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정치 = 10.0
2011/01/25 『정치학』
The Dictator's Learning Curve: Inside the Global Battle for Democracy(2012)

이로써 우리 제도의 약점 두가지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종교의 위세와 경제를 허울삼아 당선된 자가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집행을 해도 견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가면과 협잡으로 정당을 탈취한 비민주 세력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도 배웠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취약해서 보완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혹자의 말처럼 국민의 정신 상태를 정확히 반영한 것, 즉 민주주의의 본질이 구현된 걸까.
유권자를 위한 정치학 입문
유권자를 위한 정치학 입문...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1.

일반적인 정치학, 심지어 인터넷에서 떠드는 정치 담론조차 유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인문학을 판단을 위한 연습인 것처럼 선전하는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는 권력자 뿐이다.

권력과 무관한 사람이 판단을 해도, 그것은 권력자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먼저 판단하는 것일 뿐. 결국 타인의 생각.

춘추전국 시대 고전들이 위정자를 주체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2.

이것은 또한 자신을 권력자에게 투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지역의 몰표는 왜 나오는가? 자기의 실제 이익과는 무관하지만 같은 땅에서 자란 누군가가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

재산이 많은 사람은 논리적인 판단을 통해 정당을 선택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강한 감정에 휩쓸리는 것일 뿐.

3.

이런 문제 때문에 작은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탈 정치적이다.

내가 산속에서 나물 캐먹고 살아도 투표는 해야 하고, 가능하면 정당을 지원하는 게 좋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힘들어 허덕이는데, 산 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4.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없는 유권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 해주는 책. 한줌도 안 되는 자신의 정치 권리를 알뜰하게 쓸 설명서.

5.

힘 없는 개인이라도 정당을 착실하게 이용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정당을 만드는 것.

무조건 권위를 추종하라는 것은 옛 가르침.
『북한은 현실이다』(2011)

- 전직 외교관의 이야기를 들으니 현실감이 느껴진다. 저자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외교의 나이브함도 느끼게 한다.

- 책이 좀 애매한 시기에 나왔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바로 직전인 2011년 중반까지만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거.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이 예언하는 미래를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올해 바뀐 정국의 내용을 포함한 개정판이 나오면 좋을 거 같다.

- 남한 사람들은 북한이 망하길 바라거나 중공에 흡수되는 것만 걱정한다.(그나마 이것도 최근에 추가된 것)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그보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는데, 오히려 남한에 더 위협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에 대해 한번이라도 상상하게 해주는 것만 해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 임계값, 카타스트로피, 정반합 등 되도 않는 이론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신경질 나서 책을 던졌을텐데 요즘은 그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이고 저자의 장점을 찾는다.

- 소련과 동유럽의 개방에 대해 여전히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동독은 별로 호화롭지도 않은 별장이 시위의 촉발점이 되었다는데, 남한에서는 그보다 더 심한 비리가 밝혀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사실 북한도 ‘궁전’을 지어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 역사는 반복된다, 믿기 싫지만. 한반도에 핵을 통한 위협을 한 건 북한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공공연히 핵을 언급했고, 쏘련 또한 핵 카드를 꺼냈다.

-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고, 교수까지 한 사람이 쓴 글치고는 좀 생각없단 느낌이 들지만, 남북한과 관련된 국제 정세에 대한 관점을 조금이라도 확장시켜주는 데 이 책의 가치가 있다.

- 중공과의 관계가 남한으로서는 큰 숙제. 저자는 독일 통일 당시 쏘련과 자꾸 비교를 하지만 약간은 상황이 다른 거 같다. 그러고보면 한국전쟁 때도 중공의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MBC 시사매거진 2580: 「UAE 원전수주의 비밀, 미공개 계약 조건」(2011/01/30)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isa2580/vod/index.html?kind=image&progCode=1000845100488100000

기업이라면 이런 게 미덕일 수도 있다. 손해보는 장사를 하더라도 큰 거래를 통해 규모를 키울 수 있고, 차후에 관련 산업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기업은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알 수 없는 기업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닐까? 정부가 기업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기업은 망해도 경영자는 연봉받고 다른데 가면 되고, 남은 건 M&A해서 팔면 되겠지만, 국가는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국가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저는 극우입니다)

이 정부 들어서 큰 비지니스를 성사시켜 긍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내려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는 나로서는 매우 불안하다. 왜 국민이 모든 책임을 지는 모험을 해야 하는가? 한번의 선거에 국민은 자신들의 목숨을 맡긴다.

대기업을 내세우던 과거의 방법보다 어쩌면 더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든다. 대통령이 직접 성공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도, 막후에서 군림하던 군사 정권과 비교된다. 석해균 선장이 죽으면 삼호 주얼리호 구출 사건을 공으로 내세우던 사람들 중 누가 책임질까? 정부로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처신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공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공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어떠한 공권도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으며 기존하는 공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명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공권에 반항하는 이는 하느님의 명령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맞서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관헌들이란 악행에만 두려운 존재들이고 선행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공권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하시오. 그러면 그대는 공권으로부터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사실 관헌들이란 악행에만 두려운 존재들이고 선행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공권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하시오. 그러면 그대는 공권으로부터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 바울, 박영식 요한 옮김

200주년기념 신약성서가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편인데, 이상하게 이 부분은 ‘공권’, ‘관헌’, ‘선’ 같은 어려운 말들을 썼다. ‘공권’이라는 말 속에서 ‘세속의 권력’, ‘지배자의 권력’이라는 뜻이 묘하게 탈색된 느낌이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정의로운 ‘공공의 권력’인 거처럼 해석되도록 유도한다.

『정치학』

왜 그동안 『정치학』을 안 읽었을까? 구절 구절에 담긴 함의가 참으로 놀랍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가 아니라 서양 사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복인 거 같다.

사람은 각자 가장 잘하는 역할이 있고 그에 따라 노예주와 노예 역할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다 노예주에 합당한 인격을 가졌고, 오랑캐들은 다 노예이다. 그러므로 바르바로이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는 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따위의 이야기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인데, 20세기 중반까지 이런 주장의 후계자들이 지구의 모든 곳에서 활개쳤다. 예를 들자면 얼마전에 읽었던 엄복(옌푸)의 사회진화론 같은 거. 심지어 현재까지 교묘한 변주가 세계에 울려퍼진다.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자급자족(autarkeia)이라는 최고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국가는 단순한 생존(zēn)을 위해 형성되지만 훌륭한 삶(eu zēn)을 위해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공동체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국가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telos)고, 어떤 사물의 본성(physis)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20쪽)

이로 미루어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zōion politikon)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20~21쪽)

또한 국가는 본성상 가정과 개인에 우선한다.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21쪽)

따라서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20~21쪽)

…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ē)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불의(不義)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들을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월함(aretē)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다.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이 옳은지 판별해주기 때문이다. (22쪽)

우리가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역자는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로 옮겼다.(주15) 문맥 상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거 같다.

또 우리가 흔히 ‘미덕’으로 번역하는 아레테를 ‘탁월함’으로 의역했다.(주19) 번역이 전반적으로 엄밀하다기보다는 의역을 택한 거 같다. 아레테의 영어 번역어 중 하나가 ‘excellence’인 것을 참고한 거 같다.

그런데 이 번역이 약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거 같다. 다음 문장 같은 경우, 의역을 더 해줘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없을 거 같다.

주인이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습득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탁월함 때문이다. 이 말은 노예와 자유민에게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주인을 위한 지식(despotikē epistēmē)과 노예를 위한 지식(doulikē epistēmē)이 있을 수 있다. (35쪽, 1255b16)


논리학에서도 추앙받는 아리스토텔레스라 주장들이 매우 논리적일 거 같지만, 의외로 유비가 대부분이다. 중국 고전들을 연상시킨다. 인용문들도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인용한 구절들이 마치 사자성어처럼 기존에 있던 관념을 대표한 것인가? 대부분 창작물임을 고려해 볼 때 그런 거 같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관용어로 받아들인 걸 수는 있다. 수업 중의 농담 같은 걸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사라지고 강의록만 남은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강의록이라서 더 진솔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아 그래서 홍기빈 책 같은 게 나온 거구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에 대한 주장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전 경제학 중에 정치경제학 아닌 게 없지만 서도.

따라서 어떻게 보면 모든 부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재산을 획득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화폐를 무한히 늘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은 두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같은 대상, 즉 재산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용 방법은 서로 달라서, 한쪽의 목표는 증식이고, 다른 쪽의 목표는 그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증식이 가사 관리의 기능이라고 믿고는 가지고 있는 화폐를 그대로 간직하거나 무한히 증식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45~46쪽, 1257b32)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이 훌륭한 삶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의 욕망이 무한하듯,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도 무한하기를 원한다. 훌륭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마저도 물질적 향락에 도움이 되는 수단을 추구한다. 또한 물질적 향락은 재산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인간은 재산 획득에 전념하게 되고, 그리하여 두 번째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의 향락은 과잉(過剩)에 있으므로, 그들은 향락의 과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재산 획득의 기술로 이런 향락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들은 다른 수단을 써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데,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자연에 위배되게 사용한다. 예컨대 용기가 할 일은 재물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재물을 획득하는 것은 또 장군의 기술도, 의사의 기술도 아니다. 장군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고, 의사가 추구하는 것은 건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든 기술을 재산 획득 기술로 전환하는데, 재산 획득이 목적이고 모든 것은 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46쪽, 1257b40)


* 천병희가 옮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2009)을 읽으며 쓴 글입니다.
Foreign Policy 2010 Failed States Index

http://www.foreignpolicy.com/articles/2010/06/21/2010_failed_states_index_interactive_map_and_rankings
『What Social Classes Owe to Each Other』

기존 계층들 간에 이미 배분된 재산들을 재분배하려고 애쓰는 대신, 기회를 늘리고 다양화하여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문명화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나간 모든 잘못이나 폐해를 없앰으로써, 사회의 완전히 새로운 동력에 새로운 발전 기회를 터줄 수 있다. 교육이나 학문, 예술, 정부 분야의 모든 향상은 세상 사람들의 기회를 확대시킨다. 이러한 확대는 평등의 보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가 있으면 어떤 사람은 그 기회를 열심히 활용하여 득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회를 소홀히 하여 전부 날려버릴 것이다. 따라서 기회가 많을수록, 이 두 부류의 자산은 더욱 불평등해지게 된다. 모든 정의와 올바른 이성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것이 마땅하다. 평등을 향한 열망은 질투와 선망의 소산이다. B에게 주려고 A에게서 강탈하는 것 빼고는 그 열망을 만족시킬 방안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안은 인간 본성의 지극히 비열한 악덕을 조장하고, 자본을 쇠퇴시키며, 문명을 전복시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회를 늘릴 수 있다면, 전반적이고 지속적인 문명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기회의 추구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의도, 상호 존경, 자유와 안전에 대한 상호 보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뒤는 한 계층이 다른 계층에 빚진 것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만 있을 뿐이다.

… Instead of endeavoring to redistribute the acquisitions which have been made between the existing classes, our aim should be to increase, multiply, and extend the chances. Such is the work of civilization. Every old error or abuse which is removed opens new chances of development to all the new energy of society. Every improvement in education, science, art, or government expands the chances of man on earth. Such expansion is no guarantee of equality. On the contrary, if there be liberty, some will profit by the chances eagerly and some will neglect them altogether. Therefore, the greater the chances the more unequal will be the fortune of these two sets of men. So it ought to be, in all justice and right reason. The yearning after equality is the offspring of envy and covetousness, and there is no possible plan for satisfying that yearning which can do aught else than rob A to give to B; consequently all such plans nourish some of the meanest vices of human nature, waste capital, and overthrow civilization. But if we can expand the chances we can count on a general and steady growth of civilization and advancement of society by and through its best members. In the prosecution of these chances we all owe to each other good-will, mutual respect, and mutual guarantees of liberty and security. Beyond this nothing can be affirmed as a duty of one group to another in a free state.

— William Graham Sumner, 『What Social Classes Owe to Each Other』(1883) 11장. 책의 마지막 결론부. 강준만의 번역에 내가 덧붙인 것.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프레시안에 「박동천의 집중탐구」라는 제목으로 2009년 초에 연재한 총 72회의 칼럼을 책으로 묶은 것. 인터넷으로 봐도 되는 글이라고 생각하니 흥미가 약간 떨어진다;; 프레시안에 대한 선입견도 있고.

무작위로 몇개의 글을 읽어봤다. 근데 이상하게 전공 분야 교수가 하는 이야긴데 설득력이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69화 「증거의 논리학: 법원의 '시간 끌기'…해결책은 배심제」 내용은 이렇다: 조경란의 『혀』 표절이나 이재용의 전환사채 편법 증여 같은 사건들에서 판사는 대부분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시간만 흐르고 유야무야 기득권에 유리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배심원 제도를 활용해 제3자의 건강한 상식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나가면 된다. 토크빌도 배심원제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왜 설득력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book{ title =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author = "박동천", year = "2010", publisher = "모티브북", address = "서울", ISBN = "978-89-91195-38-7", price = "25000 KR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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