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선과 악의 개념에 이르기까지는 이중적인 경위가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서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한다.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선하다고 한다 ; 반면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선한 사람으로서 ‘선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가진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이 보복심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들. 아무런 공통된 감정이 없는 종속적이고 무력한 무리에 속해 있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의 배타적인 사회 계층이고, 악한 사람들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한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 같은 관계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적을 악하게 보지 않는다 : 그는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에게는 모두 선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아니라 경멸스러운 자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선은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유전된다 ; 나쁜 사람이 아주 좋은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선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여러 구실을 생각해낸다. 예를 들면 신이 선한 사람을 현혹과 광기로 몰아넣었다고 말함으로써 신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두 번째 경우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모든 다른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악은 인간, 나아가 인간이 가정하는 살아 있는 존재, 예컨대 신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 인간적, 신적이라는 것도 악마적, 악한 것이라는 것과 같다. 호의, 자선, 동정의 표시는 간계, 무시무시한 결말의 서곡, 마취와 계략, 즉 세련된 악의이며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개별 인간이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곳에서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다. 기껏해야 가장 미숫한 형식의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견해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개인과 종족과 인종의 몰락이 가까이 있다.—우리들의 현재의 윤리는 지배적인 종족과 배타적인 사회 계층의 땅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74~75쪽.
Doppelte Vorgeschichte von Gut und Böse. — Der Begriff gut und böse hat eine doppelte Vorgeschichte: nämlich einmal in der Seele der herrschenden Stämme und Kasten. Wer die Macht zu vergelten hat, Gutes mit Gutem, Böses mit Bösem, und auch wirklich Vergeltung übt, also dankbar und rachsüchtig ist, der wird gut genannt; wer unmächtig ist und nicht vergelten kann, gilt als schlecht. Man gehört als Guter zu den "Guten", einer Gemeinde, welche Gemeingefühl hat, weil alle Einzelnen durch den Sinn der Vergeltung mit einander verflochten sind. Man gehört als Schlechter zu den "Schlechten", zu einem Haufen unterworfener, ohnmächtiger Menschen, welche kein Gemeingefühl haben. Die Guten sind eine Kaste, die Schlechten eine Masse wie Staub. Gut und schlecht ist eine Zeit lang so viel wie vornehm und niedrig, Herr und Sclave. Dagegen sieht man den Feind nicht als böse an: er kann vergelten. Der Troer und der Grieche sind bei Homer beide gut. Nicht Der, welcher uns Schädliches zufügt, sondern Der, welcher verächtlich ist, gilt als schlecht. In der Gemeinde der Guten vererbt sich das Gute; es ist unmöglich, dass ein Schlechter aus so gutem Erdreiche hervorwachse. Thut trotzdem Einer der Guten Etwas, das der Guten unwürdig ist, so verfällt man auf Ausflüchte; man schiebt zum Beispiel einem Gott die Schuld zu, indem man sagt: er habe den Guten mit Verblendung und Wahnsinn geschlagen. — Sodann in der Seele der Unterdrückten, Machtlosen. Hier gilt jeder andere Mensch als feindlich, rücksichtslos, ausbeutend, grausam, listig, sei er vornehm oder niedrig; böse ist das Charakterwort für Mensch, ja für jedes lebende Wesen, welches man voraussetzt, zum Beispiel für einen Gott; menschlich, göttlich gilt so viel wie teuflisch, böse. Die Zeichen der Güte, Hülfebereitschaft, Mitleid, werden angstvoll als Tücke, Vorspiel eines schrecklichen Ausgangs, Betäubung und Ueberlistung aufgenommen, kurz als verfeinerte Bosheit. Bei einer solchen Gesinnung des Einzelnen kann kaum ein Gemeinwesen entstehen, höchstens die roheste Form desselben: so dass überall, wo diese Auffassung von gut und böse herrscht, der Untergang der Einzelnen, ihrer Stämme und Rassen nahe ist. — Unsere jetzige Sittlichkeit ist auf dem Boden der herrschenden Stämme und Kasten aufgewachsen.
81.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는 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개할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 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 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떤 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있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 고통을 상상하는 것과 고통당하는 괴로움과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관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전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쌰여 있다 ;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측정한다.— 96~98쪽.
Irrthümer des Leidenden und des Thäters. — Wenn der Reiche dem Armen ein Besitztum nimmt (zum Beispiel ein Fürst dem Plebejer die Geliebte), so entsteht in dem Armen ein Irrtum; er meint, jener müsse ganz verrucht sein, um ihm das Wenige, was er habe, zu nehmen. Aber jener empfindet den Wert eines einzelnen Besitztums gar nicht so tief, weil er gewöhnt ist, viele zu haben: so kann er sich nicht in die Seele des Armen versetzen und tut lange nicht so sehr Unrecht, als dieser glaubt. Beide haben von einander eine falsche Vorstellung. Das Unrecht des Mächtigen, welches am meisten in der Geschichte empört, ist lange nicht so groß, wie es scheint. Schon die angeerbte Empfindung, ein höheres Wesen mit höheren Ansprüchen zu sein, macht ziemlich kalt und lässt das Gewissen ruhig: wir Alle sogar empfinden, wenn der Unterschied zwischen uns und einem andern Wesen sehr groß ist, gar Nichts mehr von Unrecht und töten eine Mücke zum Beispiel ohne jeden Gewissensbiss. So ist es kein Zeichen von Schlechtigkeit bei Xerxes (den selbst alle Griechen als hervorragend edel schildern), wenn er dem Vater seinen Sohn nimmt und ihn zerstückeln lässt, weil dieser ein ängstliches, ominöses Misstrauen gegen den ganzen Heerzug geäußert hatte: der Einzelne wird in diesem Falle wie ein unangenehmes Insect beseitigt, er steht zu niedrig, um länger quälende Empfindungen bei einem Weltherrscher erregen zu dürfen. Ja, jeder Grausame ist nicht in dem Maße grausam, als es der Misshandelte glaubt; die Vorstellung des Schmerzes ist nicht das Selbe wie das Leiden desselben. Ebenso steht es mit dem ungerechten Richter, mit dem Journalisten, welcher mit kleinen Unredlichkeiten die öffentliche Meinung irre führt. Ursache und Wirkung sind in allen diesen Fällen von ganz verschiedenen Empfindungs- und Gedankengruppen umgeben; während man unwillkürlich voraussetzt, dass Täter und Leidender gleich denken und empfinden, und gemäß dieser Voraussetzung die Schuld des Einen nach dem Schmerz des Andern misst.
니체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는 확연한 특징으로 이 이중적 도덕성(주인과 노예의 도덕성(Herrenmoral und Sklavenmoral)이라고 교과서 같은 데 써있을 듯)을 들 수 있겠다.
신분과 성속을 구분하는 고전적인 관점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겠지만, 니체의 관점은 현재의 윤리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그 더러운 세속적인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강하게 전승되었나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자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듯한 지배층의 비윤리성과 피지배층의 수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현대의 우리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같은 것과 연결시키는 건 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