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에 해당하는 글 : 107 개
2010/01/07 :: 한국 (1)
2009/11/29 :: 에밀레종 (4)
2009/10/26 :: 우리의 친구
2009/09/21 :: 단군신화
2009/08/30 :: 백종
2009/02/28 :: 분신 (2)
2009/02/22 :: 인용
2009/02/08 :: 「속 타락론」 (3)
2009/02/06 :: 『일본어의 근대』 (4)
2009/01/16 :: 당초무늬 (2)
2009/01/16 :: 남걱정

* 참고: 단군은 ‘옛 시리아의 신’…황당하다고?(한겨레)


우리 문화의 원류, — 서구 문화에 물들기 전, 나아가 중국 문화에 물들기 전. — 우리의 뿌리는 무엇일까?

그 뿌리를 찾아나선 많은 선걱자들은 샤머니즘에서 발길을 멈췄다.

왜냐면, 이 한반도에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무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모든 전통 예술 역시 무당이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기독교가 워낙에 샤머니즘이 무슨 사이비 종교인 거처럼 공격해서 인식이 나빠졌는데, 외려 샤머니즘의 자리를 기독교가 대체했다. (경쟁자라서 공격했던 모냥) 샤머니즘이 뭔지 궁금한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 교회에서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연상하면 된다.

샤머니즘의 힘과 영향력은 강력하다. 누군가 신병을 앓다가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 누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인생의 어느 순간 무당을 떠올리는 일이 있다.

샤머니즘을 마치 자연발생적인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샤머니즘의 강력한 특징은 '배워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당골이 될 수 없다는 것. (요한이 없으면 예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샤머니즘의 체계는 복잡하고, 그 근원은 끝을 알 수 없다. 유럽에 까지 뿌리고 있는 그 흔적을 모두 하나의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논의에서 문제는 무엇일까? 서양과도 다른, 중국과도 다른, '우리 민족의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정신과 육체, 땅의 결합. 그것은 바로 일본식 극우 멘탈리티의 핵심인데, 나는 아직 못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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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선전물의 흥패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 사람이 봤을 때 멋지게 보이느냐 아니면 유치하게 보이느냐에 달린 거 같다.

站起来
我的爱牵着山脉
奔跑才有了期待
起点写着我的未来 嗨呀嗨呀
终点没有成与败

站起来
我的爱拥抱大海
超越不只是现在
跑过的精彩依然在 嗨呀嗨呀
泪水是胜利感慨 嗨呀

多少风雨的等待
穿越心灵彩虹告诉我的存在
生命真实的喝彩
我和你的崇拜
希望看见英雄奇迹般色彩

多少梦想的主宰
勇敢和我一起用心赢回真爱
彼此距离不在
你和我的竞赛
站起来终点没了起点也会在

네 집 앞 공공도로의 눈은 네가 치워라, 안 치운다면 벌금을 메기겠다.

네 초가집을 네 손으로 양옥집으로 바꿔라, 바꾸지 않는다면 헐어 버리겠다.

네 공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점수가 나쁘면 때리겠다.

네 아이는 네가 키워라, 사회에 받아줄 곳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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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KBS1 역사스페셜에서 '에밀레종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성덕대왕신종을 다뤘다. 전반부는 종의 고리 부분에 있는 대나무 모양을 만파식적과 연결시키고(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아직 생소하기도 한), 후반부는 에밀레종 전설을 혜공왕과 관련된 정치 현실의 비유로 해석했다.

내 생각에 에밀레종 전설을 혜공왕과 연결시키는 건 좀 어려운 일인 거 같다.

1. 우선 이 전설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 문헌 자료가 없다는 것은 프로그램에서도 언급했는데, 후반부 인터뷰에서 모두 이 전설이 천년이 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역사스페셜이 나름 중후한 프로그램이지만 가끔 사기를 친다. 주의해서 봐야 한다.

2. 억울한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에는 괴롭히는 악당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악당이 있는가? 재산이 없어 자식이라도 공양하겠다는 어머니가 악당인가? 사양하고 돌아갔는데 부처의 계시를 받은 중이 악당인가? 이런 일을 억지로 시킨 부처가 악당인가?

또한 내용 자체도 그저 슬프고 기괴한 이야기일 뿐이지 강자에 대한 억울함이 담겨져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현상(종소리 또는 종이름)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각색해낸 스타일의 이야기에 가깝다.

3. 프로그램에서 이게 '야만적'인 일이라고 했는데, 인신공양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와 유교에 넘친다. 불교에 포섭된 인도 전설까지 생각하면 에밀레종 전설이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유교의 전설은 보통 부모를 위해 희생하고, 불교(또는 인도) 전설은 보통 수행자(중)나 불법을 위해 희생하는데, 에밀레종 전설은 쌩뚱맞게도 '종'을 위해 희생한다.

기독교에서 종을 중시하고, 교과서에도 종 얘기만 나오니까 종을 불교의 상징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종은 북, 목어, 운판과 함께 4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즉 그 중요성이 북이나 목어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게다가 이것들이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할 것이다. 4분의 1 쪽 짜리 상징에 어린애 목숨을 바치는 전설은 정통적인 불교 관념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 엄마를 찾는 어린이의 한맺힌 목소리가 중생을 계도하고자 하는 불교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전설은 마치 불교를 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법을 숭상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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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정호(노컷뉴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82223

언젠가부터 고은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보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왜 매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고은의 유명한 시 몇구절을 말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었으니 받아 마땅하지 않겠느냐고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노벨 문학상은 시를 가장 아름답게 지은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노벨 평화상을 가장 착한 일 한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듯이)

기존 수상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 우선 형식, 구성, 주제 등에서 문학적으로 참신한 시도인 경우가 많다. (2) 다음으로 그 글이 인류(서양인)에 대한 깊은 보편적 통찰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것이 주제와 관련된 민족이나 사회, 또는 개인의 현실에 대한 깊은 침잠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어떤 방향성이든 환영받는 것은 아닌데, 약간은 보수적인(그리고 서유럽 중심적인) 관점에서 선택하는 거 같다. 고은의 시에 실린 일종의 불교적 에토스를 가르키며 대단한 사상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사상이라기보다 좀 나이브한 한국 불교의 특성에서 기인한 감상에 가깝다고 본다. 혹 그것이 정말 대단한 사상일지라도 독창성에서 점수를 얻기 힘들 것이다.

(3) 노벨 문학상은 수상자 선정에 있어서도 좀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 신예 작가에게 상을 주기보다는, 세계(주로 서유럽) 지식인에게 영향력을 비교적 오랜 기간 행사한 작품에 주는 경우가 많다. 노벨상 받기 전에 늙어 죽었다는 이야기나, 뭘 썼는 지 다 잊었는데 상을 받았다는 인터뷰가 나오기도 한다.

근년에 고은 작품의 영역(English Translation)이 많았다고 하는데,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서유럽에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는 없는 데다, 한국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고은의 시에서 한국어를 빼 버리면 그냥 말장난만 남는다. (나는 고은의 시에서 별다른 알맹이를 발견하지 못 했다. 어쩌면 한국 불교의 모호한 학적 수준을 반영하는 거 같다)

김치국 마시기 전에, 고은의 작품과 고은이라는 인간에 대한 심도있는 비평과 해설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얼마나 출간되었는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한국에는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 고은은 노벨 문학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물론 한국어로 그의 작품을 들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그 소중함이 노벨 문학상과 연결되어야 할 필연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고은의 노벨 문학상에 연연하는 것은 우리 것에 대한 조금 비뚤어진 사랑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활발한 활동을 고려해보면 개인의 욕심에서 연원한 것일 수도 있겠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도 자리 욕심이 아주 많다.)

p.s 나는 고은의 시 자체가 한국어를 아름답게 조탁해서 생산되어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감상적인 파편들을 하나씩 던져서 만들어 낸 일종의 신파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p.s 이렇게 따지면 한국의 알려진 문필가 사이에 노벨 문학상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p.s 김대중 이후로 한국에 노벨상 안 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p.s 대놓고 노벨상 로비하는 나라는 한국 뿐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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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일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오매불망 망한 것을 아쉬워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기자조선을 숭상하였다. 이와 관련된 실록의 기사는 깜짝 놀랄 정도다. 무려 '대왕' 세종이 단군 사당을 매우 의례적으로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한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의 나라들은 물론 각 씨족들도 제각각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또 각 씨족과 국가들 간에 하나의 핏줄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다른 오랑캐로 여겼다. 최치원의 글에서 고구려는 그저 썅 오랑캐일 뿐이다.

단군신화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문헌에 등장한다. 어쩌면 제각각이던 신화를 하나로 묶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려면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만약 단군신화가 매우 중요한 신화였다면 삼국유사보다 100년 앞선 삼국사기에 간단한 내용이나마 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 단군신화가 조명된 것도 외세의 압력을 강하게 받는 와중에 민족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지식인들의 자연적인 반응 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영토가 신라나 고려, 조선과 일치하는가? 고조선의 유민들이 삼국을 세웠는가? 그렇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시대에 남아있던 단군과 관련된 종교적 상징들의 면면들도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풍습에서 단군신화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단군신화와 그리 강하게 엮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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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百種), 음력 7월 15일. (양력으로는 2009년은 9월 3일) 백가지 종류의 씨앗을 갖춰놓았다는 뜻으로 수확이 많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 추석과 비교된다.

농사일을 쉬고 농업이나 농경신과 관련된 행사를 하며 논다. 큰 장이 서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반대로 바다에서 일을 더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날 해수욕을 하는 곳도 있다.

불교에서는 백중(百中)이라 부르며, 특히 목련존자가 지옥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오미백과(五米百果)로 우란분회를 연 날로 우란분절이라고도 부른다. [우란분경] 이를 망혼일로 여겨 절에서는 천도를 비는 행사를 한다. (헌금이 늘어나는 기간인 듯)

신라 이후 조선 초까지는 이 불교 풍습이 민간에서도 널리 펴젔던 거 같다. [동국세시기, 형초세시기, 송남잡식, 용재총화] 또 이 날은 중들의 하안거가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도교의 중원(中元)도 같은 날이다. 인간의 선악을 기록한 것을 확인하는 삼원일 중 하나다. 그래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산진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농업, 어머니, 바다, 저승, 선악 등의 상징이 섞여 있어 흥미로운데,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다.

p.s 우란분경 내용 다시 보니까 이거 너무 짜고 만든 내용 같다;;; 어렸을 땐 살짝 감동하면서 봤는데. 도교도 이 행사가 유행하니까 따라서 중원절을 만든 거 같다.

p.s 그러니까 인도나 중동 쯤에서 연원한 농경 관련 행사가 불교를 통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서 2000년 가까이 지속된 것. 아마 지중해 쪽에도 찾아보면 비슷한 게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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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곳의 케이블 TV 지역광고 때리는 것 중에 '어디어디의 후곡뼈다귀는 가짜입니다. 우리가 원조입니다'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실은 그 집이 늦게 생긴 곳이고, 가게도 '후곡'에 있지 않다. 원조는 아직도 후곡 쪽에 있다.

한국에서 이런 원조 논쟁—정확히는 사기—를 심심찮게 본다.

아무튼 이렇게 광고하는 집도 맛은 있고, 중심가에 있어 손님도 많다고 한다.

p.s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사기를 쳐서라도 '원조'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을만큼 '원조' 마케팅이 유용한 도구인 거고. 한편으로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원조'라는 말, 즉 전통이 무엇인지 분별해 내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사기나 거짓을 단죄하는 문화가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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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7일 토요일

엊그제 도서관에서 빌린 뒤로 계속 이 책만 읽고 있다. 지은이의 눈으로 본 동경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 근대사가 아주 흥미진진하다. (제목과는 달리 덴노 얘기는 약간 곁가지다. 『文藝春秋』 연재 제목은  「나의 동경대론」(私の東大論). 동경대 자체도 주된 주제라고 하긴 어렵고, 더 정확히는 '동경대를 중심으로 본 일본 근대사' 정도 되겠다.)

책이 두꺼워서 과연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1권만 1159쪽, 2권까지 합하면 2286쪽) 원래 잡지 연재물이라서 그런지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읽어갈 수 있다. 지은이가 자신의 글쓰기 작업의 3분의 1은 좋은 표현을 찾는데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생각난다. (『내가 읽은 책.재미없는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경이의 속독술』(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 서론)

일본 근대에 관한 책을 읽으면 언제나 머리 속에는 한국의 현대가 함께 떠오른다. 이 책 역시 일본 근대 뿐 아니라 우리의 모습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책은 일본어 외래어 표기법을 철저히 지켰다. 일본어 외래어 표기법 준수한 책은 처음 보는 듯. 그런데 일본어 원어를 생각해내는데 심히 헷갈린다.

한권 사다 놓을까 생각 중. 아 근데 두권 합치면 8만원;;;

2009년 3월 10일 화요일

20장을 읽고 있다. 여전히 재미는 있는데, 역사관이 좀 질린다. 개인의 의도나 사적인 감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 개인이 남긴 말을 가지고 그 진의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것. 개인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일본 책들에 전반적으로 이런 경향이 있다. 지은이가 기본적으로 저널리스트라는 것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을 수록 서울대 문화의 대부분이 동경대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는 역사적 맥락 없이 유습을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추종한다. 심지어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도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자꾸 든다.

2009년 3월 11일 수요일

난 '격동 XX년', '실록! XXX' 같은 류의 글에 그닥 흥미도 없고, 또 그것들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약간은 그런 류의 이야기이다. 그 사건의 배후는 누구, 그때 누구는 무엇을 했더라. 역사 서술도 쉽지 않다. 뼈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고유한 체통이 있고 고유한 정신이 있고 국체의 정화가 만고에 빼어나니 무엇이 들어와도 감히 빼앗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들어온 것이 모두 우리에게 동화된다. 이것이 우리 일본이 수천 년 역사를 거듭하며 그 큰 정신을 잘 보유한 까닭이다.
—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의 의견서(1919) (688쪽)

우리나라 사상계는 혼란 상태요 무정부 상태이다. 그러나 그 사상이란 것이 대부분 외래 사상의 번역사상이요 중계사상이며 스스로 창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중략) 이럴 때야말로 성실하게 연구하는 학자가 필요하다. 특히 제국대에서 교편을 잡는 학자는 우리나라의 근본사상을 기초로 하여 각종 외래사상을 철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 지를 판별하여 우리나라에 동화시킬 것은 동화시키고 동화시켜서는 안 될 것은 동화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 다케우치 가쿠지(竹内賀久治), 「모리토 문제 연구」(1919) (6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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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オレの心は負けてない)(2009)에서 기억에 남는 것:

1.

93년 한두레가 일본에서 위문 공연을 하고 한복을 송신도에게 선물하는데, 송신도는 한복 입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일본 옷(기모노)를 달라고 소리친다.

조국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2.

어설프게 기독교 선교하는 윤정옥. 「낮은 목소리」에서도 팔푼이로 나오더니. (이분이 원래 기독교가 전공이다)

3.

국가라는 것이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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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9일 목요일

도피, 향락, 취락 생활에 탐닉하는 이른바 ‘두어라 노세’의 행락 문화는 한국문화의 타락한 혼동상을 대변하는 말인데, 개탄론자들은 이것이 한국인의 치유할 수 없는 원초적 기질 내지 속성에 기인한다고 그럴 듯하게 강변하는 예가 허다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개탄론의 매우 합리적인 논거가 애초에 조윤제의 ‘두어라 노세’론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논거로 삼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견해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 9쪽

2009년 3월 2일 월요일


이 글을 좀 더 자세히 읽고 정리했으면 하는데, 책 반납 시간이 되어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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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焚身)이 (일본의) 할복(陰腹일 수도 있겠다) 비슷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대상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장을 하는 것.

다른 나라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지? 오히려 그보다는 테러를 선택하지 않을까? 조선시대에 상소 올리며 자진한 사람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몇이나 되는지?

목숨을 버리며 주장한 것이 사회에 별로 먹히지도 않는 거 같다. 이를테면 전태일 이후에 노동법이 준수되고 근로자의 권익이 향상되었는가 묻는다면 부정적인 답이 나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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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3일 월요일

그러나 우리는 늘 우리 고전 작품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다. 가령 영어를 국어로 하는 나라의 학교 교육에서, 학생들은 그들의 국어 시간에 어느새 셰익스피어의 세계에 또는 밀턴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국어 시간에서는, 학생들이 어느새 송강(宋江) 또는 고산(孤山)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는 것인가? 저들이 「햄릿」의 세계 또는 「실락원(失樂園)」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과연 「관동별곡」의 세계 또는 「사미인곡」의 세계에서 우리의 영혼을 쓰다듬을 길이 있다는 말인가? — 32~33쪽

공감이 가는 문제 제기. 필자의 답은 「관동별곡」도 나름대로 짜임이 있다는 이야기.

「관동별곡」을 사실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으로서 읽어보라. 관동 산수의 여정(旅程)은 단지 작가의 생애의 한 순간을 차지했던 외적 체험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目的)과 추구(追求)와 방황(彷徨)과 회귀(回歸)라는 인간 생명의 보편적 역정(歷程)에 대한 내적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니 그 형식은 마땅히 기(起)-승(承)-전(轉)-결(結)의 4단 구성이어야 한다. 강원도 관찰사 부임과 관내 순력으로 시작된 제1단과, “營中(영듕)이 無事(무ᄉᆞ)ᄒᆞ고 時節(시졀)이 三月(ᄉᆞᆷ월)인 제”로 이어지는 내금강 등정의 제2단과, “山中(산듕)을 ᄆᆡ양 보랴, 東海(동ᄒᆡ)로 가쟈ᄉᆞ라”로 전환되는 외-해금강 및 동해안 하행의 제3단과, “져근 덧 밤이 드러 風浪(풍낭)이 定(뎡)ᄒᆞ거ᄂᆞᆯ”로 마무리되는 관동 여로 종착역 망양정(望洋亭)에서의 하룻밤이 제4단이 그것이다. — 34~35쪽

그러나 그가 제시한 방법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국문학 혹은 국어 교과서에서 느꼈던 불만에 위안도 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관동별곡」이 적어도 실증적 문필이 아닌 한, 이것을 인생의 목적과 추구와 방황과 회귀라는 인간 생애의 보편적 역정(歷程)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럴 만한 자유를 가진다. — 57쪽

분석은 대부분 카를 융과 프로이트의 몇몇 이론을 단편적으로 적용한 것인데, (제목의 ‘가면’도 페르소나를 의미하는 것인 듯) 이것을 과연 문학을 ‘자유롭게’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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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는 고통스럽게도 사멸해 가는 것을 사람들은 마치 과거와 순수문학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의 추구야말로 불멸의 독일정신의 생생한 원천인 것이다. 독일정신은 일체의 예속을 초월하여 숭고한 것이며 일체의 타국의 속박을 조만간에 다시금 분쇄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오로지 교양을 높이고 순화되어 본래의 천성과 자유를 다시금 웅켜쥐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이 불멸의 옛 영웅시문학 만큼이나 독일인의 마음에 위안이 되고 진정한 감화를 준 것도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시가는 실로 오랜 망각에서 깨어나 소생하여 여기에 그 신선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모든 시대와 민족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작품들 중에 하나인 《니벨룽겐의 노래》는 순전히 독일인의 생활과 감성으로부터 생성되었으며, 장구한 세월 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민족시의 가장 숭고하고도 완벽한 기념비로서 불과 몇몇 작품으로 전해져 오는 여타의 중요한 민족시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며 에르빈 폰 슈타인바하(Erwin von Steinbach)의 거대하고 경이로운 건축물에 비견할 만하다. 다른 어떤 노래도 이 노래만큼 조국애를 감동적으로 휘어잡고 고무시키지는 못하리라. (……)이 노래 속에서 젊은이다운 영웅적 자태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대담하고도 기사도적인 재담과 패기, 자부심과 포부, 봄의 화사함으로 치장된 당당하고도 애교스러운 처녀들, 고매한 훈육, 소박하고 경건하며 친밀감 있는 풍속, 섬세한 수줍음과 염치, 사랑스럽고 희열로 가득 찬 민네의 유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이 노래 속에서는 몸서리처지도록 뒤얽힌 숙명이 또 다른 감미로운 사랑을 방해하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몰락으로 이끌어가지만, 그러나 바로 이러한 파국을 통해 가장 숭고한 남성적인 도덕이 발현된다. 즉 정중함, 우직함, 정직함, 죽음을 불사하는 충성심과 우정, 인간애와 온유함, 그리고 싸움에 임했을 때의 용기, 영웅심, 불요불굴의 지조, 초인적인 용맹과 대담성, 명예와 의무와 정의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덕목들은 복수와 분노와 원한과 죽음에의 은밀한 동경 등의 거친 열정, 어두운 힘과 착종하는 가운데서도 더욱 찬연히 다채롭게 발휘되며, 우리에게 비탄과 동시에 위안과 힘을 주고, 불가항력에 대한 순종과 동시에 말과 행동의 용기를 심어주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를 불어넣어 주며, 그리하여 마침내 언젠가는 독일의 영광이 되살아나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희망으로 충만케 해주는 것이다.

Friedrich Heinrich von der Hagen(1780~1856), Das Nibelungenlied 초판 서문(Zueignung der ersten Ausgabe)(1807)에서. 허창운, 「중세 영웅문학으로서의 《니벨룽겐의 노래》」『니벨룽겐의 노래(상)』(서울대학출판부, 1996), 105~106쪽에서 재판(1824)을 옮긴 것을 재인용. Google Books에서 원문을 볼 수 있음 <http://books.google.de/books?id=BIsYAAAAYA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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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광주의 "영남논단(嶺南論壇)"에서 발표를 했다.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한국이 중국전통문화를 보존하는데 공헌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매체에서 보도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심지어 나를 "매국노", "미한(媚韓, 한국에 아첨하는 자)"하는 자로 몰아부쳤다. 인터넷에서 욕하고 조롱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원래 한 가지 견해나 주장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서로 협의하고 비판하고 논박해야만이 제대로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술이 죽어버리고, 진리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본 모든 반대의견은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아주 간단한 말도 잘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다.

最近,我在广州“岭南讲坛”作报告。在回答听众提问时,我提到韩国对保存中国传统文化有贡献。经媒体报道后,竟然引起一片大哗,甚至有斥为“卖国”、“媚 韩”者,网上讥刺谩骂更不一而足。本来,对一种说法或观点有不同意见,因而提出商榷和批驳,都是题中应有之义,非如此学术不足以昌明,真理不足以彰显。但 所有我看到的反对意见,居然连基本的历史事实也不知道,或者连这样一句简单的话也没有读懂,却不能不使人啼笑皆非。


2008년 12월 27일 영남논단 발표 중.
주제는 '개혁 개방과 중공의 현대화'(改革开放与中国的现代化)
<http://epaper.xkb.com.cn/view.php?id=366613>

먼저 역사적 사실부터 얘기해보자. 일찌기 선진(先秦, 진나라통일이전)시기에 한반도에는 대량의 중원이민이 있었다. 특히 요동반도와 인접한 서북지역이 그러했다. 진,한시대에 건립된 위만조선은 중원이민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것이다. 서한의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영토를 한반도북부까지 넓혀, 요동과 조선에 4군을 설치하고 조정이 직접 관할하며, 내지와 똑같은 행정제도를 적용했다. 동한후기때 국경선이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삼국, 서진시기에는 다시 약간 확장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정치행정구역을 두는데 바로 영주(營州)이다. 6세기후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중원정권에서 벗어난다. 당고종때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때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조선을 정복했고, 정동행성을 둔다. 다만 대내적으로는 국왕을 남겨두었다. 명,청 시기에는 조선이 속국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되어서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还是先讲历史事实吧!早在先秦时期,今朝鲜半岛上已有大量中原移民,特别是在与辽东毗邻的西北部。秦汉之际建立的卫氏朝鲜国,就是以中原移民为主体的。西 汉武帝开疆拓土,将领土扩展到朝鲜半岛北部,在辽东和朝鲜设置四郡,由朝廷直接管辖,与内地的行政制度完全相同。东汉后辖境虽有所收缩,但在三国、西晋时 又有扩展,还新设置了一个一级政区——营州。6世纪后高句丽迁都平壤,脱离中原政权。唐高宗时又设置安东都护府,一度进行直接统治。元朝征服朝鲜,设征东 行省,但对内保留其国王。明、清两代以朝鲜为藩属国,直到甲午战争败后与日本签订《马关条约》,才被迫承认其独立。

비록 오늘 소수의 한국인들이 온갖 방법으로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를 단절코자 노력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 개인은 본말을 전도시키고, 사실을 날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은 계속하여 중국의 일부분으로 자처해왔거나, 천조(天朝)의 번속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적지 않은 옛날 사대부의 묘비를 보았다. 묘비의 제목은 하나같이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대청조선국(大淸朝鮮國)",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었다. 특히 명나라 만력연간에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일본의 침략을 격퇴시켜준 이후로, 조선의 군신은 모두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했다. 청나라가 입관한 후에도, 조선은 나라가 적고 백성이 곤궁함에도 불구하고, 군신들은 여러차례 북벌을 모의하고 명나라를 회복하도록 도우고자 했다. 이리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의 의복과 두발을 거절하고, 여전히 명나라식의 의관을 유지했다. 19세기말, 내우외환이 침중하고 망국의 위기에 처해서도 여전히 종주국인 청나라에 군대를 보내어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尽管今天有少数韩国人千方百计要割断与中国的历史关系,个别人甚至本末倒置,捏造史实,但在历史上,朝鲜一直以中国的一部分自居,或者以天朝的藩属国为 荣。我在韩国亲眼看到不少古代士大夫的墓碑,无不题为“大明朝鲜国”、“大清朝鲜国”、“有清朝鲜国”。特别是在明朝万历年间出兵援助朝鲜击败日本侵略 后,朝鲜君臣感恩载德。在清朝入关后,朝鲜不顾国小民穷,君臣多次密谋,要帮明朝恢复,以报“再造之恩”;并誓死抵制清朝雉发易服,延续“汉家衣冠”。 19世纪末,在内乱外患深重,濒临亡国之际,还寄希望于宗主国清朝出兵相助。
 
기원전2세기에 서한판도에 들어온 이후, 한반도북부는 중원왕조의 일부분으로 수백년을 지낸다. 중국문화는 현지의 주류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전통문화의 원류이자 주체가 된다. 그때부터 한반도는 직접 한자를 쓰기 시작하고, 이후 자신의 한글문자를 창제한 이후에도 한자는 여전히 관방에서 쓰이는 정식문자였다. 조선의 주요제도, 주류문화, 윤리도덕, 학술문화는 어느 것 하나 중국에서 전래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기초 위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서한말기, 한반도북부의 방언은 "연(燕)"나라(대체로 하북성 북부, 산서성 서북부) 일대와 비슷했다. 조선의 명문대가는 스스로 중원의 성씨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자(箕子), 주공(周公), 공자(公子), 태원왕씨(太原王氏), 청하최씨(淸河崔氏), 형양정씨(滎陽鄭氏), 하동류씨(河東柳氏)에서 주희(朱熹)까지...조선에 많은 '후손'을 남겼다. 비록 이들은 대부분이 반부(攀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 중국 및 중국문화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물며 문화라는 것은 국경이 없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예속관계일 때도 있고 독립관계일 때도 있고, 밀접할 때도 있고 소원할 때도 있었지만, 근대이전에 한반도는 계속하여 중국문화구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에서 발원하였고, 다만 전승과정에서 한반도의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창조했다. 이는 한국문화의 성취이자,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다.

从公元前2世纪归入西汉版图,朝鲜北部作为中原王朝的一部分达数百年,中国文化成为当地主流文化,也成为朝鲜半岛传统文化的源头和主体。从那时起朝鲜地区就直接采用汉字,即使是在制订了自己的文字后,汉字依然是官方的、正式的文字。朝鲜的主要制度、主流文化、伦理道德、学术文化,无不来自中国,在此基础上发展。西汉末,朝鲜北部的方言与“燕代”(大致相当今河北北部、山西西北部)一带的人相同。朝鲜的世家大族,无不自称源于中原大姓,箕子、周公、孔子、太原王氏、清河崔氏、荥阳郑氏、河东柳氏,直到朱熹等,在朝鲜都有大批“后裔”。尽管这些大多出于攀附,却反映了中国和中国文化在古代朝鲜的崇高地位。何况,文化并不一定以疆域为界限,即使朝鲜与中国的关系或隶或分,时密时疏,但在近代以前,朝鲜半岛一直属中国文化区是毫无疑问的。今天的韩国文化源于中国文化,但在传承的过程中也根据朝鲜半岛的具体条件,创造了新的形式和内容。这既是韩国文化的成就,也是对中国传统文化的贡献。

다음으로, 공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예실구제야(禮失求諸野)", 즉 예를 잃었으면 초야를 뒤져서 찾아내야 한다. 중화제민족이 황하중하류에서 형성한 화하문화(한문화)는 인구의 이동, 경제와 문화의 교류로 점차 중원왕조와 속국으로 확대되었고, 중국문화의 주체가 형성되었다. 발전과 변화의 과정에서, 각종 문화현상은 파도와 같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갔다. 선진,발달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주변지역은 왕왕 지형이 폐쇄적이고, 교통이 막혀있거나, 인구유동이 적어서,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심지역이나 선진지역보다 훨씬 늦다. 이런 지체현상은 기존문화의 보존과 연속을 가져오고, 중심지역에서 일찌감치 소멸한 문화현상이 주변지역에서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변화한다. 이런 문화는 현지에서 주류문화로 자리잡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면 현지인들이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혁신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어떤 측면에서는 모체문화를 뛰어넘는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공자는 "야"로 가서 중원의 화하가 이미 잃어버린 "예"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예"를 한국에서는 온전하게 찾을 수가 있다. 만일 이러한 "예"를 널리 알린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인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 중국문화 자체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其次,正如孔子所说,“礼失求诸野”。由华夏诸族在黄河中下游地区形成的华夏(汉)文化,随着人口的迁徙、经济和文化的交流逐渐扩大到中原王朝和藩属国,成为中国文化的主体。在其发展和变化的过程中,各种文化现象呈波浪型推进,由中心而边缘,由发达、先进区域而至相对落后区域。由于边缘地区往往地形封闭,交通阻塞,人口很少流动,接受新文化远远迟于中心区域或发达地区。这种滞后现象也反映对既有文化的保存和延续,所以一种在中心区域早已消逝的文化现象,却能在边缘或闭塞地区长期存在,并且产生新的形式和内容。当这种文化成为当地的主流,得到普遍的认同后,当地人会倍加珍惜,并且不断创新,在某些方面甚至会超过母体文化。正因为如此,当初孔子才会到“野”去求中原华夏已失去的“礼”。那么在今天,有些在中国已经失去的“礼”,也完全可能在韩国找到。如果这些“礼”得到发扬光大,岂不是以往的朝鲜人对中国文化的贡献?岂不是中国文化本身的光荣?

예를 들어, 한국은 1972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를 성공적으로 등록했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물로, 1377년에 탄생했다. 명나라 홍무(주원장)연간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실구제야"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이와 활자인쇄는 중국이 발명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에 인쇄된 주요한 내용은 <<경덕전등록>>, <<선문염송집>>등 사전부의 불서를 살펴본 후, 역대 제불조사들의 게, 송, 찬, 가, 명서, 법어, 문답중에서 선(禪)을 장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부분을 초록하고 쓴 것이다. 이는 확실히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와 중국에서 탄생한 선학이며, 쓴 것도 한자이다, 그 자체는 중국문화의 일부분이다. 다만, 현재 중국에서는 아직도 더욱 빠른 동일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문화상품은 확실히 한반도 현지에서 창조한 것일 것이나, 아니면 혹시 중원에서 전래되었는데, 한국인들이 완벽하게 보존해왔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모두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다. 만일 이후 중국에서 더욱 빠른 동일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된다면, 보완신청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 문화유산의 기록을 앞당기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이후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 없다면, <<직지심체요절>>를 중국의 불교문화, 인쇄술과 제지술을 대표하여 세계에 전시하게 하면 된다.

例如,韩国在1972年申报成功的世界文化遗产《白云和尚抄录佛祖直指心体要节》,是现存的最早金属活字印刷品,产生于1377年,相当于中国明朝洪武年间。我认为,这是“礼失求诸野”的典型。因为纸和活字印刷是中国发明的,《直指心体要节》印刷的主要内容是博览《景德传灯录》、《禅门拈颂集》等史传部的佛书之后,在历代诸佛祖师的偈、颂、赞、歌、铭书、法语、问答中抄录并撰述有助于掌握禅的重要部分,显然传自汉传佛教和产生于中国的禅学,用的是汉字,本身就是中国文化的一部分。但目前在中国还没有发现更早的同类印刷品也是事实,或许这一文化产品的确是当地人的创造,或许它传自中原,却被当地人完好地保存下来。无论哪一种情况,都是对中国文化的贡献。如果今后在中国发现了更早的同类印刷品,完全可以补充申请,将这一世界文化遗产的纪录提前。如果今后没有新的发现,就让它代表中国的佛教文化、印刷术和造纸术向世界展示吧!

또 다른 예를 들어, 청나라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갈아입게 하였기 때문에 명나라의 복식은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다만 조선은 19세기말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는 찾기로 마음먹으면 수도 없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중국에서는 아예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又如,由于清朝下令雉发易服,明朝的服饰在中国基本绝迹,但在朝鲜却一直保持到19世纪末。这样的例子还可以找到不少,其中不乏在中国已经消失殆尽的。

나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애국적인 열정을 가졌다는 것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다만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모른다면, 애국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결과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我并不怀疑有些批评者的爱国热情,但如果连基本历史事实也不知道,爱国从何谈起!结果又会如何?

— 갈검웅(葛剑雄, Ge Jianxiong, 1945~,중공 복단대학(复旦大学)  중국역사지리연구소(中国历史地理研究所) 교수), 「한국은 중국전통문화의 보존에 공헌을 했다」(韩国对保存中国传统文化有贡献) (via 중국, 북경, 장안가에서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568>)

중공 사람에게 이런 말 들으니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다.

근데 우리도 그동안 일본에게는 이렇게 말해왔는데... 다른 나라 이야기할 때는 주의하자.

p.s 이 글을 쓴 계기가 된 「신쾌보」(新快报) 기사 번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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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9일 목요일

도피, 향락, 취락 생활에 탐닉하는 이른바 ‘두어라 노세’의 행락 문화는 한국문화의 타락한 혼동상을 대변하는 말인데, 개탄론자들은 이것이 한국인의 치유할 수 없는 원초적 기질 내지 속성에 기인한다고 그럴 듯하게 강변하는 예가 허다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개탄론의 매우 합리적인 논거가 애초에 조윤제의 ‘두어라 노세’론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논거로 삼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견해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 9쪽

'전통'에 대해 꽤 오래 고민하고 공부도 했지만, 국문학 쪽은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국문학은 헛소리라는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나의 부족함. 그러고보면 학교 선생들이 조동일 등과 교류했던 걸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이 많이 없었던 듯.

글을 분석하는 방법. 그 눈과 호명하는 개념은 대부분 서양의 알려진 이론에 연원한다. 아 그래서 내가 국문학 싫어하는 거다. '국'문학이 외국(서양) 학문 수입의 첨병이 되는 이 이상함. 근데 다른 나라 국문학도 그런 면이 있는 거 같다. 외부를 카피해서 자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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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복도 아니고 기모노도 아녀...

패션 디자이너들이 오리엔탈리즘 찾다가 기모노 만드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일본 디자인의 힘인 거 같다. 반대로 한복은 개념 자체도 잘 만들어져있지 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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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3일 화요일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평소에 강명관을 흠모했는데, 이번 책은 전공 분야가 아니어서 그런지 내용이 매우 거칠다.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을 두서없이 드러내는 형식이고, 그 내용도 관련 분야의 연구 성과를 별로 반영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고보니 강명관이 우리 것이지만 잘 몰랐던 과거의 자료들을 나열하고 거기서 현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개념을 꺼내는 식의 서술을 주로 했는데, 그것은 논리적 비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그간 전혀 비판없이 받아들였음. 나도 그런걸 하고 싶었던 거 같고.

조선시대는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였지만, 근대는 냉엄한 현실로 다가온다.

2009년 2월 17일 화요일

지은이 말대로 지은이에게 서양 역사학 책을 읽을 '의무'도 없고, 또 그것은 지은이의 '전공'도 아니다. (2부)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주워삼킬 수는 없는 거 아닐까? 이 책은 분명 '학술도서'로 분류되어 있고, 관련 상도 받았는데.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각자 치열히, 또 구체적으로 자신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은 강명관이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걸까?

탁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자신의 영역을 무한정 깊이 파고들어가는데서 나올까? 또 그 '탁월함'은 결국 다른 분야의 관찰자에 의해 발견되어야 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려는 분께] 강명관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은 자못 흥미진진하지만, 이렇다하게 따르거나 참고할 만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난 이 책에서 얻을 게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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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일본어의 근대화 과정에 관한 책을 보니 한국어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관련 서적을 찾아봤다. 의외로 김윤식이 이 문제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워낙 국문학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국문학계에서는 예전부터 지적되던 부분이었나 보다. (가족 중에 국문학 박사가 있다.... 그래서 더 관심이 없는 듯) 임화의 '이식문학론'에서 정점을 이룬다. (57쪽)

구체적인 사실들은 전문적인 자료를 봐야겠지만 일단 김윤식의 책들을 먼저 보기로 했다. 관련된 주제의 책으로는 이 책,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2001) 외에도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2006),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2007) 등이 있다. 말년을 이 주제로 달리고 있다!

이 책이 1974년에 나온 『韓日文學의 關聯樣相』(一志社)의 보론으로 상정된 것으로 보아 지은이의 이에 대한 관심은 꽤 오래된 것 같고. 사실 일제 시기와 근대화라는 것이 한국인으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고, 근대 한국 문학이 생성된 공간 자체가 일본과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을 보편성으로,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을 특수성으로 상정하면서 이들 관계항의 맞물림을 헤아리는 과제를 근대사가 안고 있다는 시선에서 본다면, 지난 세기는 이 나라 근대사에 형언하기 어려운 굴절과 상처를 남긴 것으로 인식됩니다. 연구자들의 시선이 이 거대담론에 이어진 이데올로기적 과제로 기울어졌음이 이 사실을 잘 말해 주었지요. (머리말 — 세기를 넘기면서, iii)

내가 국문학에 관심이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말이 어려워서;;; 문학 하는 사람들이면 더 쉽게 좀 써줄 수 없나요;;;

아무래도 이 책의 집필 방향은 '문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거 같다. 나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것들에 관심이 있따.

여기저기서 발표한 글을 모은 것인데,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쉽게 읽히는 것이 장점.

1. 최초의 한국 근대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血의 淚」의 작가 이인직은 도쿄정치학교(정확히 어떤 학교인지 모르겠다)에서 유학하였고, 미야코신분(都新聞, 지금의 東京新聞의 전신)에서 정치소설(Staatsroman, 국가소설 또는 국사소설로도 번역됨. 독일어 위키백과의 내용을 봤을 때 내 생각엔 '계몽소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을 배웠다. '루비'와 훈독과 음독이 섞여 있는 표기방식 역시 일본의 영향이다. 이에 대한 참고자료로는 조연현의 「개화기문학 형성과정고」(『한국신문학고』, 문화당, 1996)이 있고, 기호론, 표기체제상의 논의로는 최태원의 「<혈의 누>의 문체와 담론구조 연구」(서울대 석사논문, 2000), 사에구사 도시카츠(三枝壽勝)의 「이중표기와 근대적 문체형성」(연세대학교, 2000년 9월 29일).

(이인직은 친일의 선구자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다: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파 99인 3』(돌베개, 1993)에 실린 최원식의 「이인직 : 친일문학의 선구자」를 참고할 것. 인터넷에 이 글을 옮겨 놓은 곳이 많다: 1, 2)

2. 최종적인 지향은 서양의 문학이었겠으나, 구체적인 예는 일본의 작품이었다. 김동인의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김동리전집 6』, 19쪽)에서 살필 수 있다. 일본어 표기법과 조선어 입말의 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약한 자의 슬픔」에서 한자말을 조선어로 바꾼 것, (敎授->가르침) 과거형 종결어미의 일관성 등에서 드러난다.

3.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일본어식 용법을 더욱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러고보면 국어 교과서애는 대부분 이러한 국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 실린다. 이것을 '명작'이라고 들이대는 것보다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4. 당시의 소설은 사회개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동인의 '참소설'이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계몽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창조』지에 이광수를 초청하지 않은 것은, 이광수가 덜 계몽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5. '활사실', 즉 조선의 '현실'과의 관계.

6. 김윤식은 일제 시대 문학을 '이중어 글쓰기'(bilinguial writing, 왜 어떤 용어는 독일어고 어떤 용어는 영어냐?)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사무엘 베케트 등을 예로 들고 있으며, 일본 문예잡지에서 활동하는 조선 작가들의 이야기와 또한 소재로서 이중적인 언어 사용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런 관점은 나에게 매우 낯설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본어는 당연히 외국어이고 불편한  것(수십년을 영어를 배워도 낯설어하는 한국인들을 보라)이거나 아예 모국어로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7. 친일문학에 대한 논의. 『인민문학』 창간호(1946)에 실린 이태준과 김사량의 논의. 친일 속에 녹아 있는 근대화에 대한 동경의 평가 문제.

김동인을 ‘『창조』파의 두목’이라고 표현해서, 국문학 하는 사람은 한글을 사랑하는구나... 했는데, 읽으면서 뭔가 나의 언어감각과는 잘 맞지 않는 표현들이 많다. 일제 때 태어난 사람이라서 그런가?

p.s 표지의 그림이 어쩐지 김윤식을 연상시키는데, 안석영이 그린 김동인이다.

관련 그림을 검색하다 1932~1933년에 『혜성』에 안석주(1901~1950)가 연재한 「가두에서 본 인물」에 실린 캐리커쳐를 모아 놓은 사이트를 찾았다:

2009년 2월 11일 수요일

'언어의 물질성',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2009년 2월 12일 목요일

유진오, 김사량은 일본어로 글쓰기를 했다. 조선의 풍경을 글에 담고, 조선어 식으로 쓰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의 소설 형식을 조선어로 표현하고자 하던 김동인, 염상섭과는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다.

김윤식은 김사량의 「교슈(郷愁)」(향수)(『金史良全集 2』, 河出書房新社, 1973)를 이중언어 사용자의 무의식까지 표출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한다.

(검색해보니 작년에 출판된 『김사량, 작품과 연구 1』(식민주의와 문화총서 7, 역락, 2008)라는 책이 있었다)

2009년 2월 13일 금요일

휴머니즘으로 '전향'한 경우가 일제 때도 있었다, 백석 등. 이런 종류의 일에도 역사성이 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3부는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국과 일본의 개별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에 가깝다. 나카노 시게하루(1장), 김소운(3장), 오에 겐자부로(4, 5장), 에토 준(6장)

글들의 스타일이 비슷한 점이 있다. 대립되는 이항을 선택해서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중간을 검토한다. 뭐랄까 약간 기회주의적인 느낌.

2009년 2월 14일 토요일

'황군위문작가단'이 언급되면서 일제 말기의 상황으로 이야기가 종료되는 듯 했는데, 후반부에 자신의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자신이 『李光洙와 그의 時代』(한길사, 1986)를 쓰는데 규범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에토 준의 『漱石とその時代』였다는 것. 즉 자신도 과거의 조선 문학가들처럼 일본 문학을 규범으로 삼아 글을 썼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에토 준은 비평가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는데 지향점이 되었다는 것.

또 근대문학을 연구하면서 작가들이 유학했던 쿄토와 도쿄에 대해 자기 스스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애착은 자신이 직접 도쿄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현실화되었다는 것.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미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 야나기 무네요시 비판, 김소운의 손녀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런저런 글을 모아놓은 것이지만 이 책 자체도 어느정도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이 뒤에 나온 책들은 어떤 걸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당장에 읽을 필요는 없는 거 같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건지, 그냥 그렇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앞에서 말한 문학적이 아닌 거 같다는 말은 취소한다. 난 문학적인 글들은 요점 파악이 안 되서 잘 안 읽는다. 물론 정리된 글에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긴 하다.

짧은 야나기 무네요시론은 공부를 더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나라는 야나기 무네요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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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나는 일본영화사라는 곳에서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마찬가지 촉탁 직원 중에 신문연합 이사인가 뭔가라고 하는 위세 좋은 남자가 있었다. 대단한 재담가로서, 요시카와 에이지와 사토 고로쿠가 일본에서 단연 훌륭한 문인이라는 둥의 얘기를 서슴없이 해대는 대단한 선생이었는데, 회의석상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냐며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제안한 영화는 곧, 예를 들어 늙은 농부의 마디 굵은 거친 손이라든가 누더기를 기운 옷이라든가 하는, 아버지에서 아들, 아들에서 손자로 전해지는 인고와 내핍의 얼이 담긴 상징들을 모아 하나로 얽어보자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일본 문화는 농촌 문화로 돌아가지 않으며 안 되며, 농촌 문화에서 도시 문화로 옮아간 지점에서 일본의 타락이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비극이 배태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149쪽)

戦争中私は日本映画社というところで嘱託をしていた。そのとき、やっぱり嘱託の一人にOという新聞聯合の理事だか何かをしている威勢のいい男がいて、談論風発、吉川英治と佐藤紅緑が日本で偉い文学者だとか、そういう大先生であるが、会議の席でこういう映画を作ったらよかろうと言って意見をのべた。その映画というのは老いたる農夫のゴツゴツふしくれた手だとかツギハギの着物だとか、父から子へ子から孫へ伝えられる忍苦と耐乏の魂の象徴を綴り合せ映せという、なぜなら日本文化は農村文化でなければならず、農村文化から都会文化に移ったところに日本の堕落があり、今日の悲劇があるからだ、というのであった。

이 영화가 한국에서는 얼마전에 개봉되었다는;;;;

아무튼 날카롭다. 1946년에 쓴 글이고, 영화사에 근무한 때는 전전인 1944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움.

농촌의 미덕은 내핍과 인고의 정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핍을 인내하는 정신 따위가 어찌 미덕이란 말인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결핍을 인내하지 않고, 불편함을 인내하지 않고, 필요를 인정하고 요구할 때 발명이 생기고 문화가 일어나며 진보가 이루어진다. 일본의 군대는 내핍의 군대임을 자부하며 편리한 기계를 요구하지 않고 육체를 혹사하기에 군대는 발전하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작전의 기초가 서지 못하여 오늘날 무참하기 짝이 없는 크나큰 패배에 이른 것이다. 이 어찌 군대만의 일이겠는가. 일본 정신 자체가 내핍의 정신이기 때문에 변화를 원치 않고 진보도 원치 않으며 동경과 찬미는 과거를 향해 있고 어쩌다 나타나는 진보적 정신은 이 내핍의 반동 정신이 가하는 일격에 소멸하고 모든 것은 언제나 과거로 돌아간다. (151~152쪽)

農村の美徳は耐乏、忍苦の精神だという。とぼしきに耐える精神などがなんで美徳であるものか。必要は発明の母と言う。乏しきに耐えず、不便に耐え得ず、必要を求めるところに発明が起り、文化が起り、進歩というものが行われてくるのである。日本の兵隊は耐乏の兵隊で、便利の機械は渇望されず、肉体の酷使耐乏が<おうか謳歌せられて、兵器は発達せず、根柢的に作戦の基礎が欠けてしまって、今日の無残極まる大敗北となっている。あに兵隊のみならんや。日本の精神そのものが耐乏の精神であり、変化を欲せず、進歩を欲せず、憧憬讃美が過去へむけられ、たまさかに現れいでる進歩的精神はこの耐乏的反動精神の一撃を受けて常に過去へ引き戻されてしまうのである。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하거늘 그런 필요를 추구하는 정신을 일본에서는 ‘게으른 편리주의’ 정신이라는 식으로 부르며 내핍을 미덕이라 칭한다. 일 리나 이 리는 걸으라고 한다. 오 층, 육 층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는 건 게으르기 천만한 근성이라 한다. 기계에 의지함으로써 근로정신을 잊는 것은 망국의 근원이라 한다.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게 반대다. 진리는 속이지 않는 법이다. 즉 육체의 근로에 의지하고 내핍의 정신에 의지한 일본은 진리로부터 보복당하여 오늘날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된 것이 아닌가. (152쪽)

必要は発明の母という。その必要をもとめる精神を、日本ではナマクラの精神などと云い、耐乏を美徳と称す。一里二里は歩けという。五階六階はエレベータアなどとはナマクラ千万の根性だという。機械に頼って勤労精神を忘れるのは亡国のもとだという。すべてがあべこべなのだ。真理は偽らぬものである。即ち真理によって復讐せられ、肉体の勤労にたより、耐乏の精神にたよって今日亡国の悲運をまねいたではないか。

작년 팔월 십오일,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이 종결됨으로써 천황에 의해 죽지 않고 살게 되었노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일본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천황이란 존재는 언제나 그 같은 비상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일본 역사가 고안해낸 독창적인 작품이자 방책이며 비술이다. 군부는 이 비술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우리들 일본 국민 또한 이 비술을 본능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군부와 일본 국민이 합작한 대단원의 일 막이 팔월 십오일이 되었다. (154~155쪽)

昨年八月十五日、天皇の名によって終戦となり、天皇によって救われたと人々は言うけれども、日本歴史の証するところを見れば、常に天皇とはかかる非常の処理に対して日本歴史のあみだした独創的な作品であり、方策であり、奥の手であり、軍部はこの奥の手を本能的に知っており、我々国民又この奥の手を本能的に待ちかまえており、かくて軍部日本人合作の大詰の一幕が八月十五日となった。

견디기 힘든 것을 참고, 참기 힘든 것을 참으며 짐의 명령에 따라 달라고 천황이 말한다. 그러자 국민은 엎드려 울며 다름아닌 폐하의 명령이니까. 참기 힘들지만 억지로 참으며 미군에게 지겠노라고 한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155쪽)

たえがたきを忍び、忍びがたきを忍んで、ちんの命令に服してくれという。すると国民は泣いて、外ならぬ陛下の命令だから、忍びがたいけれども忍んで負けよう、と言う。嘘をつけ! 嘘をつけ! 嘘をつけ!

  • 青空文庫에 전문이 업로드되어 있다, 위에서 인용한 본문도 青空文庫에서 가져왔다.  <http://www.aozora.gr.jp/cards/001095/card42619.html>
  • 일본어 본문 괄호 안에 있는 것은 루비(후리가나)이다. 전용 뷰어나, Microsoft Internet Explorer 7+을 사용하거나 Firefox에 XHTML Ruby Support 또는 HTML Ruby Extension 설치하면 한자 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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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8일 일요일

한국어의 역사(국어사라고 해야 하나? 국문학사는 아닐테고.)에 대해 리뷰할 만한 책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가 집어왔다.

한국어의 역사 전반에 대해 주요 사료를 중심으로 재미있게 정리한 책인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우선 이 책이 다루는 부분은 중・고등학교 교과과정과 겹치므로, 중・고등학생이나 일반인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교과서 이상의 재미나 흥미, 생각할 거리, 화려한 도판, 구체적이고 활용 가능한 예제 등을 실었어야 할 텐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실패하고 있다. 또 저자가 여럿이어서 그런지 책 전체의 논조와 완급도 일정하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기획력이 아쉬운 책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나마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국어의 역사에 대해 정리한 책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본 기억이 없다. 우리의 한글 사랑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머리말에 『역대문법대계』라는 책이 언급되어 있는데, 『역대한국문법대계』를 말하는 거 같다. 한국어의 발전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번 읽어봐야 할 거 같다.

이 책은 『ハングルの歴史』(中西恭子 옮김, 白水社, 2007)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께] 한국어의 역사에 대해 읽기 쉬우면서도 전반적으로 다룬 책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지식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해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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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최근에 급 친숙해진 이름,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 (옛날엔 노리에가(Manuel Noriega, 1934~)와 헷갈리곤 했다;;;; 이분은 여전히 미국 교도소에 감금되어 계시다고.)

소라이와 노리나가가 자신들의 언어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하게 된 주요 원인을 서양의 압력으로 보는데, 한국 역시 한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 이와 비슷한 맥락인 거 같다.

한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일제 침략기라는 것. (일본 극우파는 이것이 일본의 정책이었다고 자랑하곤 한다) 한글을 모르는 천재소년 박지원이나, 영어, 불어까지 능통하였으면서도 무려 민속학을 한문으로 적은 이능화를 보면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글 연구 역시, 양주동, 이희승 등의 작업이 저 시대 일본의 작업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다. 좀 공부해봐야 할 듯. 특히 민족주의적인 환타지 속에서 노리나가의 한문읽기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새로운 단어들이 생겨난 것도 비슷하다. 한글에 대한 민족적 관심이 80년대에 절정을 이룬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주요 참고서적:
한국인 이연숙이 이 분야에서 이름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연숙의 주저라 할 수 있는 『국어라는 사상』은 2006년에 번역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된 저자들의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이 출간될 즈음 국어와 관련된 비판이 몇개 신문에 실렸다:
이 책도 일본어 외래어 표기법 안 지킨다.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는 게 바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문제에 대해 쓴 논문이 있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검색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한글이 지금까지 수난을 당하는 것은, 한국어 자체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글 옹호자도 일종의 민족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제 때 한글 연구자들은 보수적이었는데, 현대의 한글 옹호자들은 좌파로 분류되는 것도 신기. 한글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 사회의 잣대가 변한 게 아닌가 한다.

2009년 2월 1일 일요일

문어체 한글은 없다. 구어를 옮겨 적은 한글과 한자에 토를 달거나 번역한 한글이 있을 뿐이다. ('吾等은 玆에…' 같은 글이 한글일까?) 한글의 문어체와 구어체에 관한 논쟁은 실체가 없다. 일본어와 영어의 논쟁을 따라한 것일 듯. 국한문혼용에 대한 논쟁도 알맹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

문법과 맞춤법에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그러는지도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소라이와 노리나가의 방법론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장 2절)

후쿠자와 유키치는 연설(speech)를 강조했다. 이 연설은 구어체로 작성되고 (당시 일본은 한문 문어체가 사용됨) 이것은 의회의 정치활동 방법으로 자리잡는다. 이 구어체는 신문을 통해 널리 사용된다. 신문과 구어체, 정치, 요미가나의 관계가 2장의 내용. 세이난 전쟁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를 통해 '우리'라는 개념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적은 거 같은데 주변 설명이 아주 흥미진진.

19세기 후반에 일본 사회에서는 신문을 통한 여론 정치가 구현되었다는 게 놀랍다. 예로 든 것 중에 홋카이도의 식민지 개척 비리도 있어 일본 본토와 식민지와의 관계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상상을 하게 한다. 그러니까 마치 베트남 침공을 했으나 여론에 의해 조종되는 미국과 비슷한 느낌.

연설은 지금도 일본 정치의 중요한 요소이다. 난 한국에서 정치 연설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모두 선동이었다. 해방직후나 60년대에는 한국에도 정치 연설하는 문화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단상에 올라 책상을 놓고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 같은 시기 확립된 것도 흥미있다.

정치적 연설, 강단의 발표 등이 당연히 서구의 영향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일본 내부적인 맥락도 있었다는 것. 아니면 일부러 가져다 붙인 것일 수도. 그렇게 생각해도 일본은 그것을 받아들인 '계기'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

2009년 2월 2일 월요일

제3장 천황의 ‘일본어’

<대일본제국헌법>이 안고 있었던 모순, 즉 천황 권력의 절대성과 입헌군주제에 의한 제약 사이의 모순을 <교육칙어>는 ‘국체’라는 이념, 곧 ‘짐’과 ‘그대들 신민’의 특수한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국체’라는 개념 규정을 빌어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 (105쪽)

<교육칙어>가 발포된 다음해인 1891년(명치 24) 6월 17일, <소학교축일의식규정(소학교축일의식규정)>이 공포되어 기원절(기원절)이나 천장절(천장절) 등 축제일에 교사와 생도가 행할 의식의 내용이 정해졌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천황과 황후의 ‘어진영(어진영)’에 대한 배례, 만세봉축(만세봉축), <교육칙어>의 봉독, 교장훈시, ‘키미가요(키미가요)’를 포함한 축제일 창가 제창이라는 식순에 따라 소학교의 의식이 행해지기에 이른다. (106쪽)
천황과 ‘신민’ 사이에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다시 말해 보고 보여지는 관계를 쌍방향적으로 조직하는 ‘어진영’이라는 도상 미디어. 천황이 ‘신민’을 불러내는 언설을 기록한 문자의 필사인 <교육칙어>의 등사본을 받들고, 삼가 스스로 소시를 내어 읽는 ‘봉독(奉讀 또는 捧讀)’ 또한 문자와 소리가 착종된 형식으로 쌍방향적인 응답을 그 때마다 재생산하는 언설 미디어였다. 그리고 교장의 훈시는 <교육칙어>라는 텍스트에 대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천황의 ‘덕’을 기리면서 그 어구나 내용의 해설을 생산하는, 자기 증식하면서 동시에 <교육칙어>를 호위하는 주변적인 텍스트가 된다. 그리고 ‘키미가요’를 비롯한 축제일 창가 제창은 천황의 지배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분과 감정을 조직해 가는 음악 미디어이며, 만세봉축은 일련의 미디어에 동원되고 있던 신체를 스스로 다시 한번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천황을 향한 행위로 몰아세우는 신체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107쪽)

이 조회의 풍습은 한국에서 충실히 전해지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본땄다. (‘국기에 대한 경례’ 본래 자세는 허리를 굽히는 것)

또한 그러한 반복적 행위는 학교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규율훈련조직 속에서 비일상성을 환기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학교를 통해서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을 받아야만 비로소 자기를 ‘신민’으로 동일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달성해야 완전한 ‘신민’이 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조직되는 모든 경쟁은 모두가 ‘신민’의 자격을 얻기 위해 아동들 하나 하나가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자리매김된다. 지금까지 ‘민(민)’에 지나지 않았던 자들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한 걸음씩 ‘신민’으로 다가갈 수 있으며, 예전에 천황 이외의 ‘군(君)’의 ‘신(臣)’이었던 자들은 보잘것없는 ‘민’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동일한 경쟁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군인칙유>가 발포된 1882년부터 <교육칙어>가 발포된 1890년까지 8년에 이르는 기간이 ‘메이지입신출세주의’와 메이지형 실력주의(meritocracy)의 완성기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08~109쪽)

한국의 끝없는 교육열의 근원 아닐까?

동시에 이 8년 사이에 자유민권운동이 종언을 고했다는 사실도 되새겨 보아야 한다. (109쪽)
정치결사가 학습교육조직이기도 했다는 것은, 차세대 젊은이나 아이들을 놓고 메이지 국가에 의해 편성된 관립 ‘학교’와 민권파의 사립학습기관 사이에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 전개되었다는 식으로, 이 시기의 정치상황을 파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카타기리 요시오(片桐芳雄)에 따르면, <군인칙육>가 발포된 1882년 무렵은 민권파의 사립학교가 운동의 탄압과 국가의 중등교육기관 정비에 의해 급속히 관립학교와 경합하고 길항할 가능성을 상실해 간 시기였다. (110쪽, 『自由民権期教育史研究—近代公教育と民衆』, 東京大学出版会, 1990)
1880년(명치 13)에 시행된 <집회조례(집회조례)>는 학교교육의 당사자인 교사와 생도 또는 학생이 정치집회에 참가하거나 정치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무엇보다 먼저 ‘연설’이라는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적 장으로서의 ‘집회’ 혹은 ‘결사’와 ‘학교’의 단절을 도모했던 것이다. 1882년 개정된 <집회조례>에 따라  단속이 강화되면서 사실상 민권파의 ‘연설회’ 개최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는 행동은 ‘대간친회(大墾親會)’ 또는 ‘운동회’라는 형식으로 옮겨간다. “‘운동회’에서 행하는 신체적인 ‘운동’이란 ‘소시’적 운동의 제1원리인 ‘지기(志氣)’, 즉 형식을 갖지 않은 정치적 실천을 향한 패기와 의기(意氣) 또는 진지함 등”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실천이 ‘운동’이라는 한자로 된 두 글자 숙어에 의해 정치운동과 신체운동이라는 이중성을 포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어떤 일정한 사상을 지닌 정치활동가들이 스스로의 사상 내용을 언어화하지 않고(물론 그러한 사태는 ‘연설’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의해 야기된 것일 터인데) 일련의 ‘격렬하면서도 화려한 신체 움직임’으로서 ‘소시’를 표상하고 있는 이상, 어렵지 않게 그것을 모방할 수 있고 또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신체적 모방이 용이했던 까닭에 ‘운동회’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나 방관자들을 ‘운동회’ 참가자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112쪽, 木村直恵, 『〈青年〉の誕生—明治日本における政治的実践の転換』, 新曜社, 1998)

왜 하는지 모르고 했던 것들, 혼동했던 많은 것들의 근원.

'소시'가 뭔지 모르겠음.

이 시기에 유행한, 마치 지표라도 되는 양 지나치나 싶을 정도로 한문적 수사와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자유민권파에 속한 사람들의 특유한 ‘비분강개’조의 문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正)과 부정(不正),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문체. “역적, 간신, 필부, 속물, 소인, 노배(奴輩), 우론(愚論), 사설(邪說), 악계(悪計), 간모(奸謀) 등과 같이 『삼국지』와 『수호전』류의 문자”를 늘어놓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쓰면 시류(時流)를 탄 저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자가 많은 것에 대해 후쿠자와 유키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타구치 우키치(田口卯吉: 1855~1905)가 주관한 『토쿄케이자이잡지(동경경제잡지)』의 「유행의 저서」(1887.8)라는 논설은 거침없는 야유를 보낸다. (113쪽)
키무라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세계를 ‘정사곡직(정사곡직)’으로 분할하여 기술하고 있을 따름인 이러한 ‘비분강개’조 언설은 그 논리구조상 “동시대적인 언설에서 이미 가능했던 분석적인 지향을 지닌 사고를 방해하”고, “분석이 기여하기 마련인 문제 해결을 겨냥한 효과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이나 준비 등에 대한 배려는 불가능하게 하”며, “사고하는 것(분석적이고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수행하지 못하게 한다.” (113~114쪽, 『〈青年〉の誕生—明治日本における政治的実践の転換』)

임오군란 얘기도 나오는데,남의 나라 입장에서 한국사 생각하기가 아주 어색함.

'청년' 개념(?)에 관한 책이 나온게 있었다: 소영현, 『문학청년의 탄생』/『부랑청년 전성시대』(푸른역사, 2008)

2009년 2월 3일 화요일

2장에 이어 3장도 일본 근대사가 이어진다. 재미있게 읽고는 있지만, 책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일부 분석은 너무 자의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분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나 가능해진 것 아닌가?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의 언설에 내재한 문제의 핵심은 천황의 군대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군인칙유>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언설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121쪽)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조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임오군란 등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 했다. 지은이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것은: 中塚明(1929~), 『近代日本と朝鮮』(1969)

(나카쓰카 아키라 성향이 친북인가 봅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경찰마크가;;; 그리고 이상한 사이트 하나 찾았음. 檀君 WHO's WHO <http://kamomiya.ddo.jp/> 일본 학자의 친한도와 친북도가 정리되어 있음, 거기에 애국도까지;;; 아놔;;; 이 책 저자는 친북으로 정리되어 있네;;;)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표되는 일본의 자유민권주의자들이 1884년 자유당 해체를 기점으로 정한론을 펼치게 되는 과정.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

2009년 2월 4일 수요일

검색을 해보니 저자 전공이 근대문학인데,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후쿠자와 유키치가 ‘연설’의 효용성을 ‘메이로쿠샤’의 동인들에게 설득하는 계기가 된 것이 ‘타이완정토(臺灣征討)’ 문제를 둘러싼 ‘연설’이었으며, 일본 최초의 종군기자로서 키시다 긴코(岸田吟香: 1833~1905)가 종군 기사를 쓴 것도 ‘타이완출병’ 때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두고자 한다. (133쪽)

그러나 <민선의원설립건백서> 이후의 민선의원논쟁에서 ‘유신의 공신’을 낳았던 ‘사족 및 호농과 호상(毫商)’에게만 국정참여권을 준다는 계급적 절단론이 자유민권운동의 내부에서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한 논의의 전개는 일본이 강화도를 공격하여 불평등조약을 조선에 강요한 1875년 무렵부터 후쿠자와 유키치가 펼치기 시작한 논의와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일본에서의 정치적 주체를 ‘미들 클래스’ 즉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중간계급에서 찾음으로써 ‘하층민’인 ‘농민들’을 잘라버렸던 것이며, 그러한 ‘농민들’들까지 참가하고 있던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주의적인 침략노선과 국내적으로는 하층계급을 정치적 주체에서 제거하는 차별노선이 결합함으로써 근대일본의 ‘신민’상이 천황의 언설과 짝을 이루면서 편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인들을 ‘야만’이라 하여 차별할 수 있는 ‘신민’이란, 학교 교육에 의해 서구열강의 ‘학문・기술・기계’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선택된 학력엘리트들로 구성된 ‘미들 클래스’를 말한다. 모리 아리노리()가 소학교령・중학교령・사범학교령・제국대학령을 한꺼번에 정비한 것이 <군인칙유>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한 군대에 대규모의 예산이 소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134쪽)

언제나 피해자로서의 한국을 변호하려고만 생각했지, 가해자 일본의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변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부는 해봐야 할 듯.

저자가 좀 오바하는 구석이 많은 거 같다. 읽을 때 주의해야 할 듯.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저자를 무조건적인 친한파로 오인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제4장 언문일치라는 환상

‘카나노쿠와이’를 비판하고 ‘문명’과 ‘진보’ 쪽에 서서 로마자주의를 주장한 『초야신문』 『토쿄니치니치신문』 『유빈호치신문』 기자들의 문장은 정확하게 ‘한자카나혼용문’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들은 왜 자신의 쓰는 행위와 그 내용 사이의 그토록 명백한 자기 모순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의 사고정지를 가능케 했던 식민지적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 작동했던 것일까. (140쪽)

19세기말 일본은 식민지였나? 아니면 그 당시 서구 열강에 눌린 상태가 '식민지적'인가?

2009년 2월 5일 목요일

굳이 덧붙이자면, 이 경우 ‘한문훈독체’란 한자로 이루어진 이자숙어를 중심으로 하는 주요 개념은 음독하고, 주어와 술어의 순서를 일문(日文)의 배열로 바꾼 다음 그 사이를 조사와 조동사로 연결하여 일문형으로 한 한문봉독체를 일컫는다. 주요 개념이 구문직역숙어 즉 ‘구어주의에 심취’해 있다는 증거였던 까닭에 ‘메이지의 지식인’은 자신들의 주장과 그것을 표현하는 문체 사이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면 어느 정도는 ‘모순’을 눈치챘으면서도 이것을 억지를 부려 은폐하는, 이를테면 이 시기의 식민지적 무의식의 구조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도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러니까 방치하고 모르는 체한다는 책임회피의 사고정지를 초래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역직역체에 있어서 메이지 시기에 만들어진 엄청난 수의 새로운 한자숙어는 서구열강이 ‘문명’과 ‘진보’의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중심개념을 ‘일본고유어’로느 번역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야만’과 ‘미개’를 입증하고 마는 자기식민화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구의 개념들을 표의문자인 한자를 새롭게 조합하지 않고서는 번역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서자체계(書字體系)로부터 배제하고자 했던, 문자의 ‘화석’에 지나지 않는 한자에 의존함으로써 자기식민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중층적인 자기식민지화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42~143쪽)

한자어 혹은 로마자에서 유래한 개념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게 지식인의 모순적인 식민지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발전 가능성을 믿은 건 아닐까? 현재의 일본은 신조어의 왕국 아닌가?

일제 때 조선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체가 보이는데, 나는 당연히 한문식 읽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역시 일본의 이런 경향과 관련이 있을 지도.

그리고 한국의 한자숙어를 중요시 하는 것이나 교육 방법도 아마 일본에서 수입한 듯 하다. 사실 현대 한국어 회화나 한자 숙어가 그리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이미 만들어진 개념어로 이해하는 것들일 뿐.

앞서 언급했듯이 구문직역체에 의해 활자미디어의 구두법(punctuataion)이 확립되었다. ‘.’와 ‘,’를 비록하여 ‘?’, ‘!’, ‘—’, ‘……’ 그리고 「 」나 ( ) 등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사용되는 일련의 기호는 구문직역체를 통하여 활자로 인쇄된 문자면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단순히 구두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인 문장 즉 센텐스(sentence)의 단위를 명시하는 기호인 이상, 근대 일본어의 산문 문체는 결과적으로 구문직역적인 단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문직역적인 문장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떠한 경우에도 주어를 명시하여 술어와 대응시키는 새로운 문체를 창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오호(嗚呼) 『국민지우』를 내며」의 문체. 무생물을 줭로 하는 문장의 경우, 동사의 수동형을 사용하는 문체를 비롯하여 추상명사와 비인칭대명사를 주어로 한 문장이 다수 생겨난다.
또는 ‘~하고 있다(~しつつある)’처럼 동사의 진행형을 번역하려 한 표현이나, ‘~하는 바의(~するところの)’ ‘~로서의(~としての)’ 등과 같은 관계대명사나 관계사를 직역한 표현. 그리고 지시대명사가 그 말의 뒤에 나오는 일을 지시하는 표현(예를 들면 “이것은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근대 일본어 산문은 기본적으로 구문의 번역문체였던 것이다”와 같은 표현).
또 의인법을 중심으로 한 비유표현은 메이지 시기의 문체가 지닌 ‘버터냄새’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으며, ‘요컨대(要するに)’, ‘이처럼(かのように)’, ‘……에도 불구하고(……にもかかわらず)’ ‘……하기에는 너무나(……するにはあまりに)’ ‘……하자마자(……するや否や)’와 같은 관용구적 표현도 기원은 구문직역체에 있다.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 쓰고 말하는 본서의 문체도 역시 일본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번역문체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일본어 문체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을 따름이며, 학술적인 문장을 쓰려고 생각하자마자 번역문체8) 구문직역체에 지배되고 만다. (144~145쪽)

8) 원문은 ‘飜譯文體であるところの’이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번역문체인 바의’가 되겠지만, 문맥상 대단히 어색하다—옮긴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개화기, 일제 때 한국어 문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궁금해 진다. 국문학자들의 집요함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 학자의 역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속기문’이라는, 마치 살아있는 소리가 글의 배후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새로운 서기시스템이 지식인들로 하여근 서양을 모델로 한(실제로는 그것도 환상이긴 하지만)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언문일치’라는 환상을 유지하게 했던 것이다. (159쪽)
‘언문일치’라는 환상을 둘러싼 신화는 구문직역체의 계보에 속하는 학자나 지식인, 특히 ‘문학자’들 자신이 아름답고 올바른 ‘국어’로서의 ‘일본어’ 그러니가 ‘근대 일본어’를 담당해왔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 창출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이나 야마다 비묘의 『무사시노』가 언설 시장에서 유통된 정도에 비하면, 산유테이 엔쵸의 속기 라쿠고나 쇼린 하쿠엔의 속기 코단의 시장점유율이 훨씬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통속적’이라고 판단한 학자나 ‘문학자’에 의해 엔쵸 라쿠고의 속기가 시메이나 비묘의 ‘언문일치체’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근대문학사’의 언설 속에 봉인(封印)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봉인을 가능하게 한 언설시스템은 ‘속기자’들의 역할을 표현자 이하로 떨어뜨리고 투명한 존재로 간주해버림으로써 성립했다. (159~160쪽)

한국의 문학가들이 항상 주장하는, 자신들이 국어를 지키고 발전시키고 있다는 주장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일본어와는 전혀 다르게, 그 자체가 언문일치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의 국한문 혼용, 해방 후 한글 전용 논의 등은 일본과 아주 흡사한 구석이 있다.

고단(講談)과 라쿠고(洛語)라는 일본의 전통 공연 쟝르는 근대화 과정에서 활자화, 즉 쟝르가 변환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는 동시에, 발전한다. 신문 연재소설은 여기에 유래한다. (154쪽, 「야마토신문」이 1886년 10월 창간부터 라쿠고를 속기 연재) 한국에서도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근대화되면서 그 인기를 잃지 않고, 혹은 쟝르가 바뀌어 생존한 예술 쟝르가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판소리가 근대에 크게 유행한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또 가사를 신문 등에 실었던 경우도 생각해 볼 일이다.

2009년 2월 6일 금요일

제5장제6장에서 언급되는 주요 텍스트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 1867~1937)가 1894년 데쓰가쿠칸(哲学館)에서 행한 강연인 「国語と国家と」(이 책에는 '국어와 국가'로 번역되어 있다). 꼭 읽어봐야 겠다.

국어에 대한 사랑, 민족과의 동일시 등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모두 그 성립과정이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에 반발하여 한글을 찾았지만 그 방법은 일본 따라하기였을 수도 있다. 유명 국문학자가 친일파로 분류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과정을 침략한 당사자인 일본인의 눈으로 보는 것. 낯설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꼭 해봐야 하는 일. 예를들어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은 일본 입장에서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일이라는 것, 또한 일본어를 아시아 공용어로 만들려는 생각도 있었다.

한국의 초중고가 군대식인 까닭. 당연히 일제 때 배운 것. 우리들은 이거 하나 극복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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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서장

* '가미가제'란 말이 어렸을 적 처음 들었을 때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보다 더 참담한 일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의 정신적 불일치도 그닥 모순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남을 저주하면서 자신은 선하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 권두에 실린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1915~2000, 한국이름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五長 頌歌, 「매일신보」 1944년 12월 9일)에도 예전만큼 배신감이나 가치관의 혼돈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별볼일 없는 시와 그 시를 쓴 별볼일 없는 시인 지망생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 시를 지은이가 원래 넣은 것인지, 옮긴이가 덧붙인 것인지 불확실하다. '사쿠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옮긴이가 한국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덧붙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 객관적으로 읽어야 할 책에 감정을 자극하는 글을 붙였을까?)

* 자신의 연구를 접고 연구 과정에서 만난 책을 번역한 것. 이 경우는 지은이가 자신의 연구보다 더 가치있는 연구를 소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 거 같은데, 이런 주제는 일본 사람이 쓴 좋은 책보다 한국 사람이 쓴 부족한 책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거 아닐까? (이 책을 발표한 뒤 옮긴이의 저술이 나왔는지 아직 살펴보지 않았는데, 같은 지은이의 다른 책을 또 옮겼다, 『죽으라면 죽으리라』(우물이있는집, 2007). 번안한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아주 멋지다. 장사좀 됐을 거 같다.)

* 일본어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았다. 일본어 표기 방법을 명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물론 일본어를 헷갈릴 일은 없다...

*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의『부시도』(Bushido: The Soul of Japan, 1900) 서문은 서양인에게 일본의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 부족하지만 쓴다는 투의 겸손으로 시작하는데, 그러나 이 책이 발표되는 시기는 바로 덴노 중심의 새로운 체제가 구축되는 시기로, 그의 글 역시 과거의 무사도 전통을 서술한다기보다, 새로운 시대상을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32~33쪽, 제6장에서 자세히 다룸) 아 이거 왜 예전에는 생각 못 했지? 니토베 이나조가 '서양의 기독교에 대항하여' 말하는 것에 나도 모르게 가슴깊이 찬동하고 다른 배경은 추궁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던 거 같다. 『부시도』는 Guetnberg Project에 책 전문이 올려져 있다:
* 일본어판을 옮겼다고 하는데, 번역문이 마치 영어를 옮긴 듯한 기분이다.

* 관심있는 주제의 책이니까 잘 읽어보도록 하자. 또 학술적인 연구 방법도 눈여겨 봐야 할 거 같다.

* 옮긴이가 「교수신문」에 실은 글. 책 말미에도 실려 있다:
* 책 읽다가 생각난 걸 대중없이 적다보니 좀 헛짓같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요약과 내 생각을 분리해서 적을 예정.

2009년 1월 25일 일요일

* 이 책에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기 바랬는데, 오해하기 좋은 내용이 서장부터 나온다.

사쿠라꽃을 군국주의화하는 역사적 과정에 참가한 일본사회의 엘리트도, 또한 그 역사과정에 저항하지 않았던 국민도 역사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다른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경우와 같이 왜곡을 강요한 중죄는 권력자 쪽에 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완전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 왜곡의 방향을 결정할 정도의 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든, 젊은 특공대원의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가버린 일본군부든, 인류에 대죄를 범한 사람은 그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모두가 역사의 나무를 비트는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도 또한 인식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무를 비트는 악의 힘에 말려들어 가장 위험한 문화.역사정 과정에 관계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인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51쪽)

본문의 내용을 떠나서 아마 이 주제를 가지고도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을 서양 사람들도 많이 한다. 방관하던 국민이 파시즘의 공범일 수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자는 논리. 그런데, 일본 책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주장은 이 주장과 비슷하면서도 뉘앙스가 다르다. 그 누구도 모든 일을 예측하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며, 어느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죄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논리로.

지은이에게 악의가 없다고 하더래도 이런 주장은 논의를 엄밀하게 진행해서 오해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문화인류학'적인 서술에서 이런 선언을 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 내가 특이하게 생각하는 일본의 또다른 논리 중에 하나는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 미국도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침공했다지만, 일본의 경우 이런것과 구별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적을 이겨 같은 나라가 되면 더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니, 적을 모두 이길 때까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적을 죽이겠다는 생각. 이런 아이디어는 일본의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영화나 만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를 볼 수도 있는데, 이건 일본 소설, 만화 보고 연습하다 아이디어까지 베낀 것이다)

“아무쪼록 미워할 수 없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빨리 오기를, 그것을 위해서라면 제 몸 따위는 몇 번 찢겨져도 상관없습니다.” (23쪽, 사사키 하치로(佐々木八郎), 『青春の遺書』(1981), 『烏の北斗七星』을 인용)

제1장 사쿠라꽃과 삶과 환생의 미학

사쿠라꽃은 일본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생산력을 상징했다. 이것은 봄에 핀 사쿠라꽃이 가을의 벼 수확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징성은 곧 영화(榮華)와 연결되었으며, 여성성과 연결되었다. 고대의 여성성은 육체적 음란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상징성을 갖게 된 이유에는 밤사쿠라꽃의 매혹적인 이미지와도 관련있을 것이다.

원래의 사쿠라꽃은 산에만 피던 산벚(야마자쿠라)이었기 때문에, 산이라는 공간의 신성성과도 연결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풍습인 벚꽃놀이 역시 원래는 산에서 쌀로 빚은 술을 마시는 제의적인 성격이었다. 꽃축제(하나마쓰리) 역시 벼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1887~1953), 「花の話」, 1928)

사쿠라꽃, 쌀의 생산성을 덴노와 연관시키는 것은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 이미 발견된다. 뿐만아니라 사쿠라꽃의 짧은 운명도 암시된다.

쌀 역시 신성성을 띄고 있다. 일본에서는 화폐가 수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쌀이 신성성을 가지고 있는 교환척도로 사용되었다. 또한 문학작품에서 쌀을 미화하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쌀은 황금이나 백색, 빛 등에 비유된다.

* 조선은 쌀에 대한 종교적 집착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거 같다. '사직'(社稷)이라는 개념도 벼농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또 일반 백성들은 쌀을 주식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거 같다. 즉 현재 한국에서 유통되는 '신토불이'라던가 '쌀은 민족의 생명'같은 구호들은 일제시대에 주입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부의 상징으로, 또 민간신앙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긴 했다)


50원짜리 동전 앞에 있던 벼도 일본의 문화적 전통을 차용한 것이리라. (아니 그냥 베낀 건가? 단위도 같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음)

* 이 책의 내용을 소재로 한 EBS의 지식채널e 에피소드. 2006년 8월 14일자, 139화, 「보내지 못한 편지」.


영상이랑 음악이 입혀지니 감정을 많이 자극한다.

2009년 1월 26일 월요일

야나기타(柳田国男, 1875~1962)는 여행 도중에 죽은 사람 등을 묻었던 장소에 사쿠라, 특히 그 묘목을 가져와 심는 시골 풍습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しだれ桜の問題」, 1930, 「信濃桜の話」, 1947) 그리고 이 풍습을 죽은 자의 영・정령이 나무에 깃든다는 오랜 신앙과 결부시켜 생각하고, 나아가 매장지에 특히 가지가 드리워진 나무를 택한 것은 죽은 자의 영이 이 가지가 늘어진 나무에 의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또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논하고 있다. (76쪽)

한국에서는 버드나무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길게 늘어진 가지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사쿠라와 마찬가지로 다른 나무와는 달리 가지가 땅을 향해 자란다는 것이 그런 이미지를 갖게 한 것 같다. 버드나무는 화려한 장식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데 이 역시 사쿠라의 상징성과 통한다.

사쿠라나무나 꽃은 실용적인 가치가 거의 없다. 사고방식과 정서 양쪽을 환기시키는 원천은 사쿠라꽃의 미적 가치다. 사쿠라꽃의 미적 가치는 원래 생산력과 생식력을 종교적인 의메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농격우주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93)이렇게 보면, 은유로서의 사쿠라꽃은 단지 ‘사물’이 아니고 아름다운 생명의 ‘과정’이고 ‘인간관계’이다. 즉, 꽃의 미적 가치가 꽃이 상징하는 과정・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꽃의 감각적인 미적 가치는 삶・환생이라는 개념이나 여성 등 인간의 미적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 미적 가치의 이전과정은 ‘자연화’되기 때문에 이전된 것은 잊혀지고 만다. (79쪽)

93) 오리쿠치 시노부는 쌀의 수확 정도를 예측하는 기준으로 사쿠라꽃을 중요시하고 사쿠라꽃이 미적인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문인들이 꽃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했던 헤이안시대 후기에 들어서라고 논하고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신령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 일본인이 쌀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증거가 충분히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종교와 미적 가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과 실용적인 것에서 미적 가치를 찾는다는 생각은 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아프리카 예술이나 아이누 예술에서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조각이나 자수 등을 이용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를 장식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오리쿠치의 논리는 후세의 미적 규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花の話」, 1928) (503쪽)

제2장 애상의 미학적 가치 — 피는 사쿠라에서 지는 사쿠라로

* 한자 표기에 일관성이 없다. 『古今和歌集』는 『고금화가집』으로, 『伊勢物語』는 『이세이야기』로, 『源氏物語』은 『겐지이야기』로, 어떤 것은 일본어 독음으로, 어떤 것은 한자 음으로, 어떤 것은 두가지를 혼합하여 적었다. 한국내에서 통용되는 이름을 적은 것일까? 기준을 알기 힘들다.

物の哀れ, 모노노아와레, 이 말은 에도 중기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겐지이야기』의 분석을 통해 헤이안시대 문학과 그것을 낳은 귀족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대상 객관 ‘모노()’와 감정 주관 ‘아와레(哀れ)’가 일치하는 곳에서 생기는 조화적 정취를 나타내는 이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거의 번역이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부족하나마 애상(哀想)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로 한다. (옮긴이 주, 82쪽, 本居宣長(1730~1801), 『源氏物語玉の小櫛』, 1799)

노리나가가 『古事記』뿐만 아니라 『万葉集』, 『源氏物語』도 해석했구나.

2009년 1월 27일 화요일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사쿠라는 화려한 벚꽃놀이, 구애, 기분좋은 상태, 발전한 도시 등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주인공 히카리 겐지(光源氏)의 몰락과 함께 덧없음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즉 『겐지모노가타리』를 통해 사쿠라의 상징적 의미는 변화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시대의 사쿠라에 대한 유일한 인식은 아니다.

지은이는 헤이안 시대 후기가 부패와 암흑의 시대여서 정토종의 유행했고, 그것이 호화로운 사후 생활에 대한 동경을 유발했으며, 인생의 덧없음과 호화로움의 상호관계가 사쿠라가 애상이라는 상징을 갖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제2장 요약, 99~100쪽) 너무 간소한 정리다. 이 책의 주제인 사쿠라의 상징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선 이 과정을 좀더 자세히 적었어야 하지 않을까? 뭐랄까 외국 사람의 눈으로 일본 문화를 그저 바라만 보는 듯한 피상적인 느낌. 앞으로 전개될 책의 내용 또한 그리 엄밀하지 않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물론 지은이의 감상으로도 책을 쓸 수 있다. 지은이의 전공인 문화인류학 같은 경우는 더욱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인과관계는 자신의 직관에 근거한 예상인 것임을 명확히 하고, 독자 역시 그러한 감상을 얻을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이 일본 학계의 상식이라면 주석이 있었어야 할 것이고.

제3장은 가부키와 노의 내용을 근거로 사쿠라가 개인의 광기의 발산과 성역할 변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서술한다.

그러나 상세한 분석이 부족하다. 이런 것들은 무대기술이나 미술기술로 접근해야 할 지도 모른다. 또 꽃에 대한 상징성은 너무나 일반적이다.

지은이가 무리하게 이러한 개념을 꺼낸 이유는 제4장의 첫머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사쿠라의 모순적인 이중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제4장은 원래 국가의 상징이었던 매화가 사쿠라로 바뀐 과정을 서술한다. 변화 시기에 대한 추리는 구체적이지만 다른 설명이 부족하다. 게다가 후반부는 바로 에도시대로 넘어가서 공백이 크다.

제5장은 메이지 이신 전후 근대화 과정과 그 사이 덴노의 지위와 상징 조작에 대한 요약이다. 「大日本帝国憲法」, 「軍人勅諭」, 「君が代」, 야스쿠니 진자등을 다룬다. 책 전체의 내용과는 약간 분리된 역사적 사실의 서술로, 일본 근대화 과정에 대한 요약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거 같다. (138~193쪽)

* '카부키', '노오' 등의 말은 국어사전에 '가부키', '노'로 등재되어 있다. 반면 '황거'(皇居)는 덴노가 거주하는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고쿄'라 해야 옳을 것이다. 또 '3월 3일'을 '삼월삼짇날'로 적기도 하였는데, 한국의 풍습과 관련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한편 한국에도 행해졌던 풍습인 '축국'(蹴鞠)은 '케마리'로 적었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풍습이 정확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는 억지로 '애상'으로 번역했다면서 한국어에도 있는 '유현'(幽玄)은 왜 '유우겐'으로 적었는지. 전반적으로 옮긴이가 '문화상징'에는 관심이 있지만, 한일 양국의 전통문화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5장 같은 역사 서술에 상세한 설명과 평가를 달았더라면 어땠을까.

* 일본 문화의 새로운 박물학적 지식이 느는 것은 즐겁지만, 책에 대한 흥미가 급감하고 있다. 지은이가 사용하는 개념들, '자연화', '타자' 등의 말도 너무 서양 이론을 당연한 듯이 사용하고 있어 좀 거부감이 느껴진다. 인터넷 서평 등에서 책 후반부의 가미가제를 했던 군인들의 일기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데, 그럴만한 듯.

*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청사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후에 이와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과정이 단계적으로 진행된 것도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지만(139쪽), 각 단계에서 행하는 상징 조작은 매우 치밀하다. 조선인이라면 일본 관련 책을 읽을 때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6장부터 좀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하기도 한데, 책이 잘 안 읽혀서 일단 도서관에 반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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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식물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덩굴무늬를 통칭하는 것.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유행하였고, 고려나 조선의 자기, 고구려 고분 벽화의 덩굴 문양도 당초무늬라 부른다. 경우에 따라 다른 식물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인동초무늬 등.

서양의 문양이 중국에 수입된 것인데, 고대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 중세 아랍의 덩굴 문양도 당초무늬로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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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연예계 스폰서의 실체가 밝혀지면, 우리나라 방송은 24시간 연예계 스폰서와 관련한 뉴스 보도만 한다 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이미 겉잡을 수 없이 광범위해져 버린 연예인 스폰서를 문제 삼는다면 스타들은 전부 잡혀가게 될 것이다. 남겨진 작품에는 누가 출연할 수 있겠냐 — tvN 이뉴스 인터뷰 중에서 (via)

우리 사회는 정이 많아서 그런지 남걱정을 많이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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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2009년 1월 10일 토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90년대부터 국내에 자주 번역, 소개되는 미시사나 문화사, 풍속사 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음식 평론가의 일본 문화 소개(및 찬양)에 가깝다. 내용 또한 학문적, 문학적이라기보다 에세이(?)에 가깝다. 지은이의 사상적 경향도 토쿄대 졸업, 35년간 대기업 근무, NHK방송대학 강사 등의 경력에 어울리게 보수적이다. (이런 경우 일본 전통 문화를 잘 모르는 일본인, 특히 젊은이에게 다른 일본인이 소개를 해주는 듯한 느낌)

일본 책을 읽다보면 조선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드는 반감 중에 하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나 침략에 대해서 이렇다할 반성적인 언급없이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 그런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나아가 이랬더라면 전세(戰勢)가 바뀌었을지도... 같은 말을 하곤 하는 것.

이런 특징이 객관적인 관점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비슷하기 때문에 번역의 뉘앙스 전달이 더 힘든 듯. 물론 한국인들도 이런 글들을 보며 자국과 민족, 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이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낯뜨겁고 어색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책의 내용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각종 자료들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또 기본적으로 전통문화, 근대화 관련 자료가 일본은 한국에 비해 풍부하다.

달착지근한 샤브샤브나 전골 같은 것이 일본 고기 요리의 주종을 이루는 것에는 역사가 있었다. 우선 육식에 대한 금기가 있어서 요리 방법이 발달하지 못 했고, 적당한 도축과 고기 처리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고기는 주로 물에 끓여서 먹었는데, 고기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 된장을 넣었다. 이것이 기본이 되어서 고기가 인기를 얻은 이후에는 된장대신 간장(메이지 10년대)과 설탕, 그리고 파 등의 각종 양념(메이지 20년대)을 넣어 끓이거나 쫄여 먹는 것이 주종을 이룬 것 같다.

또하나의 대표적인 일본 고기 요리는 칸사이에서 발달한 스키야키이다. '스키'()에 쟁기라는 뜻이 있으므로 쟁기 위에 고기를 구워먹는 방법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스키야키는 날계란에 찍어먹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고기를 먹기도 한다. 아마 일본에서 수입한 방법일 듯.

일본은 텐무(天武) 4년(675년)에 덴노가 소, 말, 개, 원숭이, 닭에 대한 식용 금지 명령을 내린 이후로 육식을 금기시하는 전통이 이어져왔다고 하는데, 나는 『니혼쇼기』(日本書紀)의 기록과 당시 일본의 지배 체제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명령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이후에도 여러 덴노가 육식금지, 살생금지, 방생 등의 명령을 내렸다. (34쪽에 표로 정리. 山内昶, 『「食」の歴史人類学—比較文化論の地平』(人文書院, 1994) 인용)

다만 불교와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금기가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물론 일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음 일화는 일본인의 육식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瀧川政次郎, 『日本社会経済史論考』(日光書院、1939) 인용)

살생계를 범하면서까지 쇠고기를 먹으면 무척 죄책감이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어머니의 고향인 야마토고리 산에 놀러갔는데, 어른들은 안방의 부엌이 아니라 별채에 딸린 창고에 풍로를 가져다놓고 고리를 먹곤 했다. 불단에 스키야키 냄새가 스며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천수백 년 동안 지켜온 관습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113쪽)

공공연히 육식을 즐기는 번주도 있었다. 일정양의 소고기를 주기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반인들 사이에서 육식은 '보약'이라는 은어로도 불렸는데, (사슴고기는 단풍, 멧돼지 고기는 모란, 소고기는 흑모란, 겨울모란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 병을 치료하고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지만, 고기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에도 역시 금기가 작동했다.

어른들이 아이들한테는 독이라고 해놓고 밤중에 화로를 뜰에 내놓고 몰래 수육을 삶는데,그 냄새에 아이들이 잠을 깨는 바람에 고기 한 점씩을 먹여 재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기를 삶으면 부정탄다고 자기 냄비는 놔두고 이웃집 냄비를 빌려다 썼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빌려주지마 냄비 머려'라고 빌려준 사람이 혼난 이야기도 있다. (38~9쪽)

일본 괴기 문화가 육식에 대한 금기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밤에 어른들이 모여서 몰래 고기 먹는 거 목격하면 충격받았을 듯. 게다가 어른들이 한 젓가락 준 정체불명의 음식은 왜이리 맛있었는지! 어른들은 그 음식이 건강에도 좋다고 했다. 그건 과연 뭐였을까? 어제 소 시체를 마당에서 봤는데... 뭐 이런 식;;;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서당에 다닐 무렵이니 대략 메이지 3~4년경의 일이다. 시코쿠(四國) 도사(土佐)의 시골에서 쇠고기를 팔러 온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병들어 죽은 소의 고기였던 것 같은데 "보약 드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조그만 소리로 하인에게 말을 걸곤 했다. 하인은 고기를 몰래 사 마당 끝에 돗자리를 깔고 풍로와 냄비와 불을 모두 따로따로 해서 끓였다. 하인이 약이 된다고 해서 항아리 안의 고기를 한두 조각 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때 먹은 쇠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시중에 쇠고깃집이 생긴 것은 그보다 훨씬 훗날의 일이다. (113쪽, 『日本食肉史』(1956) 인용)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금기가 신도와 덴노 숭배와 결합하여 일종의 종교적 믿음을 형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즉 덴노는 신성한 일본 영토에서 자라나는 곡식을 보호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1872년 메이지 덴노가 육식 해금을 선언하자, 황거에 자객이 침입하는 사건도 발생하한다. (29쪽)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봐도, 외국에서 향수병에 걸리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돈가스, 카레라이스, 고로케 등 이른바 일본의 '3대 양식'이 먹고 싶어진다고 한다. 일본의 양식에는 메이지 시대 이래 선인들의 노력과 집념이 깃든 불가사의한 마력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다. (10쪽)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 요리들이 비교적 최근에 개발되었고, 근대화, 개방과 관련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라멘, 규동도 비슷하다.

2009년 1월 11일 일요일

지은이는 '서양요리'(西洋料理)와 일본화 된 서양요리인 '양식'(洋食, 또는 일본 양식)을 구별한다. 이게 일반적인 인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양요리를 먹고 싶을 때 일본사람들은 '양식집 가자'고 안 하고 '서양요리집 가자'고 하는가? 혹은 돈가스를 먹고 싶을 때 '양식집 가자'고 하는가?) 일본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책인 거 같기도.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게 내리는 거 같다)

육식이 서양 문명 도입을 주장하는 세력과 반서양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나누는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름난 육식 매니아였다.

2009년 1월 12일 월요일

빵의  수입은 군대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휴대와 보관이 쉽기 때문에 전투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 빵을 먹는 경우 각기병에 걸리지 않아 억지로 먹기도 하였다. 육군에서 개발한 고(甲) 빵(1905년), 오쓰(乙) 빵 등이 있다. 건빵(乾パン)도 개발하였다. 한국군이 건빵을 먹는 게 여기서 유래한 걸까? (별사탕(金平糖)까지 들어있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을 거 같다)

단팥빵(あんぱん)은 메이지 7년(1874년, 홈페이지에 의하면 메이지 8년, 1875년 4월 4일) 키무라 야스헤에(木村安兵衛, 1817~1889)와 에지자부로(木村英三郎, 둘째 아들)에의해 개발된다. 일본주의 주정을 사용하여 빵을 발효하여 익숙한 맛을 낸다. 이것을 서양과 동양의 성공적인 혼합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 단팥빵의 단팥소는 그야말로 중국적인 것이다. 이 빙과 바오쯔를 서구식 빵 안에 넣은 것이 바로 단팥빵이다. 따라서 단팥빵은 중국문화와 서구문화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것이 생겨난 곳은 중국도 서양도 아닌 일본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158쪽, 中尾佐助, 『料理の起源』(日本放送出版協会, 1972) 인용)

좀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고, 한국에는 동도서기를 이룬 물건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 봤는데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긴자의 이 상점은 지금도 있는 모양이다.
이전까지 일본인에게 빵은 그저 간식거리이고, 먹어도 배고픈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어쩌면 한국과 그리도 비슷한지. 한국에는 빵이 어떻게 수입되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단팥빵은 손쉽게 천황에게까지 진상되고 (키무라 야스헤에가 사무라이 가문이고, 공직에서 근무했던 거 같다) 벚꽃이 곁드려진 천황 전용 제품이 궁내청에 납품되다가 곧 일반인에게도 판매된다. (桜あんぱん)

http://www.kimuraya-sohonten.co.jp/sakadane.html
어렸을 때부터 서양음식인줄 알고 제과점에서 즐겨 사먹던 빵이 일본에서 개발된데다, 천황을 위한 상징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니 당혹스럽다. 앞으로 당분간 단팥빵은 먹지 않을 듯. (그러고보니제과점이라는 공간 자체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인 듯)

키무라야는 계속해서 1900년에는 잼빵을 만들었고, 역시 제과점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슈크림빵은 신주쿠의 나카무라야(中村屋)에서 1904년에, 카레빵은 료코쿠바시(両国橋)에 있는 메이카도(名花堂, 현재의 カトレア洋菓子店)에서 1927년에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또 식빵 역시 미국의 Pullman 빵을 본 따 일본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만화 '호빵맨'(원제: 단팥빵맨)에 등장하는 '잼아저씨'나 '카레빵맨', '식빵맨' 등이 서양 문물이 아니라 일본 고유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현재도 일본 광고 시장에 우유 광고, 식빵 광고가 꾸준히 등장하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상징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쿠후는 처음에 프랑스 빵을 선호했는데, 바쿠후가 밀려나자 영국 빵이 득세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당시 영국 빵은 캐나다산 강력분을 사용해서 크게 부풀려진 모양이었다고 한다.

현재 책을 3분의 2(전체 6장 중 4장)가량 읽었는데, 아직 돈가스 얘기는 안 나오고 있다. 5장부터 나오는 돈가스 얘기 재미없으면 막 화낼 거 같다.

내가 처음에 이 책이 학술서가 아님을 강조했는데, 역시 뭐랄까 객관적인 조망이 빠져있는 느낌. 전개 과정도 약간 갈팡질팡하는 부분이 있고. 이것이 학문과 비학문의 차이점 아닐까?

Amazon.co.jp 소비자 평가 중에 코스게 케이코(小菅桂子)를 언급한 것이 있었다. 코스게 교수는 이 책과 같은 시리즈인 『カレーライスの誕生(講談社, 2002)라는 책도 썼다. 이 책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 겠다.

しかし本書は単なる邦書の継ぎ接ぎに過ぎない。
海外文献・資料の参照や、料理の経験上の考察もない。
同じ英語が出来ないにしても

小菅桂子氏などの持つ粘り強さくらいは欲しいところ。

アジアの息吹, 単なる邦書の継ぎ接ぎに過ぎない (2004/6/21)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이 책의 주제인 돈가스의 탄생 과정이 담긴 5장, 「양식의 왕자 돈가스」의 내용이 기대만큼 정밀하지가 않다. 돈가스 탄생 이전의 비슷한 요리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현재 돈가스의 장점을 나열하면서 일본 음식의 우수함과 일본인의 지혜를 확인하는 것이 주 내용. 내 이럴 줄 알았어!

이전에 돈가스와 가장 가까웠던 요리는 '포크가쓰레스'였으며, 1907년 긴자의 렌가테이()에서 등장했다. '가쓰레스'는 커틀릿(cutlet)을 이르는 말로, 1860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화영통어』에 그 단어가 보인다.

돈가스는 쇼와 4년(1929년) 시마다 신지로()가 우에노의 폰치켄()에서 팔기 시작하였으며, 뒤이어 1932년 우에노의 라쿠텐(), 1933년 아사쿠사의 키타하치(, 다른 자료에는 로 적혀 있기도 하다.)에서 팔았다.

이런 가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든게 신기하다. 사실 이런 전통이 없는 한국이 이상한 거다. 일제 때 한국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그저 수입에 급급하고 있지 않았을까?

돈가스는 기름에 넣어 튀기는데, 이 방법은 기름에 굽는 서양요리 방법과 차이가 나며, 뎀뿌라 요리 방법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돈가스에 곁드리는 양배추는 렌가테이 시절부터 있었는데, 따뜻한 야채를 사용하는 프랑스요리와 다르다. 아마도 느끼한 맛을 없애고, 요리를 빨리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 같다. 한국에서도 돈가스는 양배추와 함께 나오는데, 이것은 이 전통을 따른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된장국이나 돈지루도 느끼한 맛을 없애기 위해 사용되었다.

돈가스는 돼지고기에 옷을 입혀 튀긴 것도 아니고 돼지고기를 재료로 한 프라이도 아니다. 빵을 잘게 부순 빵가루를 황금색으로 입히는데, 그 빵가루옷이 입에 넣어 씹었을 때 바삭 하고 고기와 같이 부서지는 일체감, 이것이야말로 돈가스다. 돈가스를 한입 가득 먹고 양배추를 아삭아삭 씹어 입 안의 기름기를 씻어낸다. 이 두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먹는데, 둘이 씹히는 느낌은 비슷하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도 서로 아주 비슷한 감칠맛을 가지고 있다. 혀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없이 돈가스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밥도 맛있고 술맛도 난다. (213쪽, 『』(, 1985))

관동 대지진 후 메밀국수 가게에서 메뉴를 넓히기 위해 돈가스와 카레라이스를 추가한다. 이 역시 현재 한국의 분식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가스카레는 1918년 아사쿠사에서 포장마차 양식집을 하던 고노 긴타로(河野金太郎)가 가쓰레쓰와 카레라이스를 한접시에 담았던 것으로 시작했다. 가와킨 덮밥(河金丼)라고 불렀다. (212쪽)

가스동은 1921년 나카니시 게이지로가 만들었다. (194쪽) '가스동'을 '돈가스덮밥'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 '돈가스'는 1929년에 개발된 것으로 나오는데 '돈가스덮밥'은 1921년에 개발된 셈이라서 혼란을 초래한다. 번역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단어들에 대해 우리말이 정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일지도.

우스터소스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된 것인데, 1898년 전국간장대회에서 관심을 끈 후 1900년 일본식 우스터소스가 완성되었다. (228쪽)

돼지고기가 소고기에 비해 더럽게 인식된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돈가스는 부드러워서 잘 사용되지 않던 안심의 수요를 늘리는 역할도 했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식당 주인이 도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서양 문물과 관련이 있어서 그랬을까? 일종의 유행이었을까?

마을 어디를 다녀도 돈가스 간판이 안 보이는 곳이 없다. 이렇게 돈가스집만 생기다 보면 도쿄는 기름 냄새 때문에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206쪽, 『식도락』 1932년 11월호)

여전히 고기 굽는 냄새에 대한 금기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일본에는 이 때 생긴 '기름을 쓰면 부엌이 더러진다고 해서 튀김요리는 꼭 고깃집에서 먹는 습관'(204쪽)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결어] 이 책을 통해 요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음식 역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더 재미있고 정확하게 즐길 수 있다. 또 한국의 외식습관 중에 일본에서 발생한 풍습을 수입한 것이 많다는 것에도 놀랐다. '화혼양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 자체가 추천할 만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꽤 정성들여 정리한 책임에 분명한데도 뭔가 부족한 느낌. 그게 학문이랄까, 독서에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좀 더 전문적인 책들이 있다면 그것을 참고하는 게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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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9일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

2009년 1월 2일 금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2009년 1월 3일 토요일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에서 기획한 근대 일본 사상가들의 작품과 주석을 정리한 「일본근대사상대계」(日本近代思想大系, 모두 23권+색인 1권) 시리즈 중 하나 『翻訳の思想(1991,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음)을 맡는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당시 70대 후반)로 후반 작업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1919~2008)가 맡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집필 방향 등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은 것을 녹음했는데, 출판사에서 이를 정리해서 낸 것이 이 책이다.

즉, 이 책은 엄밀한 학문적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한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의 일본 사상계에서의 위치가 대단하기 때문에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또 출판 즈음에 마루야마 마사오가 타계하였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책 쓰기 힘드니까 자기들끼리 떠들고 대담집을 내는 한국 출판계 사정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내용보다는 이 두 거물들의 솔직한 정신 세계가 아주 흥미진진하다. 자국 중심적인 태도, 사회의 움직임을 단순화 시켜서 이해하는 것(중국의 이러저러한 반응은 '중화사상' 때문),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특수한 태도, 서양 사회의 개념을 일본에 무차별 적용하려는 시도, 사회나 문화의 근원을 중국을 중심으로 상정하려는 경향 등. 그간 잊고 있었던 일본 책에서 느꼈던 이질감을 아주 밀도있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일본어의 뉘앙스나 글쓰기 형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면도 있다. 번역자가 알아서 잘 번역해줬으리라 믿는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아악'(雅樂)은 '가가쿠'로 번역해야 오해가 없을 듯. 전반적으로 일본어 발음과 한자 사용에 대한 원칙이 없는 듯 하다.)

옮긴이가 붙인 주석과 관련 도판이 매우 정성스럽고, 자료가 충실하다. 단, 키워드 선택 기준을 잘 모르겠다. 주석은 일반 독자가 읽으면서 궁금해하거나 오해할 만한 부분에 그에 합당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역할일 것이다.

마루야마  가장 빨리 근대화한 것이 군대입니다. 하카마(袴, 주름잡힌 겉옷 하의)를 입으면 볼품이 없으니까 양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정렬해서는 말입니다. 음악도 군악대에서부터 시작되지요. 행진곡이라는 건 일본 음악으로는 아무래도 안됩니다. 아악(雅樂)으로 행진할 수는 없는 거지요. 일상생활을 생각해 봐도 군대에서는 모두 양복을 입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최초로 서구화를 받아들인 건 군대를 포함한 기술관료였습니다.
가토  외국인 고문이 군대를 훈련시켰지요. 외국인 교사는 제일 먼저가 군대, 다음이 제국대학입니다.
마루야마  군대에서도 군사훈련의 목적이라고 해서 마침내 서양사같은 것도 가르칩니다. (25쪽)

2009년 1월 4일 일요일

'왜 일본은 번역에 매진하게 되었을까?'가 이 책의 주제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무사가 지배층이어서', '군대가 기술을 먼저 받아들여서' 같은 말을 툭 던지고 설렁설렁 지나간다. 유명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정신세계가 결국 이런 거구나 하는 허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국과는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정확한 자료를 기반으로 이야기하고, 거기엔 나름대로 연구된 사상의 흐름을 담고 있다. 한국은 연구 성과가 턱없이 부족하다. 중공같은 나라에서나 가능한 사업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이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역사 연구에 지금보다 매우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는 기본적으로 문헌 자료 자체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글은 많이 썼지만 그 중에 한국 사상'사'를 이루는 뼈대가 될 수 있는 글은 별로 없는 거 같다. 또 대부분 그런 이단설들은 한 개인의 주장으로 반짝하고 그칠 뿐이다. 마치 서점에는 시험 참고서와 소설이 넘치지만 후대에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을 것인 현대와도 비슷하다.

나는 그간 한국의 역사와 전통은 그저 연구가 되지 않았던 것일 뿐이지, 누군가 연구하면 결국 뭔가 찾아낼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에는 좀 허망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우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방법론에도 마음을 두었었다.

예전엔 이기백(1924~2004)을 싫어했었다. 그의 출신성분도 그렇지만 도시 자랑스러운 한국의 역사를 이렇게 소략하게 적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가 참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허허벌판인 한국사를 그정도로 정리한 것도 대단하다는 느낌.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난 그를 풍요의 시대에 자신의 주장을 마음대로 한 일종의 기인정도로만 생각해왔다. 조선에도 특출난 얘기했다가 묻혀버린 선비가 많지 않은가.

그러나 소라이(일반적으로 일본인의 이름을 받을 때는 성을 사용하는데, 소라이는 호다. 소라이는 유명하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겠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이러한 설명이 없다.)의 사상적 배경에는 외국 문명과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 또 그의 주장은 단순히 기발한 해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고, 그 학문적 후계자가 일본에는 계속 있었다는 것. (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가 주장하는 만큼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

어쩌면 조선의 선비들도 열려있는 사회였다면 더 적극적인 사고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외부의 자극보다 더 강렬한 것이 또 있겠는가. 기발하고 이단이라고 배척받던 선비들도 크게 보면 범생이들이다. 오히려 권력다툼하는 사람들보다 더 범생이 기질이 있었기에 교과서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김시습, 박지원, 정약용 이런 사람들 다 어렸을 때 신동 소리 듣던 사람들 아닌가? 학력고사 점수 높았던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도 있을 거다.) 과거 이외의 공부는 무시당한 경직된 사회구조도 큰 이유일 것이다. (이건 청나라도 비슷했을 거 같다. 일본보다 발전이 늦어지게 된다)

이 책이 번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 책의 번역의 사소한 문제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의 한국 번역 문화가 어떤 면에서는 메이지 시대 일본보다 못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대담자들이 설렁설렁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는 각 분야의 전문적인 단어들이 쉽게 언급된다. 한국의 일반적인 연구자들이 조언을 구하지 않고 번역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요즘 한국 분위기에 불어, 독어, 한문, 일본고전, 정치학, 법학 등에 두루 기본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 않나? 후반부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전 토쿄대 법학부 시절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적절히 번역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한국의 사회나 문화가 일본보다 주체성이 결여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우익들은 일본이야말로 주체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일본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본의 경우 번역이 서양의 문명을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동했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그저 수입해서 소비하기 위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009년 1월 5일 월요일

주요 내용이 결국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공 분야인 셈이다. (자기 대학 시절 전공 수업 이야기까지) 사회 전반에 대한 뭔가 큰 이야기를 할 듯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에 충실한 것. 어쩐지 일본 스타일인 거 같기도 하고. (예전에는 젊었을 때 한탕한 거 가지고 우려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학자의 경우도 천착할 수 있는 주제가 그리 많을 수 없는 거 같다)

한편 한국에서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주요 일간지나 잡지를 펴보면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무관한 정치 훈수를 두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문열 같은 사람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문학가들은 오지랖이 넓다. 그런데, 문학가가 사회에서 오피니언을 제시하는 것. 이게 일본 근대의 전통인 듯 하다.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신춘문예도 그렇고. 한국은 맥락없이 그 전통만을 수입해와서 소설가나 시인에게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길 권한다.

물론 자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지면을 얻은 기회와 권위가 주장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좀 허무하다. 심지어 자기 전공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논리 구성이 안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석훈. 그냥 우리 사회는 자기 듣고 싶은 말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009년 1월 6일 화요일

상당히 얇은 책인데, 꽤 오래 읽고 있다. (한국에는 왜 문고판이 없는지 모르겠다. 이 책도 양을 늘리기 위해 꽤 노력한 거 같다.) 내가 좀 부정적으로 적긴 했어도 나름 즐기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읽다보니 시간이 좀 걸린다.

국체, 사회유기체설, 사회진화론 등 일본 사회를 규정하는 사상들의 수입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하지 않는다. 또 대담자들은 일본 사회가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도 믿는 거 같다.

일본 사회의 원류를 말하는 듯 하면서도 객관적 자료를 사용하고, 또 사회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본 우익들의 태도와 유사성을 느낀다. 일본 우익은 정부를 생각없고 무능한 기회주의적인 타자로 상정한다. 이 책에서도 대담자들은 '테크노크라티', '방법을 바꾸는 무리' 등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자들과의 거리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대한 책들이 근대 일본에서 많이 번역된 것이 흥미롭다. 조선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 정치 제도 자체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와 성찰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즉흥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만 있었던 거 같다. 현재까지도 민주주의=자유 정도의 등식 이외에 다른 인식이 없는 거 같다. 노무현 탄핵, 이명박 정권의 합법적인 정책 집행 때문에 제도 자체에 대한 고민이 이제서야 시작인 거 같은 느낌.

『사회정학』(Social Statics),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번역판이 한국에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정말 이런 쪽으로는 딸린다. 어쩌면 한국에서 공부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2009년 1월 8일 목요일

(마루야마) 그 밖에 가토 히로유키가 아주 빨리 소개하고 있고, 후쿠자와도 『민정일신』(民情一新, 1879)에서 사회운동・사회주의라는 가공할 존재가 유럽에 발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민정일신』에 따르면 요컨데 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면 사상이 엄청나게 빨리 전파된다, 그렇게 되면 민중에게 어떤 관념이 전파되었을 때, 정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힘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정(情)에서 이성으로’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정해’(情海)의 파도에 사회가 휩쓸린 것이며 그것이 근대문명의 한 현상이다, 따라서 “지금 서양 나라들은 증기와 전신의 발명을 맞이하여 낭패”하고 있다는 거지요. (164~5쪽, 강조는 내가)

일본의 근대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뼈속까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한편,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는 끝까지 저항하였다는 점이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일본은 결국 미국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제를 바꾸게 된다.)

이러한 정신세계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조선에서 만든 말이라고 하는데, 난 일본에서 먼저 만든 말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이중적 태도를 고취시키고, 사회가 반동적인 성격을 갖도록 한다. 반대로 서양에 대해서는 '기술은 좋지만 정신 상태는 썩어빠진', 비윤리적인 동물로 본다. 여기에 애국주의와 영토에 대한 애착, 신도가 결합하면 '신토불이'가 된다. (그런 면에서 토지를 파헤치는 토목 사업에 집착하는 우파는 자학적인 변태라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인 범죄 등에 대해서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태도도 어쩌면 이런 수입된 제도에 대한 반항의 표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서양에서 수입하였기 때문에 우리 머리 속에 남아있는 동도(東道)나 화혼(和魂)은 실체가 없는 막연한 반동적이고 보수적 감정일 뿐이며, 과거 사상의 일부분 만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우리 사회 전체를 구성하고 움직였던 그 전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극우는 상상 속의 과거를 찾는 것인지도)

우리 사회는 사회 제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논의를 찾기 힘든데, 이런 정황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좌파라는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것도 제도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혁명론'이다) 정치학을 공부해야 겠다. 서양인들의 자기 사회에 대한 논쟁의 역사이다.

「지은이 후기」는 가토 슈이치가 적었다. 이 책과 『翻訳の思想』은 결국 가토 슈이치의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본의 대담집을 보면 마치 짜고 글을 쓴 듯이 주제가 고르게 적당히 배치된  경우가 있다. 이 책도 여러 주제를 고루 건드리는 것이 마치 기획을 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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