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일 목요일
강유원의 서평<http://allestelle.net/?p=1628>을 보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찾기는 예전부터 찾았는데, 도서관의 다른 서가에 있어서 목록에는 분명히 있는데 볼 수가 없었다. 오늘에서야 직원에게 물어서 찾았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족히 천 년 전부터 있었을 거 같은 메이지 진구(明治神宮)가 20세기 초에야 생겼다는 것에 놀랐다. 그 뒤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 만들어진, 마치 전통인 듯한 문화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어판 서문
더불어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일본의 특이한 사실에 대한 책으로서보다는,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천황제’에 관한 책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 (10쪽)
간략히 말하면 이 책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특이성을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을 예외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에는 반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독특하긴 해도 모든 내셔널리즘이 그렇듯이 일본 내셔널리즘도 지난 150여 년간 형성되어 온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과 충분히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이 전지구적 근대성의 일부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이 책은 영미(英美)의 일본 연구에 있어서 일본의 사회·문화·정치 등을 이른바 서양 또는 구미의 시각에서 단순히 단정해서 비판해 버리는 경향에 반대하는 나의 투쟁—나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었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투쟁은 부분적으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에 설령 ‘천황’은 없었더라도 미국 근대사의 많은 부분—도를 넘어 종종 군주처럼 군림해 온 대통령들, 군국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인종주의, 시민들의 종속화를 포함해서—을 보면 미국식 ‘천황제’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 내셔널리즘과 천황제에 대한 나의 검토가 구미의 내셔널리즘과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비추어 보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바랐다. (10~11쪽)
… 일본의 국민적 근대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일제하의 한국과 같은 그런 경험을 했던 곳의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한국의 문화비평에 대한 나의 제한된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우리는 포스트 식민주의적 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 및 구미의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에 대항하는 반식민주의적 의제(agenda)를 계속 추구해 나갈 때, 한국 내셔널리즘의 한계와 과잉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위치를 정식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 11쪽)
1장 서론: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Introduction: Inventing, Forgetting, Remembering)
내 오랜 궁금증의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 빨리 철저한 문화적 단절이 일어났는가 였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해 반대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즉 무엇이 어떻게 그 문화를 대체했는가 하는 것.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일본사학자들의 태도는 (1) 그냥 자연스럽게 민족적 전통이 왕조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등), 긴키 지방에서는 17세기 민중의식의 맹아도 보인다. (2) 민족의 자연스런 습성, 또는 심층적으로 내재된 상징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이노세 나오키(猪瀬直樹) 등) (3) 원래 전통이 천년만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술적인 주장이 아님. 그러나 지식인들도 일상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경우가 다반사. 인데, 사실 한국사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자의 주장은, 서양의 근대국가를 참조해 정치 엘리트들이 만든 새로운 문화가, 만든 사람 스스로를 속이며 이를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릭 홉스본, 베네딕트 앤더슨 등의 주장의 응용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주장보다 좀 더 강경한 어조를 띄고 있는 거 같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담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만들어진 고대』라던가)
1.1 내셔널리즘과 도쿠가와 시대의 천황(Nationalism and the Emperor in Tokugawa Japan)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반대로 민중 수준의 국가적 정체성은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도 경우 의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이 천황의 친정복고를 선언했을 때 상당수의 일반 민중은 새로운 정부에 의해 쇄신된 세계가 도래하리라고 기대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국가나 천황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신념을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세금 감면이나 토지 재분배와 같은 구체적인 혜택을 받아 생활이 개선될길 바라고 있었다. 국가의 대리인들에 의해 민속종교를 비롯한 민중의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의무교육의 도입으로 높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데다가 아이들의 노동마저 빼앗기고, 징병의 의무를 지고, 이전보다 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면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자 민중은 즉각적으로 병렬히 저항했다. (28~29쪽)
메이지 초기는 일련의 격렬한 반정부 저항들로 얼룩졌다. … (29쪽)
Yet all of this points to existence of only an emergent and geographically limited consciousness of national identity at the popular level. When the Meiji rulers ushered in what they called restoration of imperial rule, many of the common people looked with great expectation to the arrival of a world renewed by new regim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held strong beliefs about either the nation or the emperor. Rather, they longed for a bettering of their lives, for such concrete benefits as the reduction of taxes or redistribution of land. When their hopes were shattered—by representatives of the state who attacked their religion and way of life, by compulsory education that was costly in terms of tuition and children's labor lost, by military conscription, and by even heavier taxation than they had experienced in the past—they reacted immediately and violently. The first decade of the Meiji era was rocked by a series of violent of antigovernment uprisings, …
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초기의 메이지 정부가 불안했던 주요 원인은 당시 일반 민중이 천황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적절한 이미지에 있었다. … (29쪽)
Fromt the rulers’ perspective, a major reason for the instability of the early Meiji government was the inadequancy of the existing popular image of the emperor. …
예로 든 것은 스사키 분조(Susaki Bunzō)의 백세 생일 기념 1960년대 초 기자회견, 덴노의 에도 첫 순행시 그려진, 「聖徳皇太子尊職人立願の図」(Craftspeople Praying to the Deity Prince Shōtoku, 1868)(그림 1).
대체로 메이지 시기 이전에 민중이 가지고 있던 천황의 이미지는 정치적이거나 국가공동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이며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가이자 민속학자인 미야타 노보루(宮田登)는 천황에 대한 민간설화를 수집·분석한 결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 나타난 천황과 황태자에 대한 신앙은 마레비토(客人, 마을에 찾아와 세속의 복을 안겨 준다는 신성한 존재) 신앙과 중첩된다고 주장했다. 일반 민중은 천황이 신성한 강을 만들어 주고, 풍성환 수확물과 때로는 천황의 이빨자국이 나 있는 밤(栗)처럼 색다르게 생긴 작물을 안겨 주며, 각종 자연재해나 주술적 위협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 주는 등의 이로움을 지금까지 베풀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천황의 이미지는 민간전승 중에서 재액과 재앙을 막아 준다는 또 다른 고즈 천왕(牛頭天王)의 이미지와 혼동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23) (30~31쪽)
In general, popular images of the emperor before the Meiji era tended to be nonpolitical and rooted in folk religions, rather than political and representational of the national community. The historian and ethnographer Miyata Noboru has used collections of popular legends of emperors to argue that the belief in emperors and imperial princes, which existed in some areas of Japan, overlapped with the folk beliefs in marebito—that is, sacred beings who were thought to make visitations on the village world and who supposedly dispensed tangible this-worldy benefits to the people. The common foolk believed that these emperors had brought or continued to bring such benefits as the creation of sacred rivers, bountiful and often unique crops (such as chestnuts bearing imperial toothmarks), and protection against various natural or magical threats to crops. Moreover, the tennō(emperor) was often fused in the popular mind with another tennō, gozu tennō, the deity of popular folklore believed to ward off evils and calamities.23
1.3 기억의 장(Mnemonic Sites)
새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민생활에서 천황이 중심적인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연설과 저술을 적극 활용했다. 메이지 초기부터 지방 통치기구들은 주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포고문을 자주 발포했다. 나가사키(長崎) 재판소가 작성한 초기의 한 포고문에는 평이한 구어체로 “일본이라 불리는 이 나라에는 태양신 덴쇼 고타이 진구사마(天照御大神宮樣)의 후손이신 덴시사마(天子樣)가 계시다. 그 분이 주재자 고슈진사마(御主人樣)이심은 오늘도 하늘에 태양이 떠 있듯이 옛날부터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씌여 있었다. … 메이지 초기에 정부는 대중 설교자로서 선교사(宣敎師)—나중에 교도직(敎導職)으로 바뀜—를 임명하여 종교적인 강론을 펴게 했다. 예컨데 1870년 후반 가쿠마(菊間) 번(지금의 지바[千葉] 현 지역)에서 중앙정부의 지역대표들은 두 명의 승려를 교유사(敎喩使)로 지명했다. 이들은 애국심이나 국신(國神) 및 공자·맹자에 대한 참배, 그리고 신사(神社)에서의 올바른 참배방법 등에 관해서 설명했다. (31~32쪽)
The new rulers could and did use speech and writing to explain the centrality of the emperor in natural life. From the early Meiji years, government authorities in the provinces often wrote public notices for the common people about the emperor. An early notice drawn up by the Nagasaki courthouse explained in the easily understood vernacular that “in this land called Japan there is one called Emperor(tenshisama) who is descended from the Sun Deity(tenshō kōtai jingūsama). This has not changed a bit from long ago and just like the Sun being up in the heavens He is the Master(goshujinsama ja).” … Such government agents as senkyōshi(state propagandists) and later kyōdōshoku(national priests), who were appointed in the early Meiji years to preach to the masses, continued to edify the people with homilies. In late 1870 in Kihuma han, for example, the local representative of the central government designated two local Buddhist priests as educators(kyōyushi). The spoke on patriotism, the worship of national deities, Confucius and Mencius, and the proper method of prayer for worshipping at shrines.
… 정작 그들은 대중에게 국가적·정치적 의미의 문제를 가르치는 일보다 자신들의 특정 종교를 강론하는 데 더 몰두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종교강론을 관리들의 메시지로 오해하기도 했다. (33쪽)
… appointees often were more interested in using their positions to preach their own particular religious beliefs than in educating the masses about matters of national and political significance. The people also sometimes misconstrued the message and hence the significance of the official agents.
지배 엘리트가 풍속을 조종해 결속을 만들어 내는 것. 공자의 학설이 진리일 수도 있는 거 같다. 거창한 예식 속에서 상하관계를 보이면 그것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2010년 6월 4일 금요일
근대 일본의 종교와 정치에 관해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황거 깊숙한 곳에서 거행되는 고색창연한 황실제사들이 대부분 메이지 유신 이후에 발명되었다는 것, 더욱이 천황이 직접 거행하는 13개 의례 중 11개는 역사적 전례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31) (35쪽)
일장기가 진저우(錦州) 난산(南山)의 적 진지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뛰었다. 내 몸속에 일본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상으로서는 ‘자유사상가’이지만, 혼으로 말하면 역시 대일본주의의 일원이다.(33)
When I saw the Rising Sun flag glittering from the enemy position at Nanshan in Jinzhou my heart leapt with joy. I could not help but feel that within my blood flowed the warm blood of Japanese people. Philosophically, I am a “freethinker,” but in my soul I am one of the Great Japaninsts(dainihonshugi no hitori) after all.33
1893년 국가적 영웅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의 동상 건립을 시발점으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조상광증’(彫像狂症, statumania, 조상 제작 열풍)의 바람이 불었다. 그 전에는 기념상(記念像)을 세워서 국가적 영웅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전통이 없었다. (41쪽) … 국가적 신사(神社) 입구에 도리이(鳥居)를 세우는 근대의 모뉴멘탈리즘(monumentalism)도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39) (42쪽)
On a rather unpretentious level, the people witnessed a veritable wave of “statumania,” beginning in 1893 with the erection of a bronze of the national and military hero Ōmura Masujirō. Before that time there had no tradition of public statuary celebrating national heroes. … A modern monumentalism in the building of gateways(tore) to national shrines also dates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39
1.3 국민국가의 역사민족지를 향하여(Toward a Historical Ethnography of the Nation-State)
그러나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같은 역사학자들이 언급했듯이, 에도 시대의 마지막 몇십 년 동안 피지배자에 대한 통치자의 태도에 근본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초기 도쿠가와 정치체제하의 정치엘레트인 사무라이는 일반 민중, 이른바 우민(愚民)의 수동적인 순종에 만족했지만, 새로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국가적 목표의 실현에 일반인의 적극적이고 정신적인 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43) (40쪽)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사람들을 단순한 통치대상이 아닌 지식이 있는 자기규율적인 존재(subject), 요컨데 푸코가 말하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주체—‘지배와 예속’에 복종하는 신민(subject)임과 동시에 ‘양심과 자의식’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subject)—로 다시 만들어 가려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44) (40~41쪽)
However, as historians such as Yasumaru Yoshio have noted, the last decades of the Edo period witnessed a radical reversal in the attitude of the rulers toward the ruled. While the samurai political elite under the earlier Tokugawa system had been content with the passive compliance of the common folk, the ignorant masses(gumin), the new Meiji rulers began to demand the active spiritual participation of the common people in the realization of national objectives.43 As I would describe it, they hoped to reconstitute the people into more than simply objects of rule, so that they could become knowledgeable and self-disciplined subjects in the dual Foucauldian sense—that is, subjects who were not only subjected to “control and dependence” but who were also subjects possessed of their own identity by a “conscience or self knowledge.”44
이 책은 일반적인 문화사의 나열을 넘어서기 위해 푸코의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특징인 거 같다, 기호(symbol)에 대한 강조까지. 근데 내가 푸코를 모르잖아? 이 책이 쓰여진 게 90년대 초인데, 이미 단순한 ‘폭로’를 넘어서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한국이 유행에서 좀 많이 뒤지는 거 같다.
한편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강유원의 서평에서는, 문화이론이나 푸코 등에 대한 고려가 없다. ‘얼마나 간악하게 지배자가 권력을 확장하는가’ 정도의 관점에서 읽은 거 같다. (딴 얘기지만 난 댓글에 꼬박꼬박 친절히 댓글을 다는 강유원, 박노자 같은 사람들을 인터넷의 성인(聖人)으로 보고 있다. 한편 댓글을 막고, 욕 쓰고, 자기 변명을 일삼고, 심지어 블로그를 위장폐업하고 옮기기도 하는 김규항, 우석훈 같은 사람들은 ㄱㅈ로 여긴다.)
… 기어츠는 서양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이 (문화적) 연속성에 관심을 갖고 진술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적 이디엄은 장소마다 다르고 또한 시간이 흐르면 변할지도 모르지만, ‘문화적 틀’이나 ‘지배적인 픽션’(master fictions)이 정치와 정치지도자를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이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인도든 탄자니아든(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58) 어디든 똑같다. (48쪽)
… the same sort of attention to continuity can be found in Geertz’s statements about Western cultures. Cultural idioms may differ from place to place, and they may change over time to some extent, but according to his argument, “cultural frame[s]” or “master fictions” construct politics and political leaders,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This is the same everywhere, whiter it be “Germany or France, India ot Tanzania(to say nothing of Russia of China).”58
국가적 의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대한민국은 안 망하는 게 용할 정도로 실패적이다. 껍데기만 따라하는 전전 일본의 의례는 허망하다.
1.4 시각적 지배(Visual Domination)
나를 비롯한 다수의 천황제 학자들은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모더니스트들이나 강좌파(講座派)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지탱되어 온 견해, 즉 일본 근대사에서 천황제가 돌출한 것은 일본의 근대성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이 반영된 결과라는 견해를 다각도로 비판하기 시작했다.(62) 내가 제안하듯이 천황을 근대의 원형감시적(panoptic) 국가의 중심에 재배치한다면, 국가와 천황에 대한 숭배가 비교적 근대에 창안된 것이라는 점, 아울러 천황제가 결코 ‘봉건성’을 그 특질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본의 근대성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푸코의 틀을 전용하기는 하지만, 이른바 ‘감시의 사회’에 대한 푸코의 역사적 분석과 나의 분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푸코가 근대사회의 성립을 군주제 또는 적어도 ‘군주적 권력’의 쇠퇴와 결부시킨 데 반해, 나는 일본에서 두 종류의 권력이 동일한 역사적 순간에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54쪽)
천황제를 일본의 근대성의 중심에 둔다는 제한적 의미에서, 나의 입장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근대화 이론가인 존 휘트니 홀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일본의 천황제」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글에서, 홀은 일본의 천황제가 근대성과 양립할 뿐더러 실제로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타협할 수 없는 점에서 나의 전망과 근대화 이론가들의 그것은 다르다. 첫째로 나는 일본의 천황제와 국민국가를 비판하는 데 반해, 홀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모더니스트들의 공격적인 글에 맞서서 천황제를 옹호했다. 사실 홀은 메이지 시기 이후든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든 사회적 안정을 제공하고 일본인에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고취시킨 천황제의 능력을 높이 샀다. (54쪽) …
… 따라서 나와는 대조적으로 홀의 해석은 일본이 19세기와 20세기에 경험한 온갖 부정적인 측면을 사뭇 모호하게 이해되는 전근대의 과거 탓으로 돌렸다. 홀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의 친근한 얼굴을 하고 ‘진보’—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방으로 정의되었던 진보—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19세기와 20세기의 일본에 등장한 국민적 근대성에 대해 전혀 무비판적이었다. 달리 말해서 홀은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적 지식틀 또는 인식론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모더니스트를 공격했지만, 실은 그들과 전망을 공유했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비극은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 그리고 아마도 천황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전망을.(63) (55쪽)
2장 행재소에서 제국의 수도로(From Court in Motion to Imperial Capitals)
예컨데 일본에서 국가역사상 중요시되는 공공장소, 이를테면 이세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사, 황거(皇居), 교토 등지를 대상으로 한 수학여행은 이미 1880년대에 시작되어 20세기에는 거의 모든 소학교의 관행이 되었다.(1) (60쪽)
(1) 일본 학교 소풍의 발전에 관한 뛰어난 개관으로는 山本信良・今野敏彦, 『近代敎育の天皇制イデオロギー』(新泉社, 1973), pp. 182~240을 보라. (314쪽)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 수학여행의 기원.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을 것만 같던 런던, 워싱턴, 캔버라 같은 도시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시각적인 장엄함을 위해 기획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도쿄 역시 고쿄 앞 거리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바쿠후 말기에 파괴되었던 것 위에 새로이 근대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고쿄에 왜 큰 건물이 없나 궁금했는데, 이 역시 바쿠후 초기에 소실된 것을 그 이후에 복원하지 못 한 것이었다. 덴노의 국화 문장 자체가 메이지 이신 이전에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다.
2.2 옥렴을 걷고 나오다(Out from behind Jeweled Curtains)
오쿠보는 사람들은 그 구별 없이 누구나 천하의 주인이신 분(즉 신[神])께 지극한 감사를 드리도록 해야 하며, (그래야만) “이른바 비천한 창생(蒼生)에게 기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는 천황이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우받아 “옥렴(玉簾) 뒤에서 소수의 공가(公家)에 둘러싸여” “백성의 부모로서 천부(天賦)의 직분”을 다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천도의 예’(遷都の典)뿐이다.(28) 천황을 ‘구름 위’(雲上)에 사는 자로, 공가를 ‘구름 위의 사람들’(雲上人)로 여기면 천황 자신도 스스로를 존대고귀(尊大高貴)한 사람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고, “마침내는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75쪽)
메이지 이신의 주역 중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글. 일본 근대에 등장한 평등의 목소리는 마치 서양의 평등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나, 자세히 들어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 위에 사람 없다’면서 조선인은 제외했다. (서양도 흑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것을 뒷받침 하는 논리는 바로 이런 일본 특유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이것은 서양의 영향 뿐 아니라 일본의 고쿠가쿠(国学)와도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평등주의도 서양과 비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곳곳에서 푸코의 이론을 적용하는데, 역사적인 서술에 남의 문화이론을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듯 하여 세련되 보이지 않는다. 따로 장을 할애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2.4 행제소에서 제국의 수도로(From Temporary Court to Imperial Capital(teito))
그러나 이 재정적·기술적 이유만으로는 대화재와 공식적 재건까지의 11년이라는 간격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지연사유가 오로지 재정적인 것이라면, 왜 11년이나 지나서 하필이면 대장경(大藏卿)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의 디플레이션 정책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같은 대규모 항거 재건공사가 시작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 정부 (103쪽) 지도자들이 건축 사업을 최우선과제로 여겼다면, 새 황거의 건축양식에 관한 이견을 정리하고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분명 5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착공을 질질 끌다가 갑자기 황거공사에 착수하고 그 주변에 거대한 건물을 짓기 시작한 배경에는 지배엘리트의 황거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있어싿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대순행의 절정기와 일치하는 메이지 초기의 약 15년간 그들은 황거를 그저 천황의 주거로만 여겼다. (103쪽)
후쿠자와는, 마쓰다 미치유키 같은 사람들은 도쿄 항구를, 또 다른 이들은 워싱턴의 의사당 건물이나 다른 대건축물 같은 구조물을 세우자고 주장하지만, 가장 시급한 장기적인 대규모 사업은 황거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수도는 황거를 건설한 다음에 정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거는 “천장지구(天長地久)한 일본 역대 천황 폐하”를 위한 항구적 건물이며, “우리나라의 신성한 천자(天子)가 만국의 제왕 및 대통령과 교제의 예를 행할 곳”이므로 “국력을 다해 궁실(宮室)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짓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도 주변의 정비에 대해서도 그는 독자들에게 “국력에 맞추어 궁실을 화려하게 만들 뜻이 있다면 궁중(宮中)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궁 밖의 땅, 대문 밖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에서 전형적인 것이지만) 서민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그들의 일상생활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니혼바시 거리의 부유한 신사들 옆에 니코미야(煮翔屋, 국물장수)가 활보하고, 벽돌거리 긴자에서 빨랫줄에 걸어놓은 훈도시(犢鼻褌)가 펄럭이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황거의 현관 앞에 쓰레기 더미를 놓아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빈정댔다.(104) (108쪽)
(103) 후쿠자와는 그의 의견을 그가 1882년에 창간한 『지지 신보』(時事新報) 1883년 6월 7·8일자에 「首府改造と皇居御造營と」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 (321쪽)
2.5 국가적 풍경과 국민적 내러티브(National Landscape and National Narrative)
메이지 유신 직전에도 지방에 쇼콘샤들이 있었지만,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은 새 정부가 들어선 뒤였다. (127쪽) 전몰자 위령소 연구자에 의하면 1865~1870년의 짧은 기간에 공식 지원을 받은 신사가 105개나 생겼고, 오늘날 적어도 105개의 쇼콘샤가 남아 있다고 한다.(138) (128쪽)
달리 말해서, 근자의 많은 내셔널리즘 이론가들이 국민 형성의 구심점(139)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국민의 공유시간을 표현하는 내러티브가 일본에서는 일상세계의 주변 건물에 씌어져 왔던 것이다. (128쪽)
이음매가 드러나면 그 틈을 비집고 다른 종류의 도전—예컨대 메이지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구현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막아 버리는 한 예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동상을 우에노 공원에 세운 일이다. 그의 동상은 메이지 정부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그의 믿음을 혹시라도 사람들이 기억할까 봐 가고시마(鹿兒島, 1877년 새 정부에 맞서 사쓰마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저항 중심지)가 아니라 에도 성을 향해 세워졌다. (129쪽)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와 견해들이 끊임없이 제시된다. 그런데 그 사실들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그리 강한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일본과는 다른, 서양 스타일의 책을 보는 느낌이다.
3.1.4 전쟁의례와 시각적 지배
1장 1절에서 언급한 「聖徳皇太子尊職人立願の図」와 「大觀兵式行辛の光景」(1906, 책 표지 그림)(그림 10), 또 같은 해 나온 기념엽서(그림 11)의 도상을 비교한다. 1906년의 두 도상에서는 천황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푸코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푸코에 의하면, 구체제하에서 권력과 정의의 원천인 왕은 백성들에게 가시적인 존재였다. 그는 궁정의식을 비롯하여 여러 공적인 스펙터클을 통해 백성들에게 그 화려함을 발산하는 권력의 발광체였다. 이것은 푸코가 ‘상향하는 개인화’(ascending individualization)라고 부른 체계, 즉 권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큰 주목을 받는 체계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권력이나 특권을 많이 소유할수록 그 사람은 의례나 기록이나 시각적 재생산에 의해 두드러진 개인으로 나타난다.”(74) 따라서 군주는 가장 특출난 존재였고, 반면에 통치의 객체는 비가시적인 익명의 대중이었다. 군주의 권력은 건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18세기 말 이전까지 “건축술은 권력과 신성, 힘 같은 것을 현시할 필요성과 호응하고 있다. 궁전과 교회는 요새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건축형태였다. 건축은 주권자와 하느님을 나타낸다.”(75)
규율적 권력의 체계에서는 가시성이 완전히 역전된다. 권력은 비가시적이고 익명성을 띠어서 소재를 파악할 수 없지만, 권력의 객체는 완벽하게 조명된다. 이것이 ‘하향하는 개인화’(descending individualization)의 체계, 즉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명확하게 개인화되는 체계이다. 따라서 “규율의 체계에서는 아이가 어른보다, 건강한 자보다 환자가, 정상인이나 모범시민보다 광인이나 우범자가 더욱 개인화된다.”(76) (185쪽)
푸코의 이론은 일본 근대의 풍경을 설명하는 데 그럴듯한 시사점을 던져주지만, 이것을 일본의 근대화라는 상황 전체를 설명하는 데 간단히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까? 푸코는 자신의 담론을 어떤 차원에서 만든 것일까, 역사를 설명하는 틀로서 만든 것일까?
3.2 고물(古物)의 스펙터클(Spectacles of Antiques)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에 등장했던 고풍의 의상과 고풍의 물건들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건축물의 스펙터클을 물건들이 보충해준다는 건가? 물건이 주는 고색창연함은 좋은 주제인 거 같은데, 다른 장에 비해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4.1 천황의 두 신체(The Emperor's Two Bodies)
스에마쓰는 역사학자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와 랄프 기시가 말년에 영국과 프랑스 왕위의 정신학적 측면에 관한 연구에서 도입한 ‘국왕의 두 신체’라는 개념을(4)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설파하고 일본의 천황제를 이와 비슷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처음 이론화한 사람일 것이다. 『국왕의 두 신체』(1957)에서 칸토로비치는 국왕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신체를 가졌다는 관념이 중세 말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썼다. 그는 이 허구적 관념이 엘리자베스 시대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지배적이었고 12세기에 약간의 변형을 거쳐 지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한편으로 국왕은 “타고난 또는 사고로 인한 질환, 유년기나 노년기의 정신박약, 그리고 일반인의 신체에 (유전적으로) 발생하는 장애 등에 굴복하는”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을 갖는다. 또 한편으로는 이 자연적 신체를 초월하여 정치질서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신체’(body politic)도 갖는다. 이 “정치적 신체는 보이지 않아 통제할 수 없으며, 정책과 정부를 구성하고 국민의 인도자가 되며 공공복리의 정신을 담아낸다. 이 신체는 자연적 신체가 겪는 유년기와 노년기, 기타 장애와 박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 이 명분을 갖고 국왕이 (201쪽) 정치적 신체로 행하는 것은 그의 자연적 신체의 결함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좌절될 수 없다.”(5)
주체사상이 이거 베낀 거였어? Ernst Kantorowicz의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는 저작권 계약을 한 출판사가 있다고 한다. 언젠가 번역판이 나오겠지.
저자는 일반적인 주장처럼 덴노의 이중성이 그리 극명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메이지 초기에는 신적인 면만큼 인간적인 면을 일깨워야 함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 생각난다, 그 이후로는 누구나 따라한) 이것이 「青山観兵式真図」(1868)(그림 18) 같은 마차 안에서 비추는 덴노의 모습을 만든다. 뭐랄까 이 책의 핵심은 이런 도상비교(?)인 거 같다.
그런데 제시된 주요 도상이 시간의 순서대로가 아니라서 좀 애매하다. 앞서 언급한 1906년의 도상(그림 10)은 이 이후의 작품인데, 덴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바뀌는 걸까? 아니면 더욱 발전된 형태인가? (나뭇잎으로 살짝 가렸으므로) 설명이 좀 부족한 거 같다. 더우기 같은 해의 도상 1은 추상적인 신이다.
4.2 성별화의 정치와 정치의 성별화
메이지 덴노의 사진이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 복식의 수동적인 이미지에서 근대 군복을 입은 남성의 이미지로 변화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것에서 근대 일본의 가족관에 미친 영향, 사회적인 역할 분담 등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논리를 잘 모르겠다. 3장 2절처럼 이 장도 좀 부실하다.
5.3 민중의 일상문화와 국가의 공식문화
규율적인 정부가 강요하는 새로운 습관 및 신앙과, 민중생활의 오래되고 때로는 무질서하기까지 한 습관과 사고방식 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다양한 국가장치—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와 병영—는 자신이 (284쪽)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의식은 일본 안에 감시의 사회가 창출되는 과정에서 천황의 응시에 상응하는 필숵인 요소였다. 이러한 패전트가 거행될 때—메이지 전반기에 천황의 순행길 연변에서든 아니면 메이지 후반기의 거의 모든 마을(村), 소도시(町), 도시(市)에서든—일본 전역에서 학생들이 보여준 순종적인 행동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해서 대단히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주제로 옮겨 가야 한다. 즉 군주의 화려한 스펙터클과 동시에 일어난 무질서한 순간보다, 규율적인 훈련을 만들어낸 근대 일본의 수많은 제도들의 증식 쪽으로 말이다.(108) (285쪽)
이 책의 일본어 축약판 제목 ‘天皇のページェント’을 고려해 볼 때, 의식 자체에 대한 서술이 있는 5장 군중과 황실 패전트가 이 책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 장들에 비해 역사적인 자료 나열이 간소하고, 그 분석도 너무 뻔하게, 푸코를 곧이 곧대로 복창하는 것 뿐이다. 오히려 1장, 4장의 도상 분석과, 천황제를 서양의 근대국가 형성과 비슷한 보편적인 경향으로 본 관점이 값어치있는 거 같다.
외국 이론의 단순한 적용은 한국에서도 계속 일어나는 일인데, 무조건 그 외국 이론에 찬동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한국이라는 상황을 세밀히 뜯어보면 그 외국 이론이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긴 한국에서는 이 정도의 적용도 찾기 힘들었던 거 같다.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서술된 역사적 자료를 푸코에 맞장구치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이 아깝다.(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지은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즉, 그에게 일본 연구는 외국 연구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 전체의 분위기나 분량 등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최근작으로는 Perilous Memories(200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