 이익은 오로지 전체의 지도자가 될¶능력이 있을 때에만 성공적인 것이 된다(이것이 희생을 수반할 수도 있다).

— 87~88쪽.

(4) 경제학

마르크스적인 ‘사회학’이란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학은 단지 특정한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 88쪽.

(5) 변증법적 유물론 : 마르크스라기보다는 엥겔스. 체계가 없고〔판독 불능〕 자연에 대한 언급은 불명료하다. 물리학 및 화학 그리고 천문학에의 〔판독 불능〕는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인간 정신과 사회에 대한 언급은 명백한 진리이며 매우 중요하다.

ㄱ. 부정을 통한 인간 정신의 운동(인간은 스스로 본성을¶부인할 수 있다).

ㄴ. 변화의 급작성. 전환점으로서의 악.

ㄷ. 인간 생활이 물질적 사실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이는 유물론적인 관점은 아니다. 재화의 분배는 생활의 비물질적인 측면이다.

ㄹ. 사회 계급들의 행동에서 이론과 실천의 동일성. 질량 이론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역사의 중심 요소인 의식의 임무다. 계급 의식은 임무와 사명에 대한 의식이다. 전체에 대한 준거가 계급 의식에 녹아 있다.

— 88~89쪽.

엥겔스는 싫어하는 듯. 이런 관점은 아래에도 이어진다.

3-4.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 관점: 비판」

④ … (마르크스주의 사상 전체를 표현할 때 ‘유물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객관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이들은 그의 공리들을 충분히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면서 철학적 유물론이 마라크스주의의 기초라고 오해한다)

— 89쪽.

⑬ 마르크스의 해석은 ‘종교적’인가 아니면 철학적 유물론(경제적 기계론……)의 성격을 띠는가?

— 93쪽.

ㄴ. 노동이 상품이 되었다. 그 대가로, 고용주는 사람들이 새 시대의 신기한 새 물건들을 사고 싶어 일을 하도록 꾀어 내는 데 충분할 만큼만 주었다.


ㄷ. 자본주의는 사회 안에서 개인들의 모든 책임 있는 관계를 무너뜨리고 생계와 복지에 대한 배려를 던져버렸다. 사회제도들은 큰 압력하에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한 세대 만에 자본주의적 형식들이 인간 사회에서 승인된 형식이 되어버렸다.

— 90쪽.

ㄹ. 자본가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보다 훨씬 더 성스러운 영역에서 기능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교회는 입막음의 대가로 돈을 받고 이 조직적인 강도질을 영원히 성스럽게 했다. ‘국가’는 냉정한 ‘지도자’들의 ‘중립적’ 기구라는 미신이 생겨났다. 비단 상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척도로서의 시장. 사회과학에 대한 멸시. 자연과학 같은 ‘안전한’ 영역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


경제학 책들을 보면 마치 현재의 일을 미리 예언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⑦ 사람들의 월급 봉투를 갉아먹으며 기생하는 자본이 일단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생산에 주인-노예 관계가 확립됨. 개척할 변방의 팽창이 끝나버린 나라에서 ”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아!”라는 구호는 이제 쟁기를 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총을 들어 ‘너의 생득권’, 즉 강제 노동을 지켜내라는 뜻이 되었다. 기계 일에 접근할 기회가 없는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훈련된 인간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 91쪽.

⑧ … 사실 다음과 같은 인간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제 몫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냄새 감지기와 촉각 표시 장치는 물론, 시각과 청각, 미각을 갖춘 통제 장치, 두 팔과 두 버팀대가 달린 틀거리로서, 잘 움직이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먹여야 할 입도 씻어야 할 피부도 살아야 할 삶도 없는 그런 인간 말이다. 아무래도 하느님은 신성 질서 회사(Divine Order Comany)의 중역회의에서 계속 보내온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중역회의는 골치 아픈 영혼이라는 것을 몸에 지닌 아이들이 계속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며 짜증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조정될’ 때까지 자본가들은 차선책을 취해햐 했다. 즉 노동자들의 인간적 요소가 자기 실현이나 공동체 같은 마음속의 희망을 지향하지 않고 딴 데로 향하도록 그들이 상대해야 할 용과 괴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허물어진 집 위로 밤새 떠돌아다니는 유령들을 그려내야 했다. 또 사람들을 먼 곳으로 보내 그 용들과 싸우도록 훈련시켜야 했고 그중 일부는 낯선 땅 그 도깨비들과의 싸움을 지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제 자신들 휘하의 사이비 인간들에게서 인간적 삶을 완전히 분쇄해버렸으니 해외에 있는 경쟁자들을 쓸어뜨릴 차례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진정한 국제주의의 도래라고 갈체를 보냈던 독점제들은 세계를 독점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실제로 국제적인 규모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을 그 합당한 제자리로, 즉 허구의 세계로 보내면서도 ‘건강하게 단련된’ 몸은 우리의 위대한 서양 문명과 그 영광스러운 미래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원리다.

— 91~92쪽.

⑨ … 생활 수단¶은 희소할 때에만 이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민중들에게는 생활 수단을 얻을 기회가 가로막혀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위험할 정도의 풍족함을 가져다주었지만 풍요가 판을 치면 이윤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 92~93쪽.

⑩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꾸리는 ‘삶’의 성격. ‘콩나물 교실에서 받는 교육’ 혹은 ‘뒷골목 문화’ 그 이상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은 집을 가져야 한다고 우긴다면 정신이 나갔거나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물로 간주될 것이다. 자신의 생산물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장사를 망치고 결국은 자신의 장사도 망치는 짓이 된다.

⑪ 필요 욕구는 이 사회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천사들을 집합시켜 자본주의를 관리하게 한다 해도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충분한 수의 경찰과 구사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정부가 좀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제안이 진지하게 나오기 시작하면 산업계의 우두머리들은 곧바로 일어선다.

— 93쪽.

여기까지 읽어보니 완전 마르크스주의 책인데;;; 왜 정부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까? 내가 공안 책임자였다면 책세상 출판사는 문 닫았을 듯.

⑭ … 상층 계급의 현실주의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에 반영된다. ‘집단적 안보’는 국내 정치에서 취하는 정책이며 ‘제국의 단결’은 험악한 국제 정치에서 택하는 정책이다.

— 94쪽.

⑮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

— 94~95쪽.

⑯ 이에 대한 대안은 민주주의, 그것도 영구적인 민주주의로 조직된 사회주의다.

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우려는 완벽한 사회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현재의 사회가 파괴되는 것은 공동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95쪽.

⑲ 새로 건설해야 할 ‘체제’에 대한 고찰. 이 체제는 인간 공동체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체제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인간 공동체에 가까운 사회를¶만드는 것보다 현재 눈앞에 닥친 문제점들을 고쳐나갈 사회를 만드는 일이 더 쉽다. 아무리 완벽한 조직이라 해도 조직이라는 형식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결코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라는 형식들이 전제 조건으로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형식들을 창출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이 땅에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으로 이 형식을 채워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거리지만, 과연 누군가가 인간 공동체에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이 형식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있는지를 보면 된다.

— 95~96쪽.

이런 형식들이 저절로 인간 공동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러한 최소 조건의 형식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조차 거부한다면 이는 인간을 반(反)종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공동체를 보장해줄(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들이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사악한 관점의 연장일 뿐이며, 사회가 바뀌려면 인간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오늘날 취하고 있는 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정통 교리의 가면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반(反)종교의 가장 사악한 형태의 하나이다. 이는 잠재적 인격체, 즉 공동체적 인격체인 인간을 폄하할 뿐만 아니라, 대중이 ‘변화한다면’ 사회 구조를 깨지 않고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완벽하게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셈이다. …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악마와 싸울 때 기도서만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 96~97쪽.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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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content.cdlib.org/view?docId=tf238n986k&chunk.id=bampfa_432&brand=oac>
* <http://content.cdlib.org/ark:/13030/tf509nb0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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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ditus.co.jp/BG_III/j_tanizaki.html>

2009년 8월 31일 일요일

낮에 후배에게 이 작품의 작가를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라고 설명했다. 쪽팔리다.

中央公論」 1961년 11월호부터 1962년 5월호까지 연재.

초판의 표지는 아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당시 책들은 케이스도 주요 수집 대상인 듯.
* さすらいの天才不良文学中年: 売れる本の条件 見出し 好きな本 <http://plaza.rakuten.co.jp/tsurugikazuwo/7001>

이 작품을 포함해서 타니가치 준이치로(谷崎潤一郎)의 작품이 별로 번역된 게 없다. 일본어로 읽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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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9일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교육개혁을 담당한 연합군 총사령부에서는 이렇게 호언했다.
かつて日本の教育改革を担当したGHQの役人は、こう豪語したそうだ。

「일본의 교육을 바꿔, 앞으로는 영원히 이 나라에서 천재가 나오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日本の教育を変えて、今後は天才が出ないようにします」


그들이 추진한 교육 프로그램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戦後、彼らが押しつけてきた教育プログラムの要点は、次のようなものである。

이것들은 실제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실시된 교육방침 그대로였다.
これらは、イギリスの植民地だったインドで実践された教育方針そのままだ。

한마디로, 위에서의 명령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않고 부여받은 과제만을 근면하게 해내는 노예를 만드는 교육이었다.
要するに、上からの命令に疑問を持たず、与えれた課題だけを勤勉にこなす“しもべ”を作る教育である。


-「폭로된 어둠의 지배자의 정체」로부터
『暴かれた[闇の支配者]の正体』より
<http://newkoman.mireene.com/tt/2745>

2009년 8월 31일 일요일


저자 블로그를 조금 읽었는데, 세상엔 이상한 사람도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ch에 원래 돌아다니던 요약은 이것:

戦後教育でそういう風に洗脳されたからね

かつて日本の教育改革を担当したGHQの役人は、こう豪語したそうだ。
「日本の教育を変えて、今後は天才が出ないようにします」

戦後、彼らが押しつけてきた教育プログラムの要点は、次のようなものである。

第一に、白人に対する徹底的な劣等感を植え付けること。
第二に、アメリカは素晴らしい国だと信じ込ませること。
第三に、自分独自の意見を作らせないこと。
第四に、討論や議論を学ばないこと。
第五に、受身のパーソナリティを作ること。
第六に、一生懸命勤勉に仕事させること。
第七に、目立つ人の足を引っ張ること。

これらは、イギリスの植民地だったインドで実践された教育方針そのままだ。
要するに、上からの命令に疑問を持たず、与えれた課題だけを勤勉にこなす“しもべ”を作る教育である。

『暴かれた[闇の支配者]の正体』 P.128〜129 ベンジャミン・フルフォード 著


* Benjamin Fulford 홈페이지 <http://benjaminfulfor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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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연 지음, 리상호 옮김, 조운찬 교열, 강운구 사진,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까치글방, 2009, 15쇄, 처음 출판된 해: 1999), 2,0000원. 원저: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삼국유사』(과학원출판사, 평양, 1960)
오랜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샀더니 에누리가 전혀 없다;;; 99년에 나온 책이니 헌책이나 재고도서 찾으면 훨씬 싸게 샀을텐데. (10년간 개정판 안 나왔다)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삼국유사 번역본이 없다는 것도 미스테리. (삼국사기 역시 상황 비슷) 21세기에 60년대 북한 번역본을 선택하게 만든다.

아 그리고 마치 강운구가 이 책을 위해 사진을 찍은 듯한 인상을 풍기는데, 예전에 찍었던 것을 적당히 모아놓은 것. (유적들의 상태를 볼 때 『경주남산』(1987) 이전 것도 있는 듯) 이런 거짓부렁과는 무관하게 사진과 함께 삼국유사를 보는 구성은 베리 굿. 좋은 사진과 번역의 씨너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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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소반도(房総半島): 일본 동남부의 반도(어짜피 일본이 섬인데, 그 중에 불쑥 튀어나온 곳). 동경만을 사이에 두고 동경과 인접해 있으며 치바현의 대부분이 보소반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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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gle Books: The Great Eskimo Vocabulary Hoax and Other Irreverent Essays on the Study of Language <http://www.press.uchicago.edu/presssite/metadata.epl?mode=preview&isbn=978022668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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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 박종현 옮김, 『플라톤의 네 대화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서광사, 2003)
  • 월간 『수퍼레시피』(㈜레시피팩토리),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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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ppeal to the Young
성정심
청년에게 호소함新命1993
La Conquête du Pain
백낙철빵의 쟁취新命1993
백낙철
빵의 쟁취
우리
1988
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김유곤크로포트킨 자서전우물이있는집2003
박교인어느 혁명가의 회상 — 크로포트킨 자서전한겨레1985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
구자옥
김휘천
相互扶助 進化論한국학술정보2008
김영범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르네상스2005
성인기相互扶助論大成出版社1948
Modern Science and Anarchism

近代科學과 아나키즘新命1993

現代科學과 아나키즘創文閣1973
Anarchist Morality

無政府主義 槪論 — 無政府主義 道德先驅會1947

『천황과 동경대』에 크로포트킨이 자주 언급되어서 크로포트킨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글을 공개한 곳이 많다.
  • Anarchy Archives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KropotkinCW.html>
p.s 先驅會에서 아나키즘 책을 번역했을 줄이야! 해방 직후의 자유로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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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와있었군요.

별로 좋은 느낌은 안 듭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여태까지 잡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있다가 이제와서 외국 잡지 수입이라니. 국내 잡지는 아마 시장이 더 줄겠죠.

한국은 더더욱 수렁으로 빠질 거 같은 예감. 좌파 이론도 수입하는 한국의 외제병이란.

p.s Monthly Review도 번역판이 나온 게 있었군요. 근데 1번 나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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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화요일

박사학위 논문(「케르쉔슈타이너와 듀이의 노작교육론 비교연구」,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1995)의 '후속작'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방대한 자료들에서 주제와 관련된 내용만 간략하게 요약만 해놓았을 뿐 뭘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게 그저 '정리'만 해놓았다. 그래놓고 찾아보기는 빠져있어서 참조하기도 어렵다. ('후속작'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논문에 빠진 슈타이너가 포함되었기 때문인 거 같다.)

정리한 내용들을 내가 다 기억하기도 어렵고, 또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주제와 교육학이라는 분야에 조금 익숙해졌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겠다.

'노작교육'은 독일어 Arbeitserziehung의 번역어로, 일본어 번역을 따른 거 같다. (몇십년전만 해도 '작품'이라는 뜻으로 '노작'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 말은 作業教育, 勞動教育, activity school, vocational school 등 여러가지 말이 사용된다.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노작교육이 직능교육 등과 혼동되고, 더 큰 교육의 의미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인 거 같다.

육체를 사용해 머리 속의 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사회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주장은, 매우 이상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며, 또 보수적이다. 플라톤과 유토피아가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소크라테스(Isocates, 436–338 B.C.)의 실용적인 주장 역시 사회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플라톤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작교육이 반발한 당시의 보수적인 교육도 그렇고, 현재의 한국도 그렇고 국가는 교과를 암기하는 주지주의적인 교육을 더 선호한다. 아마 이 방법이 수동적인 국민을 만들어 부려먹기 편하게 만든다고 경험적으로 느끼기 때문일 수도있겠고, 노작교육이나 예술교육 같은 것은 평가가 어렵고, 교사를 길러내기도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 예산 문제도 이러한 교육에 큰 걸림돌이 된다.

한국 교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슈타이너의 경우는 이상주의를 넘어 신비주의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을 주로 뉴에이지 관련 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있는 것도 아쉽다. (물병자리, 밝은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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