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 125.0
2012/02/07 최창조
2011/11/24 한옥의 멋
2011/05/08 PBS Kimchi Chronicles
2011/01/26 천국과 저승
2011/01/11 ‘함바’
2011/01/11 ‘법치’
2010/12/07 오로치 신화
2010/11/10 바뀐 생각
2010/01/07 한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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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6 우리의 친구
2009/09/21 단군신화
2009/08/30 백종
한글의 탄생(2011)


1.

난 이 책이 무서운데, 한글이 더이상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과 한국어에 대해서는 북한과, 연변주민과, 재일교포와, 고려인들과, 몇 세대 전에 이민간 미국인들이 모두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는 세 명의 옮긴이가 붙어있지만, 모두 대한민국에서 국문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지은이가 직접 한글로 다시 썼을 법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서장은 원본에 없는 것을 아예 새로 쓴 것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언어를 더 넓은 시각에서 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어를 가지고 외국인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르고, 예비고사 맞춤법 문제 같은 쪼잔함으로는 더이상 발전이 어려울 지도 모른다.

2.

아마도 한국어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지은이의 의도로 추측되는데, 전반적인 예시가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게 바뀌어 있다. 이런 것들은 거리감을 줄여줘서 이 책의 낯선 느낌을 반감시키다.

1장 2절에 하카다와 요코하마는 서울과 부산으로, 1장 4절의 제목 '조선어=한국어는 어떤 언어인가'(朝鮮語=韓国語はいかなる言語か)는 '한국어는 어떠한 언어인가'로 번역해 의미가 매우 희석되어 있다.

반면 의미 전달에는 세밀한 신경을 쓰지 않은 거 같은데, 1장 3절에 '한편 방언도 군대를 가지면, 종종 언어라 불리운다.'라는 문장은 한국어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어로는 문제가 없는데, 왜냐면 '군대'를 한자로 쓰기 때문이다.(一方で、方言も軍隊を持つと、しばしばそれは言語と呼ばれる。) 군대의 의미를 알았다고 해도 한국어 문장은 아닌 일본어 직역투인 거 같다.

1장 4절에서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似ていながらどこかしら異なる、そういった感触. 원문에는 강조 표시가 없는데 번역판에는 있다)으로 지적되듯이 일본어 직역의 문제가 있다. 일본어로 한국어를 설명한 이 책이 어떤 면에선 일본어 직역의 예시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또 한자어는 일본어와 동일한 것이 많기 때문에 어떤 것을 일본어 독음으로 옮겨야 하고, 또 어떤 것은 한국어 독음으로 옮겨야 할 지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 일본어 독음으로 하면 더 좋았을 것을 한국어 독음으로 옮긴 경우가 많은 거 같다.

3.

지은이가 역사에 대해 약간 무지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우선은 한국 뿐만 아니라 중공과 대만의 근대 한자 조어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연히 일본어와 같을 수 밖에 없다. 한자어는 근대를 기준으로 분리해서 이해해야 할 거 같다.

입말인 한국어 역시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여러차례 한자의 가차를 통해 표현되었다. 훈민정음에 이르러 처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일본어도 마찬가지로, 히라가나 이전에도 가차하여 자신의 말을 표현한 것이다.

지은이의 핵심적인 논제이기도 한데, 한자는 형음의로 분리되어 있는 말이 아니라, 원래 하나의 말이었던 것이 후에 문어로 변화한 것이다.

4.

한국어 '글쓰기'는 불어 'écriture'와는 의미가 좀 다르다. 오히려 에크리튀르를 원래 의미를 살려 외래어 자체로 사용하는 일본어가 어떤 면에선 더 정확할 수도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데리다를 접목시키기 위해 좀 억지로 끌어들인 거 같은 느낌이다.

'평면'과 '레이어'라는 말의 혼재도 굉장히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후기를 보면 이런 용어들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했다는데, 결과물은 공역자들이 각자 알아서 번역한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5.

총평을 하자면, 생각보다 내용이 알차지 못하고,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대해 세밀하게 고찰하지 못하였다. 게슈탈트, 형태음운학 등 외국의 이론을 들이대지만 그냥 자의적인 소개일 뿐이다.

저자 경력을 보면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연구원도 있는데, 한국 학계의 주장도 별로 반영되지 않은 거 같다.

소재 자체들은 흥미있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도 훈민정음 소개 책자로 권하기 좀 아쉬운 면이 있다.

그럼 훈민정음을 잘 소개한 다른 책이 있는가? 아쉽지만 없는 거 같다. 그래서 이 책이 상을 받은 거겠지.

어쩌면 한국 사람에게 너무나 중차대한 주제이자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주제라서 섣불리 종합한 사람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나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각 부분의 전문서를 찾아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6.

한문에 토를 다는 방법을 더 찾아볼 것.

아 그리고 책 두께와 크기가 일본책의 2배다; 한글이 히라가나보다 정보 전달 효율이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생각하는 (옛날) 서울대
(1) 문과: 일제 때 전공한 사람이 간판만 바꿔 강의함. 한국의 학문은 아직 성숙되지 않았으므로 외국 지식을 말만 바꿔 가르치거나 완성되지 않은 협소한 학문을 가르침. 독자적인 학문 역시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학문의 영향을 받음. 학생들은 일본과 구미의 지식을 두루 귀동냥한 인텔리가 되거나, 좁은 틀에 갖힘.

(2) 이과: 미국 대학원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대학원에서 배운 전문 지식을 학부 학생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침. 학생들은 다시 미국 대학원 유학을 떠나고 한국 학생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음.

(3) 그러나 모두 일본과 미국의 지식을 주입식으로 가르친 것으로 창의적인 학문이나 논리적인 자기 반성의 기회, 주체적인 학문 구축의 기회는 공식적인 수업 시간에 없음. 창의적인 과제물도 의미가 없음. 이것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제국대학(테이코쿠다이가쿠)의 전통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음.

(4) 90년대 프랑스 철학의 수입, 분석철학의 대중화, 쏘련의 해체로 인문학은 객관성을 찾아가고 있으나, 미국의 득세와 정부의 이공계 경시로 실용학문과 순수과학, 응용과학, 공학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
최창조
KBS2 TV 특강(2012/02/06~08)에서 최창조의 강의를 듣는다. 우리 풍수학에 이런저런 개념이 있는데, 현대 심리학이나 건축학으로 해석 가능하지 않은가. 20년전 주장과 바뀐 것이 없다.

현대 심리학이나 건축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면, 현대 심리학이나 건축학을 하면 되지 왜 굳이 풍수학을 꺼내서 해석하고 연결하는 복잡하고 확실하지 않은 작업을 해야만 하는가?

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동양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서양의학을 버릴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아련한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의 문제다. 강의 중 풍수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는데, 그건 그만큼 교육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전하고 발전시킬 것인가?
『일본인과 천황』(2002)


『맛의 달인』(한국어판 서문에 『맛의 달인』을 통해서도 역사적인 문제를 언급하려고 노력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명성황후 시해를 다루는 등)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만화 작가 카리야 테츠(표준어 가리야 데쓰)의 일본 천황제 정면 비판. 만화와 에세이가 섞여 있다.

「교육칙어」와 그 근거가 되는 기기의 천황 관련 내용 비판을 시작으로, 마지막에는 「쇼와 천황 고백록」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지적한다.

곁가지로 도토대학(물론 가상의 대학이다. 도쿄+쿄토인 듯. 그런데 카리야 테츠는 도쿄대학을 다녔다) 축구부 주장 스미카와의 기미가요 제창 반대로 시작해 일본 사회의 조직 문제를 꺼내고 이 모든 것이 상징천황제를 유지하는 데서 비롯되었으니 헌법에서 조항을 삭제하는 것으로 새 시대를 열자는 주장으로 끝을 맺는다.

인기 만화 작가가 천황제를 정면 비판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저자가 호주에 살아서 테러를 안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쉬운 점은 천황제와 현실 세계 모순과의 연결이 섬세하지 않다는 거. 즉 전전 천황제가 어떻게 현재 일본의 조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지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또 현재의 일본 사회가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할 수 밖에 없다.(41년생인 저자에겐 사회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오히려 천황제가 없는 한국에서 심하다. 남한 얘기는 언급되지 않고,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북한은 언급된다.

日本人と皇室との関係についても
一つ上の先輩に対しても神様の様に扱う日本人の上下関係について触れているが
今日の日本ではそこまでの上下関係は存在しないし、
『美味しんぼ』で雁屋 哲氏が無条件賛美している韓国の方がはるかに上下関係がキッチリしている。しかしそれには触れていない。

한국 사람이라면 이 만화의 다음 대사들을 보고, 군대와 학교에서 자랑스럽게 행하던 전통이 어디서 온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는게 좋을 거다.

응, 체험담을 읽어보니까 상식을 벗어나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난폭했어…
주먹으로 치는 건 기본이고, 혁대나, 가죽 슬리퍼, 심지어는 배트까지 사용했다고 해.

그때 입은 상처로 지금까지 귀가 들리지 않는다던가 하는 후유증이 남아 있는 사람도 꽤 많다고 하더라…

하루라도 먼저 들어간 사람이 고참이랍시고 더 늦게 들어온 사람들을 괴롭혔다고도 하고.

상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조차 구타 당했다고 하더라.
윗사람에게 노예로서 복종하라고 강요했던 거라고…!
— 104~105쪽

내 생각엔 조금 더 심도있게 일본 뿐 아니라 남북한까지 다룰 수 있는 연구가 앞으로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일본에서 천황 연구는 쉽지 않겠지. 결국 일본의 자유를 천황제가 막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맞는 것일 거다.
『한글 글꼴의 역사』(2008)

 - 저자의 국문학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아주 참신한 소재 같다. 이런 식의 통합(?)을 모색하는 것이 앞으로 유망할 듯.

근데 이 글에서 기존 국문학이 확장되거나 연장되었다는 느낌은 별로 안 듬.

- 1장 개관이 너무 허술하다. ‘한글은 파스파 문자를 기초로 했다.’ 이런 식. 차라리 선행 연구들만 살짝 요약하고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면 좋았을 거 같다.

- 컴퓨터와 글꼴 기술 관련 부족함이 눈에 띈다. ‘True Type’ 같은 공식 명칭을 모르고, 자료를 페이지마다 보기 좋게 포토샵으로 임의로 가공했다.

- ‘고딕’, ‘명조’, ‘세리프’, ‘바디’ 같은 글꼴 전문 용어를 분별없이 쓴다. 출판업을 하고 있는 저자가 현업의 감각을 그대로 옮긴 듯.

현대 글꼴의 레퍼런스도 ‘신명조체’, ‘명조체’란 말을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정확히 어느 회사의 어떤 글꼴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글꼴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할 듯. 컴퓨터가 아닌 활자에서 찾는 게 맞을 거 같기도 하고.

- 저자를 따라 글자를 한글자씩 보니 해례본의 글자가 엄청난 명필로 보인다. 당대의 명필들이 균형감 있게 쓴 글들 같다.

단순히 크게 꽉꽉 채워서 쓴 게 아니라, 요소들의 크기와 모양을 고려해 조절한 것이다.

- 한글 활자체의 변형은 사실 한문 붓글씨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 붓글씨의 편의를 증대하는 쪽으로 바뀌고, 미학적 관점 역시 붓글씨에서 단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붓글씨라는 요소를 전혀 무시한 채 각 요소의 위치나 각도 등만 분석하였다.(물론 그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붓으로는 네모나 원을 그릴 수 없으므로 평붓이나 도장, 대나무 등을 썼을 거라고 저자는 주장하는데, 조선 시대 서예가들의 테크닉을 생각해보면 보통 붓으로도 충분히 하고 남았을 거라고 본다.

- 조선의 경우 붓글씨로 쓴 것을 목판에 그대로 새기는 경우가 많아, 서양의 활자와 동일하게 생각할 수 없다. 붓글씨와 판화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미학적인 관점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모음의 점이 초성 안으로 들어가 채우는 건(예를 들자면 ‘고’) 분명히 한자의 미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ㅠ’의 아래 점들을 좌우로 벌린 것도 한자 필법의 특성이다.

즉 활자 자체만의 발전이 아니라 붓글씨와 상호 영향을 주며 발전한 것이라 모두를 개괄해야 한다.

- 글씨보다 나무를 판 기술이 좀 떨어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서각을 할 때 일부러 웨이브를 줘서 붓글씨 모양을 살리는 걸 생각해보면 그런 전통 하에 있는 거 같기도 하다.

- 한글 활자체가 생각보다 빨리 변했다. 모음의 점이 사라지는 데는 1년 밖에 안 걸렸다. 반포한 지 채 10년이 안 된 세조 원년(1455)의 을해자(로 찍었으리라 추정되는 책)만 봐도 현대의 쓰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한옥의 멋
집은 기후에 따라 변한다. 여름이 더운 일본 중부의 전통 가옥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앞뒤로 큰 문을 내 바람이 잘 통하게 되어있고 바닥은 띄우고 목재를 단열소재로 사용한다. 겨울이 추운 중국 북부의 집은 벽돌로 둘러 쌓고 창은 작게 낸다.

한옥은 어떤 기후에 맞춰 만든 것일까? 내 경험으로 한옥에서 쾌적한 시간을 보낼 때는 여름 저녁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 정도인 거 같다. 더위를 피하는 거 치고는 문이 작고, 추위를 피하는 거 치고는 문이 크다. 대체 어떤 기후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온돌 역시 『열하일기』 이후로 아무런 발전이 없다. 아랫목은 장판이 탈 정도로 뜨겁고, 웃목은 차가운 돌 그대로인 것이 한옥의 멋일까?

한옥의 이런 디자인 컨셉은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진 거 같다. 일반적인 주택이나 아파트(30평대?)는 모두 베란다를 한쪽으로만 낸다. 그래서 여름엔 바람이 많이 통하지 않는다. 반대로 겨울엔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창 때문에 난방 효율이 떨어진다.

이렇게 현대에 까지 이어지는 한옥의 디자인 컨셉을 굳이 말하자면 편안함 아닐까. 뒤는 막혀있고 앞은 뚫려 있는 원초적인 편안함. 그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권력적 기능성. 우리는 냉난방 효율보다 이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좌파민족주의’
교과서나 언론에서는 좌우를 무슨 이념대립인 것처럼 다루지만 한국에서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보수민족주의자들이고,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매판인 것에 평소 괴리감을 느끼며 자주 고민하는데, 박노자(Влади́мир Ти́хонов)의 블로그에 러시아의 동향과 함께 이에 대한 분석이 올라와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37986

박노자는 러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치 단체인 민족볼셰비키당(Национа́л-большеви́стская па́ртия, НБП)도 사회주의적이고 좌파적인 지향과 함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분석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일언이폐지하자면, 세계 체제 주변부/준주변주로서의 어떤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든 러시아든 투쟁에 나서는 "열혈 분자"들에게는 각각 그 지배층의 세계 자본/미국/일본에의 종속은 수치이자 민중 본위 사회 건설의 주된 장애물로 인식되어집니다. 물론 이 인식 자체가 꼭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한 결함은 세계 체제 중심과 주변부를 망라하는 계급적 연대에 대한 관점의 부족입니다. 이러한 연대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 위계서열적인 세계체제 전체를 무너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계급 본위의, 계급 연대적인 관점이 부족하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비판 의식이 결여돼 있기에, 이 좌파민족주의자들이 본인의 "민족"이 억압의 주체가 되는 경우들에 대해서는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의 체첸 독립운동의 말살, 한국 자본에 의한 외국인 노동자의 살인적 착취 등등) 전혀 반성이 없기도 합니다…

쉬운말로 정리하면:
  1. 시야가 좁은 ‘좌파민족주의자’들은 지고한 계급의식을 모릅니다.
  2. 공부를 안 하는 ‘좌파민족주의자’들은 국가나 민족 개념을 비판할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평소에 박노자가 민노당을 비판하며 꾸준히 주장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좀 부정적인데, 우선 ‘계급의식’이라는 지고지순한 가치를 인간이 감각적으로 느끼고 사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정적이다. 인류애면 인류애고, 억압받는 민중들의 연대면 연대지 ‘계급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꼭 습득해야 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더욱이 ‘계급혁명’을 인류의 사명으로 받아들일 논리적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이건 어디까지나 식자들의 지향아닐까.

또 이런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독재국가들끼리 반제국주의를 외치며 연대하는 경우도 있다. 즉 민족주의적 연대 역시 가능한 것이다.(물론 독재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두번째로는 좌파민족주의가 출몰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즉 국가적 범위로 착취 당하고 탄압받는 사람들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국가 자체가 극복되어야할 대상이고 민족은 모두 함께 행복해져야하는 공동체이자 조직의 근거일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적은 국가를 착취하는 다른 국가이고, 민족의 이익을 유출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내 생각엔 이들이 박노자의 말처럼 아직 개명하지 못한 좌파가 아니라 자생적인 보수민족주의자들인 거 같다. 그리고 이들이 ‘계급의식’을 갖춘 좌파로 성장할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본다. 이들의 좌파적인 정책이나 주장은 오히려 원시적 공산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구라파의 좌파들이 민족주의를 경원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 노동운동 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전통이다. 물론 그런 운동과 사상이 발원한 중심지이긴 하다.
『반크 역사 바로 찾기 1: 백두산 괴물을 찾아라!』(2010)

이렇게 다른 나라를 무조건적으로 음해하는 책이야말로 정부에서 금지 서적으로 지정해야할텐데, 왜 아무도 비판을 하지 않는 걸까. 내가 중공 정부라면 한국 정부에 항의했을 거다. 신기하게도 일본에서 이런 식으로 책이 나오면 우리 언론과 인터넷에서 우익 어쩌고 하며 계속 비판한다.

오히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양성우, 1943~, 전남대 국문학과 63학번, 13대 국회의원)에서 2010년 7차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청소년권장도서)로 뽑았다. 검열을 제목만 보고 하거나 우리가 하는 우익짓은 공식적으로 어린이에게 권장되거나 둘 중 하나일 듯.


p.s 그리고 아쉽지만 백두산은 우리(남한 정부)의 손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선동이 더욱 헛되게 느껴진다. 심지어 남한이 흡수 통일을 한다고 해도 중공에 영토 반환을 주장하기 어려울 거다.

게다가 백두산정계비를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하게(근데 북한 영토 늘려주는게 남한에게 유리한 걸까?) 해석을 해도 백두산의 일부가 청나라의 영토였다는 것만 확인될 뿐이다. 조상 탓밖에 할 게 없다.
PBS Kimchi Chronicles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2009)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표지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70~80년대 일본에 관한 책들과 닮았다. ‘일본의 경제 성장은 놀랍다. 이들은 서구와 어깨를 겨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겉으로는 근대화되어 서구와 똑같지만 동양적인 속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따위의 주장. 하긴 동양 문화의 원류는 중국이니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동양인의 속마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언제나 유연하게 외국에 대한 자기 의견을 펼칠 수 있는 서구가 무서운 걸 지도.

골드만삭스의 2025년, 2050년 GDP 예측을 보면 의외로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가 높은 순에 올라있다.(14쪽) 이 나라들에 잘 빌붙어야 하겠다.

CNN 중계로 국제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미국의 종말이 떠올랐었다. 그런데 그게 비단 나 혼자 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다. 집단 상징의 무서움.

읽다가 짜증나서 접었다. 우선 「Marxism Today」 편집장이었다는 경력과 딴판으로 경제 분석에 어떤 기준이 없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는 건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그동안 다른 나라들은 다 망하는 건지, 세계의 정치 판도는 어떻게 될 것인 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두번째로는 동양 역사에 대한 몰이해. 중국은 2000년 동안 국민국가를 유지해왔다? 과연 그런가? 역사에 대한 천착이 전혀 없다. 동양에 대한 무지와 환상. 동양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도 아무런 시사점을 찾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메이지 유신이 혁명이 아니고 복고인 것이 현재 일본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까? 나로서는 큰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 안세민이 옮긴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패권국가 중국은 천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서울: 부키, 2010)을 읽으며 적은 글입니다.
황교익, 『미각의 제국』(2010)
블로그 카테고리를 ‘전통’으로 설정한 것은, 이 책이 전반적으로 ‘맛집’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저자가 한국 ‘전통’의 맛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무공해 전통의 맛도 소개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못한 맛도 끄집어낸다. 멸치젓은 동남아보다 못하고, 소금은 유럽 유명 제품보다 못 하다.

고추장, 참기름 등으로 맛이 정리되는 한국의 식습관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개인적으로 언제나 고민하던 것이라서 많이 공감된다.

전문가가 아닌 ‘맛집 전문 기자’의 한계도 많이 보여주지만, 다른 책이나 칼럼에서 보지 못 한 진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재료의 맛과 질감에 대한 묘사도 여타 요리나 맛집 책보다 진일보한 면이 있다.

분량이 작아서 더 작게 책을 만들어면 좋았을테지만, 편집으로 한몫하려는 세상이라 이 정도는 눈감아 줄 만 한 거 같다.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


* 황교익이 쓴 『미각의 제국』(따비, 2010)을 읽고 쓴 글입니다.
장정란 — 「이유태와 부포석의 미인도 비교 연구: 1933~1940년대를 중심으로」(2003)

이런 연구가 으레 그렇듯 결론이야 흐지부지하지만 ‘미인도’를 통해 한중일 3국의 근대 회화를 조명한다는 시도가 매우 흥미롭다. 선택한 두 작가 이유태와 푸바오스(傅抱石, 1904~1965. 외래어 표기법대로 하면 ‘바오시’일 거 같은데 다들 ‘바오스’라고 써서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어야 겠음)은 공통점이 있는데, 우선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에 유학해서 서양화를 배웠고, 일본 유학 이전에 각각 조선과 중국의 전통 회화기법에 숙달된 상태였다는 점. 이 외에도 이유태의 스승인 김은호와 가와사키 쇼코(川崎小虎(かわさきしょうこ), 1886~1977), 푸바오스의 스승인 야마구치 호슌(山口蓬春(やまぐちほうしゅん), 1893~1971)이 언급된다.

이유태의 미인화를 보면 조선의 전통적인 인물화법과 신일본화의 화사한 채색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미인도 작품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 근대화단의 김은호 미인화의 맥을 이으면서 한 단계 진보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고 본다. (233쪽)

시집가는 날을 그리고 있는 만큼 색감이 화사한데 여인들의 뽀얀 얼굴색이나 상단부의 투명하고 몽롱한 배경처리는 그의 스승인 川崎小虎의 영향이다. … 또한 이 그림은 시집가는 전통복장을 한 신부와 들러리를 그렸는데 군상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川崎小虎뿐만 아니라 일본화단에서 애용되었던 화면구성이다(도판 19). (233쪽)

‹感›은 결혼하는 여인이다(도판 20). 중심에 주인공을 두고 주변에 보조 인물들을 배치하였는데 당시 일본 인물화에서 많이 애용되었던 구도이다(도판 21). ‹情›은 출산한 여성이며 가정을 꾸린 여인이다(도판 22). 뒷배경의 문갑이나 화분 등의 소도구 또한 근대 일본 인물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치이다. (234쪽)

그림의 제목은 黑田淸輝(1866—1924)의 1899년의 기념비적인 작품 ‹智·感·情›과 동일한데, 이유태가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5쪽)

이유태 미인화의 채색을 보면 김은호보다 화사하다. 호분의 양과 관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은호가 구사한 미세한 朦朧體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川崎小虎에게 화사한 색감은 익혔지만 그가 구사한 朦朧體는 극히 제한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미인도 배경에 채용되는 보카시 기법, 특히 3부작 중 ‹智›와 ‹情›의 배경 하단 부분에 구사한 방법은 山崎小虎가 그의 미인도 배경으로 애용하였던 방식이다. (236쪽)

푸바오스의 작품에 대해선 이유태 만큼 자세한 분석이 없다. 근데 뭐 유명한 작가이므로 찾아보면 충분한 연구가 있을 거 같다.

부포석과 이유태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만의 畵法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우선 부포석은 중국화의 대표성이 線이라고 믿었고, 筆線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는 서양의 그림은 색채와 面의 결합이며, 중국의 회화는 線條와 点의 교향악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서양화는 寫實적이며 중국화는 寫意적이다. 서양화는 과학적이며 중국화는 철학적, 문학적이다”라고 피력하였다. 그의 미인화에서 이런 부포석의 이론을 충분히 보여주는 線의 다양한 구사, 詩題를 활용한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寫意性에 대한 固守를 읽을 수 있다.

둘째는 시대성에 대한 규정이다. 그는 “國畵는 변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변해야 하나.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림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 사상, 재료, 도구 모두 같을 수 없다. 그러나 宋·明은 망하지 않았고, 吳鎭, 倪瓚, 石濤, 八大家는 水墨畵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그림의 본체는 자유롭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傳統과 師承으로 다양한 境界가 나온다”라고 중국 전통회화의 연계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미술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 인격과 수양, 둘째 외국과 외국 교류의 최대한 흡수 그러나 최대한의 저항, 셋째 중국미술의 표현은 雄渾, 朴茂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236~237쪽)

굉장히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화혼양재, 신일본화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 한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푸바오스는 중국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경향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일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민족주의를 하나 더하는 경우가 흔하다.

해방 후 우리나라 화단에는 일본화적인 요소가 배격당하고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다시 찾자는 동양화단의 요구가 있었는데, 같은 김은호 문하였으며 역시 인물화에 능했던 김기창은 비구상으로 갔고 장우성은 남종문인화에서 그 본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유태는 山水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해방 후부터는 미인화를 그리지 않았다. (238쪽)

우리나라는 뭔가 일제를 극복하는 방법이 좀 어정쩡하다. 이 사람들이 과연 일본의 잔재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런지. 사회적인 비판을 소재를 바꿈으로써 회피한 것은 아닌지. 뭐가 우리 거고 뭐가 일본 건 지 구별할 줄도 모르는 사회는 왜 그리 야멸차게 예술가들을 대한 건지. 결국 그래서 뭐가 우리 거고 뭐가 일본 건 지도 모르게 된 건 아닌지. 씁쓸하다.

* 이 글은 「동양미술사학」 4집에 먼저 실렸다.
『제국미술학교와 조선인 유학생들: 1929-1945』(2004)
1929년에 설립된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현 무사시노 미술대학(武蔵野美術大学))을 다닌 조선인 학생 관련 자료를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정리한 것. 이 책에 실린 조정육의 글(255쪽)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입학했던 미술학교’(표현이 좀 애매하다)로, ‘150여 명(확인 불가능한 학생까지 합하면 170여 명 정도)’가 유학하였다고 한다.

학진 지원 받아 만든 거라는데 편집이 좀 난삽하다. 부록의 『무사시노미술대학60년사』 번역 말고는 그냥 대충 이런저런 자료 묶어서 찍은 거 같다. 다음 두 논문이 좀 흥미있었다.

장정란, 「이유태와 부포석의 미인도 비교 연구: 1933~1940년대를 중심으로」, 225~238쪽.
조정육, 「제국미술학교 교수 연구 — 일본화과의 鏑木淸方과 奧村土牛를 중심으로」, 255~265쪽.

일본의 근대 동양화(?)는 어떻게 생겨났고, 또 그게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나의 관심사 중 하나다.
천국과 저승

1.

초기불전연구원에서 펴낸 불경들을 읽다가 머리에 어렴풋이 생긴 개념이 있는데, 외람되게도 불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통해 수입된 ‘천국’에 대한 개념이었다.

석가모니가 꾸준히 반론을 제시하는 3천년 전 인도의 종교에서, ‘범천’ 즉 천국은 너무나도 명확해 손에 잡힐듯한 존재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천국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인식이 나에게는 매우 낯설고도 신선했다.

인도 종교에서 이 천국의 세계는 우리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가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법칙에 의하여 그곳에서 새로 태어나는 방법 밖에 없다. 즉 천국에 갈 수 있는 필요조건은 이 인간세계에서의 죽음이다. 범천에서 인간계로 올 수도 있는데, 그 과정 역시 범천에서의 죽음을 조건으로 한다.

천국에서의 보상은 현실 인간계와는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다. 인도의 종교 관념을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친 서구와 중동을 포괄하는 근원적인 종교 관념이라 가정한다면, 기독교의 천국 관념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
— 마태오의 복음서

이 문화권의 종교 관념에서는 현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저 천국에 가기 위한 업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인 것 뿐이다. 현실에서의 모든 고난은 죽고 나서 천국에서 보상받는 것이지, 죽기 전에 세속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위의 구절을 돈 많이 벌어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하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분들은 골룸)

왜 그럴 수 있느냐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날 천국의 존재를 그들은 너무나도 확신하고 있으니까. 흑인 노예들의 영가는 자식놈 좋은 대학 보내 출세시키겠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인도, 중동, 서구의 종교 관념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 박창학, 「달리기」

난 이 노래 가사가 기독교의 천국 개념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아무리 현실이 괴로와도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끝이 존재한다는 거. 그리고 그 뒤에 천국에서 보상이 있으리라는 거. (이 노래가 자살을 주제로 했다는 근거없는 루머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음.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라는 후렴구도 왠지 그런 걸 연상시킴. ‘five five five’ 말만 바꾼거겠지만.)

2.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의 개념은 뭘까? 내가 보기에 그건 ‘저승’이다. 난 이 저승이라는 것이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서 유래했다고 보는데, 저승은 천국과 달리 무당이나 혹은 일반인도 우연한 기회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숙달된 무당의 경우 저승에서 얻은 지식이나 예지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복이나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저승은 이승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죽으면 저승사자를 따라 걷다가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즉 저승에 가는 방법은 물리적인 이동이다. 조상들 역시 특별한 기회에는 이승에 와서 제사를 받거나 후손에게 위험을 알리거나 구원을 해주기도 한다.

반면 천국으로 가는 방법은 불가해한 것이다. 그 기준은 세속적인 가치와 무관하다. 심지어 사제들 조차 천국에 간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함바’

한바(飯場)에도 도모코와 비슷한 관계가 보인다. 한바란 규슈 지방에서는 나야(納屋)라 부르고, 짐을 나르는 인부들 사이에서는 곤조베야(権造部屋)라고 불리며 오야카타를 중심으로 발생한 노동 도급제이다. 한바 역시 오야카타·고가타 관계로 전개되는 근대 노동조직의 전형적인 형태 중 하나이다.

이 한바 제도는 토건·임업·광산·항만노동 등의 현장에서 널리 보였던 제도로, 공통점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많은 점에서 도모코 제도와 유사한 성격을 띠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한바 제도가 노동 도급제라는 사실이다.

한바의 우두머리는 중간 착취자였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바의 우두머리는 원청회사에서 일을 받자마자 그 일을 실행할 노동자를 모집하고 실제 작업의 진행과 노동자의 생활관리까지 책임졌다. 원청회사는 임금을 포괄적으로 한바 우두머리에게 지불하기 때문에 한바 우두머리는 노동자를 공급하고 수입의 20% 정도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또한 하청업자가 다시 하청을 맡기는 과정에서 심각한 중간 착취가 발생했다. 하청하는 과정이 반복되자 임금만으로는 뜯어낼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다른 수단과 방법을 고안해야 했던 것이다. 과대한 노동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한바 우두머리의 권력으로 노동력의 강도를 높이거나 필요한 노동자 수를 감소기키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작업관리 현장에는 폭력이 개입되었다.

산간벽지에서 실시되는 토목공사나, 정해진 기간 안에 마무리해야 하는 방대한 양의 하역작업 등을 할 때에는 일인당 노동량이 과중되기 십상이었고, 노동량을 예정일에 맞춰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작업관리에 폭력이 개입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바제도는 이런 중간 착취와 지배종속적인 관계였다. 이 점이 상호구제집단의 원리를 전제로 한 도모코와 다른 점이다. 이런 한바제도에서 발전된 오야분·고분의 관계는 종종 야쿠자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성장해갔다. 거기에는 상호협동이라는 아름다운 성격과 함께 중간 착취라는 꺼림칙한 성격이 항상 따라붙었다.

실제로 많은 근대 야쿠자가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야마구치구미의 모체인 하역인부집단도, 그리고 같은 하역인부 동료로부터 떨어져 나와 전업 도급업자가 된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성격의 단체가 되었다.

— 미야자키 마나부(宮崎学) 지음, 강 우원용 옮김, 『야쿠자, 음지의 권력자들』(ヤクザと日本—近代の無頼)(2008), 93~95쪽.

한국의 노동 문화는 근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원산지에서 사라진 풍습이 외형 뿐 아니라 내면까지 충실하게 전승되고 있다.

飯場制度(はんばせいど), 納屋制度(なやせいど)에 대한 연구가 일본에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 거 같다.

‘법치’

법치주의라는 개념은 서양에서 건너왔다. 영어로 말하자면 the rule of law를 동양어로 번역하면서 법치주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법치(法治)라는 말 자체는 동양의 전통적 어휘 안에 있었다. 즉, 제가백가 시대 한비, 이사, 상앙 등, 법가(法家)가 제안한 통치방식을 법치라고 부르는 용례가 있었다. 적어도 언어의 표면만 보면, the rule of law가 법치로 번역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서양의 법치 개념과 동양의 전통적 법치 개념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서양근대의 개념에서는 법이 지배한다는 뜻인데 비해서 동양의 전통개념에서는 법으로 지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씨 하나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법과 권력의 관계를 정반대로 파악한다는 결정적인 차이에 해당한다.

서양근대의 법치주의란 왕의 권력을 법이 제약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동양 법가의 사상이란 사람들을 다스릴 때 법을 정해서 형벌을 엄하게 하면 모두 복종하게 된다는 뜻이다. 법가사상에서 법이 군주의 권력을 통제하는 장치로 작용할 여지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 사진은 1962년 12월 17일 민정이양을 위한 개헌안 투표 중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야쿠자, 음지의 권력자들』

1장

서문과 1장에 저자가 왜 야쿠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나온다. 우선은 자신의 아버지가 야쿠자 보스(寺村組 組長)였고,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운동권 학생들은 야쿠자를 업신 여겼다. 스도 히사시(須藤久) 감독이 쓴 『破邪顕正の浪曼』(1974)에 등장하는 꽃집을 습격하는 전공투와 건물을 지키는 야쿠자의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야쿠자는 정신적으로 우익과 한통속이 된다. 한국에서도 뭔가 이에 비견될만한 이야기가 있을 법 하다.

저자는 야쿠자를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아웃사이더로 본다. 물론 정확히 그것이 아니라며 ‘근대 야쿠자’와 구별짓지만, 결국은 가부키모노(カブキ者), 마치얏코(町奴)가 ‘단속적으로 전승’된 것이라 말한다. 바쿠토의 활동 기반이던 도박 역시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근대 야쿠자’는 인류의 보편적 역사 속에 존재했던 조직이 아니다. 권력과 밀착된 특이한 현상이며, 사실 고전적인 ‘의협’과도 거리가 있다. 한국에서도 ‘국부’ 이승만이 키워주기 전엔 조직 폭력배가 없었다. 지역적인 깡패와 주먹이 있었을 뿐이다.

1장의 역사에 관한 내용들은 전반적으로 저자가 서두에 언급한 오가타 쓰루키치(尾形鶴吉)의 『本邦侠客の研究』(1933), 이노 겐지(猪野健治)의 『ヤクザと日本人』(1993) 등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언급한 거 같다. 이 책들을 직접 보는 게 좋겠다.

영화나 만화에 야쿠자가 자주 등장하고, 한국에서도 조폭 영화가 유행하면서 야쿠자는 익숙한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지만, 정작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잘 모른다. 최근에 나온 관련 서적은 이 책 하나 정도인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인터넷에 유통되던 관련 정보들이 야쿠자를 우호적으로 다룬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3장

에도 시대 ‘근세’ 야쿠자에서 ‘근대’ 야쿠자가 탄생한 배경을, 특정 조합 운동과 근대화된 항만의 하역 노동자 조합, 직업 소개소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탄생 순간을 포착한 것은 아니다. 1945년생인 저자가 1920년대의 ‘인상’을 추억하기도 한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야쿠자를 이끌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면 좋겠으나, 철거일을 하면서 그리되었다고 개인사를 수줍게 고백하듯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야쿠자는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인 인물들과 과정이 등장한다.

야쿠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농촌에 소작 관련해서 있었던 오야카타-고카타 관계를 언급한다. 이런 관계가 직능 조합이나 도제 관계에서도 성립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노동자를 헐값에 장기간 노동시키고 마구 잘라버리는 전통이 있는데, 어쩌면 일본의 야쿠자식 관계에서 연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 말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이런 노동 착취를 하면서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문화는 분명 근대화 과정에서 생겼을테니 한번 조사해볼 만한 일인 거 같다.

저자도 구분하긴 했지만, 이러한 관계는 같은 시기 발달한 수평적인 노동 조합원 간의 관계와 대치된다. 어쩌면 ‘전통’ 운운 하지만 남을 착취하려는 반근대적 욕망이 일본과 한국에서 그런 노사관계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들이 좀 흥미있긴 한데, 전반적인 내용이 야쿠자를 미화하는 저자의 추억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자료를 따로 찾아봐야 할 거 같다.

오로치 신화
… 오라버니는 자신의 아내가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죽여 버렸다. 아이들은 동물의 먹잇감이 되도록 숲속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암호랑이가 우연히 남자 아이를 발견하고는 그를 키웠다. 암호랑이는 남자 아이가 장성하자 그와 결혼하였다. 또 여자 아이를 발견한 곰은 그녀를 키웠고, 역시 장성하자 그녀와 결혼하였다. 이 두 결혼으로부터 각각 오로치족과 우데게족이 시작되었다. (C. B. Березницкий, Мифология и Верования Орочей, Сант-Летербург, 1999.)

『시베리아 만주-퉁구스족 신화』 맨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32쪽. 중간의 오자는 내가 고쳤음). 동북아와 중앙아시아 설화를 보면 호랑이와 곰 이야기가 많아 우리의 단군신화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단군신화는 이렇게 원초적이지 않다. 우선 제석천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중국을 통해 수입된 불교 속의 인도 신화 흔적이다. 또, 역사적인 시기도 요임금, 주무왕과 겹친다. 실제로 그 시기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교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도 요임금 시절에 임금이 하나 있었다, 요임금보다는 동생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의.

실제로 채집된 시기도 아주 늦다. 삼국사기보다도 100년 넘게 늦게 나왔고, 저자 역시 종교적인 편향이 강한 대승불교의 중이었다.
바뀐 생각
예전엔 전통 문화가 사라진 것이 일본놈들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에 사라진 것이 더 많다.

전통 사상이 사라진 건 민감한 근대화의 시기에 일제를 겪어
우리 사상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었기 때문으로 알았는데,

그보다는 우리 지식인들이 일본의 사상을 너무나 적극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조선시대 글들을 보면 만주에 대한 동경이 전연 없다.
북벌이라는 것도 국가의 도의 문제였던 거고.

또 대한제국 이후 우리 조상들의 공화주의(?)에 대한 열망은 놀라울 정도인데,
해방 후에 천황을 섬기던 자들은 다시 왕을 찾는다.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엄기표, 2007)
2010년 7월 7일 수요일

1. 번(幡, Pataka, 波多迦)

불교 초기부터 스투파 위쪽을 장식하기 위해 달아놓은 기다란 천.

후에 사찰 내부나 외부를 천으로 장식한 것도 번이라 부르고, 막대기에 들고 다니는 것도 역시 번이라 부르는데, 저자는 이것들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넘어갔다.

2. 당

번과 당은 혼용되었다. 대체로 번이 한장의 천을 늘어놓은 것에 비해, 당은 윗쪽에 종모양의 머리가 있고, 여러 갈래의 천을 달아놓은 경우가 많다.

이 부분 역시 번과 당이 어떻게 혼용되었는지, 당의 기원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개인이 막대기에 달아 들고 다니는 당이나 번은 군대 등에서도 쓰였다.

3. 석주

아쇼카 왕의 석주가 전해져 사찰 앞에 세워진 것이 당간의 유래가 아닌 가 저자는 짐작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없다.

4. 당간

사찰 옆에 세우는 당간은 중국이나 서역의 사찰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되었다. 그런데 역시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그냥 대충 넘어가기.

5. 한국의 당간

한국의 당간의 특징은 사찰 옆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절의 중문 정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그러했는데, 저자는 '진입공간'에 설치되었다는 말로 매우 예술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내 생각엔 경제, 정치적인 환경을 무시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6. 용두

당간의 끝에 용두가 있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특징이다. 인도의 뱀의 상징이 중국으로 건너와 용으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추측.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없음.

7. 괘불지주

조선 후기에 들어 괘불을 설치하기 위한 괘불지주가 사찰에 설치된다. 위치는 사찰의 바로 옆.


구체적인 내용없이 그냥 넘어가 버리는 서술들이 좀 아쉽다. 학술서라고 보기는 구성이 조직적이지 않고, 불교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대중서라고 보기엔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없다. 뭔가 그림은 많은데, 조직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번과 당간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에 하나였다는 것, 그리고 절에 있는 돌들이 당간지주가 아니고 괘불지주였다는 걸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김종윤, 2000/2009)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이분은 속칭 ‘대륙조선설’을,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내용을 주장하시는 거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강성함을 이야기하는 경우 주로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정도까지 대륙을 지배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제 바로 직전, 20세기초(아마도 1910년 한일합방까지)까지 조선은 중국 땅에 있었고, 현재의 지명은 일제의 의해 철저히 조작되었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얄타회담(1945)까지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나 보더군요. 그런데 이분이 그런 주장을 안 하는 이유는, 어쩌면 본인이 1945년 이전에 출생하여 사회를 경험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방법 중 하나는 실제 중국 노인들의 증언을 찾으시는 거 같습니다.)

성북구 쪽으로 가면 정릉(貞陵)이라고 되어 있는 곳은 분명히, ‘문바위골’이었다. 일제가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라고 역사 설명을 달고 있으나, 이는 전혀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이 무덤은 수백 년 간 주인 없이 버려진 무덤에 불과했는데, 조선역사를 짜집기하면서 전고를 입힌 것이다.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6쪽)

의림지라는 제천에 있는 연못은 이 지역 농수를 위해 일제초기에 그들이 만든 인공연못이다. 그리고는 동네 이름을 ‘제방을 쌓았다’는 뜻으로 ‘제천(堤川)’이라 한다지만, 이 역시 조선사와도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즉 ‘제천 의림지’는 섬서성 연안 아래쪽에 ‘의천(宜川)·의군(宜郡)·제주(堤州)’라는 곳을 일컫는다. ‘백수(白水)’ 또는 ‘의림제(義臨堤)’라고도 했고, ‘내토(奈土)·내제(奈堤)’라는 이름으로도 불러 『삼국사기』의 조선사와도 연결되는 곳이다. 그와 같은 제천이란 땅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놓고, 연못을 중심으로 호서니 호남이니 했다면 참으로 장난 치고는 웃기는 장난이다. (「이 땅의 지명은 짜집기된 것」, 26쪽)

역사 이전작업은 보다 직접적인 총독부 사업이었다.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것을 두고 대륙조선에서 가져온 사서(史書), 이를테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 및 각종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지리지(地理志) 등을 바로잡는다는 구실 아래 한반도의 지명을 전고(典故)(典例와 故事)에 의해 꿰맞춰 놓고 사서에 고쳐서 써넣는 이른바 ‘교열(校閱)’을 하여 ‘중간(重刊)’이라는 이름으로 찍어낸 것이다.

이 총독부 안에는 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라는 것도 있었다. 문집류나 씨족사 등 역사서는 아니나 그 전고가 밝혀져서는 안 될 문헌은 역시 이곳에서 ‘교열’과 ‘중간’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지금 우리가 원서니 원전이니 하는 책들이나, 규장각에 있는 대개의 책들은 모두 이런 절차를 거친 것들이다. ‘교열’ 과정에서 한반도에 전혀 배치되는 부분은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땜질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의 팔역(八域)이 한반도에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은 모조리 삭제(「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해 버렸다. 특히 지명의 경우는 ‘원(原)’을 ‘주(州)’로 바꾸고, ‘주(州)’를 ‘천(川)’으로, ‘천(川)’을 ‘성(城)’으로 (13쪽) 바꾸어 후대인들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심지어 ‘경도(京都)’니 ‘경사(京師)’니 하는 것들은 원(元)이나 명(明)의 수도라고 짐짓 주석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왜곡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와서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와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라는 것을 만들고는 세종 때의 정음(正音)만을 떼어내 그것을 이 땅의 글이라 가르쳤다. ‘’와 ‘’, 이것을 조선문학이라 해서 조선의 역사와 얼과 정신을 어문(語文)에서 가로챘던 것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4쪽)

중국도 이에 동조했다:

… 그것은 손문 정권이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 조선을 반도에 짜맞추고 새로운 동서의 개념을 심은 것이다. (「압록강과 위화도는 어디인가」, 109쪽)

중국이 이 음모에 동참한 건 ‘서세동점’ 때문이다. 근데 서양이 아시아의 국가들의 영역 조작에 관심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전체적인 역사라면 몰라도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관심이 있었을 거 같진 않다. 혹은 서구의 사상이 그런 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중국과 일본이 자의든 타의든 서양의 계획을 세부적으로 실행한 걸까?

이런 것들은 장안(지금의 서안)을 중심으로 해서 설정되었던 고대의 방위개념이 서세동점 이후 손문 정권이 북경에 자리잡으면서 서구 세력과 함께 조선을 반도에 제한하기 위해 북경이 동·서의 분기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성계 조선과 한반도는 무관하다」, 115쪽)

… 조선이 소멸된 후 조선 땅에는 ‘대한제국’으로 부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지만(1897년) 모두가 일장춘몽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쥐도새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온 일본은 대륙 남방을 내어주고 ‘열도’라는 새로운 황무지를 개척하는 한편, 스스로의 역사를 정비함과 동시에 한반도로 이식된 조선역사를 (12쪽) 재구성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3쪽)

증거는 대부분 중국 지명과의 유사성에서 찾는다. 또 어떤 경우는 지명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압록강’은 ‘오리처럼 푸르다’는 뜻이니 맑은 강은 어느 것이나 압록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마 유럽에 있는 푸른 강도 압록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거 같다) 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어떤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연구된 부분에 대한 참고도 없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명동(황금정)은 종로보다 번화했는데, 어떻게 종로가 오백년 왕조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서울은 근세조선의 오백년 왕도인가」, 49~53쪽) 그러나 명동은 일제의 개발로 발전한 것이고, 조선 왕조는 상업을 억제해서 성내의 상가가 그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원나라의 고려 지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 역시 대륙의 남부에 있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열도’로 이주한 것으로 본다. (대체 왜!?)

우리의 역사나 전통에 매진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존경스럽지만(이분도 40대 후반부터 독학을 하셨다고 한다) 또 뻔히 눈에 보이는 문제점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너무나 아쉽다.

우리의 전통이 해방 이후 어느정도 돌아오는 듯 하다가 오히려 60년대 이후에 새마을 운동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주로 지명을 연구하시는 분 같다.

필자가 어렸을 때인 1945년 전후까지만 해도 각 동네 이름들은 한자명으로 불려지지 않고 순전히 토박이말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미 일제가 우리 나라 전국토에 걸쳐 한자명으로 지명을 개명했는데도 말이다.

필자의 마을은 동네 주변이 돌담으로 쌓여져 있다고 해서 ‘담안’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고, 옆 마을은 배미골이란 뜻으로 ‘전배미’로, 또 이웃마을은 골(谷)이 깊어 나그네도 쉬어간다 해서 ‘손고개’라 하였고, 또 마을 너머에는 땅만 파면 샘이 난다고 해서 ‘샘내’ 또는 ‘샘골’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토속적 이름은 아마도 수백, 수천 년 동안 불려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일제가 이 땅의 이름을 모조리 바꿔놓았고, 그리고 ‘구(區)’라는 것을 만들고 ‘구장(區長)’을 세워 행정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일제가 만든 지명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옛날 토속명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무래도 우리 입맛에는 된장·고추장이 좋은 것이었다고 (43쪽) 보여진다. 그후 1960년대를 지나오면서 농어촌 개혁바람이 불고 행정은 쇄신되었으며 각 마을은 마을 단위로 ‘재건’이란 슬로건 아래 살기 좋은 자기 고장을 만드느라 몸부림치고 있었다. 일제가 만든 행정단위 즉 ‘도·시·군·읍·면·동·리’ 제도가 장착된 것도 실은 이 무렵이었다.

요즈음에는 사회 각 단체들이 주동이 되어 올바른 옛 땅이름을 되찾아 쓰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본다. 가령 판교(板橋)는 본래의 이름 ‘널다리’로, 이수교(梨水橋)는 ‘배물다리’로, 윤중로(輪中路)는 ‘여의둑길’로, 안양천(安養川)은 ‘오목내’로, 신천동(新川洞)은 ‘새내동’으로 써야 이 고장 역사도 또 선대의 얼과 숨결도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하다. 지금의 한자 지명은 얼도 숨결도 없어 죽은 이름이나 같다.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4쪽)

하지만 필자는 한반도에 조선사를 이식시키기 위해 지명을 억지로 짜맞추었다는 점만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초 일제가 우리 땅이름을 한자명으로 바꾸면서 대륙 조선사의 판도에 따라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위치에는 토속 지명과 관계없이 옮겨다 붙였으며, 소규모 민촌이나 산하(山河)는 음역(音譯)하고, 음역이 맞지 않으면 이에 근사한 말로 차용했던 것이다. 이는 토속 명칭으로는 그들의 호구 문서 등 각종 문서작업에 등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4쪽)

한편으로는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집단적 기억상실이랄까.

… 이 묘에 대한 기록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면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 이 묘들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적고 있다. 옛부터 박씨묘·유씨모·이씨묘·성씨묘라는 4개의 표석만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민간에서 이를 육신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육신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인지는 사록에 없고, 다만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육신전 (六臣傳)」에 의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동인물이 위의 ‘사육신’일 것이라는 추리를 해낼 뿐이라고 한다. (「노량진 사육신 묘비는 가짜」, 241쪽)

2010년 18일 금요일
민족이란 무엇일까? 나라란 무엇일까? 나의 조상들은 지금은 일일이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나라를 세워 서로 싸우고, 정복하고, 또 멸망해 갔는데, 어느 나라를 숭상해야 할까? 나라란 곧 지배층만 바뀌는 것이므로, 민중의 영원함을 칭송해야 할까? 각 나라가 개국할 때는 시대의 요구에 부흥하였으므로 모든 나라를 좋게 봐야 할까? 아니면 중국 땅의 나라보다 왕조가 오래됨에서 자랑을 찾아야 할까?

조상을 생각하고, 전통을 배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면? 또 남아있는 내용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인가?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러지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치당 치하의 독일을 다룬 어린이 동화에서는, 자신의 모국인 독일과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자신의 민족을 배반하고 미국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친일을 했던 사람들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다 못해 상전으로 모시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기 문화를 모르는 서양 유학생을 우리는 경외한다.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들은 우리와 분명히 한 핏줄, 아니 어제 저녁까지 형제였던 사이로 민족의 모든 역사를 공유하는데, 우리는 그들의 모든 것을 폄하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다. 조선족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재일교포는? 우리 민족으로서의 가치를 그들과 충분히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과거 이 땅에 있던 나라들, 우리 조상들의 나라들도 서로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그 와중에서 우리 민족을 빛나게 하는 고유한 그 무엇 한가지를 찾을 수 있을까?

없다. 자기들끼리 잘 싸웠으니 전쟁에 용맹했다는 칭찬말고 뭐가 남겠는가. 혹은 민족이 사라지지 않고 번성했으니 번식을 잘했다. 용맹과 다산은 과거에는 너무나도 지고한 가치였지만, 현대에는 아무도 그것을 정치 이념으로 삼지 않는다. 결국 그런 가치는 설령 실재했다해도 우리 손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것을 찾는 사람은 어찌하는가? 적을 만든다. 적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그들을 대척점에 둠으로 나를 만들 수 있다. 적이 더 고상하고 찬란한 문명을 쌓을 수록, 대척점인 우리도 자연과 함께 고매해진다. 우리의 가치 역시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빛으로 화(化)한다.

강화수요조약을 체결했다는 강화부 청사 정문. 어찌 이런 곳에서 국가간 조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4쪽, 그림 설명)

그런데 지금 필자의 고향 경기도 적성은 상서도성이 있을 만한 고장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 더군다나 ‘상서도성’이란 ‘상서성(尙書省)’이라고도 해서 신하와 천자(天子) 사이에 오가는 문서를 맡아보던 기관으로 상서성 장관은 고려시대에 설치했던 6부(六部)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여겼던 벼슬이다. 그런 나라의 중추적 기관이 적성이란 벽촌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역사는 분명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 땅의 지명은 짜집기된 것」, 24쪽)

흔히들 격변기라고 말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기록물들을 모아 사진으로 보여주는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라는 책을 보면 과거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이 책에 의하면 서울에 전차가 들어온 것은 1898년 경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부설에 착수해 1899년 5월 4일에 청량리에서 동대문·종로를 거쳐 서대문까지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동대문에서 종로쪽을 바라보고 찍힌 사진들을 보면 그것은 왕이 사는 도성이라기보다 밀집된 (50쪽) 대촌(大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서울은 근세조선의 오백년 왕도인가」, 51쪽)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낡고 초라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찬란한 건축물 옆에 움막이 있었던 곳도 있고, 그런 건축물마저 한 때만 존재했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 자료로 과거를 추정해 볼 때 지금의 눈으로는 매우 규모가 작은 곳이 많다.

나는 그냥 우리 바로 이전 나라인(대한제국을 어찌봐야될지 모르겠지만,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조선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양은 같은 시대 에도나 북경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거 같고, 개경이나 서라벌보다도 못한 점이 있는 거 같다. 사실 이런 조선에 대한 불만이 우리의 고대사를 확대하려는 사람들이 생긴 이유 중에 하나일텐데, 이게 돌고돌아서 조선 자체가 작지 않았다는 주장을 만들어 버렸다.


『화려한 군주』(Takashi FUJITANI, 1996)

2010년 6월 3일 목요일
강유원의 서평<http://allestelle.net/?p=1628>을 보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찾기는 예전부터 찾았는데, 도서관의 다른 서가에 있어서 목록에는 분명히 있는데 볼 수가 없었다. 오늘에서야 직원에게 물어서 찾았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족히 천 년 전부터 있었을 거 같은 메이지 진구(明治神宮)가 20세기 초에야 생겼다는 것에 놀랐다. 그 뒤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 만들어진, 마치 전통인 듯한 문화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어판 서문

더불어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일본의 특이한 사실에 대한 책으로서보다는,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천황제’에 관한 책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 (10쪽)

간략히 말하면 이 책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특이성을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을 예외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에는 반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독특하긴 해도 모든 내셔널리즘이 그렇듯이 일본 내셔널리즘도 지난 150여 년간 형성되어 온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과 충분히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이 전지구적 근대성의 일부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이 책은 영미(英美)의 일본 연구에 있어서 일본의 사회·문화·정치 등을 이른바 서양 또는 구미의 시각에서 단순히 단정해서 비판해 버리는 경향에 반대하는 나의 투쟁—나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었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투쟁은 부분적으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에 설령 ‘천황’은 없었더라도 미국 근대사의 많은 부분—도를 넘어 종종 군주처럼 군림해 온 대통령들, 군국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인종주의, 시민들의 종속화를 포함해서—을 보면 미국식 ‘천황제’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 내셔널리즘과 천황제에 대한 나의 검토가 구미의 내셔널리즘과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비추어 보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바랐다. (10~11쪽)

… 일본의 국민적 근대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일제하의 한국과 같은 그런 경험을 했던 곳의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한국의 문화비평에 대한 나의 제한된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우리는 포스트 식민주의적 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 및 구미의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에 대항하는 반식민주의적 의제(agenda)를 계속 추구해 나갈 때, 한국 내셔널리즘의 한계와 과잉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위치를 정식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 11쪽)

1장 서론: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Introduction: Inventing, Forgetting, Remembering)

내 오랜 궁금증의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 빨리 철저한 문화적 단절이 일어났는가 였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반대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즉 무엇이 어떻게 그 문화를 대체했는가 하는 것.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일본사학자들의 태도는 (1) 그냥 자연스럽게 민족적 전통이 왕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등), 긴키 지방에서는 17세기 민중의식의 맹아도 보인다. (2) 민족의 자연스런 습성, 또는 심층적으로 내재된 상징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이노세 나오키(猪瀬直樹) 등) (3) 원래 전통이 천년만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술적인 주장이 아님. 그러나 지식인들도 일상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경우가 다반사. 인데, 사실 한국사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자의 주장은, 서양의 근대국가를 참조해 정치 엘리트들이 만든 새로운 문화가, 만든 사람 스스로를 속이며 이를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릭 홉스본, 베네딕트 앤더슨 등의 주장의 응용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주장보다 좀 더 강경한 어조를 띄고 있는 거 같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담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만들어진 고대』라던가)

1.1 내셔널리즘과 도쿠가와 시대의 천황(Nationalism and the Emperor in Tokugawa Japan)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반대로 민중 수준의 국가적 정체성은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도 경우 의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이 천황의 친정복고를 선언했을 때 상당수의 일반 민중은 새로운 정부에 의해 쇄신된 세계가 도래하리라고 기대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국가나 천황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신념을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세금 감면이나 토지 재분배와 같은 구체적인 혜택을 받아 생활이 개선될길 바라고 있었다. 국가의 대리인들에 의해 민속종교를 비롯한 민중의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의무교육의 도입으로 높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데다가 아이들의 노동마저 빼앗기고, 징병의 의무를 지고, 이전보다 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면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자 민중은 즉각적으로 병렬히 저항했다. (28~29쪽)

메이지 초기는 일련의 격렬한 반정부 저항들로 얼룩졌다. … (29쪽)

Yet all of this points to existence of only an emergent and geographically limited consciousness of national identity at the popular level. When the Meiji rulers ushered in what they called restoration of imperial rule, many of the common people looked with great expectation to the arrival of a world renewed by new regim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held strong beliefs about either the nation or the emperor. Rather, they longed for a bettering of their lives, for such concrete benefits as the reduction of taxes or redistribution of land. When their hopes were shattered—by representatives of the state who attacked their religion and way of life, by compulsory education that was costly in terms of tuition and children's labor lost, by military conscription, and by even heavier taxation than they had experienced in the past—they reacted immediately and violently. The first decade of the Meiji era was rocked by a series of violent of antigovernment uprisings, …

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초기의 메이지 정부가 불안했던 주요 원인은 당시 일반 민중이 천황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적절한 이미지에 있었다. … (29쪽)

Fromt the rulers’ perspective, a major reason for the instability of the early Meiji government was the inadequancy of the existing popular image of the emperor. …

예로 든 것은 스사키 분조(Susaki Bunzō)의 백세 생일 기념 1960년대 초 기자회견, 덴노의 에도 첫 순행시 그려진, 「聖徳皇太子尊職人立願の図」(Craftspeople Praying to the Deity Prince Shōtoku, 1868)(그림 1).

대체로 메이지 시기 이전에 민중이 가지고 있던 천황의 이미지는 정치적이거나 국가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이며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가이자 민속학자인 미야타 노보루(宮田登)는 천황에 대한 민간설화를 수집·분석한 결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 나타난 천황과 황태자에 대한 신앙은 마레비토(客人, 마을에 찾아와 세속의 복을 안겨 준다는 신성한 존재) 신앙과 중첩된다고 주장했다. 일반 민중은 천황이 신성한 강을 만들어 주고, 풍성환 수확물과 때로는 천황의 이빨자국이 나 있는 밤(栗)처럼 색다르게 생긴 작물을 안겨 주며, 각종 자연재해나 주술적 위협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 주는 등의 이로움을 지금까지 베풀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천황의 이미지는 민간전승 중에서 재액과 재앙을 막아 준다는 또 다른 고즈 천왕(牛頭天王)의 이미지와 혼동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23) (30~31쪽)

In general, popular images of the emperor before the Meiji era tended to be nonpolitical and rooted in folk religions, rather than political and representational of the national community. The historian and ethnographer Miyata Noboru has used collections of popular legends of emperors to argue that the belief in emperors and imperial princes, which existed in some areas of Japan, overlapped with the folk beliefs in marebito—that is, sacred beings who were thought to make visitations on the village world and who supposedly dispensed tangible this-worldy benefits to the people. The common foolk believed that these emperors had brought or continued to bring such benefits as the creation of sacred rivers, bountiful and often unique crops (such as chestnuts bearing imperial toothmarks), and protection against various natural or magical threats to crops. Moreover, the tennō(emperor) was often fused in the popular mind with another tennō, gozu tennō, the deity of popular folklore believed to ward off evils and calamities.23

1.3 기억의 장(Mnemonic Sites)

새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민생활에서 천황이 중심적인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연설과 저술을 적극 활용했다. 메이지 초기부터 지방 통치기구들은 주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포고문을 자주 발포했다. 나가사키(長崎) 재판소가 작성한 초기의 한 포고문에는 평이한 구어체로 “일본이라 불리는 이 나라에는 태양신 덴쇼 고타이 진구사마(天照御大神宮樣)의 후손이신 덴시사마(天子樣)가 계시다. 그 분이 주재자 고슈진사마(御主人樣)이심은 오늘도 하늘에 태양이 떠 있듯이 옛날부터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씌여 있었다. … 메이지 초기에 정부는 대중 설교자로서 선교사(宣敎師)—나중에 교도직(敎導職)으로 바뀜—를 임명하여 종교적인 강론을 펴게 했다. 예컨데 1870년 후반 가쿠마(菊間) 번(지금의 지바[千葉] 현 지역)에서 중앙정부의 지역대표들은 두 명의 승려를 교유사(敎喩使)로 지명했다. 이들은 애국심이나 국신(國神) 및 공자·맹자에 대한 참배, 그리고 신사(神社)에서의 올바른 참배방법 등에 관해서 설명했다. (31~32쪽)

The new rulers could and did use speech and writing to explain the centrality of the emperor in natural life. From the early Meiji years, government authorities in the provinces often wrote public notices for the common people about the emperor. An early notice drawn up by the Nagasaki courthouse explained in the easily understood vernacular that “in this land called Japan there is one called Emperor(tenshisama) who is descended from the Sun Deity(tenshō kōtai jingūsama). This has not changed a bit from long ago and just like the Sun being up in the heavens He is the Master(goshujinsama ja).” … Such government agents as senkyōshi(state propagandists) and later kyōdōshoku(national priests), who were appointed in the early Meiji years to preach to the masses, continued to edify the people with homilies. In late 1870 in Kihuma han, for example, the local representative of the central government designated two local Buddhist priests as educators(kyōyushi). The spoke on patriotism, the worship of national deities, Confucius and Mencius, and the proper method of prayer for worshipping at shrines.

… 정작 그들은 대중에게 국가적·정치적 의미의 문제를 가르치는 일보다 자신들의 특정 종교를 강론하는 데 더 몰두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종교강론을 관리들의 메시지로 오해하기도 했다. (33쪽)

… appointees often were more interested in using their positions to preach their own particular religious beliefs than in educating the masses about matters of national and political significance. The people also sometimes misconstrued the message and hence the significance of the official agents.

지배 엘리트가 풍속을 조종해 결속을 만들어 내는 것. 공자의 학설이 진리일 수도 있는 거 같다. 거창한 예식 속에서 상하관계를 보이면 그것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2010년 6월 4일 금요일
근대 일본의 종교와 정치에 관해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황거 깊숙한 곳에서 거행되는 고색창연한 황실제사들이 대부분 메이지 유신 이후에 발명되었다는 것, 더욱이 천황이 직접 거행하는 13개 의례 중 11개는 역사적 전례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31) (35쪽)

일장기가 진저우(錦州) 난산(南山)의 적 진지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뛰었다. 내 몸속에 일본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상으로서는 ‘자유사상가’이지만, 혼으로 말하면 역시 대일본주의의 일원이다.(33)

When I saw the Rising Sun flag glittering from the enemy position at Nanshan in Jinzhou my heart leapt with joy. I could not help but feel that within my blood flowed the warm blood of Japanese people. Philosophically, I am a “freethinker,” but in my soul I am one of the Great Japaninsts(dainihonshugi no hitori) after all.33

1893년 국가적 영웅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의 동상 건립을 시발점으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조상광증’(彫像狂症, statumania, 조상 제작 열풍)의 바람이 불었다. 그 전에는 기념상(記念像)을 세워서 국가적 영웅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전통이 없었다. (41쪽) … 국가적 신사(神社) 입구에 도리이(鳥居)를 세우는 근대의 모뉴멘탈리즘(monumentalism)도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39) (42쪽)

On a rather unpretentious level, the people witnessed a veritable wave of “statumania,” beginning in 1893 with the erection of a bronze of the national and military hero Ōmura Masujirō. Before that time there had no tradition of public statuary celebrating national heroes. … A modern monumentalism in the building of gateways(tore) to national shrines also dates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39

1.3 국민국가의 역사민족지를 향하여(Toward a Historical Ethnography of the Nation-State)

그러나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같은 역사학자들이 언급했듯이, 에도 시대의 마지막 몇십 년 동안 피지배자에 대한 통치자의 태도에 근본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초기 도쿠가와 정치체제하의 정치엘레트인 사무라이는 일반 민중, 이른바 우민(愚民)의 수동적인 순종에 만족했지만, 새로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국가적 목표의 실현에 일반인의 적극적이고 정신적인 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43) (40쪽)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사람들을 단순한 통치대상이 아닌 지식이 있는 자기규율적인 존재(subject), 요컨데 푸코가 말하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주체—‘지배와 예속’에 복종하는 신민(subject)임과 동시에 ‘양심과 자의식’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subject)—로 다시 만들어 가려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44) (40~41쪽)

However, as historians such as Yasumaru Yoshio have noted, the last decades of the Edo period witnessed a radical reversal in the attitude of the rulers toward the ruled. While the samurai political elite under the earlier Tokugawa system had been content with the passive compliance of the common folk, the ignorant masses(gumin), the new Meiji rulers began to demand the active spiritual participation of the common people in the realization of national objectives.43 As I would describe it, they hoped to reconstitute the people into more than simply objects of rule, so that they could become knowledgeable and self-disciplined subjects in the dual Foucauldian sense—that is, subjects who were not only subjected to “control and dependence” but who were also subjects possessed of their own identity by a “conscience or self knowledge.”44

이 책은 일반적인 문화사의 나열을 넘어서기 위해 푸코의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특징인 거 같다, 기호(symbol)에 대한 강조까지. 근데 내가 푸코를 모르잖아? 이 책이 쓰여진 게 90년대 초인데, 이미 단순한 ‘폭로’를 넘어서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한국이 유행에서 좀 많이 뒤지는 거 같다.

한편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강유원의 서평에서는, 문화이론이나 푸코 등에 대한 고려가 없다. ‘얼마나 간악하게 지배자가 권력을 확장하는가’ 정도의 관점에서 읽은 거 같다. (딴 얘기지만 난 댓글에 꼬박꼬박 친절히 댓글을 다는 강유원, 박노자 같은 사람들을 인터넷의 성인(聖人)으로 보고 있다. 한편 댓글을 막고, 욕 쓰고, 자기 변명을 일삼고, 심지어 블로그를 위장폐업하고 옮기기도 하는 김규항, 우석훈 같은 사람들은 ㄱㅈ로 여긴다.)

… 기어츠는 서양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이 (문화적) 연속성에 관심을 갖고 진술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적 이디엄은 장소마다 다르고 또한 시간이 흐르면 변할지도 모르지만, ‘문화적 틀’이나 ‘지배적인 픽션’(master fictions)이 정치와 정치지도자를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이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인도든 탄자니아든(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58) 어디든 똑같다. (48쪽)

… the same sort of attention to continuity can be found in Geertz’s statements about Western cultures. Cultural idioms may differ from place to place, and they may change over time to some extent, but according to his argument, “cultural frame[s]” or “master fictions” construct politics and political leaders,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This is the same everywhere, whiter it be “Germany or France, India ot Tanzania(to say nothing of Russia of China).”58

국가적 의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대한민국은 안 망하는 게 용할 정도로 실패적이다. 껍데기만 따라하는 전전 일본의 의례는 허망하다.

1.4 시각적 지배(Visual Domination)

나를 비롯한 다수의 천황제 학자들은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모더니스트들이나 강좌파(講座派)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지탱되어 온 견해, 즉 일본 근대사에서 천황제가 돌출한 것은 일본의 근대성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이 반영된 결과라는 견해를 다각도로 비판하기 시작했다.(62) 내가 제안하듯이 천황을 근대의 원형감시적(panoptic) 국가의 중심에 재배치한다면, 국가와 천황에 대한 숭배가 비교적 근대에 창안된 것이라는 점, 아울러 천황제가 결코 ‘봉건성’을 그 특질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본의 근대성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푸코의 틀을 전용하기는 하지만, 이른바 ‘감시의 사회’에 대한 푸코의 역사적 분석과 나의 분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푸코가 근대사회의 성립을 군주제 또는 적어도 ‘군주적 권력’의 쇠퇴와 결부시킨 데 반해, 나는 일본에서 두 종류의 권력이 동일한 역사적 순간에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54쪽)

천황제를 일본의 근대성의 중심에 둔다는 제한적 의미에서, 나의 입장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근대화 이론가인 존 휘트니 홀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일본의 천황제」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글에서, 홀은 일본의 천황제가 근대성과 양립할 뿐더러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타협할 수 없는 점에서 나의 전망과 근대화 이론가들의 그것은 다르다. 첫째로 나는 일본의 천황제와 국민국가를 비판하는 데 반해, 홀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공격적인 글에 맞서서 천황제를 옹호했다. 사실 홀은 메이지 시기 이후든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든 사회적 안정을 제공하고 일본인에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고취시킨 천황제의 능력을 높이 샀다. (54쪽) …

… 따라서 나와는 대조적으로 홀의 해석은 일본이 19세기와 20세기에 경험한 온갖 부정적인 측면을 사뭇 모호하게 이해되는 전근대의 과거 탓으로 돌렸다. 홀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의 친근한 얼굴을 하고 ‘진보’—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방으로 정의되었던 진보—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19세기와 20세기의 일본에 등장한 국민적 근대성에 대해 전혀 무비판적이었다. 달리 말해서 홀은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적 지식틀 또는 인식론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모더니스트를 공격했지만, 실은 그들과 전망을 공유했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비극은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 그리고 아마도 천황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전망을.(63) (55쪽)

2장 행재소에서 제국의 수도로(From Court in Motion to Imperial Capitals)

예컨데 일본에서 국가역사상 중요시되는 공공장소, 이를테면 이세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사, 황거(皇居), 교토 등지를 대상으로 한 수학여행은 이미 1880년대에 시작되어 20세기에는 거의 모든 소학교의 관행이 되었다.(1) (60쪽)

(1) 일본 학교 소풍의 발전에 관한 뛰어난 개관으로는 山本信良・今野敏彦, 『近代敎育の天皇制イデオロギー』(新泉社, 1973), pp. 182~240을 보라. (314쪽)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 수학여행의 기원.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을 것만 같던 런던, 워싱턴, 캔버라 같은 도시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시각적인 장엄함을 위해 기획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도쿄 역시 고쿄 앞 거리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바쿠후 말기에 파괴되었던 것 위에 새로이 근대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고쿄에 왜 큰 건물이 없나 궁금했는데, 이 역시 바쿠후 초기에 소실된 것을 그 이후에 복원하지 못 한 것이었다. 덴노의 국화 문장 자체가 메이지 이신 이전에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다.

2.2 옥렴을 걷고 나오다(Out from behind Jeweled Curtains)

오쿠보는 사람들은 그 구별 없이 누구나 천하의 주인이신 분(즉 신[神])께 지극한 감사를 드리도록 해야 하며, (그래야만) “이른바 비천한 창생(蒼生)에게 기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는 천황이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우받아 “옥렴(玉簾) 뒤에서 소수의 공가(公家)에 둘러싸여” “백성의 부모로서 천부(天賦)의 직분”을 다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천도의 예’(遷都の典)뿐이다.(28) 천황을 ‘구름 위’(雲上)에 사는 자로, 공가를 ‘구름 위의 사람들’(雲上人)로 여기면 천황 자신도 스스로를 존대고귀(尊大高貴)한 사람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고, “마침내는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75쪽)

메이지 이신의 주역 중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글. 일본 근대에 등장한 평등의 목소리는 마치 서양의 평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나, 자세히 들어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 위에 사람 없다’면서 조선인은 제외했다. (서양도 흑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것을 뒷받침 하는 논리는 바로 이런 일본 특유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이것은 서양의 영향 뿐 아니라 일본의 고쿠가쿠(国学)와도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평등주의도 서양과 비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곳곳에서 푸코의 이론을 적용하는데, 역사적인 서술에 남의 문화이론을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듯 하여 세련되 보이지 않는다. 따로 장을 할애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2.4 행제소에서 제국의 수도로(From Temporary Court to Imperial Capital(teito))

그러나 이 재정적·기술적 이유만으로는 대화재와 공식적 재건까지의 11년이라는 간격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지연사유가 오로지 재정적인 것이라면, 왜 11년이나 지나서 하필이면 대장경(大藏卿)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의 디플레이션 정책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같은 대규모 항거 재건공사가 시작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 정부 (103쪽) 지도자들이 건축 사업을 최우선과제로 여겼다면, 새 황거의 건축양식에 관한 이견을 정리하고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분명 5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착공을 질질 끌다가 갑자기 황거공사에 착수하고 그 주변에 거대한 건물을 짓기 시작한 배경에는 지배엘리트의 황거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있어싿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대순행의 절정기와 일치하는 메이지 초기의 약 15년간 그들은 황거를 그저 천황의 주거로만 여겼다. (103쪽)

후쿠자와는, 마쓰다 미치유키 같은 사람들은 도쿄 항구를, 또 다른 이들은 워싱턴의 의사당 건물이나 다른 대건축물 같은 구조물을 세우자고 주장하지만, 가장 시급한 장기적인 대규모 사업은 황거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수도는 황거를 건설한 다음에 정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거는 “천장지구(天長地久)한 일본 역대 천황 폐하”를 위한 항구적 건물이며, “우리나라의 신성한 천자(天子)가 만국의 제왕 및 대통령과 교제의 예를 행할 곳”이므로 “국력을 다해 궁실(宮室)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짓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도 주변의 정비에 대해서도 그는 독자들에게 “국력에 맞추어 궁실을 화려하게 만들 뜻이 있다면 궁중(宮中)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궁 밖의 땅, 대문 밖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에서 전형적인 것이지만) 서민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그들의 일상생활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니혼바시 거리의 부유한 신사들 옆에 니코미야(煮翔屋, 국물장수)가 활보하고, 벽돌거리 긴자에서 빨랫줄에 걸어놓은 훈도시(犢鼻褌)가 펄럭이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황거의 현관 앞에 쓰레기 더미를 놓아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빈정댔다.(104) (108쪽)

(103) 후쿠자와는 그의 의견을 그가 1882년에 창간한 『지지 신보』(時事新報) 1883년 6월 7·8일자에 「首府改造と皇居御造營と」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 (321쪽)

2.5 국가적 풍경과 국민적 내러티브(National Landscape and National Narrative)

메이지 유신 직전에도 지방에 쇼콘샤들이 있었지만,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은 새 정부가 들어선 뒤였다. (127쪽) 전몰자 위령소 연구자에 의하면 1865~1870년의 짧은 기간에 공식 지원을 받은 신사가 105개나 생겼고, 오늘날 적어도 105개의 쇼콘샤가 남아 있다고 한다.(138) (128쪽)

달리 말해서, 근자의 많은 내셔널리즘 이론가들이 국민 형성의 구심점(139)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국민의 공유시간을 표현하는 내러티브가 일본에서는 일상세계의 주변 건물에 씌어져 왔던 것이다. (128쪽)

이음매가 드러나면 그 틈을 비집고 다른 종류의 도전—예컨대 메이지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구현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막아 버리는 한 예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동상을 우에노 공원에 세운 일이다. 그의 동상은 메이지 정부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그의 믿음을 혹시라도 사람들이 기억할까 봐 가고시마(鹿兒島, 1877년 새 정부에 맞서 사쓰마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저항 중심지)가 아니라 에도 성을 향해 세워졌다. (129쪽)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와 견해들이 끊임없이 제시된다. 그런데 그 사실들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그리 강한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일본과는 다른, 서양 스타일의 책을 보는 느낌이다.

3.1.4 전쟁의례와 시각적 지배
1장 1절에서 언급한 「聖徳皇太子尊職人立願の図」와 「大觀兵式行辛の光景」(1906, 책 표지 그림)(그림 10), 또 같은 해 나온 기념엽서(그림 11)의 도상을 비교한다. 1906년의 두 도상에서는 천황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푸코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푸코에 의하면, 구체제하에서 권력과 정의의 원천인 왕은 백성들에게 가시적인 존재였다. 그는 궁정의식을 비롯하여 여러 공적인 스펙터클을 통해 백성들에게 그 화려함을 발산하는 권력의 발광체였다. 이것은 푸코가 ‘상향하는 개인화’(ascending individualization)라고 부른 체계, 즉 권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큰 주목을 받는 체계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권력이나 특권을 많이 소유할수록 그 사람은 의례나 기록이나 시각적 재생산에 의해 두드러진 개인으로 나타난다.”(74) 따라서 군주는 가장 특출난 존재였고, 반면에 통치의 객체는 비가시적인 익명의 대중이었다. 군주의 권력은 건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18세기 말 이전까지 “건축술은 권력과 신성, 힘 같은 것을 현시할 필요성과 호응하고 있다. 궁전과 교회는 요새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건축형태였다. 건축은 주권자와 하느님을 나타낸다.”(75)

규율적 권력의 체계에서는 가시성이 완전히 역전된다. 권력은 비가시적이고 익명성을 띠어서 소재를 파악할 수 없지만, 권력의 객체는 완벽하게 조명된다. 이것이 ‘하향하는 개인화’(descending individualization)의 체계, 즉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명확하게 개인화되는 체계이다. 따라서 “규율의 체계에서는 아이가 어른보다, 건강한 자보다 환자가, 정상인이나 모범시민보다 광인이나 우범자가 더욱 개인화된다.”(76) (185쪽)

푸코의 이론은 일본 근대의 풍경을 설명하는 데 그럴듯한 시사점을 던져주지만, 이것을 일본의 근대화라는 상황 전체를 설명하는 데 간단히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까? 푸코는 자신의 담론을 어떤 차원에서 만든 것일까, 역사를 설명하는 틀로서 만든 것일까?

3.2 고물(古物)의 스펙터클(Spectacles of Antiques)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에 등장했던 고풍의 의상과 고풍의 물건들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건축물의 스펙터클을 물건들이 보충해준다는 건가? 물건이 주는 고색창연함은 좋은 주제인 거 같은데, 다른 장에 비해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4.1 천황의 두 신체(The Emperor's Two Bodies)

스에마쓰는 역사학자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와 랄프 기시가 말년에 영국과 프랑스 왕위의 정신학적 측면에 관한 연구에서 도입한 ‘국왕의 두 신체’라는 개념을(4)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설파하고 일본의 천황제를 이와 비슷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처음 이론화한 사람일 것이다. 『국왕의 두 신체』(1957)에서 칸토로비치는 국왕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신체를 가졌다는 관념이 중세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썼다. 그는 이 허구적 관념이 엘리자베스 시대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지배적이었고 12세기에 약간의 변형을 거쳐 지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한편으로 국왕은 “타고난 또는 사고로 인한 질환, 유년기나 노년기의 정신박약, 그리고 일반인의 신체에 (유전적으로) 발생하는 장애 등에 굴복하는”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을 갖는다. 또 한편으로는 이 자연적 신체를 초월하여 정치질서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도 갖는다. 이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 않아 통제할 수 없으며, 정책과 정부를 구성하고 국민의 인도자가 되며 공공복리의 정신을 담아낸다. 이 신체는 자연적 신체가 겪는 유년기와 노년기, 기타 장애와 박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 이 명분을 갖고 국왕이 (201쪽) 정치적 신체로 행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신체의 결함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좌절될 수 없다.”(5)

주체사상이 이거 베낀 거였어? Ernst Kantorowicz의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는 저작권 계약을 한 출판사가 있다고 한다. 언젠가 번역판이 나오겠지.

저자는 일반적인 주장처럼 덴노의 이중성이 그리 극명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메이지 초기에는 신적인 면만큼 인간적인 면을 일깨워야 함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 생각난다, 그 이후로는 누구나 따라한) 이것이 「青山観兵式真図」(1868)(그림 18) 같은 마차 안에서 비추는 덴노의 모습을 만든다. 뭐랄까 이 책의 핵심은 이런 도상비교(?)인 거 같다.

그런데 제시된 주요 도상이 시간의 순서대로가 아니라서 좀 애매하다. 앞서 언급한 1906년의 도상(그림 10)은 이 이후의 작품인데, 덴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바뀌는 걸까? 아니면 더욱 발전된 형태인가? (나뭇잎으로 살짝 가렸으므로) 설명이 좀 부족한 거 같다. 더우기 같은 해의 도상 1은 추상적인 신이다.

4.2 성별화의 정치와 정치의 성별화

메이지 덴노의 사진이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 복식의 수동적인 이미지에서 근대 군복을 입은 남성의 이미지로 변화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것에서 근대 일본의 가족관에 미친 영향, 사회적인 역할 분담 등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논리를 잘 모르겠다. 3장 2절처럼 이 장도 좀 부실하다.

5.3 민중의 일상문화와 국가의 공식문화

규율적인 정부가 강요하는 새로운 습관 및 신앙과, 민중생활의 오래되고 때로는 무질서하기까지 한 습관과 사고방식 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다양한 국가장치—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와 병영—는 자신이 (284쪽)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의식은 일본 안에 감시의 사회가 창출되는 과정에서 천황의 응시에 상응하는 필숵인 요소였다. 이러한 패전트가 거행될 때—메이지 전반기에 천황의 순행길 연변에서든 아니면 메이지 후반기의 거의 모든 마을(村), 소도시(町), 도시(市)에서든—일본 전역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순종적인 행동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해서 대단히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주제로 옮겨 가야 한다. 즉 군주의 화려한 스펙터클과 동시에 일어난 무질서한 순간보다, 규율적인 훈련을 만들어낸 근대 일본의 수많은 제도들의 증식 쪽으로 말이다.(108) (285쪽)

이 책의 일본어 축약판 제목 ‘天皇のページェント’을 고려해 볼 때, 의식 자체에 대한 서술이 있는 5장 군중과 황실 패전트가 이 책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 장들에 비해 역사적인 자료 나열이 간소하고, 그 분석도 너무 뻔하게, 푸코를 곧이 곧대로 복창하는 것 뿐이다. 오히려 1장, 4장의 도상 분석과, 천황제를 서양의 근대국가 형성과 비슷한 보편적인 경향으로 본 관점이 값어치있는 거 같다.

외국 이론의 단순한 적용은 한국에서도 계속 일어나는 일인데, 무조건 그 외국 이론에 찬동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한국이라는 상황을 세밀히 뜯어보면 그 외국 이론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긴 한국에서는 이 정도의 적용도 찾기 힘들었던 거 같다.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서술된 역사적 자료를 푸코에 맞장구치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이 아깝다.(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지은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즉, 그에게 일본 연구는 외국 연구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 전체의 분위기나 분량 등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최근작으로는 Perilous Memories(2001)이 있다.)


박용숙 — 『샤먼 제국』(2010)

* 참고: 단군은 ‘옛 시리아의 신’…황당하다고?(한겨레)


우리 문화의 원류, — 서구 문화에 물들기 전, 나아가 중국 문화에 물들기 전. — 우리의 뿌리는 무엇일까?

그 뿌리를 찾아나선 많은 선각자들은 샤머니즘에서 발길을 멈췄다.

왜냐면, 이 한반도에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무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모든 전통 예술 역시 무당이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기독교가 워낙에 샤머니즘이 무슨 사이비 종교인 거처럼 공격해서 인식이 나빠졌는데, 외려 샤머니즘의 자리를 기독교가 대체했다. (경쟁자라서 공격했던 모냥) 샤머니즘이 뭔지 궁금한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 교회에서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연상하면 된다.

샤머니즘의 힘과 영향력은 강력하다. 누군가 신병을 앓다가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 누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인생의 어느 순간 무당을 떠올리는 일이 있다.

샤머니즘을 마치 자연발생적인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샤머니즘의 강력한 특징은 '배워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당골이 될 수 없다는 것. (요한이 없으면 예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체계는 복잡하고, 그 근원은 끝을 알 수 없다. 유럽에 까지 뿌리고 있는 그 흔적을 모두 하나의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논의에서 문제는 무엇일까? 서양과도 다른, 중국과도 다른, '우리 민족의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정신과 육체, 땅의 결합. 그것은 바로 일본식 극우 멘탈리티의 핵심인데, 나는 아직 못 버렸다.



成龍+王力宏+孫燕姿+韩红 — 站起来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선전물의 흥패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 사람이 봤을 때 멋지게 보이느냐 아니면 유치하게 보이느냐에 달린 거 같다.

站起来
我的爱牵着山脉
奔跑才有了期待
起点写着我的未来 嗨呀嗨呀
终点没有成与败

站起来
我的爱拥抱大海
超越不只是现在
跑过的精彩依然在 嗨呀嗨呀
泪水是胜利感慨 嗨呀

多少风雨的等待
穿越心灵彩虹告诉我的存在
生命真实的喝彩
我和你的崇拜
希望看见英雄奇迹般色彩

多少梦想的主宰
勇敢和我一起用心赢回真爱
彼此距离不在
你和我的竞赛
站起来终点没了起点也会在

한국
네 집 앞 공공도로의 눈은 네가 치워라, 안 치운다면 벌금을 메기겠다.

네 초가집을 네 손으로 양옥집으로 바꿔라, 바꾸지 않는다면 헐어 버리겠다.

네 공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점수가 나쁘면 때리겠다.

네 아이는 네가 키워라, 사회에 받아줄 곳은 없지만.
에밀레종
오늘(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KBS1 역사스페셜에서 '에밀레종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성덕대왕신종을 다뤘다. 전반부는 종의 고리 부분에 있는 대나무 모양을 만파식적과 연결시키고(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아직 생소하기도 한), 후반부는 에밀레종 전설을 혜공왕과 관련된 정치 현실의 비유로 해석했다.

내 생각에 에밀레종 전설을 혜공왕과 연결시키는 건 좀 어려운 일인 거 같다.

1. 우선 이 전설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 문헌 자료가 없다는 것은 프로그램에서도 언급했는데, 후반부 인터뷰에서 모두 이 전설이 천년이 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역사스페셜이 나름 중후한 프로그램이지만 가끔 사기를 친다. 주의해서 봐야 한다.

2. 억울한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에는 괴롭히는 악당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악당이 있는가? 재산이 없어 자식이라도 공양하겠다는 어머니가 악당인가? 사양하고 돌아갔는데 부처의 계시를 받은 중이 악당인가? 이런 일을 억지로 시킨 부처가 악당인가?

또한 내용 자체도 그저 슬프고 기괴한 이야기일 뿐이지 강자에 대한 억울함이 담겨져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현상(종소리 또는 종이름)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각색해낸 스타일의 이야기에 가깝다.

3. 프로그램에서 이게 '야만적'인 일이라고 했는데, 인신공양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와 유교에 넘친다. 불교에 포섭된 인도 전설까지 생각하면 에밀레종 전설이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유교의 전설은 보통 부모를 위해 희생하고, 불교(또는 인도) 전설은 보통 수행자(중)나 불법을 위해 희생하는데, 에밀레종 전설은 쌩뚱맞게도 '종'을 위해 희생한다.

기독교에서 종을 중시하고, 교과서에도 종 얘기만 나오니까 종을 불교의 상징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종은 북, 목어, 운판과 함께 4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즉 그 중요성이 북이나 목어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게다가 이것들이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할 것이다. 4분의 1 쪽 짜리 상징에 어린애 목숨을 바치는 전설은 정통적인 불교 관념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 엄마를 찾는 어린이의 한맺힌 목소리가 중생을 계도하고자 하는 불교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전설은 마치 불교를 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법을 숭상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친구
노벨 문학상 후보 고은

사진: 박정호(노컷뉴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82223

언젠가부터 고은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보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왜 매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고은의 유명한 시 몇구절을 말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었으니 받아 마땅하지 않겠느냐고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노벨 문학상은 시를 가장 아름답게 지은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노벨 평화상을 가장 착한 일 한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듯이)

기존 수상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 우선 형식, 구성, 주제 등에서 문학적으로 참신한 시도인 경우가 많다. (2) 다음으로 그 글이 인류(서양인)에 대한 깊은 보편적 통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것이 주제와 관련된 민족이나 사회, 또는 개인의 현실에 대한 깊은 침잠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어떤 방향성이든 환영받는 것은 아닌데, 약간은 보수적인(그리고 서유럽 중심적인) 관점에서 선택하는 거 같다. 고은의 시에 실린 일종의 불교적 에토스를 가르키며 대단한 사상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사상이라기보다 좀 나이브한 한국 불교의 특성에서 기인한 감상에 가깝다고 본다. 혹 그것이 정말 대단한 사상일지라도 독창성에서 점수를 얻기 힘들 것이다.

(3) 노벨 문학상은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도 좀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 신예 작가에게 상을 주기보다는, 세계(주로 서유럽) 지식인에게 영향력을 비교적 오랜 기간 행사한 작품에 주는 경우가 많다. 노벨상 받기 전에 늙어 죽었다는 이야기나, 뭘 썼는 지 다 잊었는데 상을 받았다는 인터뷰가 나오기도 한다.

근년에 고은 작품의 영역(English Translation)이 많았다고 하는데,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서유럽에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는 없는 데다, 한국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고은의 시에서 한국어를 빼 버리면 그냥 말장난만 남는다. (나는 고은의 시에서 별다른 알맹이를 발견하지 못 했다. 어쩌면 한국 불교의 모호한 학적 수준을 반영하는 거 같다)

김치국 마시기 전에, 고은의 작품과 고은이라는 인간에 대한 심도있는 비평과 해설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얼마나 출간되었는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한국에는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 고은은 노벨 문학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물론 한국어로 그의 작품을 들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이 노벨 문학상과 연결되어야 할 필연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고은의 노벨 문학상에 연연하는 것은 우리 것에 대한 조금 비뚤어진 사랑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활발한 활동을 고려해보면 개인의 욕심에서 연원한 것일 수도 있겠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도 자리 욕심이 아주 많다.)

p.s 나는 고은의 시 자체가 한국어를 아름답게 조탁해서 생산되어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감상적인 파편들을 하나씩 던져서 만들어 낸 일종의 신파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p.s 이렇게 따지면 한국의 알려진 문필가 사이에 노벨 문학상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p.s 김대중 이후로 한국에 노벨상 안 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p.s 대놓고 노벨상 로비하는 나라는 한국 뿐일 듯.
단군신화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일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오매불망 망한 것을 아쉬워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기자조선을 숭상하였다. 이와 관련된 실록의 기사는 깜짝 놀랄 정도다. 무려 '대왕' 세종이 단군 사당을 매우 의례적으로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한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의 나라들은 물론 각 씨족들도 제각각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또 각 씨족과 국가들 간에 하나의 핏줄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다른 오랑캐로 여겼다. 최치원의 글에서 고구려는 그저 썅 오랑캐일 뿐이다.

단군신화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문헌에 등장한다. 어쩌면 제각각이던 신화를 하나로 묶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려면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만약 단군신화가 매우 중요한 신화였다면 삼국유사보다 100년 앞선 삼국사기에 간단한 내용이나마 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 단군신화가 조명된 것도 외세의 압력을 강하게 받는 와중에 민족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지식인들의 자연적인 반응 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영토가 신라나 고려, 조선과 일치하는가? 고조선의 유민들이 삼국을 세웠는가? 그렇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시대에 남아있던 단군과 관련된 종교적 상징들의 면면들도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풍습에서 단군신화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단군신화와 그리 강하게 엮여 있지 않다.
백종
백종(百種), 음력 7월 15일. (양력으로는 2009년은 9월 3일) 백가지 종류의 씨앗을 갖춰놓았다는 뜻으로 수확이 많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 추석과 비교된다.

농사일을 쉬고 농업이나 농경신과 관련된 행사를 하며 논다. 큰 장이 서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반대로 바다에서 일을 더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날 해수욕을 하는 곳도 있다.

불교에서는 백중(百中)이라 부르며, 특히 목련존자가 지옥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오미백과(五米百果)로 우란분회를 연 날로 우란분절이라고도 부른다. [우란분경] 이를 망혼일로 여겨 절에서는 천도를 비는 행사를 한다. (헌금이 늘어나는 기간인 듯)

신라 이후 조선 초까지는 이 불교 풍습이 민간에서도 널리 펴젔던 거 같다. [동국세시기, 형초세시기, 송남잡식, 용재총화] 또 이 날은 중들의 하안거가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도교의 중원(中元)도 같은 날이다. 인간의 선악을 기록한 것을 확인하는 삼원일 중 하나다. 그래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산진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농업, 어머니, 바다, 저승, 선악 등의 상징이 섞여 있어 흥미로운데,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다.

p.s 우란분경 내용 다시 보니까 이거 너무 짜고 만든 내용 같다;;; 어렸을 땐 살짝 감동하면서 봤는데. 도교도 이 행사가 유행하니까 따라서 중원절을 만든 거 같다.

p.s 그러니까 인도나 중동 쯤에서 연원한 농경 관련 행사가 불교를 통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서 2000년 가까이 지속된 것. 아마 지중해 쪽에도 찾아보면 비슷한 게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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