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교육 = 7.0
2011/09/26 ‘수업’
2009/02/25 『노작교육론』
2008/12/08 괜찮습니다.
2008/11/10 스승 살해
‘수업’
「수업」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아 정말이지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개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교회 마당에 빙 둘러 앉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서로를 잡아먹는지 가르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 H. P. 러브크래프트, 장진열 옮김, 「픽맨의 모델」 중에서
『러브크래프트 전집 1』(㈜황금가지, 2009), 193~194쪽)

There was one thing called ‘The Lesson’ -- Heaven pity me, that I ever saw it! Listen -- can you fancy a squatting circle of nameless dog-like things in a churchyard teaching a small child how to feed like themselves?
수능 제2외국어 선택 1위는…

언제나 제도의 본질을 비웃는 한국 입시 판의 풍경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요즘 수험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제2외국어 과목이 뭔지 아십니까? 현재 수능 제2외국어 가운데 최고의 인기과목은 아랍어입니다.

올해 수능에서 제2외국어를 선택한 수험생 가운데 45%가 넘는 49116명이 아랍어를 선택했습니다. 2위(일본어.19931명.18.6%)를 더블스코어로 따돌린 압도적인 인기.

… 일반 고교는 물론이고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조차 아랍어를 가르치는 곳이 없습니다. 단 한군데도. 그때도 물론이고 2011년 1월 현재까지도 ‘개설 에정’ 중인 울산외고를 제외하면 아랍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는 국내에 없습니다. 우스개삼아 나온 ‘응시자보다 출제 위원들의 수가 더 많다’라는 말이 진지하게 다가왔던게 아랍어의 현실이었습니다.

— 충용무쌍, 「아랍어는 정말 수능의 로또일까?」(딴지일보, 2011/02/07)
『학교 없는 사회』(1971)


2006년 12월 20일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추가.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1971년에 나와 주목을 받은 이 책은 여러차례 번역되었다.
  1. 황성모 옮김, 『탈학교의 사회』(삼성문화재단, 1978) — 小澤周三 옮김, 『脱学校の社会』(東京創元社, 1977) 중역.
  2. 김남석 옮김, 『교육사회에서의 탈출』(범우사, 1979)
  3. 양한수 옮김, 「탈학교의 사회」(『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2장, 한길사, 1979) — 1~4장만 옮김.
  4. 김광한 옮김, 「탈학교사회」(『탈학교논쟁』, 1부, 한마당, 1984)
  5. 심성보 옮김, 『학교 없는 사회』(미토, 2004)
  6. 박홍규 옮김, 『학교 없는 사회』(생각의나무, 2009)
옮긴이는 한국의 반응이 느린 점(219쪽), 유독 이 『학교 없는 사회』 만 번역된 점, 처음의 잘못된 번역이 계속된 점(240쪽) 등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또한 80~90년대에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적었음을 지적한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 독재시대에 일리히는 보수적인 어용학문에 대응되는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었으나, 프랑코가 죽고 독재가 끝난 뒤 그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 230쪽.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1980년 전후의 한국에서도 일리히는 독재시대 교육에 대한 비판용으로 잠깐 읽혔다가 소위 허구적인 민주화 바람 속에서 금방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 감동은 일회용 독재비판 주사로 그치지 않았다. 나에게 그 감동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회 전체가 가장 극단적으로, 가장 포괄적으로, 가장 철저히 학교화되고 전문화된 곳이 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탓이었다. — 231쪽.

관련 모임과 저술도 적지 않게 이루어졌던 거 같다. 난 일단 가장 최근에 번역된 박홍규가 옮긴 『학교 없는 사회』를 빌렸다.

이 책의 영어 원문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이분이 오스트리아 사람인데, 영어로 글을 썼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책 내용 중에 스페인어 교육에 관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역시 그의 재능 때문에 맡게 된 일이다.)
  • http://ournature.org/~novembre/illich/1970_deschooling.html
옮긴이는 ‘Deschooling’을 ‘비학교화’로 번역한다. (12쪽) 기존의 ‘탈학교’라는 번역은 대안교육 등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일리히는 사회 제도 전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므로 적당한 번역인 거 같다. ‘Disestablishment’도 ‘폐지’가 아닌 ‘비국가화’로 옮긴다. (23쪽, 주1)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학교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들이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能辯)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홰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强辯)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Many students, especially those who are poor, intuitively know what the schools do for them. They school them to confuse process and substance. Once these become blurred, a new logic is assumed: the more treatment there is, the better are the results; or, escalation leads to success. The pupil is thereby "schooled" to confuse teaching with learning, grade advancement with education, a diploma with competence, and fluency with the ability to say something new. His imagination is "schooled" to accept service in place of value. Medical treatment is mistaken for health care, social work for the improvement of community life, police protection for safety, military poise for national security, the rat race for productive work. Health, learning, dignity, independence, and creative endeavor are defined as little more than the performance of the institutions which claim to serve these ends, and their improvement is made to depend on allocating more resources to the management of hospitals, schools, and other agencies in question.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세가지 차원은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In these essays, I will show that the institutionalization of values leads inevitably to physical pollution, social polarization, and psychological impotence: three dimensions in a process of global degradation and modernized misery.

— 1장, 23~24쪽.

뭔가 심금을 울린다. 한편으로는 70년대의 아련한 이상주의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복지 관료는 사회적 상상력에 대한 전문적・정치적・재정적 독점을 주장하며 무엇이 가치 있고 가능한지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데, 이러한 독점이 빈곤의 현대화를 초래하는 원흉이다. 모든 간단한 요구에 대한 제도적 대응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계급의 빈곤이나 새로운 빈곤의 정의가 나타난다. — 27쪽.

Welfare bureaucracies claim a professional, political, and financial monopoly over the social imagination, setting standards of what is valuable and what is feasible. This monopoly is at the root of the modernization of poverty. Every simple need to which an institutional answer is found permits the invention of a new class of poor and a new definition of poverty.

빈곤의 현대화는 미국 도시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이곳의 빈곤대책은 빈민의 의존성, 분노, 욕구불만, 그리고 더 많은 요구를 만들어낸다. 또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곳의 빈곤대책은 그것이 일단 현대화되면 금전에 의한 처리만으로는 저항에 부딪히게 돼 제도의 근본적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 29쪽.

It is probably most intensely felt in U.S. cities. Nowhere else is poverty treated at greater cost. Nowhere else does the treatment of poverty produce so much dependence, anger, frustration, and further demands. And nowhere else should it be so evident that poverty-once it has become modernized-has become resistant to treatment with dollars alone and requires an institutional revolution.

일단 그러한 제도에서 일하는 전문가의 위계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원이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사회에 믿게 한다면, 아무리 많은 비용을 들여도 복지제도가 지닌 본래의 파괴성을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국의 빈민은 깨달아 가도 있다. 미국의 도시 중심부에 사는 빈민은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학교화된’ 사회의 사회복지법이 만든 오류를 밝힐 수 있다.

They are making the discovery that no amount of dollars can remove the inherent destructiveness of welfare institutions, once the professional hierarchies of these institutions have convinced society that their ministrations are morally necessary. The poor in the U.S. inner city can demonstrate from their own experience the fallacy on which social legislation in a "schooled" society is built.

… 즉 현재 건강, 교육, 복지를 다루는 제도에 대한 재정지출을 중단하면, 그 제도의 무능화라는 부작용에 의해 결과한 빈곤의 증대를 막을 수 있다. — 29~30쪽.

… Only by channeling dollars away from the institutions which now treat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can the further impoverishment resulting from their disabling side effects be stopped.

… 그 적절한 사례는,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 3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약 6백만 명의 아동을 불우한 조건에서 해소하기 위해 미국의 학교에서 소비된 것이다. … 그럼에도 이러한 ‘불우한’ 아동의 공부는 거의 개선되지 못했다. 그들을 중산계급 출신 동급생과 비교하면 그들은 더욱 더 후퇴했다. — 30쪽.

위의 이유 2가 말하듯 자금이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은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학교체제상 특히 그러했다는 점도 사실이다. 학교는 그 자체의 구조로 인해, 특별취급을 하지 않으면 불리한 입장에 놓이는 자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에 저항한다. 특별한 교육과정, 교실의 분리, 특정 학생에 대한 더 많은 교육시간의 부여는 더 높은 비용으로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 32쪽.

역설적이게도, 보편적 교육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신념은, 학교가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봉사한 나라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나라들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34쪽.

… 그러나 나아가 아동 1인당 지출되는 비용은, 전 국민의 10퍼센트에 이르는 가장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에 비해 가장 부유한 부모의 아이들은 10배의 공공비용을 확보하고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유한 아이들이 더욱 긴 학교교육을 받고, 대학교의 1년은 고등학교의 1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용이 들며, 거의 대부분의 사립대학교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세금에서 나온 재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 37쪽.

강제적인 학교화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양극화한다. 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국제적인 차별제도로 계급화한다. 카스트처럼 나라들은 계급화돼 그 교육적 권위는 시민의 평균취학연한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1인당 국민총생산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 38쪽.

이 책을 읽으며 한국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옮긴이의 머리말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교육기회의 평등화란 사실 바람직한 것이고 동시에 실현가능한 목표다. 그러나 이를 강제적 학교화와 동일시함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현대화된 프롤레타리아의 세속종교가 돼왔고, 과학기술시대의 빈민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실현될 수 없다. 국민국가는 학교를 채택해 모든 시민을 등급화된 졸업장을 따게 하는 계급화된 교육과정 속에 강제로 끌어들였으나, 이는 과거의 성인식 의례나 성직자 계급승진과 다르지 않다. 현대국가는 선의의 학생지도나 취업조건을 통해 교육자가 판단을 강요하는 의무를 인정해왔다. 이는 스페인 왕들이 그 신학자들의 판단을 중남미 정복자나 종교재판을 해 강요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 38~39쪽.

능력과 이력의 결부를 단절시키기 위해 개인의 학력 조사를 금지해야 한다. 이는 정치단체나 종교단체에의 소속, 혈통, 성적 취향, 인종적 배경에 대한 조사를 금지하는 것과 같다. 학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은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 물론 법률로도 학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중단할 수 없고, 독학한 사람과의 결혼을 강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법률은 부당한 차별을 단념시킬 수 있다. — 42쪽.

대부분의 공부는 우연히 얻는 것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의도적 공부도 계획적으로 가르친 결과가 아니다. 보통 아이들은 자신의 국어를 우연히 배운다. 물론 그들의 부모가 관심을 가지면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우연한 사정에 의한 것이지, 연속적인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가령 외국에 있는 조부모의 집에서 살았다든가, 여행을 했다든가, 외국인과 사랑에 빠진 탓이다. 읽기에 능한 것도 정규교육과정 이외의 활동의 결과다. 폭넓게, 또 즐겁게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하도록 배운 탓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 의문을 갖게 되면 그들은 쉽게 그런 환상을 버린다. — 43쪽.

… 학교교육보다는 비용이 덜 드는 반복훈련은 지금, 부자여서 학교에 가지 않거나, 군대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직무교육을 받는 자들의 특권이 되고 있다. 미국이 교육의 비하교화를 서서히 진행하는 계획을 추칮하는 경우, 무엇보다도 반복훈련에 유용한 자원은 제한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누구든 그 생애의 어느 때나 수백 개의 기능 중 하나를 선택해서 공공비용으로 배우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될 것이다. — 45쪽.

기능교사의 ‘시장’을 개방하면 공부의 기회가 대폭 증대될 것이다. 이는 적절한 교사가 적절한 학생을 만나는 것에 의존한다. 그 경우 학생은 교육과정에 구속되지 않고, 지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충분히 자극받아야 한다. — 45쪽.

책을 대략 통독했는데, 한번 읽고 끝날 책이 아닌 거 같다.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선언적인 간단함이 있어서 쉽게 정리가 안 되는 거 같다. 일리히의 다른 책들을 기회가 있으면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거 같다.

2010년 5월 14일 금요일
권말에 옮긴이의 해설(218~351쪽)이 있어서, 일리히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역시 너무 선언적인 것들이라서, 자세한 논의는 일리히의 글을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거 같다.

옮긴이 해설 중에 관련된 교육학자(?) 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4장 일리히와 아나키즘 교육사상) 메모해뒀다가 기회가 되면 책을 읽어봐야 겠다.
  • William Godwin —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and its Influence on Modern Morals and Manners, 탐구자: 교육, 의례, 문학에 관한 성찰(무슨 책인 지 모르겠음)
  • 프루동
  • Max Stirner — Das unwahre Princip unserer Erziehung
  • 톨스토이
  • Francisco Ferrer — 이훈도 옮김, 「모던 스쿨의 기원과 이상」(『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말라』, 2002)
  • 간디 — 『부자가 있는 한 도둑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 Vinoba Bhave — Pfade in Utopia
  • Martin Buber
  • Herbert Read
  • Paul Goodman — Compulsory Mis-education and the Community of Scholars
  • Everett Reimer — 『학교는 죽었다』
  • John Holt — 『존 홀트의 학교를 넘어서』(Instead of Education)
  • Paulo Freire — 『피압박자의 교육학』
  • 크로폿킨 — 『빵의 쟁취』
『노작교육론』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박사학위 논문(「케르쉔슈타이너와 듀이의 노작교육론 비교연구」,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1995)의 '후속작'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방대한 자료들에서 주제와 관련된 내용만 간략하게 요약만 해놓았을 뿐 뭘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게 그저 '정리'만 해놓았다. 그래놓고 찾아보기는 빠져있어서 참조하기도 어렵다. ('후속작'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논문에 빠진 슈타이너가 포함되었기 때문인 거 같다.)

정리한 내용들을 내가 다 기억하기도 어렵고, 또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주제와 교육학이라는 분야에 조금 익숙해졌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겠다.

'노작교육'은 독일어 Arbeitserziehung의 번역어로, 일본어 번역을 따른 거 같다. (몇십년전만 해도 '작품'이라는 뜻으로 '노작'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 말은 作業教育, 勞動教育, activity school, vocational school 등 여러가지 말이 사용된다.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노작교육이 직능교육 등과 혼동되고, 더 큰 교육의 의미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인 거 같다.

육체를 사용해 머리 속의 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사회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주장은, 매우 이상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며, 또 보수적이다. 플라톤과 유토피아가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소크라테스(Isocates, 436–338 B.C.)의 실용적인 주장 역시 사회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플라톤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작교육이 반발한 당시의 보수적인 교육도 그렇고, 현재의 한국도 그렇고 국가는 교과를 암기하는 주지주의적인 교육을 더 선호한다. 아마 이 방법이 수동적인 국민을 만들어 부려먹기 편하게 만든다고 경험적으로 느끼기 때문일 수도있겠고, 노작교육이나 예술교육 같은 것은 평가가 어렵고, 교사를 길러내기도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 예산 문제도 이러한 교육에 큰 걸림돌이 된다.

한국 교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슈타이너의 경우는 이상주의를 넘어 신비주의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을 주로 뉴에이지 관련 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있는 것도 아쉽다. (물병자리, 밝은누리)

괜찮습니다.
저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히로히토 덴노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라고 배우며 자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승만 박사 찬가를 배우며 자랐고,

전 박정희를 왕으로, 전두환을 최고의 대통령으로 배우며 자랐지만

현재 모두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들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제 주위에는 수업 시간에 전두환을 미화하는 내용을 배우고 가르쳤던 걸 기억 못 하는 친구와 교사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의 영향인지 그들은 여전히 숭배할 영웅을 찾아 헤메고 있지요.

그런 교육은 장기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어린이들의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스승 살해

솔직히 이해 간다.

중학교 입학식 날 예행 연습하다가 손 움직였다고 단상에 올라오라고 해 놓고 다 올라오지도 않은 애 날라차기 하던 스승 생각난다. 그게 군기 잡으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스승들. 아마 연금받으며 잘 살고 있겠지. 자기들이 반성하기 전에 학교 가서 애들한테 이 사건 가지고 뭐라고 떠드는 놈들도 분명 있을테고. 사회의 부조리를 시범 보이는 사람도 교사이고.

나도 남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너무 약한 거 같고. 아무튼 뭐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인생 잘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 그러다보면 어느날 우연히 지나가다 벼랑끝에 메달려 있는 그 사람의 손가락을 밟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뭐.

p.s 미디어다음 댓글 장난 아니다;;; 실명 올라오고;;; 근데 교사 옹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
최진기, '현 정부의 환율방어 무엇이 문제인가?'

메가스터디 사회탐구 영역(경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님) 강사 최진기의 강의. 최근 정부의 경제 정책과 관련해서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길이가 30분도 넘길래 볼 생각도 않고 있다가, 자동재생 시켜놓은 웹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가서 듣게 되었다.

이걸 보고 느낀 건... 현 정부에 대한 분노보다 학원 강의의 문제점...

귀에 술술 들린다. 아! 이것이 과연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메가스터디의 매력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애들이 과연 이 강의를 들어서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식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면 이 강의를 듣고 주식을 팔았을까? 이 강의를 들은 학생에게 다른 케이스를 던져주고 분석하라면 할 수 있을까? 못 할꺼라고 본다. 조금만 신선한 시험문제가 나와도 맞추기 힘들 거다.  나중에 강만수와 똑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뭐랄까 강의라기 보다 신문 읽고 썰풀기처럼 느껴진다. (전후좌우 설명이 어딘가 부족한 인상도 있다. 이전에는 환율을 올려서 나빴고, 왜 이번에는 환율을 낮춰서 나쁜가?)

귀에 술술 들어오는 이 학원 강의는 뭔가 이해를 하게 되는 거 처럼 느껴지지만, 그 지식을 자기의 힘으로 만들기는 어려운 구성이라는 거. 대중적인 입시학원 강의의 한계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가 없어도 강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관계가 공부를 시키는 데는 더 효과적인 거 같다. 이를테면 공교육. 돈없으면 동강 들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걸 들어서 공부 잘 할 놈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게 안타까운 일이다.

중간에 강사가 개미 투자자들은 이런 걸 이해 못 한다고 했는데... 주식하다 돈 날린 사람들 이야기 보면 아닌 거 같다. 한국 장 끝나면 미국 증시 보다가 밤 새는 분들인데 이런걸 모를리가... 한국 개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몰라서라기보다 감정 상의 문제랄까? 이건 결국 자본의 문제이고. (자본이 감정도 지배하는 구나... 아니 이건 도박이라서 그런가? 빚 얻어서 도박하는데 냉철한 놈이 비정상인 거다. 아니 냉철한데 왜 도박을 해? 이것부터 이상하다.) 그러고보니 정치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전두환 나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찍어줘야지. 생활도 뭔가 비슷한 점이 있다. 나쁜 일인 건 아는데 남들 다 하니까 해야지... 정치는 빨갱이 무서워서 그렇고 생활은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다고 쳐도, 경제는 왜 그러는지?

개미도 아는 걸 강만수 장관은 몰랐을까? 몰랐으면 바보인 거고. 알았으면 나쁜 놈인거고. 나는 대기업들—사실 복수로 쓸 필요가 없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성—을 위해서 이런 정책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단기적인 이익보전 하자고 국민들 팔아먹는 대기업은 원래 나쁜놈이었던 거고... 그걸 듣는 놈이 바보인 거지... 이러나저러나 결국 바보인 건가? (제1) IMF도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정치적인 성공은 실력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느껴질 정도) 사회가 안정적이라면 국민들만 고생(;)하고 끝나겠지만, 다른 나라와 실력을 겨뤄야 하는 경우 나라를 들어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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