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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에 남아있는 정치 이야기는 지나치게 간략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정치가 이렇게 쉽게 해석되는 시대는 드물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도 현대 정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단순한 욕망이 아닌 고도의 행정적인 조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들어 한대 초기의 염철론만 보더라도 현대에 이루어지는 토론을 능가하는 깊은 내용이 오고간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서는 다만 그것이 모두 은폐되고 생략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선은 이전 왕조의 기록은 민중의 감상으로만 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민중의 감정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즉, 남아있는 중국 역사는 포퓰리즘 역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저자는 아마도 이런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윤리관을 규범으로 제시하더라도 결국 그 윤리관은 민중의 감성적인 태도의 기반만 바꿀 뿐이다.

또 그 윤리관이 얼마나 세밀한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유학은 세밀한 가치 판단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학자의 독단에 맡기는 경향도 있는 거 같다. 정치적인 합의나 다수결 같은 조정 절차가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그 판단을 내리는 유학자는 민중의 반란은 막아야 한다. 즉 어느정도는 포퓰리스트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민심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신이 직접 반란을 이끄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거나, 회피나 포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두번째로는 역사와 정치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초월적인 서술은 20세기 중반이 되서야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정치 그 자체가 정치 기록을 제한한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연대기와 기사만이 남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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