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역사 =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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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은 왜 광주 학살을 명령했을까? |
일단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은, 특수전 사령관이 서울의 특수전 사령부에서 광주로 떠날 때, 강경하게 진압하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즉 계엄에 따라 동네 군인들이 데모 막아보다가 문제가 커져서 특수 부대를 부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맛좀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 5월 18일이라는 것도, 계엄 확대 바로 다음 날 첫빠다로 한번 당해보라는 식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깡패들이 현관에 들어와 진을 치고 사시미질을 하고 있는데, 시민들이 발포를 했네 어쩌네 하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광주는 서울과 멀고, 휴전선과도 먼 그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기 적당한 작은 도시였을 것이다. 그럼 누가 이런 계획을 생각했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 이런 종류의 작전을 수행한 경험을 이미 갖고 있었는데, 4.3 제주도 학살이 그것이다.(시위대에 총을 쏜 걸로 치면 4.19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나, 군대의 치밀한 작전이라는 점에서 4.19와는 좀 다른 거 같다) 1950년대초에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던 전두환(과 그 친구들)은 제주도에서 행해진 작전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이나 측근이 직접 이런 작전을 지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로는 미국의 개입을 예상할 수 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한은 이제 막 성장하려는 제3세계였고, 미국은 친미 정권의 안정을 위해 폭력적인 비정규전을 실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비정규전을 특수전에 대한 이해가 있는 전두환 일당은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3세계 국가나 제주도에서와는 달리 광주는 고립되지 않아서 그 영향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 미국의 작전 미스일 것이다. 아니, 제주도를 보면 광주도 충분히 묻힐 수 있었는데, 묻힐 걸 꺼낸 운동권들이 대단한 것일 수도. 제주도 학살 역시 미군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는 점에서 광주 학살과 비슷한 점이 있다. 또,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로 몬 것도 제주도 학살에서 있었던 심리전과 동일한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런데 광주에는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같은 세력들이 없었다. 즉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로 몬 것은 그냥 이쪽의 작전이라는 얘기. 여태까지 이거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군대 다시 갔다오거나 밀덕질을 해보거나 해야 함. 결론은… 광주 학살은 당시 최상층에서 결행한 작전이며,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근데 미국이 당시 페이퍼웍을 잘해서 결정적인 증거는 없고, 전두환의 움직임을 방조한 정도로 설명되는 듯. … 이렇게 쓰면 예전 운동권들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나는 이걸 민족주의나 반미주의를 부채질할 소재로 사용할 생각이 없다는 게 차이랄까. 아무튼 진압 한번 해서 조용히 시키자고 했던 작전이 두고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단초가 되어버린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
| SBS 스페셜 — 「나는 나 - 재일 동포 3,4세들의 새로운 선택」(2007/03/25) |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311936&vProgId=1000126&vMenuId=1002036&vVodCnt1=00078&vVodCnt2=00&vSection=V5&vCompressCode=T1 |
| 조선과 명 왕조의 공시성 |
- 조선 태종(1400~1418): 왕자들과 공신들을 숙청하여 왕위 획득. - 명 혜종(건문제, 1398~1402): 왕위 계승 순위를 어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20대 초의 손자를 선왕이 지명. - 조선 세종(1397~1450): 왕위 계승 순위를 어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20대 초의 삼남을 선왕이 지명. - 명 태종(영락제, 1402~1424): 무력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 찬탈. 선왕은 행방불명. 충신은 모두 살해. - 조선 세조(1455~1468): 무력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 찬탈. 선왕은 유배 후 독살. 충신 살해. - 명 효종(홍치제, 1487~1505): 어머니가 선대에 독살. - 조선 연산군(1494~1506): 어머니가 선대에 독살. * 연도는 모두 위키백과를 참조했습니다. |
| 태극단과 금정굴 |
http://815book.co.kr/sajuk/nQJq/ 탄현에 ‘태극단 사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지나갈 때마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얼마전에야 뜻을 알았다. 한국 전쟁과 서울 수복 사이 약 3달간 경의선을 타고 통학하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일산 지역에 비밀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서 북한군을 공격한 ‘태극단’이 결성된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태극단은 250여명까지 늘어났으며, 6.25 발발 직후 한국군이 손을 못 쓰던 상황에서 무시못할 전과를 남겼고,(한강, 경의선 등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이들은 남한군이 서울을 되찾자, 무기를 반납하고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 되어 이후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얘기인데,(13세 소년병도 있었지만 그런건 그냥 넘어가자) 문제는 이분들이, 수복 직후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다. 북한을 조금이라도 도와줬다 싶으면 문자그대로 사돈의 팔촌까지 잡아다가 죽였다. 서울 수복 직후 불안한 정국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그야말로 고향 사람들을 ‘살해’한 셈이다. 태극단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들이 없다면 한눈에 보였을, 야트막한 황룡산 금정굴에서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발굴한 유해만 153구다. 이들의 ‘사형’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굴된 77명은 아직 신원을 모른다. 희생자는 대략 500명으로 추산된다. 나는 태극단 사거리를 지날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북한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중학생들을 앙모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이 머리에 총알을 박아 50년간 쓰러져있었던 이름도 못남긴 고향 사람들을 떠올려야 할까?(300명 이상은 시체도 못 찾았다) 한국전쟁은 참으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금정굴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의 후손이 지금 살아있는 소년병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950년 여름 석달은 우리를 괴물로 변형시켰다. |
| 특별영주자 |
1947년 외국인GHQ의 명령으로 제정한 「외국인등록령」(外国人登録令)에서 조선인, 대만인을 외국인으로 정의. 구일본 법체계의 마지막 법령(칙령).1952년 평화적국적이탈자1951년 협약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의 조선, 대만, 사할린 영토 포기와 독립 인정이 공식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 대만인 등은 졸지에 외국인이 됨.이들에 대하여 국적법 상의 ‘평화적국적이탈자’에 대한 「외국인등록법」에 의한 외국인 등록 시행. 1965년 협정영주자한일기본조약(日本国と大韓民国との間の基本関係に関する条約)과 함께 이루어진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日本国に居住する大韓民国国民の法的地位及び待遇に関する日本国と大韓民国との間の協定)으로 조선인과 2세는 협정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인에 비해 강제 퇴거 조건이 완화되고, 교육 등의 권리를 확인했다.등록 기간은 1971년 1월까지 5년이었는데, 오키나와가 1972년에 반환되는 바람에 오키나와 거주 조선인은 이를 신청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북한을 모국으로 하거나 다른 사유가 있는 조선인은 등록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평화적국적이탈자 신분의 외국인이었다. 3세에 대한 논의는 25년 후에 하기로 합의. 1991년 특별영주자1994년 경부터 2005년 경까지 발급한 외국인증명서 견본 http://www.city.tokyo-nakano.lg.jp/dept/213000/d001203.html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의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관리에 관한 특례법」(日本国との平和条約に基づき日本の国籍を離脱した者等の出入国管理に関する特例法)을 제정해 1952년 이전 일본 거주자와 일본에서 태어난(외국 출생은 제외) 그 직계 자손은 ‘특별영주자’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함. 외국인 등록법에 의한 외국인과 달리 재입국 심사(재일교포는 여권이 아니라 재입국허가서를 발급받아 출국한다) 아니라 간소화, 외국인 노동 신고 면제 등의 혜택을 줌. http://blog.daum.net/taejeong0405/10407084 북한을 모국으로 하는 등의 이유로 협정영주권 신청을 하지 않은 조선인도 당연히 신청할 수 있다. 2010년에 전체 등록자는 40만명이었으며 99%가 조선인과 한국인(협정영주자). 2012년http://www.soumu.go.jp/main_sosiki/jichi_gyousei/c-gyousei/zairyu_korean.html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및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근거하여 일본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 관리에 관한 특례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등의 법률」(出入国管理及び難民認定法及び日本国との平和条約に基づき日本の国籍を離脱した者等の出入国管理に関する特例法の一部を改正する等の法律)에 의해 외국인도 내국인과 동일하게 주민표와 호적에 기제할 수 있게 되었음. 「외국인증명서」가 장기체류자는 「재류카드」로, 특별영주자는 「특별영주자증명서」로 바뀜. 재입국 허가 한도가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남. 그리고 무엇보다 상시휴대 의무가 없어졌다. http://www.immi-moj.go.jp/newimmiact_2/index.html 결론그러니까 사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 남한에게도 협정영주자, 특별영주자 모두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의한 재외교포로 외국인이다.1965년 조약으로 아주 약간 신분이 보장되고. 1991년 법으로 행정적인 편의가 조금 생긴 정도인데, 이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국적을 바꾸지 않는 재일교포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국적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 http://ja.wikipedia.org/wiki/特別永住者 |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2007) |
『한국사 100장면』, 『한국사 편지』로 나름 이 분야 인기 작가인 박은봉이 잘못 알려진 한국 역사의 단편들을 정리한 것. 내용은 목차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장 「고려 태조 왕건의 성은 ‘왕’씨다?」는 물론 고려 태조 왕건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 역사에 어느정도 상식이 있으신 분은 목차를 우선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나름 인기 작가라서 그런지 저자의 책은 대부분 어린이 또는 청소년 판으로도 편집되어 나와있다. 이 책도 같은 제목으로 2권으로 된 어린이용 책이 나와있다.(1권은 2008년에, 2권은 2010년에 나왔다. 잘 안 팔리는 듯) 그런데 이 책이 국사 통념의 오개념을 다루는 것이라서 어린이들에게는 별로 권할만하지 않은 거 같다. 시험이란게 사실 통념을 묻는 것 아닌가. 이 책의 장점은 꼭 문서에서 근거를 찾는 것인 거 같다. 20여년 전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을 자유롭게 인용하는 논문이 드물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의 매니아들조차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이름 모를 문집까지 쉽게 인용한다. 아마 전산화의 공이 가장 컸을테고, 학계와 사회 자체가 한단계 함께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20여년전엔 역사의 오개념을 다루는 책으로는 비전공자의 표절작 『거꾸로 보는 세계사』 정도가 있었다. 그나마 협소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거꾸로 읽는 세계사』 표절에 대해선 인터넷의 글들을 참고: http://gerecter.egloos.com/3723540) 어린이들에게 꼭 이 책을 읽히고 싶다면 어린이판이 아닌 원저를 보여주는 것이 자료도 있고 오히려 더 나을 거 같다. 가장 흥미있게 읽은 것은 9장 「현모양처는 조선시대 여성의 이상형이다?」이다.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졌다는 거. 조선은 ‘열녀효부’라는 순종적인 여성을 이상향으로 삼았었다는 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간 정확하게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생겼다는 것도 흥미있다. 일본 지배 체계의 특징을 엿볼 수도 있고, 또 이것이 일본의 여성신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서구보다 빠르다. ‘가정학과’ 역시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봐야 할 거 같다. 또 이런 개념을 이승만, 박정희 정권도 계속 강조했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일제 시대를 반복하지 않은 게 별로 없지만) 이렇듯 국사의 통념들은 대략 일제 때에 생겼다.(사실 한국사가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역사라는 학문이 친숙하고 오랜 동시에 새로운 학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렇게 별로 오래되지 않은 개념들을 전통이라고 주장하며 목숨을 건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주제들이 너무나도 병렬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읽기가 지겹다는 것이다.(그러고보니 작가의 다른 책들도 병렬적으로 주제를 배열한 경우가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큰 목표가 있어야 읽어가기가 힘들지 않다. 이 책도 근대화라던가 일제와의 관계 같은 좀더 일반론적인 문제제기를 함께 끌고 갔다면 더 대중적이고 읽기 쉬운 책이 되었을 거 같다. |
| 유재현 지음,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2009) |
읽으면서 마음이 갑갑하다. 80~90년대 민주화를 이룬 나라가 많지만 대부분 독재를 청산하지 못 했고, 또다른 수탈과 독재로 이어졌다.
한국의 인권 쇠퇴와 경제적 어려움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주변 아시아 나라들과 함께 겪어가는 것이었다.
주위 나라들을 보면 우리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고, 위험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이 책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선진국 따라할 게 아니라 우리 상황에 맞게 사회를 보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거 같다) 잘 그러나 나는 참 아시아 국가에 대해 무지하다. 자기의 이웃 나라보다 서구를 더 강조하는 게 내가 받아온 한국 공교육의 특성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찍은 사진집이나 관광 안내보다 이런 자신 만의 관점을 담은 소개서가 참 값진 거 같다.
* 유재현이 쓴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서울: 그린비, 2009)를 보고 적은 글입니다. |
| 국기와 정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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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 |
이 책에서는 에스페란티스토(Esperantisto)와 아나키스트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아나키스트들이 좀 언행일치하는 거 같다. 1920~30년대 한중일의 아나키스트들 역시 에스페란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티스토일 것으로 추측되는 홍명희의 호 벽초(碧初)가 에스페란토어의 상징인 녹색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폐허」, 「개벽」 등 잡지에는 ‘LA RUINO’, ‘LA KREADO’라는 에스페란토어 제호가 나란히 써 있기도 하다. 1924년 홍명희가 편집국장으로 재직시 동아일보에는 「에스페란토 난」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김산도 에스페란토에 능숙하였다고 한다. 홍콩에서 발행된 에스페란토 잡지 『遠東使者』(Orienta Kuriero) 1939년 5월호 18~21쪽에 실린 김산의 글 「La Teatra Movado dum la Milito」(전쟁 중 연극운동)이 장정열의 번역과 함께 실려있다.(인용된 번역과 설명이 구별되지 않아 약간 혼란스럽다.) 참고: 최대석, ‘에스페란토’로 항일을 노래하다—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우생의 창작 · 번역물 40편 유럽 도서관에서 최초 발굴(한겨레21, 제504호, 2004년 4월 15일 발행) 『오스기 사카에 자서전』(실천문학사, 2005)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오스기 사카에( 아쉬운 점은 장 구분이 일목요연하지 못 하고, 책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글은 아나키즘 홍보(?)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특히 3장 「노자와 아나키즘」은 좀 주제에서 많이 동떨어진 듯 하다) 내용도 에스페란토를 중심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 운동사와 구분 없이 섞여 있어서 나같이 이런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보기 좀 불편하다. 차라리 아나키즘과 에스페란토에 대한 간략한 소개—한/중/일의 에스페란토 도입사—아나키즘과 에스페란토 홍보 이런 식으로 깨끗하게 분리되어있으면 정보를 얻는 데 아주 편리한 책이 되었을 거 같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고려가 적은 기존 ‘아나키즘운동사’을 보충하는 것이 서문에서 밝힌 집필 의도였으나, 그 배면에 흐르는 에스페란토 부분만 딱 떼어내서 풍부하게 만들긴 역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영어가 판치는 현실 속의 세상을 에스페란토로서 유토피아적 꿈의 연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나키스트이어야 가능하다. 아나키스트는 에스페란토를 하여야 하며 에스페란티스토는 아나키스트여야 하는 것이다. (서문, 19쪽)
* 안종수가 쓴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서울:선인, 2006)을 읽고 적은 글입니다. |
| 한국 역사와 일본 역사의 차이 |
인쇄 기술의 발달과 서술의 풍부함은 생각보다 관련이 적다. 오히려 역사에서는 특정 정보의 전달을 위해 매체가 발달한 경우가 많다. |
| 만리장성 |
http://en.wikipedia.org/wiki/File:Map_of_the_Great_Wall_of_China.jpg 위키피디아에 Chumwa라는 아이디를 쓰는 Maximilian Dörrbecker이라는 사람이 정리한 이 그림을 보고나서야 만리장성에 관한 복잡한 논의를 머리 속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만리장성이 논의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일률적으로 만리장성이라 부르는 장성들이 실은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완전히 다른 건축물인데다, 시대에 따라 중층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수천년 안 무너졌네 하며 테레비에 나오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만든 것이라 당연히 깨끗한 것이고, 사막에 무너져가는 만리장성은 진나라 또는 한나라 때 만든 것이라 당연히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평양 근처까지 내려온 장성의 흔적일텐데, 이것은 전국시대 연나라 장성으로 추측된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라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어짜피 장성들이 만고불변의 경계로 작동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연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자존심에 그리 상처받지 않을 듯? (이걸 북한 학계의 주장대로 고려의 성이라고 해도, 중국 세력과 한반도 세력의 경계선이 되는 것임에 분명하고, 고려가 옛날 성을 사용하지 않았으리라는 법도 없다) 요동반도의 명나라 장성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도 제작자가 천리장성도 표시하면 더 좋을 거 같다) 명나라 장성을 만리장성으로 부르기도 하니,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만리장성이 됨 셈이다. |
|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재』(김연실, 2007) |
2010년 7월 4일 일요일 저자가 초등학교 교사라 그런지, 전체적인 구성이 마치 초등학교 참고서인 거 같다. 그래서인지 내용을 교과서적으로 설명하려는 부분이 많다. 삼국시대 역사 등을 단순하게 인식한다거나 하는 부분이 많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민족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 역시 교과서적인 관점인 거 같다. 그러나 초등학생용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의 학술적인 내용이 갑자기 나오기도 한다. 이 책의 독자를 누구로 상정하고 썼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런 언급들은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 써있지 않다. 교사가 쓴 책이 이렇다니 한국의 인용 문화가 참 척박하다.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들, 이를테면 삼국시대 이두 발음에 대한 주관적인 주장 같은 것들을 여과없이 옮겨 적었다. 각급 학교에서 약간 민족적인 정서를 풍기기만 하면 확인하기 어려운 역사에 대한 주장도 자료로서 받아들이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책은 지역 주민 만이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모으고, 그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미덕인 거 같다. 거기에 거대한 담론이나 교과서적 견해, 얼토당토 않은 주장 등을 넣는 건 오히려 가치를 깎아먹는 일인 거 같다. 이 책은 자료 수집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끝낸 거 같다. 참고문헌도 「행주얼」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일반적인 책들이다. 박물관학을 전공했다는 저자가 박물관의 자료를 사용하는 데도 인색하다. 이래서는 지역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좀 부족할 거 같다. |
| 『한국 속의 세계』(정수일, 2005) |
2010년 6월 19일 토요일 정수일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1년간 연재했던 「문명교류기행」(2004년 6월~2005년 5월)을 상하 2권으로 모은 책이다. 신문 연재글이어서 그런지 정수일의 다른 책에서처럼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를 전달한다기 보다, 널리 알려진 소재들을 가볍게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는 정도다. 다만 그것을 한국 만의 역사로 보거나, 한민족의 우수성이나 독자성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하지 않고, 세계 다른 나라와 연결시켜 사고한 것이 다르다. 전체 목차와 원래 한겨레신문 기사를 메모해 둔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편집된 책에는 어느 매체에 언제 실린 글을 어떻게 다듬은 것인 지 명기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아쉽다. 마지막 세 꼭지는 신문에 실리지 않은 글이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연재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일 수도 있다. 1년 연재가 50회 정도이니까)
1. ‘문명교류기행’의 먼 길을 떠나면서
나라와 민족의 독자성, 그 이전엔 왕조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역사는 씌어졌고, 또 그 역사를 학교에서 주입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치 중립적인 지구 범위의 무한 교류 상태가 역사여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동양의 컴플랙스를 희석하기 위한 논리일 수도 있다.
또한 정수일은 이런 인식이 바로 (정부와 대기업의 프로파간다인) ‘세계화’의 길임을 천명한다. 교역을 활발히 하던 나라는 번성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사라졌다. 국경없는 자유무역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나라들 모두 개방의 의지의 여부로만 파악할 수 없다. 교역에 대해 얼마나 열려있는가도 중요한 요소였겠지만 현실적인 권력관계와 전통적인 사고도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열려있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따질 것이 많다. 현재 최고의 자유국가라는 미국은 열린 나라인가 닫힌 나라인가? 민중의 삶은 어떠한가? 상대 국가와의 관계는 어떤가? 이런 것들.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읽다보니 짜증나서 버렸다. 이것저것 얘기는 많이 하는데, 정확하게 얼개를 잡아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유물과 연결시키지만 관계에 대한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중간중간에 은근히 반 서양적인 태도, 그러니까 동양이 대안인데, 연구해보니 한국이 나름 중심이네? 이런 얘기들 섞여 있고.
예전 정수일의 책을 볼 때는 아 모르는 걸 정말 많이 배웠다.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왜 이모냥인지 모르겠다. 이런 글을 1년간 연재한 신문이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신문이라는 것도 황당하다. 게다가 이 책이 각급 학교에서 한국사 참고 자료로 추천되고 있다는 것이 참담하다. |
| 『표해록』(김찬순 옮김, 1488) |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보리 출판사의 겨레고전문학선집을 보면 짜증이 난다. 우선 우리 민족의 주요한 고전들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번역이 없어서 북한 것을 가져다가 봐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표해록의 경우는 남한에서도 여러차례 번역되었다) 두번째로는, 외교가 없는 다른 나라 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면서(저작권 문제를 출판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책값은 솔찮게 비싸다. (표해록은 문예진흥기금, 즉 세금까지 사용했다) 어떤 것은 여러 권으로 나누어 만들기도 했다. 또 원문의 무엇을 어떻게 왜 고쳤는지 표시를 안 해서, 자료로서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장절 구분을 어떤 기준으로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 전체에 판본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번역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진지한 연구에 사용할 수 없다. 즉 동포 학자들의 노고를 그저 심심풀이 읽을거리로도 읽힐까말까한 쓰레기로 만드는 작업을 세금을 축내며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끝없는 바다에 표류하다
원문의 서문을 속표지(도비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해놓으면, 이 내용이 편집 상 집어넣은 글인지, 원문인지 매우 헷갈리게 된다. 아니면 원래 북한 번역물에 없던 내용을 어중간하게 집어넣은 것일까? 얼마 전에 본 『남환박물』(푸른역사, 2009)에서도 그렇던데 이게 요즘 유행인가보다.
그리고 이 책 자체가 서문에서 보이듯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쓴 일지인데, (돌아온 직후 왕명을 받고 청파역에서 8일간 썼다고 한다) 번역을 개인의 일기(또는 기행문)처럼 했다. 내 생각엔 왕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충분히 고려해서 번역했어야 할 거 같다. (더 읽어보니 글의 주어가 ‘臣’이다.)
조선시대 관리(또는 선비)들은 어떤 태도(즉 사상)로 이런 글을 썼을까? 그 태도는 현재의 어떤 문체로 옮기는 게 좋을까? 모른다. 전통이니 선비정신이니 운운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북한 번역이라서 그런지 한글 문장이 자연스럽게 잘 읽힌다. 원문과 대조하면서 보니 중간의 조사나 꾸미는 말들을 의역하거나 읽기 좋게 뜻을 첨가한 경우가 많다. 또 구성도 원문과 다르게 마치 일기처럼 날짜와 날씨를 앞으로 빼서 적은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런 구성 때문에 글 자체의 보고문으로서의 형식이 탈색되어있다. 이 번역이 최초이긴 하지만 완역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빼놓고 번역한 부분은 못 찾았다. (아니면 1964년판이 완역이 아니고, 1988년판은 완역인 것인지?)
북한말이 남한말과 모양은 같지만 뜻이나 문맥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읽으면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지 약간 의구심이 든다. 편집자의 해설이 아쉽다. ‘바람씨’ 같은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말이지만 매우 낯설고, 직관적으로 의미 파악이 안 된다. 원문의 ‘風’을 대체로 바람씨로 옮겼던데, 바람이라는 객관적인 현상을 의미한다기보다 바람의 기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이렇게 옮긴 듯 하다.
p.s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에 반하게, 이 책에서는 서풍(西風)이 불어서 중국으로 표류했다는 말이 많다:
내게 항해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는데, 우선 이들이 방위를 정확히 몰랐었던 거 같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자신들이 서쪽으로 많이 표류했기 때문에, 다시 동북쪽으로 가야 (조선과 수교가 있는) 중국 땅에 도착할 것으로 여겼던 거 같다.
아무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사실은 위도 막혀서 진짜 섬나라에 살면서 바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천안함 침몰 사건 덕택에 선박에 대한 지식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표해록의 표류 방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윤은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책이 있는 마을, 2000/바움, 2009)에서 봄에는 동풍이 불지 않는다 하며 이를 속칭 ‘대륙조선설’(;)의 근거로 삼는데, 좀 허황되게 느껴진다.
사진은 윤정월 초나흘 부분이다. 확실히 크고 작은 두 가지 활자체로 되어 있다. 두 그림의 순서가 위아래가 바뀌어 있다. 내용을 보지 않고 배치한 듯.
김종윤의 이러한 지적이 맞다고 해도, 제주가 글자 하나 같은 산동성 제령이고, 최부 일행은 경항운하로 나주에 가다가 양자강에서 바다로 나와 (계속 운하로 가지 않고?) 상해 앞에서 표류했고, 명나라 군인이 아닌 왜구 들에게 잡혔던 것을 일본인이 고친 것이고, 같은 조선이지만 지방의 일이라 특별히 임금에게 글을 썼다는 주장은, 좀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제주 서남쪽에 백해(白海)가 있다는 말도 흥미롭다. 지금 확인할 수 방법이 있을까?
2. 천신만고 끝에 중국 땅에 닿다
처음엔 좀 밋밋했는데, 읽을수록 흥미진진하다. 성종19년 무신년 윤정월 초사흘에 별도포(제주도 동쪽)를 출항해서 표류하다 12일에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고 16일에 다시 다른 해적을 만났다 17일에 해변의 민가로 탈출한 것도 드라마틱하다. (세계 3대 기행문이라고 불러도 될 지는 좀 더 봐야 겠다)
왜구 때문인지 마을에 이런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중국에서 은근히 이런 식의 마을 단위의 자위를 하는 문화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거 같다. 한반도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을까? 제도가 정비된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거 같고, 농악이 아마 이런 풍습의 남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사흘을 걸어 도저소(挑渚所)에 간다.
중국 여행기에 언제나 등장하는 중국인들의 희귀한 물건 요구, 조선의 군사정보 탐문, 관리들의 공문서 위조. 이에 대한 최부의 대답이 굉장히 조리있다. 옛날이야기로 전해내려오는 답을 잘해 한반도를 외교적으로 구한 조상 중에 최부도 포함되어야 할 거다. 대명(大明) 황제를 섬긴다거나 하는 얘기는 좀 부끄럽다. 과거 등급을 가지고 서로 잘난 체 하는 모습도 좀 우습다.
성리학자들의 합리적인 주장같은 것도 엿볼 수 있다. 『열하일기』 같은 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고려 이후 성리학의 전통 속에서 자연스래 나온 것 같다. 『제주풍토록』도 문장이 대단히 현대적이다. 성리학의 전래가 한반도의 중국어 수준을 확실히 높이긴 한 거 같다. 그전에 최치원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박지원의 벽돌처럼, 최부도 수리시설에 대해 세밀히 관찰하고 조선에 돌아와 이를 다시 제작하기도 한다. 사서삼경을 볼 게 아니라 조상의 재미난 글부터 먼저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이 완역이 아니라는 말은 아마 작은 글씨를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3. 양자강과 회하를 지나
옛글을 읽다보면 내가 시를 모른다는 게 아쉽다. 경전의 내용이야 논리적으로 짐작하면 되지만, 시에 대해선 즐길수도, 가치를 평가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사실 난 현대에 한시를 제대로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제딴에는 지었다고 하지만 대개는 어떻게 알았는지 운자와 자수(字數)만 맞춰놓았을 뿐이다. 고시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시를 약간만 바꿔놓은 것도 유치하긴 마찬가지다.
표해록 자체가 분명히 번역되어야 할 훌륭한 글이지만, 왜 북한에서 이걸 굳이 번역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엔 저자의 왕에 대한 충성심, 표류한 사람들의 결집력, 민중의 생활상과 명나라 관리의 부패상, 민족적 자긍심 등이 북한의 체제이념과 호응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게 단순히 북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이걸 앞뒤없이 한민족의 우수성이나 동방예의지국 이쪽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태도에 대해선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고’라는 말이 지금도 남아있다. 근데 주로 ‘물고를 내다’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물고라는 말을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일없다’라는 북한말과도 연관된 거 같아 재미있다.
오마이뉴스에 표해록의 코스를 따라간 여행기가 있다. 기사에 실린 지도는 한길사에서 펴낸 표해록의 화보를 옮긴 거 같다. 지도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은데, 이동경로가 바로 경항운하다.
표해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로는 박원호의 『최부 표해록 연구』와 『최부 표해록 역주』(고려대출판부, 2006)을 꼽는 모양이다. 한번 읽어봐야 겠다.
사람들이 표해록의 방대한 내용과 인명등을 보고 최부가 메모를 해와서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거 같은데, 내 생각엔 그냥 외워서 쓴 거 같다. 우선 자신의 짐에 대한 묘사에 메모 얘기가 없고, 필담 후 종이를 버렸다는 얘기도 나오고, '잊었다'는 말도 자주 나온다. 장원급제 할 정도의 선비라면 글 외우는 데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거다. 필담이 어짜피 글 아닌가.
일제 때 집안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했다는 국사 교육이 정확히 유교적 전통 교육과 동일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부의 간략한 역사관이 일제 때 우리의 기초적인 국사 인식과 너무 닮아있다.
강남(양자강 이남)을 다닌 기행문은 없다는데, 운하로만 순풍에 다니니까 좀 심심하다. (수리시설에 대한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상을 못 치른 것, 어머니가 아버지 상 중에 아들마저 잃었다고 생각할 것을 계속 걱정하는 것이 극적인 긴장감을 준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조선의 왕 개념과 헷갈리고 있다.
4. 황성으로 들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래서 대입시험 과목이 그리 많은 건가? 아무튼 경서 하나만 연구하던 나라들이 지금은 조선의 후손보다 잘 산다.
5. 반가울손, 압록강!
최부는 범생이 유학자 답게 중에게 면박을 줘서 보낸다, 오랜만에 보는 동포인데도.
6. 내가 본 중국 땅 중국 사람이 장에선 일지 형식을 벗어나 전체적인 문물이나 산업을 논한다.
또 재미있는 건 중국 강남(양자강 이남)과 강북의 비교이다. 강남은 도둑이 물건은 훔쳐가도 목숨은 빼앗지 않고, 창주는 수괴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전체적인 문물이나 경제활동도 강남이 뛰어나다고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강남이 평등하지만, 공무에서는 더 철저한 모습이다. 불교와 도교의 숭상은 강남과 강북이 같아 아쉬워한다.
창주부터 북쪽은 여자들의 옷섶을 바로도 달고 외로도 달았으나 통주서부터는 다 바로 달았다. 산해관 동쪽 사람들은 다 추잡스럽고 의복도 남루하다. 해주, 요동 등지에는 중국 사람, 우리 나라 사람과 여진 사람 등이 서로 섞여 살고 있으며 석문령 남쪽 압록강까지 모두가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의복, 날씨, 여자들 머리 차림 등이 다 우리 나라와 같다. (「살림살이와 옷차림새」, 4월 23일, 273쪽) 책을 대략으로나마 다 읽고나니, 왜 이제서야 이런 책을 읽게 되었나 아쉬움이 든다. 한문을 가르친다는 곳에서도 어린이에게는 한자능력시험이나 소학을 가르치고, 어른들에게도 사서일경만 외우라고 가르치니, 생동감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 조상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고 한다. 내용이 사실 좀 단조로운 부분도 없지않아 있으나, 15세기라는 시대나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임을 고려해볼 때 흥미있는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번역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원문의 내용을 약간 벗어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다른 번역과 해설을 또 읽을 필요가 느껴진다. 일단 한길사에서 나온 표해록과 박원호의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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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아드/오딧세이』 |
어렸을 때는 전쟁의 원인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 참 미개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
| 『남환박물』(이상규, 오창명 옮김, 1704) |
2010년 6월 6일 일요일 해제
실학 계열(?)의 인물로 유명한 병와 이형상이 제주 목사 퇴직 직후 쓴 제주 박물지. 효언 윤두서의 제주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 말이 서두에 있으나, (해제, 10쪽) 아마도 당시 실학자(?)들처럼, 정확한 지리 정보 제공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한 기초가 되길 바랬던 것이리라.
이상하게도 번역문에는 이 문장이 없다. 편집자가 이걸 그냥 속표지(도비라?)로 처리한 거 같다. 큰 실수라고 본다. 게다가 이건 원문에서는 이어진 문장이다. 이형상의 제주에 관한 저술은 『남환박물』 이외에도 『탐라순력도』(탐라순력도로 만든 관광 안내 홈페이지가 있다: http://tamnamap.jejusi.go.kr), 『탐라장계』, 『탐라록』(병와전서) 등이 있다. 『남환박물』의 필사본은 2종류가 남아있는데, 책 말미의 「황복원대가」가 빠진 것 외에는 큰 차이는 없다. (해제, 11쪽) 1978년에 나온 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인 있다. 이형상이 제주도에서 만들었다는 거문고를 포함한 그의 유물은 경북 영천의 병와유고에 있다. 내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역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나는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일반독자가 보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사실 이런 번역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우선 번역어 선택이 어렵다. 옛말로 할 것인가, 현대어로 할 것인가 골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학술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약간 아쉽다. 한자말이 많은데, 이게 원문이 아니라 번역어다. 번역어를 원문으로 착각하기 쉽다. 전반적으로 학술서도, 일반서도 아닌 것이 아쉽다. 또 중간중간 삽입한 그림들이 내용 이해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주도의 현재 사진이나 지도, 특히 『탐라순력도』는 충분히 더 이해하기 쉽게 배치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또 주석이 미주로 되어 있어서 참고하기 힘들다. 이런 책의 주석은 각주나 중간중간 해제로 삽입하면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주를 바라보는 역사관이 너무 피해자, 이방인의 눈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옛날 박물지의 객관적인 모습을 상술하기만 해도 충분히 이국적이다. 이런저런 사료를 모으면 꽤 재미있는 제주 역사 답사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5. 계절(誌候)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말하기를, “이 고을의 풍토는 따로 한 구역이나, 모든 일이 유다르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며 변화가 어긋나 일정함이 없다. 기후는 따뜻하 것 같으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히 첨리(尖利)하다. 의식의 절제가 어려워 병이 나기 쉽다. 더구나 운무가 항시 음침하게 끼고 습하여 끓은 듯 답답하다. 지네·거미·지렁이 등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은 모두 겨울을 넘겨도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계절」(誌候), 46쪽) 한유(韓愈)의 조주 시(潮州詩)에서 말하기를, “한 겨울에도 날개를 쳐 혹 움직이고, 한여름에도 혹 두터운 가죽옷을 입는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헛말이 아니로다. (「계절」(誌候), 47쪽)
제가 느낀 제주도 이랬습니다;;; 조선시대 글 답게 인용이 많습니다.
6. 지리(誌地)
어떤 것은 음차하고 어떤 것은 뜻으로 적었다. ‘藪’(수)라는 말 자체도 ‘숲’을 음차한 거 처럼 느껴진다. 왜 편한 언문 놔두고 이렇게 적으셨습니까, 조상님들.
때는 늦은 봄이라—이때가 임오년(숙종 29, 1720) 3월 25일이다.— 바람은 빠르고 조수는 급하니—심히 배가 빠르게 가는데, 뱃사람이 말하기를 “총알도 반드시 뒤로 떨어진다.”라고 하기에 이를 시험하여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사시(巳時) 말(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술시(戌時) 초(오후 7시)에 닻을 내리니 곧 이른바 제주이다. 집집마다 귤나무와 유자나무가 있고 곳곳마다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있다. 기이한 암반과 암초는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다만 돌 색깔이 추악하다. 토질은 부조(浮燥)하고 구릉은 둑이 되고 평지도 되어 있으니 가증할 따름이다. (「지리」, 50쪽)
해남에서 출발해서 8~10시간 정도 걸렸으니, 꽤 빠르다. 근데 정말 총을 쏴 본 걸까?
《남사록》에는 겁회(劫灰)에 비교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생각하건대 아마도 극한(極寒)과 극열(極熱)로 구름이 증발하고 안개가 끓어서 토맥(土脈)이 자연히 그 성질을 잃은 것이다. (「한라산 산행」「지리」, 52쪽)
화산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듯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말하기를, “산의 전체는 물러가는 듯하다가 도리어 높이 서 있다. 그 겉모양을 쳐다보면 둥글둥글해서 높이 험준하지 않은 것 같고, 바다 다운데 있는 섬이어서 높게 솟아나지 않은 것 같다. 마치 벌판 속에 우뚝하게 선 뫼와 같아서 특별히 험난할 것이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나아가 기어오르면서 그 속을 다녀본다면, 높고 날카로운 바위와 낭떠러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비틀어진 골짜기와 동학(洞壑)이 어둡고 침침하여 곤륜산의 터(崑崙之墟)와 판동의 골짜기(板洞之谷)과 한가지지만, 세속을 떠난 정결하고 위기(偉奇)한 맛이 많이 난다. … (「한라산 산행」「지리」, 53쪽)
한라산의 이중성이랄까, 멀리서 보면 어머니 같이 아늑한데, 가까이서 보면 험한. 500년 전 감상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것이 놀랍다. 조상님들과 이런 교감을 하고 싶은데,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 『제주풍토록』은 나중에 찬찬히 읽어봐야 겠다. 이게 좀 대단한 책 같다.
다만 이상하 것은 못 곁에 조개껍질이 있는데 모두 말하기를 해조(海鳥)가 물어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 울음소리가 공공(貢貢)하는 까닭에 그 새를 공조(貢鳥)라고 부른다. (「한라산 산행」「지리」, 55쪽)
이거 혹시 화석 아닐까;;
기타 샘(泉)—섬에는 모두 물맛이 좋은 샘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안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긴다. 멀리 있는 샘은 혹은 4~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이 지망 사람들은 익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 사람들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목성의 가락쿳물이 성 안에 있고 돌구멍에서 혹 솟아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 전하건데, 이는 김정이 귀양살이 할 때 판 것이라고 한다. … (「탐라의 샘·소·개」「지리」, 52쪽)
이 책이 장절 구분이 좀 명확하지 않다. 사실 옛책을 현대의 목차로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는데, 그래도 전체적인 조망을 먼저 세워야 한다.
—이것은 과대하게 포장된 말인 듯하나, 맛과 느낌에 대한 표현을 다한 것이다. 지금은 거주하는 스님은 없고 단지 헐린 온돌 몇 칸만 있다. (「수행골·존자암」, 68쪽)
조선시대 선비들이 좀 신화적 감각이 떨어지고, 객관적인 면이 있는 거 같다. 이형상의 이 이야기는 ‘수행굴’이라고 표현한 존자암 존재의 마지막 기사로 알려져있다.1993~1994년에 발굴작업이 있었고, 현재는 존자암으로 추정되는 곳에 절이 들어서고,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도 43호) 이 존자암은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조선 선비들은 신화보다 오히려 과학적인 추론을 즐긴 거 같다. 여기저기 오름이 올라와있는 제주도 전체의 지질학적 조망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화산으로 여기지 않고, 육지의 산맥이 바다에 끊긴 것으로 여긴다. 아래사람들도 바다 속에 땅의 흔적이 있다며 동조한다. (근데 목사 말에 동조 안 하면 어쩔텐가.) 포작인(포작한)도 제주에서 중요한 직업인데, 아직 그리 연구가 되어있지 않은 듯 하다. 이들은 제주와도 또다른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7. 경승(誌勝)
「경승」에 등장하는 장소는 지금도 관광지인 곳이 많다. 제주 여행하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걸. 다음에 또 제주에 갈 일 있으면 다시 읽어봐야 겠다.
8. 사적(誌蹟)
『고씨세계록(高氏世系錄)』을 근거로 고부양씨 이후의 제주 역사를 정리한다. 그들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3군데로 나눠서 산 곳을 ㄴㆍㅣ라고 부른다.
9백 년 뒤에 세 사람이 각자 돌에 화살을 쏘아 용맹한 힘을 겨루었는데, 고(高)가 상(上)이고 양(良)이 중(中)이고, 부(夫)가 하(下)였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이 모두 고씨로 돌아서니, 고씨로써 군장(君長)을 삼고, 양씨로써 신하를 삼고, 부씨로써 백성을 삼았다. 나라 이름을 탁모(乇牟)라고 했는데, 보리 곡식이 무성한 까닭이다. 지금 제주 성 안을 세 곳으로 나누어, 일ㄴㆍㅣ·이ㄴㆍㅣ·삼ㄴㆍㅣ라고 하는데, 도(徒) 자는 도(都) 자의 잘못 아닌가 의심된다. 그러나 방언 발음으로 도(徒)를 ㄴㆍㅣ(乃)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이 발음은 그때 부르던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86쪽)
이 『고씨세계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역자는 『동문선』에 실린 「성주고씨가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주 157) 이 「성주고씨가전」을 94~98쪽에 따로 실었다. 또, 『고려사』 혹은 『고려사절요』의 내용과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형상은 계속 인용한다.
‘성주(星主)’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신라 이후로 제주도의 대빵을 이르는 말이다. ‘왕자(王子)’는 ‘군(君)’ 아래의 작위를 일컫는다.
8장 성씨(誌姓)과 9장 인물(誌人)도 역사적인 기록이 이어진다. 한가지 몰랐던 사실은, 원나라 때 정착한 성씨 이외에도 명나라가 집권 후 운남의 북요 황실의 후예를 제주로 보냈다는 것. (99쪽)
11. 풍속(誌俗)
『지지』(『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지』일 것으로 추측, 주 37)를 인용해 지금도 전해오는 흥미로운 제주의 풍습 몇 개를 소개한다.
11.1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지지(地誌)》에,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가 8~90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옛날에는 120여 세의 사람도 많았는데, 을병(乙丙)의 해(1695~1696)에 전염병으로 거의 사망하였다.”라고 한다. 노인잔치에 온 사람이 102세가 1인, 101세가 2인, 90세 이상이 29인, 80세 이상이 211인이었는데, 근력이 장건(壯健)하려 꺽이고 무너지는 기세가 거의 없었다. 충암(김정)의 말한 바와 같이 수성(壽星)(노인성)이 비치는 곳이니, 그것이 헛말이 아님을 믿을 수 있다. (103쪽) 11.2 여자는 많고 남자가 적다.매년 배가 패몰(敗沒)하여 죽는 사람이 매우 많은 까닭에, 남자는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천하게 여긴다. 아주 잔약한 사람도 또한 두셋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고, 혹은 십여 명의 아내를 둔 사람도 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곧 고래의 밥이라 말하면서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여자아이를 낳은 뒤에야 기뻐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우리를 봉양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러한 사정이 슬프다. (104쪽) 11.3 풍속은 어리석고 검소하지만 예의와 겸손함이 있다의복과 음식이 소박하고 검소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이 없다. 부유한 사람도 칡의 섬유로 짠 베로 옷을 지어 입으니, 역시 화려하지 않다. … 관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비록 용렬하고 어리석은 하천(下賤)이라 하더라도 또한 예를 잘 차린다. 길에서 관인을 만나면 재빨리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혹 피하지 못한 사람은 길가에 엎드려 감히 머리를 들지 않는다. (104쪽)
이건 정복지라서 그런 거 아닌가?
11.4 혼례는 문 앞에서 절하여 예를 표한다《지지》에 의하면 … (104쪽) 혼인하는 저녁에 사위될 사람이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를 배알한다. 음식을 조촐하게 차리면 여자(신부)가 나오지 않는다. 술에 취한 뒤에 신랑이 신부 방에 들어간다. 지금도 이러한 풍속이 있다. 또한 같은 성과 가까운 친족과는 간택하지 않는다. 또 교배례(交拜禮)는 행하지 않는다. 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깨닫도록 일러주었다. 또한 남녀의 예복을 향청(鄕廳)에 내려주었다. 그런 즉 문 앞에서 절하는 일과 술·고기를 갖추는 일은 과연 곧 중도에서 그쳤다. 교배의 예는 신랑과 신부가 모두 부끄러워하여, 심지어 우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 습관을 익힌 뒤에는 사람들이 이를 좋게 여겼다. (105쪽) 11.5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다.내가 제주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105쪽) 시끄럽게 뒤섞여 들려서 마치 일본 사람의 말과 거의 비슷하였다. 문자는 섞어서 써서 중국의 말과 매우 유사하다. 보통 때 묻고 답하는 말이 《노걸대(老乞大)》와 같았다. 소 모는 소리에 대해서는 역관이 말하기를, “더욱 분별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관임들이 말한 바로는, 대개 서울의 말과 같다고 하였으나, 자기들이 주고받는 말 가운데 전연 이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시골 여자들이 관문에 고소(告訴)하는 것은 재두루미의 소리 같기도 하고 바늘로 찌르는 소리 같기도 하여 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서리들로 하여금 번역하게 한 뒤에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풍속은 중국과 더불어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원나라 목자드리 서로 섞여서 전해온 풍습 때문에 그런 것인가? (106쪽)
아 그래도 같은 나라 말인데, 중국말 같다고 하니 대략 난감. 조선 유학자들이 음운학이나 외국어에 밝은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11.6 토질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11.7 밭을 밟고 바령을 한다밭을 밟아 주지 않으면 씨를 뿌리지 못하고, 거름을 하지 않으면 이삭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나 말을 몰고 나와 종일 달리게 하고 짓밟는다. 이것을 ‘밧ㅂㆍㄹ리기(밭 밟기)라고 한다. 그들의 소나 말을 담을 쌓은 밭 안에 가두어 밤낮으로 밭에 똥오줍을 싸게 한다. 이것을 ‘바량(八陽)’이라 한다. (107쪽)
제주도 밭의 담이 높은 이유일 듯.
11.8 여자의 부역이 매우 무겁다
관의 부역이나, 공물을 여자에게 부과한다.
제주지방 풍속은 짐을 등에 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지는 않는다. 물을 길어올 때도 나무통을 지고 다니는 사람은 있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또 치마가 없어서 단지 삼노(麻索)로써 허리를 두루 메고, 몇 자의 굵은 베를 바늘을 이용하여 삼노의 앞면에 얽어매었으니, 오직 그 음부(陰部)를 가릴 뿐이다. 옷과 치마를 벗고 몸뚱이와 볼기짝을 (107쪽) 드러낸 것이어서 참담하여 차마 볼 수가 없다. 고을 안에 사는 사람이 출입할 때를 당하면 혹 의상을 뚫기도 하는데, 옛 풍속의 습관에 젖어 부끄러움을 모른다. 매번 서리와 백성을 대할 때마다 그것이 불가한 이유를 말하고, 그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였다. 그런 뒤에 영(令)을 내려 금지하였다. (108쪽) 11.9 그물과 덫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산이 험해서 덫을 놓을 수 없고, 바다가 험해서 그물을 칠 수 없기 때문
11.10 서울 벼슬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진무(도지관), 즉 제주 관아의 아전이 되는 것이 짱이라는군요.
11.11 돌을 모아 담을 쌓는다《지지》에 “예로부터 밭두렁이 없어서, 몹시 우악스럽고 사나운 사람이 남의 땅을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제주 각지에 영을 내려 담을 쌓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지금은 밭두둑과 집 옆에도 모두 각기 담을 쌓았으니, 다만 밭 경계를 정한 것일 뿐 아니라 목장의 말을 막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09쪽) 11.12 집에는 정자와 온돌이 없다그러나 새를 엮거나 뜨거나 하지 않고 새를 쌓아서 두텁게 덥고서 문지도리로써 빽빽하게 맺는 것은 바람이 두렵기 때문이다. 굴뚝이 없는 것은 ㅈㆍㅁ수하는 무리들이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피부가 갈라지고 살이 문드러져서 반드시 큰 병을 얻기 때문에 땅바닥에 잠자는 풍습은 예로부터 습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부모가 있는 사람은 간혹 작은 온돌이 있으나, 또한 천백의 하나일 뿐이다. 정지(부엌)은 오직 솥만 놓고 밥을 해 먹는다. (109쪽) 11.13 다듬잇돌도 없고 절굿공이도 없다
남방에(나무 방아)를 쓰고 다듬이질은 손으로 한다. 풀무질도 손으로 한다.(방아가 없으니까)
11.14 저자에서 사고 팔지를 않는다
행상만 있다. 근데 이것은 제주도의 경제규모의 문제이기도 했다.
11.15 조리희11.16 밭머리에 묘를 만든다11.17 절도 없고, 중도 없고, 비구니도 없다
절터는 남아있는데, 비구가 하나도 없음. 그나마 억불정책으로 있던 절도 헐리는 판.
11.18 음사를 숭상한다《주기(州記)》에 의하면, … 매년 정월 초하루에서 정월 보름까지 무당과 박수가 같이 신독(神纛)을 만들어 나희(儺戱)를 한다. (114쪽)
죽기살기로 없앴다는...
11.19 마을에는 도적이 없다. 가상하고 놀랍다
근데 지난번 제주도 갔을 때 지역 뉴스에서 절도 얘기 나오던데;;;
2010년 6월 7일 월요일 12. 문예(誌文)
제주도에 남아있는 문화재 중 가장 삐까뻔쩍 한 것이 향교였다. 항교는 여러번 개수되었고, 그 규모가 관아보다 컸다. 드라마 「거상 김만덕」에 상인의 집이 고대광실처럼 나오던데, 제주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 거 같다. 성리학자의 유교 전파는 마치 종교적 열정에 빠진 사람 같다. 또한 그 대상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한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 전파와 비슷하다. 아마 한나라 때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던 거 같은데, 정신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 하겠다. 조선의 경우는 권력과 성리학을 같은 것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들의 맹목이 남달랐을 거 같다.
14장 전답(誌田), 15장 토산물(誌産), 16장 날짐승(誌擒), 17장 들짐승(誌獸), 18장 풀(誌草), 19장 나무(誌木), 20장 과수원(誌果), 21장 목장(誌馬牛), 22장 물고기(誌魚), 23장 약재(誌藥) 등은 당시 동식물의 현황을 옅볼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귤과 물고기, 말의 품종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 연구는 물론이고, 현재의 상품 개발, 과학 연구 등에 참고할 만한 정보가 될 거 겉다. 이 장들의 이름은 단순히 소재로 이름으로 번역되었는데, 내용은 그에 관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번역이 아쉽다. 예를 들어 ‘誌果’라는 것은, 귤을 포함한 각종 과수의 생태와 과수원 운영에 관한 것이므로, ‘과수원’이라 번역할 수 없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36. 고적(誌古)36.1 삼성혈
어떤 부분에서는 합리적이고, 민중의 고통을 덜고자 노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남을 무시하고 독단을 부리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어떤 때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도들이 부린 오만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 조선의 유학을 숭상하는 사람들도 이런 모순적인 정신세계를 어느정도 물려받은 거 같다. 이형상 정도 되는 선비야 원칙을 지켰겠지만 그 외의 제주목은 그보다 못한 야비한 자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근데 37장 誌名宦을 보면 훌륭한 관리가 많네요?)
조선시대 글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것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다 촌이라는 거. 제주도는 물론이고, 강원도는 거의 아마존. 평안도만 해도 완전히 풍습이 다른 이국적인 관광지 정도로 여긴다. 심지어 사대문 밖만 나가도 굉장히 벽지인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
| 달라이 라마 |
- 5대(1617~1682): 티벳을 제정일치 사회로 만듬. 포탈랍궁도 이 때 지은 것. 그런데 이 둘 이후는 모두 정치적인 힘도 약할 뿐더러 성인이 된 직후 암살을 당해 일찍 죽은 경우가 많다. 13대(1876~1933)에 이르러서야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적인 구심점이 되고, 다시 정권을 잡는다. |
| 조선왕실 가계도 V2 |
일요일 오후에 소일거리(;;;)로 그려본 조선왕실 가계도. (혼자서 잘 놉니다;;;) 생각만큼 인포머티브하지 않네요;;; 다음에 연구해서 디자인을 바꿔봐야 겠습니다. 근데 조선 왕실 참... 장자승계된 적이 별로 없네요;;; 효종~영조 구간이 좀 아이디얼한데 그 시기가 그리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죠. 그리고 계승 서열이 떨어지는 서자 중에서 장자가 나온 경우도 많아서 문제를 자주 일으키고요. 의친왕은 자손이 많은데, 의외로 사람들이 관심이 없네요. 해방 이후에 정치적인 문제로 고생한 왕손도 있고요.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 탄압받는 크리를 왕손도 못 피했다는... |
| 중국에 녹아 들다... |
그럼 지금 중공에 남아있는 그 많은 민족과 고유한 풍습, 고유한 말들은 대체 뭔가. 그건 왜 수천년이 지나도 중국에 안 녹았나. 중국이 포용한 건가? 중국 문명이라는 용매는 존재하는가? 중국 고전은 중공보다 한국, 일본, 대만이 훨씬 잘 알꺼다. 중공의 소수민족 정책은 이민족을 중국에 녹여주는 건가? 이런 걸로 따지면 세계를 가슴에 품은 미국 문명이 제일일 듯. 아이누족이 자기 말 잊게 만든 일본도 있고. 중국에 특수한 힘이 있다기보다 그냥 중국 땅덩어리가 이놈저놈이 투닥투닥 쌈질하기 적당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
| KBS1 역사스페셜 — 발굴보고! 잃어버린 조선왕손을 찾아서 (2009/07/11) |
* PD: 정수웅. |
| 행주산성 |
그러니까 주민들의 힘으로 정부에서는 신경도 안 쓰던 삼국시대에 지은 토성에서 전투를 벌였고 또 이겼다는 것.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지켜낸 서울은 나중에 양녕대군의 후손 하나가 백성들을 속이고 자기만 피난을 가기도 하는데... |
| Persepolis (2007) |
요즘 이란(페르시아) 역사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긴 귀찮으시죠? 만화로 봅시다. |
| 서용좌,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 |
2009년 3월 2일 월요일 『니벨룽겐의 노래』를 보면서 독일 문학에 대한 나의 무지에 심히 놀라 개론서를 찾았다. 독일문학사 전반을 다뤘다는 점에서 잘 고른 거 같은데, 문제는 이 책이 제목 그대로 독일 역사와 독일 문학사를 1:1로 다루고 있다는 거. 문학을 설명하기 위해 당연히 정치 상황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문학에 집중하여 설명했더라면 매우 알찬 교과서가 되지 않았을까? 두께도 줄일 수 있었을 듯. 또 역사와 함께 배치되어서인지 문학에 대한 서술이 너무 객관적이기만 하다. 예술에 대한 서술은 교과서라도 좀 주관적인 감상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 같다. (지은이가 소설가에다 하인리히 뵐을 연구했다는 것과 좀 상반되는 듯) 역사 부분을 좀 줄이고 거기에 예로 든 작품등을 더 충실하게 싣고, 도판등을 더했더라면 길이 남을 독일문학사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참고서적 목록을 책 말미에 실을 것이 아니라, 관련 내용이 있는 각 장에 붙인다면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일 텐데.
2009년 3월 3일 화요일 생소한 내용에, 친절하지 않은 요약적인 서술에 읽기가 어렵다. 그래도 독일 문학에 대한 정보를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얻기 힘들 거 같다. 하루에 1장씩만 '그냥' 읽어나가자. |
| 『손문평전』 |
왜 그가 서구에 대해 그렇게 인식의 깊이가 얕았나? 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죠.. 손문(孫文, 1866~1925)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천박한 민족주의에 충격받은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손문에 대해 공부해 본 기억이 없다. '근대화'의 시조이니 무조건 좋은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손문이 중공과 대만 모두에서 칭송받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
| 국사 시간에 어물쩡 넘어간 것들 |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내 또래 친구들도 우연히 역사의 이 부분 이야기가 나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뭐 한국사 어느 부분을 제대로 배웠을까만은...) 지금 생각나는 것들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연도 순): 1. 기자조선에 관한 사료가 더 많다. 물론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의 영토와 동떨어진 곳일 수도. 아무튼 단군조선의 사료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는... 2.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한 것은 당나라였다. 신라는 그 뒤에 유민들을 배후 조종해서 당나라를 몰아낸다. 발해가 생긴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데, 그냥 신라 영향권 밖이라서 새 나라가 생긴 거다. 3. 고려는 원나라 식민지였다. 무신들이 집권했으면 전쟁 하나는 잘했을 법 한데, 그렇지도 않은 가 보다. 고려가 그나마 독립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원나라의 식민지(?) 경영 정책 때문이지 고려가 특출나서 그런 건 아닌 듯. 4. 조선은 일본의 점령지였다. 일본은 임진왜란 첫해에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조선의 2/3를 점령한 채 몇년을 보냈다. 의병이 나타나고, 게릴라 전술에 일본군이 피해를 입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행. 그나마 일본군을 몰아낸 건 명나라. 그것도 휴전으로. (조선은 휴전을 반대했다고 한다. 뭘 믿고?) 5. 자발적인 친일도 많았다. 무력도 작용했겠지만 근대화와 함께 빠져들듯이 친일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조건 돈을 쫓은 것 만도 아니다. (결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이 자발적인 친일 과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친일파 청산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묘한 것은 국사 교과서는 이 내용을 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내 머리가 이해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는 거. |
| 『현대일본을 찾아서』 |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발표 때 일본사에 대해 살짝 언급할 일이 있는데, 어짜피 글이 개판이지만 모르는 거 안다고 할까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이 책을 고르는 데는 이 글을 참고했다. 중국사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쓴 일본사 책을 찾기가 힘들어서 아쉽다. (2) 동양학의 연구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당연한 건가?) 아무튼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 일본도 손 놓고 있었다는 거.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동양학 연구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서양 사람이 쓴 중국이나 일본 책을 번역해서 읽으면 껄끄럽다. 우리는 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에둘러 보는 느낌이다. 2008년 9월 28일 일요일 발표가 끝나고 나니 책 읽기가 싫어진다. 그리고 이 책이 뭐랄까 미국의 전통적인 학문서 스타일(?)로 쓰여 있어서 구조적으로 목차가 잡혀있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꽉 차 있지만 글을 차분히 하나하나 읽어가지 않으면 내용 파악이 어려워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또 양이 만만치 않다. 내가 좀 관심있어 하는 부분(에도의 도시화 과정)과 조선과 관련된 부분만 읽고 도서관에 반납할 예정이다. 함께 빌렸던 『현대일본의 역사: 도쿠가와 시대에서 2001년까지』가 목차도 관심을 끄는 소재 위주로 전개되고 있고,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2008년 9월 29일 월요일 가만히 앉아서 찬찬히 읽으니 또 잘 읽힌다. 일부러 그렇게 써서 그런건지, 실제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일본 역사를 보며 부러운 점은 에도시대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시대도 정치적인 연속성이 있다는 거. 너무 당연한 얘기일 지 모르겠으나, 에도시대의 논리가 전전까지 참고되고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문무분리 원칙) 또 정치가들이 대의를 밝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정도전 말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교묘한 핑계를 찾기가 정치적인 대의를 찾기보다 쉽다. 물론 권력자가 권력을 드러낼 때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다. 오히려 공문서의 지시로만 남은 것이 더 잘 정비된 국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 때문인지 우리는 여전히 사회의 지향과 목표를 파악하기 힘들다. 오직 느끼는 건 사회의 압력 뿐.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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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드기르 |
| 『현대일본의 역사: 도쿠가와 시대에서 2001년까지』 |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발표 때 일본사에 대해 살짝 언급할 일이 있는데, 어짜피 글이 개판이지만 모르는 거 안다고 할까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이 책을 고르는 데는 이 글을 참고했다. 중국사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쓴 일본사 책을 찾기가 힘들어서 아쉽다. @book{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중국 근대에 관해 글 쓸 일이 있는데, 중국 근대에 대해 너무나 아는 게 없어서 발표하다 뻘소리 할 까봐 서점에 나가 참고할 만한 책을 골라 봤다. 신기한 것은 신임 대통령이 중공에 방문하는 것이 중요 일정이 되고, 한국 경제가 이미 중공 경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하고, 너도나도 보통화(普通话) 배운다고 하면서도 중국의 근현대사에 관해 일반인이 참고할 만한 책을 찾기 힘들다는 것. 그나마 이 책이 교과서적인 시각을 담지하고 있는 듯 해서 구입했다. 좀 심하게 고등학교 교과서 같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외에 참고할 만한 책은 서울대학교동양과학연구회의 『講座 中國史』 정도인 듯 한데, 이 책은 일종의 논문집이라고 볼 수 있고, (제목이 왜 '강좌'인지?) 중국사 전반에 대한 개념을 잡고 시대를 참고하는 데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 듯 하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하다는 바로 옆의 큰나라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기 힘든 한국의 현실에 절망해 본다. 중공 학문 베끼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중공에서 낸 역사책 하나 번역한 것도 없다는 게 황당하고, 공자왈 맹자왈은 다 어디갔는지 궁금하다. 2008년 9월 17일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들의 선후관계가 명확해졌다. 특히 공교육에서 단편적으로만 다루어져서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한국의 근대사가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꿰어지는게 있는 느낌이다. 침략자인 서구 열강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중국 땅에 비하면 굉장히 덜 중요한 곳이었으리라.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서양 자본주의의 침략사는 정말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book{ |
| 『20세기 중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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