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철학 = 32.0
2009/04/28 다이모니온
2009/03/31 잡담 (1)
2008/12/18 「Human All Too Human」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2
45.
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선과 악의 개념에 이르기까지는 이중적인 경위가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서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한다.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선하다고 한다 ; 반면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선한 사람으로서 ‘선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가진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이 보복심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들. 아무런 공통된 감정이 없는 종속적이고 무력한 무리에 속해 있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의 배타적인 사회 계층이고, 악한 사람들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한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 같은 관계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적을 악하게 보지 않는다 : 그는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에게는 모두 선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아니라 경멸스러운 자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선은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유전된다 ; 나쁜 사람이 아주 좋은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선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은 여러 구실을 생각해낸다. 예를 들면 신이 선한 사람을 현혹과 광기로 몰아넣었다고 말함으로써 신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두 번째 경우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모든 다른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악은 인간, 나아가 인간이 가정하는 살아 있는 존재, 예컨대 신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 인간적, 신적이라는 것도 악마적, 악한 것이라는 것과 같다. 호의, 자선, 동정의 표시는 간계, 무시무시한 결말의 서곡, 마취와 계략, 즉 세련된 악의이며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개별 인간이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곳에서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다. 기껏해야 가장 미숫한 형식의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견해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개인과 종족과 인종의 몰락이 가까이 있다.—우리들의 현재의 윤리는 지배적인 종족과 배타적인 사회 계층의 땅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 74~75쪽.

Doppelte Vorgeschichte von Gut und Böse. — Der Begriff gut und böse hat eine doppelte Vorgeschichte: nämlich einmal in der Seele der herrschenden Stämme und Kasten. Wer die Macht zu vergelten hat, Gutes mit Gutem, Böses mit Bösem, und auch wirklich Vergeltung übt, also dankbar und rachsüchtig ist, der wird gut genannt; wer unmächtig ist und nicht vergelten kann, gilt als schlecht. Man gehört als Guter zu den "Guten", einer Gemeinde, welche Gemeingefühl hat, weil alle Einzelnen durch den Sinn der Vergeltung mit einander verflochten sind. Man gehört als Schlechter zu den "Schlechten", zu einem Haufen unterworfener, ohnmächtiger Menschen, welche kein Gemeingefühl haben. Die Guten sind eine Kaste, die Schlechten eine Masse wie Staub. Gut und schlecht ist eine Zeit lang so viel wie vornehm und niedrig, Herr und Sclave. Dagegen sieht man den Feind nicht als böse an: er kann vergelten. Der Troer und der Grieche sind bei Homer beide gut. Nicht Der, welcher uns Schädliches zufügt, sondern Der, welcher verächtlich ist, gilt als schlecht. In der Gemeinde der Guten vererbt sich das Gute; es ist unmöglich, dass ein Schlechter aus so gutem Erdreiche hervorwachse. Thut trotzdem Einer der Guten Etwas, das der Guten unwürdig ist, so verfällt man auf Ausflüchte; man schiebt zum Beispiel einem Gott die Schuld zu, indem man sagt: er habe den Guten mit Verblendung und Wahnsinn geschlagen. — Sodann in der Seele der Unterdrückten, Machtlosen. Hier gilt jeder andere Mensch als feindlich, rücksichtslos, ausbeutend, grausam, listig, sei er vornehm oder niedrig; böse ist das Charakterwort für Mensch, ja für jedes lebende Wesen, welches man voraussetzt, zum Beispiel für einen Gott; menschlich, göttlich gilt so viel wie teuflisch, böse. Die Zeichen der Güte, Hülfebereitschaft, Mitleid, werden angstvoll als Tücke, Vorspiel eines schrecklichen Ausgangs, Betäubung und Ueberlistung aufgenommen, kurz als verfeinerte Bosheit. Bei einer solchen Gesinnung des Einzelnen kann kaum ein Gemeinwesen entstehen, höchstens die roheste Form desselben: so dass überall, wo diese Auffassung von gut und böse herrscht, der Untergang der Einzelnen, ihrer Stämme und Rassen nahe ist. — Unsere jetzige Sittlichkeit ist auf dem Boden der herrschenden Stämme und Kasten aufgewachsen.
8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는 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개할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 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 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떤 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있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 고통을 상상하는 것과 고통당하는 괴로움과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관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전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쌰여 있다 ;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측정한다.
— 96~98쪽.

Irrthümer des Leidenden und des Thäters. — Wenn der Reiche dem Armen ein Besitztum nimmt (zum Beispiel ein Fürst dem Plebejer die Geliebte), so entsteht in dem Armen ein Irrtum; er meint, jener müsse ganz verrucht sein, um ihm das Wenige, was er habe, zu nehmen. Aber jener empfindet den Wert eines einzelnen Besitztums gar nicht so tief, weil er gewöhnt ist, viele zu haben: so kann er sich nicht in die Seele des Armen versetzen und tut lange nicht so sehr Unrecht, als dieser glaubt. Beide haben von einander eine falsche Vorstellung. Das Unrecht des Mächtigen, welches am meisten in der Geschichte empört, ist lange nicht so groß, wie es scheint. Schon die angeerbte Empfindung, ein höheres Wesen mit höheren Ansprüchen zu sein, macht ziemlich kalt und lässt das Gewissen ruhig: wir Alle sogar empfinden, wenn der Unterschied zwischen uns und einem andern Wesen sehr groß ist, gar Nichts mehr von Unrecht und töten eine Mücke zum Beispiel ohne jeden Gewissensbiss. So ist es kein Zeichen von Schlechtigkeit bei Xerxes (den selbst alle Griechen als hervorragend edel schildern), wenn er dem Vater seinen Sohn nimmt und ihn zerstückeln lässt, weil dieser ein ängstliches, ominöses Misstrauen gegen den ganzen Heerzug geäußert hatte: der Einzelne wird in diesem Falle wie ein unangenehmes Insect beseitigt, er steht zu niedrig, um länger quälende Empfindungen bei einem Weltherrscher erregen zu dürfen. Ja, jeder Grausame ist nicht in dem Maße grausam, als es der Misshandelte glaubt; die Vorstellung des Schmerzes ist nicht das Selbe wie das Leiden desselben. Ebenso steht es mit dem ungerechten Richter, mit dem Journalisten, welcher mit kleinen Unredlichkeiten die öffentliche Meinung irre führt. Ursache und Wirkung sind in allen diesen Fällen von ganz verschiedenen Empfindungs- und Gedankengruppen umgeben; während man unwillkürlich voraussetzt, dass Täter und Leidender gleich denken und empfinden, und gemäß dieser Voraussetzung die Schuld des Einen nach dem Schmerz des Andern misst.

니체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는 확연한 특징으로 이 이중적 도덕성(주인과 노예의 도덕성(Herrenmoral und Sklavenmoral)이라고 교과서 같은 데 써있을 듯)을 들 수 있겠다.

신분과 성속을 구분하는 고전적인 관점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겠지만, 니체의 관점은 현재의 윤리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그 더러운 세속적인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고 강하게 전승되었나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자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듯한 지배층의 비윤리성과 피지배층의 수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현대의 우리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같은 것과 연결시키는 건 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

요즘 책세상에서 나온 「니체전집」을 간간이 읽고 있다.

10년전, 또는 한 20년 전에 니체를 봤으면 불타올랐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긴 그땐 완역본도 별로 없었으니까.

또다른 이유는 니체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일 거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이제 무슨 속담처럼 쓰이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맥락을 파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무조건적인 반감을 드러낼 뿐이다.

조금 더 쉽게 ‘신은 없다’, ‘신은 마음 속에 있다’, ‘신은 서구 문화 속에 있다’ 같이 말했어도 좋으련만 그렇게 쓰면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켰겠지.

아무튼 지금의 나에게는 니체의 이야기가 고만고만하게 느껴진다. 100년전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결례가 아닌 시대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사실 문학가에 가깝다. 그만의 표현을 통해 독자의 마음속에 내용이 구성된다. 만약 내가 니체를 다시 꼼꼼히 읽게된다면 그건 그의 글쓰기 기술을 훔치고 싶기 때문일 거다.

20세기는 니체의 예언대로 진행됐다. 물론 니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세기말 심리학과 철학, 근대의 출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니체가 최초의 20세기 사상가일 수도 있겠는데, 100년도 전 일을 누가 먼저인지 따지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진다.

1882년 7월 유고에 니체 자신이 자기의 전집을 기획한 것이 있는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가장 앞에 있다. 전작의 여러 주제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느낌이다. 내용이 끊어지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는 않다.

2.

깨달음을 얻으면 고독해지는데, 왜 깨달음을 얻어야 하나?

깨달음을 얻은 후 왜 다시 사회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하나? 니체는 아주 낙관적인 사람.

3.

형이상학을 가르칠 필요 없이 역사와 사회 현상만을 가르치라는 말에서 20세기말이 떠오른다.

손으로 직접 해보라는 보수적인 교육과 통하지만 보수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런던통신 1931-1935』

버트런드 러셀이 1930년대초 미국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모음집. 서문을 보면 마치 2009년에 재발견한 글인양 호들갑이지만 1975년에 나온 책이다.

읽다가 좀 짜증나서 덮었다. 러셀 성격이 좋은 거 같진 않다. 아니면 이게 당시 영국식 글쓰기일까?

철학자라는 직업에 걸맞게 러셀의 다른 글에서처럼 현상을 개념화하하는 건 탁월한 거 같다.

그가 지적한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는 90년대 들어서야 겨우 사회에서 인식되었다는 것에 작은 모멸감 비슷한 걸 느낀다.
『역사학의 철학』(이한구, 2007)

2010년 6월 8일 화요일

머리말

이 책은 특히 이런 상대주의를 철저하게 논파하고자 한 시도이다. 오늘날 상대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너무나도 (viii) 막강한 유행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학문적 탐구는 객관성을 준칙으로 해야 한다는 이 책의 논지는 시대의 유행에 맞서는 하나의 무모한 도전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던 유행도 근거가 없는 거품일 때는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유행이 진리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ix)

왠지 이 책을 더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요약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역사‘학’ 또는 역사‘철학’에 무지하기 때문에 배우는 마음으로 일독을 해볼 생각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의 역사 강의도 역사학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없다. 한국사 강의는 강사들이 자기 전공 분야를 자랑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어느 시대를 수업할 건 지도 강사 얼굴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앨빈 토플러 따라하는 사회학 전공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참고도서도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끝이었다. 여기다 기껏해야 마르크 블로흐를 언급하는 정도. (심지어 유시민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같은 걸 추천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보장하는데, 역사 공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책이다) 더군다나 이 책들에 대한 해설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전무했다. (시대탓도 있는 거 같다. 90년대 후반 이후에야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거 같다. 페르낭 브로델도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기백 이런 사람들도 선구자인 것이지, 지금와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기는 어렵다.)

2010년 6월 9일 수요일
조선일보에서 찍은 강의 동영상이 있다. 객관을 중요시하는 분이시라 조선일보를 선택하신 듯.
  1. '역사학의 철학' 쓴 이한구 교수<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358>
  2. 이한구 교수의 '역사학의 철학'(1): (제1주제) 역사학에서의 상대주의, 왜 문제인가?<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292>
  3. 이한구 교수의 '역사학의 철학'(2): (제2주제) 역사관과 객관적 역사서술은 모두 필요하다<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294>
  4. 이한구 교수의 '역사학의 철학'(3): (제3주제) 역사관은 과학에서의 '중핵 가설'과 같다<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299>
  5. 이한구 교수의 '역사학의 철학'(4): (제4주제) 철학자, 한국 역사학계를 비판하다<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302>
  6. 이한구 교수의 '역사학의 철학'(5): (제5주제) 동북아 역사전쟁을 해결하려면 정치에서 벗어나야<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37303>

서론

우리는 최대한 정확한 지도를 그리려고 한다. 이것이 지도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2쪽)

웬 유비와 선언?

… 그렇지만 사실의 발견이 어떤 고정된 하나의 이야기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는 한에서, 그리고 이야기도 어떤 고정된 하나의 설명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한에서, (6쪽) 사실의 발견과 이야기 서술은 서로 구별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역사학자와 역사가의 작업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실제로 많은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7쪽)

이정도로 ‘역사 연구(historical research)’와 ‘역사 서술(narrative writing of history)'의 분리가 가능할까?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이야기와 연결되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객관적 역사 서술이 가능하고 역사학은 시학과 구별된다는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논제를 통해 전개된다.

첫째,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이것이 역사를 제멋대로 해석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째, 역사 인식은 해석학적 이해와 과학적 설명 모두를 필요로 한다. 즉 역사는 이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설명의 대상이다.

셋째, 역사관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인식의 틀이 아니다. 우리는 보다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역사관을 추구할 수 있다. (7쪽)

얼핏 보기에 역사학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거 같다. 쿤을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3쪽), 과연 어떻게 논박할까 궁금하다. 두번째 주장과 첫번째 주장의 일부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책을 더 읽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1.1.1 실재론적 역사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역사 인식론은 서로 대립한다

원숙한 학자가 자신의 전공 분야를 선언적으로 개괄하고 있기 때문에, 문외한인 나는 상식적으로 대충 이해는 할 수는 있지만, 각 주장에 대한 적당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이 글은 사료로 치면 3차 사료쯤 될 것이다. 1차 사료를 봐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평가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 이처럼 자연적으로 결속된 사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완성의 이상을 추구하며, 한 사회의 이상은 나머지 다른 사회들의 이상들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역사 인식에서는 철저히 실재론적이다. 말하자면 역사 탐구란 존재했던 그대로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물론 헤르더를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감정이입이라는 특이한 방법을 써서 다른 민족서이나 다른 시대정신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인식을 위한 특이한 방법론일 뿐이었다. (21쪽)

… 실증주의자들은 관찰과 실험 및 일반 법칙의 적용과 같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역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렇게 할 때만 역사학은 과학으로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동시에 역사의 탐구가 개별적 현상의 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집단적 현상이나 총체적 사회 현상의 파악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역사학이 동태적 사회학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24쪽)

만약 우리가 좁은 의미로 실증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랑케를 실증주의자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한의 「실증주의 사관」을 참조. 『사관의 현대적 조명』, 차하순 편저(청람문화사, 1978)) 그는 분명 콩트적 의미의 실증주의자는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역사를 공학과 같은 성격으로 보는 현대적 실증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역사적 사건의 개성을 강조하는 고전적 역사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케가 이런 넓은 의미의 실증주의에 포섭될 수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주7, 500쪽)

저자의 서술만 놓고 볼 때,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사람들이 결국 주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틀을 갖게 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은연 중 칸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칸트에 관한 저작을 출간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의 말미에서 칸트적 통합을 시도할 것이라 예측된다. 이 사람들이 과연 그러했는지, 어디까지 어떻게 주장했었는 지는 따로 공부해서 확인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두번째로는 지은이의 전공분야를 ‘분석철학’이라 소개한 글도 있던데, 일반적인 분석철학 전공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세밀함, 논리적인 전개 등을 느끼기가 어렵다. 아마도 서울대의 학풍이 그런 거 같다.

2010년 6월 12일 금요일

1.1.2 반실재론적 역사 인식의 기본 교설

구성주의 인식론의 원조는 엠마누엘 칸트이다. … 즉 대상을 중심에 놓고 인식 주관이 그것을 반영한다는 전통적인 인식론을, 인식 주관을 중심에 놓고 인식 (27쪽) 주관이 대상을 구성한다는 인식론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수동적 인식론을 능동적 인식론으로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수동적 관찰의 결과라기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능동적인 정신적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다. … 이것은 또한 어떠한 전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칸트는 이런 전제의 체제를 인간 이성의 불변적 구조를 의미하는 ‘범주의 틀’이라 규정했지만, 현대의 인식론자들은 훨씬 자유롭고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념 체계’라 불리기도 하고 ‘세계관’이나 ‘패러다임’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런 인식론의 가장 현대적인 형태가 패러다임 이론이다. … (28쪽)

… 이때 경쟁적인 여러 패러다임들은 서로 불가공약적(incommensurable)13)이다. 즉 그들은 서로 비교되거나 번역될 수 없다. … (29쪽)

뭔가 나이브한 느낌이 듭니다.

읽어볼 책: 아담 샤프, 「역사와 진실」(History and Truth, 1976)

1.1.3 두 이론의 문제점들

역사 인식의 객관성이란 우리가 반드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도리 탐구자의 덕목이다. 물론 지금도 역사학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 완전히 결판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과학과 예술 사이에 과연 어떤 질적 차이가 존재하는가 하는 과학의 합리성을 둘러싼 비교적 최근의 논쟁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합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한, 일단 예술과 과학은 구별되며, 역사는 예술이 아니라 과학의 분야라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합라주의자의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적 탐구의 특성은 인식의 객관성에 있는 반면, 예술의 특성은 미의 창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학을 과학으로 간주하지 않거나, 혹은 과학의 객관성을 전적으로 의심한다면, 어떤 역사 서술이 날조되었거나 왜곡되었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극히 비상식적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제적인 역사 탐구의 과정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32쪽)

결론적으로 역사의 구성주의는 두 개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주관적 요소를 모두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장애물로만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개념 체계나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역사의 구성주의가 항상 상대주의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오류 때문이다. (33쪽)

모든 것에서 예외되는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하나의 객관적인 주관성은 존재하는 것일까? 필자가 딱히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

2장 현재주의: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 현재주의가 볼 때, 책의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이다. 우리가 그것을 읽고 이해할 때, 그것은 살아난다.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기억하지 못할 때, 그것은 죽은 상태이다.

동시에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현재주의는 현재의 관점이나 기준을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접근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며 현재를 그대로 과거에 투사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거는 그 자체를 위해서, 그 자신의 권리에서, 그 자신의 술어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실재론적 실증주의적 입장과는 대립된다. (37쪽)

1.2.1 현재주의가 제기되는 이유

첫째, 현재주의는 과거란 완전히 사라진 시간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속에서 되살리지 않는 한, 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관심을 갖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주장도 현재주의의 존재론적 시각을 나타낸다. (37쪽)

‘현재주의’에 대해 너무 극단적으로 설명하는 거 같다. 바로 뒤에 설명이 따르지만, 현재주의가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 그것이 살아 있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거를 현재 우리의 정신 속에 되살려야만 한다. 이때 비로소 역사는 참된 역사가 되고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나는 이를 현재주의의 (38쪽) 존재론적 논재라 부르고자 한다. (39쪽)

‘참된’, ‘정신’ 등의 수식어에서 민족주의가 연상된다.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이것이 시간의 존재론에서 현재주의가 취하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 시간의 존재론에서는 현재주의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주의의 반대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존재한다는 불멸주의(eternalism)이다. 현재주의와 불멸주의 중간에 과거와 현재는 존재하지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간 이론이 있다. 불교의 시간론은 대표적인 현재주의이다.2) (39쪽)



Introduction to Political Philosophy(Open Yale Course, PLSC 114)
1강만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너무 자주 보면 어려우니까 2~3일에 한 강좌 정도 보면 적당할 거 같다. (숙제도 해야 하고;;;)

홈페이지에서 볼 수도 있고, iTunes UYouTube에서 볼 수도 있는데,

iTunes U를 이용하면 iPod으로 옮기기 편할테고, 홈페이지에서는 자막이 내장된 고해상도 QuickTime 동영상(MOV)을 볼 수 있다. 강의에 대한 다른 해설도 있고. 마지막으로 YouTube는 자막을 보기 편하게 배열해서 영어를 잘 모르는, 혹은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p.s 고화질을 Podcast 파일로 만들어봤습니다: plsc114.xml
『마이클 왈전, 정치철학 에세이』(2009)
읽다가 좀 짜증나서 반납했다.

우선 번역이 엉성하다. 의미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는다.

번역이 잘못된 곳을 세세하게 지적하면 좋겠지만, 우선 한가지 문제만 지적하면, '이', '그' 같은 지시대명사의 사용의 잘못이 자주 눈에 띈다. 속칭 가주어 'it' 같은 것을 '이것'으로 옮기기도 했다.

두번째로는 책 내용이 짜증난다.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들, 특히 13장 이후의 침략 가능 조건에 관한 논의들. 자국의 정치 논리를 연구해주는 것이 정치철학이라는 학문인가?

저자의 주저를 영어로 읽는 것이 저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일 거 같다.
「철학과 민주주의」(Michael Walzer, 1981)
2010년 5월 19일
… 지적인 이유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유로도, 철학자가 자신과 동료 시민 사이에 두는 거리는 동료 의식을 단절시킬 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단지 실제적인 이유로 속임수와 은폐를 통해 거리를 다시 좁혀야 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의 데카르트(Decartes)처럼 사상적으로는 분리주의자로, 실제적으로는 순응주의자로 등장한다. — 36쪽.

… For practical as well as intellectual reasons, the distance that they put between themselves and their fellow citizens must be widened into a breach of fellowship. And then, for practical reason only, it must be narrowed again by deception and secrecy. So that the philosophers emerges, like Decartes in his Discourse, as a separatist in thought, a conformist in practice.

그는 적어도 실제를 그의 사상의 진리에 어느 정도 더 가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입장에 있게 되기까지는 순응주의자다. 그는 도시의 뒤죽박죽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창시자나 입법자, 왕, 밤의 시의원, 판사가 될 수 있다.—또는 더 현실적으로 그런 인물들의 조언자가 되어 권력의 귀에 속삭일 수 있다. 철학 프로젝트의 특성이 몸에 배어 있는 그는 흥정이나 상호 간의 타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알거나 안다고 주장하는 진리는 특성상 유일무이하기에 그는 정치도 똑같아야 한다고, 즉 개념은 일관되고 실행에는 타협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 37쪽.

He is conformist, at least, until he finds himself in a position to transform practice into some nearer approximation to the truths of his thought. He cannot be a participant in the rough and tumble politics of the city, but he can be a founder or legislator, a king, a nocturnal councillor, or a judge—or, more realistically, he can be an advisor to such figures, whispering in the ear of power. Shaped by the very nature of the philosophical project, he has little taste for bargaining and mutual accommodation. Because the truth he knows or claims to know is singular in character, he is likely to think that politics must be the same: a coherent conception, an uncompromising exception. …

번역을 잘했다고 하기는 어렵겠네요.

2010년 5월 20일
… 그러나 분명히 인민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설사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은 아닐 지라도, 어쨌든 여러 개의 머리를 가졌기에 교육하기 어렵고 서로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또한 인민의 다수가 철학의 수단이 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어떤 진정한 민주사회에서도 다수는 일시적이고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인민은 많은 의견을 갖고 있고 진리는 영원하지만 인민은 지속적으로 마음을 바꾼다. 여기에 가장 단순한 형태의, 철학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이 있다. — 43쪽.

… But cleary, the people raise the greatest difficulties. If they are not a many-headed monster, they are at least manu-headed, difficult to educate and likely to disagree among themselves. Nor can the philosophical instrument be a majority among the people, for majorities in any genuine democracy are temporary, shifting, unstable. Truth is one, but the people have many options; truth is eternal, but the people continually change theta minds. Here in its simplest form is the tension between philosophy and democracy.

그러기에, 인민의 권리를 주장한 루소조차도 인민의 의견을 (철학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입법 과정에서도, 배심원에게 다수결의 결과를 재검토할 것을 요청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귀족주의로, 헤겔의 공무원 집단이나 레닌의 전위 정당 역시 같은 것이다.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에서 이러한 맥락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판사다. 그들은 철학적으로 옳은 것을 기반으로 삼기를 바란다. 그러나 판사의 권한이 커진다는 것은 입법부의 힘을 제한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와는 또 멀어진다.

판사들이 '사법 소극주의'(judical restraint)를 선택한다면, 이것은 철학자의 회의주의적인 경향과 유사할 것이다.

다이모니온
‘영적인 것’의 원어 to daimonion에서 ‘다이모니온’(daimonion)을 ‘수호신’, ‘신령’ 또는 ‘영’(靈)을 가르키는 낱말인 다이몬(daimôn)의 축소형 명사로 잘못 아는 일이 더러 있는데, daimonion은 원래 형용사이고 이를 중성 정관사 to와 함께 써서 명사화한 것이지, 고전기 헬라스어에서 daimonion이 명사로 쓰인 일은 없다는 게 J. Burnet의 견해이다.
— 박종현, 「에우티프론」, 주10, 35쪽.

에우티프론이 보기에(글은 플라톤이 썼다) 소크라테스의 피소 이유는 바로 이 단어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고, 이 단어는 이후로도 계속 오해를 불러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잡담
사놓은지 거의 10년 만에 요한네스 힐쉬베르거(Johannes Hirschberger, 1900~1990)의 『서양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를 읽어가고 있다. 기대와는 달리 의외로 소략하고, 현재의 일정한 사상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역시 철학자들의 책을 하나하나 읽는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사람이 많은데,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주장을 보노라면 제자백가가 생각난다. 특히 자연철학과 상대주의, 쾌락주의는 도덕경을 자주 떠오르게 한다.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이 있는게 아니라 서양에서 무엇인가 먼저 생겨났고, 그것이 근대를 만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막스 베버 얘기 같기도 하고.
『이야기 속의 논리학』

2009년 1월 20일 화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내가 논리적 글쓰기나 논증 같은 거에 약하다. 공교육에서 논리적 사고 같은 걸 배워 본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려서부터 너무 컴퓨터에 익숙해서 형식논리와 일상언어를 아예 다른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인 거 같다.

그래서 가끔 이쪽 공부를 해줘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게 있다. 그런데 대입 논술 과외를 받았던 사람들이나 글쟁이들, 심지어 학자들도 나보다 모르는 경우가 종종있기 때문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그리고 논리가 실생활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다. 논리에 안 맞아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도서관에서 보니 이 책이 아주 쉬워보여서 집어왔다. 연변에서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한국에서 나온 것보다 간명하고 명쾌할 거 같아 믿음도 갔다.

이쪽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논리학을 '도구'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유용성'을 언제나 내세우는 거 같다. 꼭 그래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실재와 인간의 사고 과정, 판단 능력에 대한 질문들은 언제나 뒤로 미뤄져 있다. 혹은 다른 철학 분야와 경쟁하기 위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철학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하는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논리 자체로도 이런저런 생각거리가 많이 떠오르긴 하는데, 내 머리 속에서 잘 구성되지는 않는다.

웹에서 검색해보니 저자의 경력이 화려하다. 연변인민출판사 사장 및 주필, 중국민족출판사업위원회 부주임 등. 「대중화문고」(大中华文库) 『로자』(老子)를 번역하기도 했다.

2009년 1월 21일 수요일

예상대로 비교적 간명해서 시간낭비 않는 거 같아서 좋다. 반면 주요개념이 계속 나열되므로 좀 부담스럽다. 미덕이라면 책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적었다는 거. 공산권 책들이 이런 실용서적인 특성이 있는 거 같다. (옛날이야기들의 사용이 좀 언밸런스한 느낌도 드는데, 연변 개그 감각을 모르니 평가하기 어렵다.)

요즘 한국의 경우는 좀 난감한데, 외국어 참고서로 공부를 해도 쓸 수가 없고, 고등학교까지 다녀도 법제도를 이용한다거나 일상생활에서 역학(力學)을 활용하기 힘들다. 또 대부분 개념적으로 배우는 것이 어디까지나 대학입시용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것으로 사회에서 이야기하면 대학가면 다르게 배운다며 못 배운 취급을 하거나 현실을 모른다며 미숙한 사람으로 몬다. 친절히 설명해주는 책 역시, 어려운 거 쉽게 설명해주니까 알아서 겸손하게 따라오라는 식이다. 이렇게 배운 지식은 실생활에서 즉각 활용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논리학이라던가 이쪽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것도 무슨 고등학교 수학 공부하듯이 문제집을 풀면 좀 잘하게 되려나? 한편으로는 그 내용들에 대한 반감도 있는 거 같다. 책이나 선생은 언제나 논리학이 명쾌한 듯 이야기하지만 현실 생활에 그런 일은 별로 없다. 논리보다는 권력과 근원을 알 수 없는 당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뭐 따지려고 해도 입도 잘 안 열리고. 내가 논박당해도 기분 나쁘고.

아무튼 뭐 가끔씩이나마 논리학 책을 들춰보는게 내가 그나마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인 거 같다.

다 아는 내용 같지만 구체적으로 개념을 묻는다면 잘 모르겠는 것도 많고, 머리속에 박혀있는 건데도 잘 모르겠는 것도 있다. 아 논리학은 너무 어려워. (공부는 별로 안 했지만)

* 128쪽

(1) 오직 그때 7층에 있던 사람만이 범인이다.
(2) 다딴니는 7층에 있던 사람이다.
---------------------------
(3) 그러므로 다딴니는 범인이다.

이게 왜 오류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는 왜 이렇게 정리되는지 모르겠어요) 왜냐면 이야기 문맥상 7층에 있던 사람이 혼자였던거 같아서... 근데 책 진도상 사람이 여럿있어야 말이 되겠죠?

보는 김에 예전에 수업을 들었던 『기호논리학』(천지, 1992)책도 같이 들춰보고 있는데, 대체 내가 그때 시험은 어떻게 본 건지;;; 미스테리도 이런 미스테리가 없습니다;;;; 책 한줄한줄이 암호입니다.

더 늙기 전에 찬찬히 공부해봐야 할 거 같은데...

2009년 1월 22일 목요일

* 충분조건, 필요조건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p->q가 참일 때, p는 충분조건, q는 필요조건, 이렇게 배웠는데, 나는 이 정의를 p와 q가 서로 의존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한동안 헤맸다.

충분조건은 결과가 참일 때 참일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조건, 그러나 조건이 있으면 결과는 꼭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필요조건은 결과가 참일 때 꼭 참이어야 하는 조건이나 조건이 일어난다고 결과가 꼭 일어나지는 않는 것.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좋았을 듯. 더 복잡한가?

* Exclusive OR

'배타적'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 못했었다. 이게 일반적으로는 남을 배척하고, 특정한 주체만 권리를 가지고 있다, 뭐 그런 뜻 아닌가. 번역을 자연스럽게 안 하면 사람들 고생시킨다.

2009년 1월 23일 금요일

예시되는 이야기나 책 디자인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가 타겟인 거 같은데, 내겐 좀 어렵게 느껴졌다. 설명만 나와있는 것들을 직접 증명해보려니 좀 힘든 것도 있다.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걸로 치면 초등학생이 나보다 더 쉽게 읽을 수도 있을 듯.

공산권 특유의 유물론 찬양, 관념론 비난이 튀어나와서 좀 어색한 부분이 있다. 예제에도 '독재', '파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새날 출판사가 원래 운동권 책 내던 곳이기도 하고. 최근에도 개정판이 계속 나오던데, 이런 내용이 계속 유지되는지 궁금하다.

운동권 책이나 공산권 책들의 선언적인 어투를 매우 싫어했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장점이 있다. 독자와의 거리를 줄이고, 실제 사용해보고 싶게 만든다. 일반적인 교과서들이 너무 객관적인 문장들로 채워있거나, 친절하다고 말하면서 너무 아이 다루듯이 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또 간략한 설명의 장점도 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반복적으로 읽게 되는데, 학습 효과가 있는 거 같다.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사고』를 작년에도 한번 읽었는데, 지겹기만하지 이 책만큼 자극을 주지는 않았었다. 내 수준이 그정도인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대학 수준의 다른 책을 찾고 있다. 외국 책 찾아봐야 하나...

대입 논술 시장이 성장했지만, 의외로 이 분야에 체계적으로 학습해 갈 수 있는 책이 나와있는 거 같진 않다.

한국에 오랜시간 사용되는 '교과서'가 없는 것이 아쉬울 때가 많다. 워낙에 외국(미국) 종속적인 것이 많아서 그렇다고 쳐도, 이런 논리학 책 같은 것은 독자가 얼마나 쉽게 이해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만 따져서 교과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평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학생까지 두루 공부할만한 책. 다른 책처럼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주요 개념을 대부분 소개하고 있는 게 장점.


『이탈리아인 태고의 지혜』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비코가 다치바나 다카시 책에 여러번 언급되길래 빌려봤다. 다행히 번역판이 한국에 있었다.

2009년 1월 17일 토요일

이 책은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Giovanni Battista) Vico, 1668~1744)의 초기 저작인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원제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 ex Linguae Originibus Eruenda Librir Tres, 1710)을 번역한 것이다. 비코의 대표작인 『La Scienza Nuova』(새로운 학문, 원제 Principi di una Scienza Nuova intorno alla comune natura delle nazioni, 1725)과 주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는 본래 형이상학(Liber metaphysicus), 자연학(Liber Physicus), 윤리학(Liber moralis) 3권으로 계획되었으나, 첫번째 책인 형이상학 편만 출간되었고, 자연학은 『De aequilibrio corporis animantis』(1713)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이야기가 자서전에 실려있으나 현재 유실되었다. 윤리학편은 집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는 형이상학 편만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것은 우에무라 다다오(上村忠男, 1941~, 현 東京外国語大学 명예교수)『イタリア人の太古の知恵』(法政大学出版局, 1988)이다. 해제와 주 역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우에무라는 같은 해에 『ヴィーコの懐疑』(みすず書房, 1988)라는 자신의 책도 냈다)

옮긴이(이원두, 1938~)의 경력(한국일보, 경향신문 기자, 일본 특파원, 추리소설 작가, 현 파이낸셜뉴스 주필)을 생각해 볼 때, 철학이나 역사 연구자거나 중세 이태리어에 능통하신 분일 확률은 적을 거 같고, 일본어판을 충실히 번역하신 거 같다. 이런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번역어가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아닐 수도 있고, (딜타이(Wilhelm Dilthey)를 '디르타이'라고 적는 경우는 처음봤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에 이런 단어의 혼란으로 내용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학계의 논점을 번역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 할 수도 있다. (동문선 출판사의 인문학 책들이 대체로 전문 번역가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번역되었지만 국내 학계와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거 같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좀 고민스러운데, 우선 너무 어렵다. 이 책이 당시의 사상적 논쟁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당시 사상계의 맥락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없다. 기독교에 대한 언급들도 짐작은 가지만 정확한 교리는 모르겠다. (그래서 서양사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나 보다. 그러나 그건 교회에 나가야 한다거나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와는 전연 다른 것이다. 공부하는데 꼭 필요하다며 성경 찍어주는 놈들은 자기는 공부해 본 적도 없으면서 전도좀 해보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박홍규(1952~,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박홍규 아님. 『법은 무죄인가』 썼던 사람)『처음으로 돌아가라 — 비코의 생애와 사상』(필맥, 2005)라는 책이 있던데, 아무래도 앞뒤 설명이 나올테니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비코가 법학자가 되고 싶어했다는 말이 해제에 있긴 함)

이사야 벌린의 『비코와 헤르더』(이종흡, 강성호 옮김, 대우학술총서, 민음사, 1997)라는 책도 번역되어 있었다. 옮긴이 이종흡의 『마술 과학 인문학 — 유럽 지적 담론의 지형』(지영사, 1999)에도 비코에 대한 설명이 있는 듯. (아마도 데카르드 등과 대비해서)

이상현의 박사학위 논문인 『新理想主義歷史理論』(大完圖書出版社, 1985)에서도 비코를 다루는 듯. 비코는 역사학이랑도 관련이 되나보다.

또 이 책이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논리가 부앙부앙하게 느껴지고 (이건 내가 이런 식의 글에 익숙하지 못 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잘 몰라서 그렇게 보이는 거.) 직관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면이 있다. (시체말로 하면 민족주의 같은 거.) 발표 직후 '서술이 지나치게 간결할 뿐 아니라 저자가 생각하는 형이상학 이념을 제시하는 데 머물고 있을 뿐 체계적인 전개가 부족하다'는 서평이 나오기도 했던 걸 봐서는 내 생각만도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대략(;;;) 정리하면서 읽어보려고 한다. 이 책이 의외로 철학보다 민족주의의 예시로 사용될 수도 있을 거 같은 예감도 든다.

서언

(1) 많은 라틴어의 말들은 학문적 이론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융성했을 당시 배우지 못 한 사람들도 진공에의 혐오, 자연의 반감과 호감, 사체액의 성질 등에 관한 표현을 사용하였고, 아리스토텔리스의 『형이상학』이 전래되기 전에는 존재, 본질, 실체, 우유성 등의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2) 고대 로마인들은 농경과 군사 외에는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라틴어의 많은 어휘들은 학식이 풍부한 다른 민족, 특히 이오니아인과 에트루리아인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3) 그러므로 라틴어의 어원을 탐구한다면 고대 이탈리아인의 지혜를 탐구할 수 있다. (이오니아와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땅에 있었다) 이는 언어를 연구해 자신의 철학을 조직하려는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것이며, 어떤 학파에도 구속됨이 없어야 한다.

(숫자는 내가 붙인 것) 서언부터 뭔가 좀 감각적(?)이다. 후에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줄 만도 한 듯.

우리는 은연 중에 로마=이탈리아라고 생각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었던 듯. 그리고 이오니아(Ionia)가 이탈리아였나? 지리감각도 잘 모르겠음.

이렇게 정리하면서 읽으면 어느 세월에 다 읽을 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는 책인지도 미지수. 오히려 『새로운 학문』을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본문은 대충 짧게 요약할 예정.

2009년 1월 23일 금요일

지난 일주일간 이 책좀 읽어보려고 노렸했는데 책이 무척 안 읽힌다.

우선 내가 중세 이탈리아와 철학을 잘 모른다. 번역도 일어판을 옮긴 것이라 그런지 자연스러운 느낌이 안 들고. (한국에 시오노 나나미 빠가 많으니 한 5년 있으면 중세 이태리 전문가들이 번역한 글들이 많아질 거 같아 자못 기대가 된다) 『새로운 학문』 역시 같은 번역자가 같은 일본어 번역자의 책을 옮긴 것이던데, 이것도 아무래도 쉽게 읽진 못할 거 같다.

지금 생각으로는 비코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해 안 간다. (데카르트를 까서 그런가?) 재조명 받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 시대에 인물이 없었나? 자연과학을 철학이나 신학과 연결시키는 것도 지금 내 입장에서는 매우 불량스럽게 보이고, 게다가 이게 비코가 처음 한 일도 아니지 않는가?

신에게 있어서 진리는 마루의 입체상, 다시 말하면 조소(彫塑)와 같으며, 인간의 그것은 일종의 도안, 그리고 평면상이다. 따라서 회화(繪畵)와 같다고 볼 수 있다. (26쪽)

기독교 신자나 신비주의자라면 읽으면서 믿음을 다질 수 있을 듯.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비코는 데카르트를 독단론자로 본다.

'사람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가 아닌가, 살아 있는가 아닌가, 점령 공간이 넓어지고 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가 아닌가에조차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교활한 악마를 끌어들인다. 이는 마치 키케로의 『아카데미학파 철학』에서 스토아 학파가 같은 것을 확증하기 위한 책략으로 신이 보내 준 꿈을 이용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것이다. (35쪽, 1장 2절)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했어도 형이상학을 추구한 사람이 맞다. 데카르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비코는 형이상학을 자연과학과 수학, 논리학 등을 이용해 증명한다. 이 역시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인 내용인지, 신선한 주장인지.

유개념은 무한해야 하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 (2장) 점은 더이상 분해될 수 없는 개념이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논증, '자라나는' 형상도 있다는 주장, 신은 일반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특정한 것을 만들 때 신비하고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 그리고 인간은 구상력(構想力, ingenium)을 가지고 있어서 아름다운 조화를 가진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

생각나는대로 정리했는데,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내게 형이상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거 같다. 책의 문장만 보고 내용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거의 불가능한 듯.

그리고 고대 이탈리아어(=라틴어=로마어)에서 이런 증거를 찾았다고 하는데, 내가 라틴어를 모르기도 하지만 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이 책 전체에서 라틴어 운운하는 부분을 모두 없애도 진행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어떤 맥락에서 그가 고대 이탈리아를 강조했는지 글만 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읽고나서 보니 의외로 내용이 짧다. 아무래도 『새로운 학문』까지 봐야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 알거 같고, 그 이전에 해석서를 읽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아무래도 벌린 책이 좋을 거 같다.

비코의 주장에 대해 쉽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놀랍다;;;


Philosophy: A Guide To Happiness (2004)
  1. Socrates on Self-Confidence [Google Video]
  2. Epicurus on Happiness [Google Video]
  3. Seneca on Anger [Google Video]
  4. Montaigne on Self-Esteem [Google Video]
  5. Schopenhauer on Love [Google Video]
  6. Nietzche on Hardship [Google Video]
BBC에서 2004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Google Video로 링크한 것은 전편이 하나의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기 때문. YouTube 등 다른 유명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음.
「Human All Too Human」
철학자들의 생애를 다룬 BBC 다큐멘터리. (1999)
  1. Friedrich 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Google Video]
  2. Martin Heidegger: Think the Unthinkable [Google Video]
  3. Jean Paul Sartre: The Road To Freedom [Google Video]
Google Video를 링크한 것은 전체가 하나의 파일로 업로드되어 있기 때문에. YouTube 등 다른 유명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국 영어의 압박이 있긴 한데 그럭저럭 볼만함. (한국에선 왜 미국 영어가 '원어'인지? 영어 자체에 대한 고민도 부족한 나라. 미국에 간 사람은 자기 동네에서 한국에서 배웠던 표현 안 쓴다고 투덜거린다. 학교에서 왜 니네 동네 말을 가르쳐야 하는데?)
김광수, 『증명과 설명』(1997)
@book{citeulike:2180562,
title = {증명과 설명},
series = {김광수 교수의 비판적 사고},
volume = {1},
author = {김광수},
address = {서울},
publisher = {철학과현실사},
year = {1997},
month = {October},
day = {30},
price = {6000 KRW},
isbn = {8977752094},
citeulike-article-id = {2180562} }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도서관 반납 기일이 다 되었다. 제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공부는 나랑 안맞는건가? 다시 빌려서 2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으면 정리할 수 있을거 같은데.

2007년 12월 30일 일요일

논증책임을 못하면 바보보다 못한 비정상인으로, 정신병원에 보내져야 한다는 말. 좀 거슬린다. 사람은 이유를 생각하며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대중들이 몽매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아니면 진실은 미친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걸까?

'A는 휼륭하다'는 말은 가설 추리일 수도, 연역 추리일 수도, 귀납 추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마포평생학습관 문헌정보실 개가에서 눈에 띄어 빌렸다.

난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출판된 해인 1990년에 읽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T OR F = T 따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특히 컴퓨터의 논리연산에 익숙한 나로서는 대체 이 책이 무엇을 위해 씌여졌는지 알 수 없었다.

책 말미의 논리적 오류의 목록이 지금도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는데, (예를 들자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따위) 이것은 마치 암기 과목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었다.

90년대초 '논리와 비판적 사고'는 대학가에서 꽤 인기있는 강의였는데, 나는 이해할 자신이 없어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을거 같은 '기호논리학'을 수강하였다. 여전히 오리무중.

그러다가 2005년에 변주석의 강의를 듣고나서야 '논리와 비판적 사고'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또 무엇을 다루고자 하는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기계적일 것만 같았던 논리학(?)을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내적인 깨달음을 통해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는게 신기한 일이다.

미리 예단하고 강의를 듣지 않고 보낸 세월이 아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문장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도 했다.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였던거 같다. 별로 기억에 남는 책은 아니다.)의 첫머리에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흔하디흔한 삼단논법 명제를 봤을 때, 10여년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각종 잡생각이 물밀듯이 넘쳐났다. '모든 사람이 죽는거 니가 봤어?', '분류라는건 뭔가?', '현상 사이에 인과관계는 존재하는가?'

논리란건 이상을 상정하지만, 현실과 떨어질 수 없는 묘한 관계라는 것. 아마도 내가 어려서 과학,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고등학교도 이과로 다니고, 대학도 이공계를 다녔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에 매우 어색했던거 같다. 수학은 현실과 유리된 순수한 이상세계를 다룬다고 주장할 뿐더러, 수학을 현실에 투사하는 방법도 매우 플라톤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변주석의 강의를 더 듣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간극을 메우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던 와중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이다.

첫째 마당

1장의 내용은 매우 비추스럽다. 신문(한겨레, '김광수 교수의 논리와 글쓰기', 1995년 1월~1996년 8월)과 잡지(계간 철학과 현실, '청소년 논리 교실')에 연재되었던 글임에도 글이 별로 매끄럽지가 못하다.

또 21세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배우시라는 메시지는 좀 밥맛이 떨어져서, 대충 훑어보고 반납할까 하였는데, 중간중간에 강조된 주요개념들 — 원인과 이유(2장), 논증 평가, 특수 사실과 일반적 사실, 귀납 추리, 가설 추리, 연역 추리, 증명과 설명(3장) 등 — 에 대해 곱씹어 생각해보니 난 여전히 잘 모른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각 장의 연습문제 역시 내 자신이 흡족하게 풀 자신이 없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겸허하게 배우는 마음으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했다. (논리라는 순수한 개념을 훈련을 통해서 체득해야 한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한번 이해하면 끝나야 되는거 아닌가?)

p.s 90년대초 '논리와 비판적 사고'의 갑작스런 유행을 나는 미국식 교육과정 수입의 심화 과정이었다고 본다.

구연상, 수유연구실 하이데거 강좌 (2002/08)
http://www.transs.pe.kr/cgi-bin/ez2000/ezboard.cgi?db=jew&action=read&dbf=89
http://www.transs.pe.kr/cgi-bin/ez2000/ezboard.cgi?db=jew&action=read&dbf=90
http://www.transs.pe.kr/cgi-bin/ez2000/ezboard.cgi?db=jew&action=read&dbf=91
http://www.transs.pe.kr/cgi-bin/ez2000/ezboard.cgi?db=jew&action=read&dbf=92
小阪修平, 『철학사 여행』(1984)
book_title: イラスト西洋哲学史
author: 小阪修平
illustrator: ひさうちみちお
publisher: JICC出版局
date_issued: 1984
list_price: 1890
list_price_currency: JPY
ISBN: 4880630314
book_title: 철학사 여행 1
subtitle: 지혜의 세계로 떠나는 특별한 즐거움
author: 고사카 슈헤이
translator: 방준필
illustrator: 변영우
publisher: 간디서원
date_issued: 2004-07-03
list_price: 9000
list_price_currency: KRW
ISBN : 8990854210
---
book_title: 일러스트 서양철학기행
author: 고사카 슈헤이
translator: 이희구
cover_design: What.Man
publisher: 한마음사
date_issued: 1999-12-10
list_price: 10000
list_price_currency: KRW
ISBN: 8978000649

109 1999a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인문/자연과학실 (4층)
---
book_title: 함께 가보는 철학사 여행
author: 고사까 슈우헤이
publisher: 다정원
date_issued: 1997-08-20
list_price: 8500
list_price_currency: KRW
ISBN: 8986311410
---
book_title: 함께 가보는 철학사 여행
subtitle: From Thales To Marx
author: 고사까 슈우헤이
translator: 방준필
illustrator: 변영우
place: 서울
publisher: 사민서각
date_issued: 1990-03-15
list_price: 4500
list_price_currency: KRW

109 1990a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인문/자연과학실

109 고51ㅊ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도서관
5층 일반자료실
---
book_title: 서양철학사
translator:
  - 서계인
  - 문상련
publisher: 가람문화사
date_issued: 1990

다음 주부터 스터디할 책.

일이 있어 늦게 나갔더니, 화이트헤드가 어렵다고 책이 바뀌었다;
언어 철학 관련 책들 (by chinadrum)
chinadrum, 네이버 지시iN: "철학과 언어"답글 (2005/01/29)
로즈마리, "[퍼온글] 언어 철학 관련 책들1" (2005/10/25)
로즈마리, "[퍼온글] 언어철학 관련 책들2" (2005/10/25)

에서 도서정보만 옮겨적습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이 전공자는 아닌거 같고, 목록도 아주 좋은거 같진 않지만, 현재의 저로서는 참고 할만한거 같습니다.

- M. K. 뮤니츠, '현대 분석철학'.
- R. Rorty(ed)., 'Linguistic Turn'
- A. 케니, '프레게'
- 프레게, '산수의 기초'
- G. 로마노스, '콰인과 분석철학'
- J. 요르겐센, '논리 실증주의'
- L.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 이승종,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 박영식, '비트겐슈타인 연구'
- K. T. 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 A. 케니, '비트겐슈타인'
- K. 포퍼, '추측과 논박'(1, 2권)
- L.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 J. 오스틴, '말과 행위'
- J. R. Searle, 'Speech Acts'
- H. G. Gadamer, 'Truth and Method'
- J. 하버마스, '탈형이상학적 사유'
- W. 레제-쉐퍼, '칼 오토 아펠과 현대 철학'
-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 R. 해리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 W. V. O. 콰인, '논리적 관점에서'
- S. 크립키, '이름과 필연'
- R.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 N. 촘스키, '언어 지식'
김진석, "동양담론의 허구성"(2001)
- '동양'이라 불리워지는 극동에서 근동에 이르는 지역은 하나로 불리워지기에는 너무 이질적이다.
- '동도서기'의 '동', '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 동아시아는 아시아 다른 지역, 동남아시아 등에 배타적이다.
- '동양적 전통의 현재성',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경험주의적 전제이다.
-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을 생각하기도 하나, 현실적인 잔존과 대안은 다른 것이다.

- 공자 사상은 중국적 전통이며, 중국의 패권주의이다. (서양의 경우 그리스 문명이 패권을 잡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다)
- 현재는 봉건적 정명론과의 단절이다.
- 가치의 신분 의존성이 성리학을 해석하는 근대적 해석학에서 대부분 은폐되었다. 이것은 공모일 수도 있다. 지배자-군자의 성격은 도덕주의의 성향을 띨 것인데, 니체의 원한 곧 르쌍티망(Ressentiments)의 도덕이다.

- 도가를 서양의 대안으로 삼는 일은 이미 동양 내부에서 비-해체적 단순화의 대가를 치른다.
-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한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다.
- 노자의 지배술의 성격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런 것들을 호명하기는 하지만, 그 호명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에서도 나왔듯이 장기적으로 세상을 취하고,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 노자는 해체의 주체가 아니라, 거꾸로 많은 경우 해체의 대상이다.

"서양문명의 위기와 한달음에 노자의 자연을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서양문명의 위기를 기술에서 찾는다. 특히 철학적인 담론은 기술의 과학주의뿐 아니라 그것 뒤의 존재론적 구조를 문제삼는다.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기술론은 그러한 담론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이 초래하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기술에 모든 책임을 묻는 그런 위기론이 매우 피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제스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매우 상투적인 비판에 그치는 때도 많다. 자, 한 번 보자. 자본주의의 위험이 다만 기술에서 유발되는 것인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그 기술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하는 존재론적 망각 때문인가?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공허해지기 쉬운 지점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가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면서 생산력을 확대하는 괴물 같은 '자본'에 힘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구가하는 개인들의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억압받고 빼앗기는 층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자유와 평등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 욕망에 제 영혼을 태우고 있다. 이 점을 망각하는 동양 대안론이야말로 공허하다.

동양적 해석학만이 허구적인가? 필자는 단순히 서양철학자의 자리에서 동양-대안론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서양 중심의 해석학도 마찬가지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과거의 해석학은 오늘을 위해 제한된 효과밖에 가지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단절이 있다. 시퍼렇고 시커먼 단절. 인문학 자체가 거기에 빠져 허둥거리고 휘청거린다."

- 김진석(인하대 철학과 교수), "동양담론의 허구성" (연세대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학술강연회 발표문, 교수신문, 203호, 2001/06/02)

뭐 대충 동감합니다만... 정밀하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한참 이야기가 나올거 같고, 학계에서 이렇게 선언적으로 말하는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요. 김성환을 대표로 하는 반론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14강: 플라톤과 노자 (2006/04/11 방영)
- 희랍인은 감관으로 느끼는 것을 존재라 부르지 않음; 존재는 관념; 이데아; idea; ideal; 이상적인; 관념만이 영원한 것
- '고양이'라고 말했을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원본; 다른 것은 복사;
- 종교적 동기가 있는 듯

아니 또 왜 노자 도덕경;

- '도가도비상도', logos 라는 말도 '말한다'(speak)의 뜻을 가지고 있음.
- 상: '항상스럽다'는 것은 변화가 있는 것; '변화하는 모습'이 constant하다; 항상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와 더불어 있는 것;
- 동양인은 도를 불변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지속(duration)으로 생각;
- 희랍인은 지속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변화 아니면 불변.
- '도를 말하다' 관념화되어진 도(Conceptualized Tao); idea 가 된 도;
- 플라톤과 반대되는 이야기;
- 개인적으로는 발상의 전환의 계기
- 철학에는 놀람과 경이가 있어야

- 동양: 알 수 없는 것에 시간낭비하지 말자;
- 상식에 대한 존중
- 변화의 세계 긍정
- 서양: 이성주의, 수학주의
- 동양은 노자를 사랑해서 과학을 발전 못 시킴; 오히려 현대과학에 가까운 사고
- 예술 등을 꽃피움; 과학은 문명의 필요 조건이 아님. (페르시아 등)

- 진짜 리얼한 것은 항상 변하는 모습

뭐랄까 오늘 강연은 좀 힘이 없어 보이네요; 애들한테 개그도 안먹히는거 같고;

- as it is; 자연;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바라보자;

- 다른 나라는 플라톤적인 사고로 출발했는데, 동양은 노자적, 여러분은 그러니까 한국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뭔가 좀 이상한 느낌;

그리고 김병조는 왜 옆에 계속 세워놓나;

- 김병조: 서양철학 'No'자

- 탁상행정도 관념;

- 두 가지 사조를 항상 머리에 두고 있는게 논술적 사고;

- 김병조: 가치 기준은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이 중요하다. 동양문화, 동양철학을 되돌아보자;

- 부모님 연금 빼서 먹어 살아도 되니까; 가치 있는 인간이 되자;

예를 조금 심하게 드신 듯;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13강: 웃음이란 무엇인가? (2006/04/10 방영)
- 웃음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 Aethetics 의 분야
- Henri Bergson (b. 1859, d. 1941), Le Rire(Laughter, 1899)

김병조(조선대 교수)

- 유행어를 만든 과정, 정치풍자를 위해서 '지구를 떠나거라', 끝을 후려쳐서, 2년후 변형, 판소리, 3,4조
- 下下下 자기보다 아래인 경우
- 김용옥: superiority theory
- 好好好 좋아해야 웃음이 나온다
- 虛虛虛 욕심이 없어야 한다
- 解解解 문제가 풀렸을때 (Relief Theory)

아무래도 김용옥 다음번 TV 방송은 대담형식으로 진행하지 않을까? 책도 몇개 그랬고, 문화일보 기사도 그랬고 그게 더 편할지도

- 김용옥: Any breach of usual order of events
- 김용옥: 생명의 유연성에 기계적인(mechanical) 것이 덮어씌워질때 웃음이 발생(Bergson)
- 김용옥: Rigidity; 경직성은 웃음의 대상

오랜만에 듣는 80년대 유머들; 많이 안 웃긴다.

- 코메디는 논리적이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
- 김용옥: 철학도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으면

김병조 집안 이야기 나올 줄 알았음; 두 사람 다 광산 김씨;

- 라디오, TV 가 없을 때 자라났음. 사회등을 보면서 자라남.
- 졸업논문, '위트와 유머의 차이'
- 위트; 기지; wit; 지적; 상대를 바보 만들어서 웃기기 / humor; 유모어; 감정적; 자기가 손해보면서
- 김용옥: 인생의 멋은 손해를 봐야 생긴다
- 김용옥: 논리를 관철시키려면 유머가 있어야, 손해볼줄 아는 인간이 되야

- 군대에서 특기를 '웃기는거'로 적은게 계기가 되어 군대 연예대에 배속, 방송국과 자매부대. 전화위복

광산 김씨 드디어 나오는군요;

- 천자문, 사자소학, 동몽선습, 명심보감, 어릴 때 바둑이와 놀던 애와 하늘과 놀던 애는 다르지 않을까?
- 효어친 자역효지; 너나 잘해라
- 일직서는 중대장 혼자 웃기는 것이 제일 힘들었음
- 목요일에는 직접 대본 수정 후에 작가와 이야기(일요일밤의 대행진); 명심보감 등 도입 계기

제가 본 김용옥 방송 게스트 중에서 김용옥을 가장 띄워주고, 편안하게 대해주는군요. 참 배울게 없음.

- 김용옥: 예술은 진리의 세계를 다루진 않는다. 사실과 부합되지 않아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장 위대한 모험. 예술은 fiction 그러나 거기에는 truth element 가 있어야; 진리의 기반 위에 있어야; 사회에 소통하고; 사회가 구현하려고 하는 가치를 표현하려고 할 때 위대한 예술이 된다.

제가 가장 이해를 못하고 있는 김용옥 철학(?)의 한 부분. 김용옥의 보수성의 근거가 되는 부분인거 같다. 그리고 이때 '예술은 신화(mythos)의 세계'라는 자막이 나왔는데, 예술이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다; 또 '신화의 세계'라는 것이 뭘 지칭하는건지도 참 물어보고 싶다. 예전에 수업 들을때가 그립긴 하다. 아니참, 수업 들을 때는 질문도 맘대로 못했던거 같다;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EBS)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12강: 상대론과 발생학 (2006/04/04 방영)
최무영(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강의 계속

- Q: 상대성이론
- 김용옥: 질량이란 무엇인가?
- A: 관성의 크기, 순환적 답, 물리학의 기본개념
- 김용옥: 질량을 없앤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A: 원자를 쪼갠 것;
- 김용옥: 질량이 에너지로 바뀐거네;
- 고전 물리학은 시공간을 절대적으로 상정.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을 통일적으로 이해
- 김용옥: 철학에서 시간은 변화를 인식하는 우리의 틀, 절대시간/절대공간

- Q: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연구
- A: 비과학적면 존재, 과학자는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정상
- 복잡성(complexity, complex system)의 개념에서 줄기세포로 치료하기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봄. 과학의 인식적 가치에 위배됨.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더 강하다고 봄

'과학의 인식적 가치'가 뭐죠;

- 김용옥: stem cell?

예전에 한의대 졸업하시고 건강강좌 하던 레퍼토리 나오시네; 그러고보면 정말 참 저처럼 김용옥 강의 골고루 듣고 TV로 시청해준 사람도 드물 겁니다;

- 김용옥: 각 장기별로 분화되가는 control mechanism 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

- 천체관측과 달리 일기예보는 예측 불가. 줄기세포도 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봄. 암세포로 변이하는 경우도 많음.

- Q: 광자는 질량, 부피가 있는지, 질량이 있는데 어떻게 광속으로 움직이는지, 부피가 있는데 블랙홀에 어떻게 모이는지
- 질량이 있으면 광속으로 달릴 수 없는가?
- Q: 상대성 이론에 위배
- 빛은 질량이 없고, 에너지만 가지고 있다.
- 김용옥: 관성이 없다
- 정지질량
- 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크기가 있을까? 표준이론에서는 전자는 구조가 없으므로 크기가 없다고 보고, 양성자, 중성자가 구조가 있어서 크기가 있는 것으로 봄

- 김용옥: 과학이나 인문과학의 총체적인 우주론적인 틀 속에서 이해 안하고, 몇가지 말 들에 관심을 가져서 골방에 앉아 상상력으로 공부해서, 그런데 빠지면 평생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과학이 종교가 된다.

- Q: 빅뱅이론
- 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 질문자를 위해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그런 질문이 성립안된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M. C. Escher, Print Gallery, 1956
Lithography, 319 x 317 mm


- 인간은 과학활동의 대상이면서 주체

방송에 나온 그림은 TV 화면에 맞추어서 좌우로 길었는데,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니까 훨씬 의미가 살아나는거 같군요;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11강: 물리의 세계 (2006/04/03 방영)
최무영(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 자연현상의 실체는 matter 임을 전제
- 물질과 우주는 불가분;
- 이론과학
- 특정지식;particular knowledge/보편지식;universal knowledge
- theory

- 김용옥: neutral monism

헉! 중간에 끼어들기!

- Dalton

각설탕이란 말은 지금도 참 낯설다. 국민학교 자연시간에 각설탕이라는 말이 나왔을때, 선생님도 잘 모르시는거 같았다. 설탕물을 얼리라고 했던가; 최근엔 또 갑자기 시럽을 쓰는 추세라서 각설탕은 여전히 나에게서 너무나 먼 얘기;

- 만유인력(The gravitation interactions)/전자기력(The electromagnetic interactions)/강한 힘(The strong interactions)/약한 힘(The weak interactions)

- 김용옥: 중력은 왜 생기는 겁니까?

아인슈타인 이야기 하고 싶으셨나;

- 전자기력, 약한 힘, 강한 힘은 어느정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중력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

- 이론체계의 적용범위, 단순성

- 뉴튼의 운동법칙;고전역학 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 사람의 머리 속; 우주해 내재해 있지는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과학자의 창조물

- 김용옥: 예술품은 인위적이지 않나? 과학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거 아닌가?

- 검증; 타당성; 실험적; 논리적 정합성 필요

예술 역시 적당한 정합성을 보여줘야 한다;

- 과학도 출발은 상상력; 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 (A. Einstein)

- 사회의 영향

-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다양한 시각; 재구성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김용옥, 논솔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10강: 원자론의 탄생 (2006/03/28 방영)
- substance; 실체

- 남들이 같은 것을 볼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 유아론; solipsism

- 우주의 substance 는 matter 하나; 유물론; materialism / mind 하나; 유심론; spritirualism (일원론)

- 우주는 선신과 악신의 전쟁의 드라마로 보는 종교도;
- monotheism; 유일신론
- polytheism; 다신론
- atheism; 무신론
- pantheism; 범신론

- 젊어서는 무전제적인 사고를 해야

- tom; 자르다

- 혜시; 지대무외
- 신이 우주 전체일 수 밖에 없다

- Herakleitos(Ἡράκλειτος, Heraclitus); Permanent, immutable substance does not exist, for ultimate reality is essentially a mutable substance, always developing, hence constantly in a state of flux; 변화하는 세계가 진실; 전쟁; 변화를 긍정; 주역
- Parmenides; 운동도 없고 변화도 없다; 불변

- 다원론으로 절충; atomism
- Demokritos(Δημόκριτος, Democritus)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9강: 아르케의 추구 (2006/03/27 방영)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7강: 수학이란 무엇인가 (2006/03/20 방영)
- 장우석 (숙명여고 교사)

제가 맨날 김용옥 과학 모른다고 글을 써왔는데, 다른 강사를 기용했네요;;;

- '몇어찌'(기하, 양주동)
- 비유/증명
- "멋모르고 '예, 예.'하다 보니 어느덧 대정각이 같아져 있지 않은가!"

- 단순화
- 검산
- 변형
- 임원경제지, 서유구
- 연역적 추론
- 추론 과정이 중요
- 사다리타기 = 함수
- 전제가 중요
- 귀류법

EBS: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6강: 플라톤과 수학 (2006/03/14 방영)
- 생성; Becoming
- 존재; Being

- 희랍인들은 사유는 시, 공간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4강: 헬라스적 사유의 역사적 배경 (2006/03/07 방영)
- sensible; appearance; phenomena; opinion; doxa
- reality; intelligible; knowledge; truth; episteme; noumena

뻔한 얘기 같은데, 막상 시험보면 헷갈립니다;

- 폴리스의 목적은 전쟁; 교육은 전쟁기술;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기 위한 민주주의; 노예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었다(스파르타)
-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

고대 그리이스 의회민주주의가 현재 민주주의와 같지 않을거라는 것은 저도 의심하는 바

-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자긍심이 생김;

진나라도 그렇고; 국가의 형성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듯; 자꾸 듣다보니 저도 머리에 박혔습니다;

- 말싸움 잘하는 세계; 웅변, 수사학; rhetoric; 표로 연결
- 해결방법은 투표뿐; 리더쉽의 부재;

살짝 현실 정치 얘기로; 그렇다면 논술 열풍은 자연스러운 것?

-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relativism; sensationalism (Protagoras); 강한/약한 주장
- Pig; 사람이라면 뭔가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Socrates)

암튼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나타나고, 김용옥은 약간 호응하는 느낌.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적인 느낌이 든다;

- 대화; 개념; 문답; 무지의 자각; dialectic; 산파술; maieutike
- 약한 의견을 강한 의견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찾기 위한 방법

-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리를 알 수 있다

- 소피스트의 극단적인 상대적인 것에 대한 반대; 민주로 인해 허무주의에 빠진 아테네를 구하려는 영웅적 노력;

이렇게 생각하면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암튼, 제 자신도 제 의견을 낼 수 있을정도로 공부해야겠어요;

- 법을 어기는 것은 doxa다; 만들어진 원칙을 내가 고치면 질서가 회복되겠는가;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을런지는(혹은 생각했을런지는) 의문임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3607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5강: 새만금과 논술 (2006/03/13 방영)
김용옥,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3강: 존재란 무엇인가? (2006/03/06 방영)
- 차렷 경례 소리 들으니 옛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 재생 가능하도록 노트필기 해오라는 것도;;
- 색 이야기;
- 자꾸 나오는 불교 이야기.
- 뭔지 모르지만 뭔가는 있다; 물자체 이야기
- "희랍인은 감각의 대상과 사유의 대상을 나누어 생각"
- "존재는 사유의 대상", "감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현상"
- 현상과 도덕의 일치
- appearance / reality

그냥 이렇게 메모해서는 도움이 안되는거 같네요; 강의 필기 하듯이 써야 하나?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EBS)
김용옥 -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 2강: 생각이란 무엇인가? (2006/02/28방영)
- 구면이라고 말트시고;
- 본격적인 논술강의 시작이네요; 이런 분위기라면 김용옥의 글쓰기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을지도;
- 아 역시 전공인 철학으로; 데카르트 나오네요. 데카르트~칸트 까지의 강의는 참 여러번 들었던듯;
- "언어가 나의 사유를 빌어서 자기를 표현한다"
-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하다는 것에서 논술이 철학이 되어버리네요; 어짜피 자기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만큼 표현하는게 글쓰기일거 같은데...
- 실체, 본질, essence, substance ... 일본말

김용옥의 강의는 너무 쉬운게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가운데 아하 하는 깨달음을 얻지만, 그 이상 발전시키기가 어렵다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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