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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와 공자가 대기설법(對機說法)에 능했던 것처럼 설명하고, 그것이 놀라운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면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초능력도 아니고 아주 상식적인 일이다.

종교에서는 상대를 말로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유치하게 보이지만 내가 믿는 신이 당신이 믿는 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말로 설복시키는 것이 중요한 종교적인 대화이다.

팔리삼장에서 석가모니가 다른 종교 신자들과 하는 대화는 대부분 논박이다. 당신의 종교적 주장은 이러저러해서 모순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주장에 설복당한 상대는 석가모니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것들은 대기설법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다른 종교의 논리적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의 지적 수준에 따라 설명이 바뀔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논파해야 하는 논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며, 대화 상대들 역시 자신이 믿는 종교 교리에 매우 익숙한 상태일수 밖에 없다.

또한 이것이 신흥종교 창시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시련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가모니가 기존 종교들에 대한 지식을 매우 잘 갖춘 사람이고, 동시대에 발흥한 다른 종교인 육사외도에 대한 정보수집과 연구도 어느정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과정이 초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어린시절 받은 교육과 출가후 여러 스승과 수행자들과 교류하며 배운 것이다.

그럼 이미 제자가 된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했을까?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했을까? 지금의 우리가 그때의 대화를 알 수는 없지만 팔리삼장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보면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때그때 말을 바꾼 것이 아니라 요점을 주입식으로 교육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먼저 들어온 사람의 말을 따르라는 부분에서도 참고할 수 있다. 먼저 들어온 사람에게 신통력이 먼저 생겨서 따르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먼저 들어온 사람이 반복되는 교과서적 가르침을 더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대기설법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대승불교의 선문답 전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경향일 수도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대화를 할 때 마치 초능력으로 꿰뚫어 보는 듯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역시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다.

당시 공자는 분명히 제자들과 하루종일 숙식을 같이하는 공동체를 운영하며 교육을 했을 것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 정도면 이미 공자와 수년에서 수십년을 함께 기거한 사이인데 서로의 성격을 모르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제자의 학습진도를 아주 정밀하게 파악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제자가 미처 말하지 않은 부분도 이심전심으로 짐작해서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자 역시 스승 공자에 대해 격이 없는 태도로 질문할 수 밖에 없다. 그 제자가 성격이 급한 것이 아니다. 생활을 같이 하기 때문에 식사 중에도 충분히 스승과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학문적 질문도 할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유세를 다닐때는 더더욱 밀접하게 생활했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장기간 트래킹과 캠핑을 같이 하는 것 아닌가. 개울가에서 함께 발씻다가 인(仁)을 떼에 비유하며 질문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공자 생전에 이미 계파가 생긴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 생각엔 이런 종류의 공동체는 스승이 살아있는한 분열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역시 오래된 제자들의 역할은 인정했지만 그렇다해도 모두 동등한 관계인 것이지 거기서 다시 항렬을 나누지 않았다.

공자의 학교 모습은 우리 상상과 많이 다를 것이다. 학교의 후계자 역시 학문적 후계자이기도 했겠지만 그런 생활방식을 유지할수 있는 사람 중에서 골랐을 것이며, 해체 역시 누가 나가서 독립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둘 떠나가며 천천히 이루어졌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도 여기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 교사가 수업시간에 강의를 하는 직업인이 아니라 생활을 같이하는 사이여야 인격적인 지도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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