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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구가 으레 그렇듯 결론이야 흐지부지하지만 ‘미인도’를 통해 한중일 3국의 근대 회화를 조명한다는 시도가 매우 흥미롭다. 선택한 두 작가 이유태와 푸바오스(傅抱石, 1904~1965. 외래어 표기법대로 하면 ‘바오시’일 거 같은데 다들 ‘바오스’라고 써서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어야 겠음)은 공통점이 있는데, 우선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에 유학해서 서양화를 배웠고, 일본 유학 이전에 각각 조선과 중국의 전통 회화기법에 숙달된 상태였다는 점. 이 외에도 이유태의 스승인 김은호와 가와사키 쇼코(川崎小虎(かわさきしょうこ), 1886~1977), 푸바오스의 스승인 야마구치 호슌(山口蓬春(やまぐちほうしゅん), 1893~1971)이 언급된다.

이유태의 미인화를 보면 조선의 전통적인 인물화법과 신일본화의 화사한 채색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미인도 작품은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 근대화단의 김은호 미인화의 맥을 이으면서 한 단계 진보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고 본다. (233쪽)

시집가는 날을 그리고 있는 만큼 색감이 화사한데 여인들의 뽀얀 얼굴색이나 상단부의 투명하고 몽롱한 배경처리는 그의 스승인 川崎小虎의 영향이다. … 또한 이 그림은 시집가는 전통복장을 한 신부와 들러리를 그렸는데 군상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川崎小虎뿐만 아니라 일본화단에서 애용되었던 화면구성이다(도판 19). (233쪽)

‹感›은 결혼하는 여인이다(도판 20). 중심에 주인공을 두고 주변에 보조 인물들을 배치하였는데 당시 일본 인물화에서 많이 애용되었던 구도이다(도판 21). ‹情›은 출산한 여성이며 가정을 꾸린 여인이다(도판 22). 뒷배경의 문갑이나 화분 등의 소도구 또한 근대 일본 인물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치이다. (234쪽)

그림의 제목은 黑田淸輝(1866—1924)의 1899년의 기념비적인 작품 ‹智·感·情›과 동일한데, 이유태가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5쪽)

이유태 미인화의 채색을 보면 김은호보다 화사하다. 호분의 양과 관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은호가 구사한 미세한 朦朧體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川崎小虎에게 화사한 색감은 익혔지만 그가 구사한 朦朧體는 극히 제한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미인도 배경에 채용되는 보카시 기법, 특히 3부작 중 ‹智›와 ‹情›의 배경 하단 부분에 구사한 방법은 山崎小虎가 그의 미인도 배경으로 애용하였던 방식이다. (236쪽)

푸바오스의 작품에 대해선 이유태 만큼 자세한 분석이 없다. 근데 뭐 유명한 작가이므로 찾아보면 충분한 연구가 있을 거 같다.

부포석과 이유태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만의 畵法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우선 부포석은 중국화의 대표성이 線이라고 믿었고, 筆線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는 서양의 그림은 색채와 面의 결합이며, 중국의 회화는 線條와 点의 교향악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서양화는 寫實적이며 중국화는 寫意적이다. 서양화는 과학적이며 중국화는 철학적, 문학적이다”라고 피력하였다. 그의 미인화에서 이런 부포석의 이론을 충분히 보여주는 線의 다양한 구사, 詩題를 활용한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寫意性에 대한 固守를 읽을 수 있다.

둘째는 시대성에 대한 규정이다. 그는 “國畵는 변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변해야 하나.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림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 사상, 재료, 도구 모두 같을 수 없다. 그러나 宋·明은 망하지 않았고, 吳鎭, 倪瓚, 石濤, 八大家는 水墨畵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그림의 본체는 자유롭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傳統과 師承으로 다양한 境界가 나온다”라고 중국 전통회화의 연계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미술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 인격과 수양, 둘째 외국과 외국 교류의 최대한 흡수 그러나 최대한의 저항, 셋째 중국미술의 표현은 雄渾, 朴茂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236~237쪽)

굉장히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화혼양재, 신일본화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 한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푸바오스는 중국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경향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일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민족주의를 하나 더하는 경우가 흔하다.

해방 후 우리나라 화단에는 일본화적인 요소가 배격당하고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다시 찾자는 동양화단의 요구가 있었는데, 같은 김은호 문하였으며 역시 인물화에 능했던 김기창은 비구상으로 갔고 장우성은 남종문인화에서 그 본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유태는 山水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해방 후부터는 미인화를 그리지 않았다. (238쪽)

우리나라는 뭔가 일제를 극복하는 방법이 좀 어정쩡하다. 이 사람들이 과연 일본의 잔재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런지. 사회적인 비판을 소재를 바꿈으로써 회피한 것은 아닌지. 뭐가 우리 거고 뭐가 일본 건 지 구별할 줄도 모르는 사회는 왜 그리 야멸차게 예술가들을 대한 건지. 결국 그래서 뭐가 우리 거고 뭐가 일본 건 지도 모르게 된 건 아닌지. 씁쓸하다.

* 이 글은 「동양미술사학」 4집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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