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라틴어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말 문법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예를 들어 Urbs Troia a Graecis decem annos oppugnabatur.(트로이 성은 그리스에게 10년 동안 공격받았다.)는 문장에서

'10년 동안'이라고 번역했지만 'decem annos'는 목적격이다. 영어를 비롯한 서구언어의 전치사에 익숙하기 때문에 기간을 목적격으로 나타낸다는 것이 처음엔 어색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한국어로도 '10년을 공격받았다'라고 목적격 조사를 써도 말이 된다, 오히려 더 말이 잘 된다. 심지어 목적격 조사를 생략해도 자연스럽다, '10년 공격받았다'.

그러니까 한국어에도 라틴어와 동일하게 목적격이 기간을 나타내는 부사인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처음 품사를 배울 때는 이러 생각을 하기도 했던거 같은데 익숙해지다보니 이런 생각을 그동안 머리 속에서 막아놓고 살았던거 같다. 왜 문법에 대한 생각을 유연하게 하지 못했을까. 이런 용법은 아직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영어 문법만 배우다보니 한국어에는 수동태가 없어서 수동태가 어색하다는 얘기만 되풀이하는데, 라틴어 수동태에서는 수동태의 행위자를 표시하는데 탈격을 사용한다. 탈격은 우리말 조사 '에게'와 뜻이 통한다. 즉 우리말 수동태가 어색했던게 아니라 그런 스타일의 수동태도 원래 존재해왔던 것이다.

시제도 마찬가지다. '공격받았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보통 과거 시제라고 배운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면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과거 미완료 시제다. 20년전부터 쭉 일어난 일이고, 오늘도 일어났고, 내일도 아마 십중팔구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현재형이 진리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현재형의 사용법이어서가 아니라, 원래 현재형이라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를 한꺼번에 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건 아마도 문법 이전에 더 원초적인 인류의 특성일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이런 생각까지 분명히 하고 있겠지만 밖에는 답답한 문법만 전한다.

라틴어가 우리와 워낙 지리적으로 먼 곳의 말이다보니 원래 같은 말이었다는 식의 상상은 하기 어렵고, 인류 언어 자체에 어떤 공통된 특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언어학 이론들이 생각보다 실용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 문법을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이렇게 강하게 들긴 처음이다. 그러나 이런 자극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찾아볼 지는 모르겠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