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정치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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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ictator's Learning Curve: Inside the Global Battle for Democracy(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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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우리 제도의 약점 두가지를 알게 되었으니... |
우리의 민주주의는 취약해서 보완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혹자의 말처럼 국민의 정신 상태를 정확히 반영한 것, 즉 민주주의의 본질이 구현된 걸까. |
| 유권자를 위한 정치학 입문 |
1. 일반적인 정치학, 심지어 인터넷에서 떠드는 정치 담론조차 유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인문학을 판단을 위한 연습인 것처럼 선전하는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는 권력자 뿐이다. 권력과 무관한 사람이 판단을 해도, 그것은 권력자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먼저 판단하는 것일 뿐. 결국 타인의 생각. 춘추전국 시대 고전들이 위정자를 주체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2. 이것은 또한 자신을 권력자에게 투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지역의 몰표는 왜 나오는가? 자기의 실제 이익과는 무관하지만 같은 땅에서 자란 누군가가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 재산이 많은 사람은 논리적인 판단을 통해 정당을 선택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강한 감정에 휩쓸리는 것일 뿐. 3. 이런 문제 때문에 작은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탈 정치적이다. 내가 산속에서 나물 캐먹고 살아도 투표는 해야 하고, 가능하면 정당을 지원하는 게 좋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힘들어 허덕이는데, 산 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4.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없는 유권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이야기 해주는 책. 한줌도 안 되는 자신의 정치 권리를 알뜰하게 쓸 설명서. 5. 힘 없는 개인이라도 정당을 착실하게 이용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정당을 만드는 것. 무조건 권위를 추종하라는 것은 옛 가르침. |
| 『북한은 현실이다』(2011) |
| MBC 시사매거진 2580: 「UAE 원전수주의 비밀, 미공개 계약 조건」(2011/01/30)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isa2580/vod/index.html?kind=image&progCode=1000845100488100000 기업이라면 이런 게 미덕일 수도 있다. 손해보는 장사를 하더라도 큰 거래를 통해 규모를 키울 수 있고, 차후에 관련 산업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기업은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알 수 없는 기업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닐까? 정부가 기업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기업은 망해도 경영자는 연봉받고 다른데 가면 되고, 남은 건 M&A해서 팔면 되겠지만, 국가는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국가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저는 극우입니다) 이 정부 들어서 큰 비지니스를 성사시켜 긍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내려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는 나로서는 매우 불안하다. 왜 국민이 모든 책임을 지는 모험을 해야 하는가? 한번의 선거에 국민은 자신들의 목숨을 맡긴다. 대기업을 내세우던 과거의 방법보다 어쩌면 더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든다. 대통령이 직접 성공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도, 막후에서 군림하던 군사 정권과 비교된다. 석해균 선장이 죽으면 삼호 주얼리호 구출 사건을 공으로 내세우던 사람들 중 누가 책임질까? 정부로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처신일 것이다. |
|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공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
200주년기념 신약성서가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편인데, 이상하게 이 부분은 ‘공권’, ‘관헌’, ‘선’ 같은 어려운 말들을 썼다. ‘공권’이라는 말 속에서 ‘세속의 권력’, ‘지배자의 권력’이라는 뜻이 묘하게 탈색된 느낌이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정의로운 ‘공공의 권력’인 거처럼 해석되도록 유도한다. |
| 『정치학』 |
왜 그동안 『정치학』을 안 읽었을까? 구절 구절에 담긴 함의가 참으로 놀랍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가 아니라 서양 사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복인 거 같다. 사람은 각자 가장 잘하는 역할이 있고 그에 따라 노예주와 노예 역할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다 노예주에 합당한 인격을 가졌고, 오랑캐들은 다 노예이다. 그러므로 바르바로이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는 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따위의 이야기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인데, 20세기 중반까지 이런 주장의 후계자들이 지구의 모든 곳에서 활개쳤다. 예를 들자면 얼마전에 읽었던 엄복(옌푸)의 사회진화론 같은 거. 심지어 현재까지 교묘한 변주가 세계에 울려퍼진다.
우리가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역자는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로 옮겼다.(주15) 문맥 상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거 같다. 또 우리가 흔히 ‘미덕’으로 번역하는 아레테를 ‘탁월함’으로 의역했다.(주19) 번역이 전반적으로 엄밀하다기보다는 의역을 택한 거 같다. 아레테의 영어 번역어 중 하나가 ‘excellence’인 것을 참고한 거 같다. 그런데 이 번역이 약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거 같다. 다음 문장 같은 경우, 의역을 더 해줘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없을 거 같다.
논리학에서도 추앙받는 아리스토텔레스라 주장들이 매우 논리적일 거 같지만, 의외로 유비가 대부분이다. 중국 고전들을 연상시킨다. 인용문들도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인용한 구절들이 마치 사자성어처럼 기존에 있던 관념을 대표한 것인가? 대부분 창작물임을 고려해 볼 때 그런 거 같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관용어로 받아들인 걸 수는 있다. 수업 중의 농담 같은 걸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사라지고 강의록만 남은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강의록이라서 더 진솔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아 그래서 홍기빈 책 같은 게 나온 거구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에 대한 주장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전 경제학 중에 정치경제학 아닌 게 없지만 서도.
* 천병희가 옮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2009)을 읽으며 쓴 글입니다. |
| Foreign Policy 2010 Failed States Index |
http://www.foreignpolicy.com/articles/2010/06/21/2010_failed_states_index_interactive_map_and_rankings |
| 『What Social Classes Owe to Each Ot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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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
프레시안에 「박동천의 집중탐구」라는 제목으로 2009년 초에 연재한 총 72회의 칼럼을 책으로 묶은 것. 인터넷으로 봐도 되는 글이라고 생각하니 흥미가 약간 떨어진다;; 프레시안에 대한 선입견도 있고. 무작위로 몇개의 글을 읽어봤다. 근데 이상하게 전공 분야 교수가 하는 이야긴데 설득력이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69화 「증거의 논리학: 법원의 '시간 끌기'…해결책은 배심제」 내용은 이렇다: 조경란의 『혀』 표절이나 이재용의 전환사채 편법 증여 같은 사건들에서 판사는 대부분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시간만 흐르고 유야무야 기득권에 유리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배심원 제도를 활용해 제3자의 건강한 상식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나가면 된다. 토크빌도 배심원제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왜 설득력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book{ title =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author = "박동천", year = "2010", publisher = "모티브북", address = "서울", ISBN = "978-89-91195-38-7", price = "25000 KRW"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