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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학』

kabbala 2011.01.25 03:43

왜 그동안 『정치학』을 안 읽었을까? 구절 구절에 담긴 함의가 참으로 놀랍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가 아니라 서양 사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복인 거 같다.

사람은 각자 가장 잘하는 역할이 있고 그에 따라 노예주와 노예 역할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다 노예주에 합당한 인격을 가졌고, 오랑캐들은 다 노예이다. 그러므로 바르바로이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는 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따위의 이야기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금서목록에 올라가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인데, 20세기 중반까지 이런 주장의 후계자들이 지구의 모든 곳에서 활개쳤다. 예를 들자면 얼마전에 읽었던 엄복(옌푸)의 사회진화론 같은 거. 심지어 현재까지 교묘한 변주가 세계에 울려퍼진다.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자급자족(autarkeia)이라는 최고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국가는 단순한 생존(zēn)을 위해 형성되지만 훌륭한 삶(eu zēn)을 위해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공동체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국가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telos)고, 어떤 사물의 본성(physis)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20쪽)

이로 미루어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zōion politikon)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20~21쪽)

또한 국가는 본성상 가정과 개인에 우선한다.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21쪽)

따라서 국가는 분명 자연의 산물이고 개인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개인은 전체에 대해 다른 경우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없거나, 자급자족하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들짐승이거나 신(神)일 것이다. (20~21쪽)

…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ē)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불의(不義)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들을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월함(aretē)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다.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이 옳은지 판별해주기 때문이다. (22쪽)

우리가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역자는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로 옮겼다.(주15) 문맥 상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거 같다.

또 우리가 흔히 ‘미덕’으로 번역하는 아레테를 ‘탁월함’으로 의역했다.(주19) 번역이 전반적으로 엄밀하다기보다는 의역을 택한 거 같다. 아레테의 영어 번역어 중 하나가 ‘excellence’인 것을 참고한 거 같다.

그런데 이 번역이 약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거 같다. 다음 문장 같은 경우, 의역을 더 해줘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없을 거 같다.

주인이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습득한 지식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탁월함 때문이다. 이 말은 노예와 자유민에게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주인을 위한 지식(despotikē epistēmē)과 노예를 위한 지식(doulikē epistēmē)이 있을 수 있다. (35쪽, 1255b16)


논리학에서도 추앙받는 아리스토텔레스라 주장들이 매우 논리적일 거 같지만, 의외로 유비가 대부분이다. 중국 고전들을 연상시킨다. 인용문들도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인용한 구절들이 마치 사자성어처럼 기존에 있던 관념을 대표한 것인가? 대부분 창작물임을 고려해 볼 때 그런 거 같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관용어로 받아들인 걸 수는 있다. 수업 중의 농담 같은 걸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사라지고 강의록만 남은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강의록이라서 더 진솔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경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아 그래서 홍기빈 책 같은 게 나온 거구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에 대한 주장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전 경제학 중에 정치경제학 아닌 게 없지만 서도.

따라서 어떻게 보면 모든 부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재산을 획득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화폐를 무한히 늘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은 두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같은 대상, 즉 재산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용 방법은 서로 달라서, 한쪽의 목표는 증식이고, 다른 쪽의 목표는 그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증식이 가사 관리의 기능이라고 믿고는 가지고 있는 화폐를 그대로 간직하거나 무한히 증식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45~46쪽, 1257b32)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이 훌륭한 삶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의 욕망이 무한하듯,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도 무한하기를 원한다. 훌륭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마저도 물질적 향락에 도움이 되는 수단을 추구한다. 또한 물질적 향락은 재산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인간은 재산 획득에 전념하게 되고, 그리하여 두 번째 종류의 재산 획득 기술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의 향락은 과잉(過剩)에 있으므로, 그들은 향락의 과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재산 획득의 기술로 이런 향락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들은 다른 수단을 써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데,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자연에 위배되게 사용한다. 예컨대 용기가 할 일은 재물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재물을 획득하는 것은 또 장군의 기술도, 의사의 기술도 아니다. 장군이 추구하는 것은 승리고, 의사가 추구하는 것은 건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든 기술을 재산 획득 기술로 전환하는데, 재산 획득이 목적이고 모든 것은 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46쪽, 1257b40)


* 천병희가 옮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2009)을 읽으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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