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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속칭 ‘대륙조선설’을,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내용을 주장하시는 거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강성함을 이야기하는 경우 주로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정도까지 대륙을 지배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제 바로 직전, 20세기초(아마도 1910년 한일합방까지)까지 조선은 중국 땅에 있었고, 현재의 지명은 일제의 의해 철저히 조작되었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얄타회담(1945)까지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나 보더군요. 그런데 이분이 그런 주장을 안 하는 이유는, 어쩌면 본인이 1945년 이전에 출생하여 사회를 경험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방법 중 하나는 실제 중국 노인들의 증언을 찾으시는 거 같습니다.)

성북구 쪽으로 가면 정릉(貞陵)이라고 되어 있는 곳은 분명히, ‘문바위골’이었다. 일제가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라고 역사 설명을 달고 있으나, 이는 전혀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이 무덤은 수백 년 간 주인 없이 버려진 무덤에 불과했는데, 조선역사를 짜집기하면서 전고를 입힌 것이다.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6쪽)

의림지라는 제천에 있는 연못은 이 지역 농수를 위해 일제초기에 그들이 만든 인공연못이다. 그리고는 동네 이름을 ‘제방을 쌓았다’는 뜻으로 ‘제천(堤川)’이라 한다지만, 이 역시 조선사와도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즉 ‘제천 의림지’는 섬서성 연안 아래쪽에 ‘의천(宜川)·의군(宜郡)·제주(堤州)’라는 곳을 일컫는다. ‘백수(白水)’ 또는 ‘의림제(義臨堤)’라고도 했고, ‘내토(奈土)·내제(奈堤)’라는 이름으로도 불러 『삼국사기』의 조선사와도 연결되는 곳이다. 그와 같은 제천이란 땅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놓고, 연못을 중심으로 호서니 호남이니 했다면 참으로 장난 치고는 웃기는 장난이다. (「이 땅의 지명은 짜집기된 것」, 26쪽)

역사 이전작업은 보다 직접적인 총독부 사업이었다.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것을 두고 대륙조선에서 가져온 사서(史書), 이를테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 및 각종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지리지(地理志) 등을 바로잡는다는 구실 아래 한반도의 지명을 전고(典故)(典例와 故事)에 의해 꿰맞춰 놓고 사서에 고쳐서 써넣는 이른바 ‘교열(校閱)’을 하여 ‘중간(重刊)’이라는 이름으로 찍어낸 것이다.

이 총독부 안에는 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라는 것도 있었다. 문집류나 씨족사 등 역사서는 아니나 그 전고가 밝혀져서는 안 될 문헌은 역시 이곳에서 ‘교열’과 ‘중간’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지금 우리가 원서니 원전이니 하는 책들이나, 규장각에 있는 대개의 책들은 모두 이런 절차를 거친 것들이다. ‘교열’ 과정에서 한반도에 전혀 배치되는 부분은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땜질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의 팔역(八域)이 한반도에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은 모조리 삭제(「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해 버렸다. 특히 지명의 경우는 ‘원(原)’을 ‘주(州)’로 바꾸고, ‘주(州)’를 ‘천(川)’으로, ‘천(川)’을 ‘성(城)’으로 (13쪽) 바꾸어 후대인들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심지어 ‘경도(京都)’니 ‘경사(京師)’니 하는 것들은 원(元)이나 명(明)의 수도라고 짐짓 주석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왜곡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와서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와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라는 것을 만들고는 세종 때의 정음(正音)만을 떼어내 그것을 이 땅의 글이라 가르쳤다. ‘’와 ‘’, 이것을 조선문학이라 해서 조선의 역사와 얼과 정신을 어문(語文)에서 가로챘던 것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4쪽)

중국도 이에 동조했다고 주장한다.

… 그것은 손문 정권이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 조선을 반도에 짜맞추고 새로운 동서의 개념을 심은 것이다. (「압록강과 위화도는 어디인가」, 109쪽)

중국이 이 음모에 동참한 건 ‘서세동점’ 때문이다. 근데 서양이 아시아의 국가들의 영역 조작에 관심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전체적인 역사라면 몰라도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관심이 있었을 거 같진 않다. 혹은 서구의 사상이 그런 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중국과 일본이 자의든 타의든 서양의 계획을 세부적으로 실행한 걸까?

이런 것들은 장안(지금의 서안)을 중심으로 해서 설정되었던 고대의 방위개념이 서세동점 이후 손문 정권이 북경에 자리잡으면서 서구 세력과 함께 조선을 반도에 제한하기 위해 북경이 동·서의 분기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성계 조선과 한반도는 무관하다」, 115쪽)

… 조선이 소멸된 후 조선 땅에는 ‘대한제국’으로 부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지만(1897년) 모두가 일장춘몽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쥐도새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온 일본은 대륙 남방을 내어주고 ‘열도’라는 새로운 황무지를 개척하는 한편, 스스로의 역사를 정비함과 동시에 한반도로 이식된 조선역사를 (12쪽) 재구성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3쪽)

증거는 대부분 중국 지명과의 유사성에서 찾는다. 또 어떤 경우는 지명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압록강’은 ‘오리처럼 푸르다’는 뜻이니 맑은 강은 어느 것이나 압록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마 유럽에 있는 푸른 강도 압록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거 같다) 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어떤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연구된 부분에 대한 참고도 없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명동(황금정)은 종로보다 번화했는데, 어떻게 종로가 오백년 왕조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서울은 근세조선의 오백년 왕도인가」, 49~53쪽) 그러나 명동은 일제의 개발로 발전한 것이고, 조선 왕조는 상업을 억제해서 성내의 상가가 그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원나라의 고려 지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 역시 대륙의 남부에 있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열도’로 이주한 것으로 본다. (대체 왜!?)

우리의 역사나 전통에 매진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존경스럽지만(이분도 40대 후반부터 독학을 하셨다고 한다) 또 뻔히 눈에 보이는 문제점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너무나 아쉽다.

우리의 전통이 해방 이후 어느정도 돌아오는 듯 하다가 오히려 60년대 이후에 새마을 운동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주로 지명을 연구하시는 분 같다.

필자가 어렸을 때인 1945년 전후까지만 해도 각 동네 이름들은 한자명으로 불려지지 않고 순전히 토박이말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미 일제가 우리 나라 전국토에 걸쳐 한자명으로 지명을 개명했는데도 말이다.

필자의 마을은 동네 주변이 돌담으로 쌓여져 있다고 해서 ‘담안’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고, 옆 마을은 배미골이란 뜻으로 ‘전배미’로, 또 이웃마을은 골(谷)이 깊어 나그네도 쉬어간다 해서 ‘손고개’라 하였고, 또 마을 너머에는 땅만 파면 샘이 난다고 해서 ‘샘내’ 또는 ‘샘골’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토속적 이름은 아마도 수백, 수천 년 동안 불려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일제가 이 땅의 이름을 모조리 바꿔놓았고, 그리고 ‘구(區)’라는 것을 만들고 ‘구장(區長)’을 세워 행정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일제가 만든 지명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옛날 토속명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무래도 우리 입맛에는 된장·고추장이 좋은 것이었다고 (43쪽) 보여진다. 그후 1960년대를 지나오면서 농어촌 개혁바람이 불고 행정은 쇄신되었으며 각 마을은 마을 단위로 ‘재건’이란 슬로건 아래 살기 좋은 자기 고장을 만드느라 몸부림치고 있었다. 일제가 만든 행정단위 즉 ‘도·시·군·읍·면·동·리’ 제도가 장착된 것도 실은 이 무렵이었다.

요즈음에는 사회 각 단체들이 주동이 되어 올바른 옛 땅이름을 되찾아 쓰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본다. 가령 판교(板橋)는 본래의 이름 ‘널다리’로, 이수교(梨水橋)는 ‘배물다리’로, 윤중로(輪中路)는 ‘여의둑길’로, 안양천(安養川)은 ‘오목내’로, 신천동(新川洞)은 ‘새내동’으로 써야 이 고장 역사도 또 선대의 얼과 숨결도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하다. 지금의 한자 지명은 얼도 숨결도 없어 죽은 이름이나 같다.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4쪽)

하지만 필자는 한반도에 조선사를 이식시키기 위해 지명을 억지로 짜맞추었다는 점만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초 일제가 우리 땅이름을 한자명으로 바꾸면서 대륙 조선사의 판도에 따라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위치에는 토속 지명과 관계없이 옮겨다 붙였으며, 소규모 민촌이나 산하(山河)는 음역(音譯)하고, 음역이 맞지 않으면 이에 근사한 말로 차용했던 것이다. 이는 토속 명칭으로는 그들의 호구 문서 등 각종 문서작업에 등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44쪽)

한편으로는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집단적 기억상실이랄까.

… 이 묘에 대한 기록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면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 이 묘들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적고 있다. 옛부터 박씨묘·유씨모·이씨묘·성씨묘라는 4개의 표석만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민간에서 이를 육신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육신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인지는 사록에 없고, 다만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육신전 (六臣傳)」에 의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동인물이 위의 ‘사육신’일 것이라는 추리를 해낼 뿐이라고 한다. (「노량진 사육신 묘비는 가짜」, 241쪽)

민족이란 무엇일까? 나라란 무엇일까? 나의 조상들은 지금은 일일이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나라를 세워 서로 싸우고, 정복하고, 또 멸망해 갔는데, 어느 나라를 숭상해야 할까? 나라란 곧 지배층만 바뀌는 것이므로, 민중의 영원함을 칭송해야 할까? 각 나라가 개국할 때는 시대의 요구에 부흥하였으므로 모든 나라를 좋게 봐야 할까? 아니면 중국 땅의 나라보다 왕조가 오래됨에서 자랑을 찾아야 할까?

조상을 생각하고, 전통을 배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면? 또 남아있는 내용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인가?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러지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치당 치하의 독일을 다룬 어린이 동화에서는, 자신의 모국인 독일과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친다.

한편 우리와 같은 핏줄인 북한, 조선족, 재일교포는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 민족으로서의 가치를 그들과 충분히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비하하지 않는가? 과거 이 땅에 있던 나라들, 우리 조상들의 나라들도 서로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그 와중에서 우리 민족을 빛나게 하는 고유한 그 무엇 한가지를 찾을 수 있을까?

없다. 자기들끼리 잘 싸웠으니 전쟁에 용맹했다는 칭찬말고 뭐가 남겠는가. 혹은 민족이 사라지지 않고 번성했으니 번식을 잘했다. 용맹과 다산은 과거에는 너무나도 지고한 가치였지만, 현대에는 아무도 그것을 정치 이념으로 삼지 않는다. 결국 그런 가치는 설령 실재했다해도 우리 손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것을 찾는 사람은 어찌하는가? 적을 만든다. 적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그들을 대척점에 둠으로 나를 만들 수 있다. 적이 더 고상하고 찬란한 문명을 쌓을 수록, 대척점인 우리도 자연과 함께 고매해진다. 우리의 가치 역시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빛으로 화(化)한다.

강화수요조약을 체결했다는 강화부 청사 정문. 어찌 이런 곳에서 국가간 조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이다.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 년 전 조선이 보인다」, 14쪽, 그림 설명)

그런데 지금 필자의 고향 경기도 적성은 상서도성이 있을 만한 고장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 더군다나 ‘상서도성’이란 ‘상서성(尙書省)’이라고도 해서 신하와 천자(天子) 사이에 오가는 문서를 맡아보던 기관으로 상서성 장관은 고려시대에 설치했던 6부(六部)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여겼던 벼슬이다. 그런 나라의 중추적 기관이 적성이란 벽촌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역사는 분명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 땅의 지명은 짜집기된 것」, 24쪽)

흔히들 격변기라고 말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기록물들을 모아 사진으로 보여주는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라는 책을 보면 과거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이 책에 의하면 서울에 전차가 들어온 것은 1898년 경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부설에 착수해 1899년 5월 4일에 청량리에서 동대문·종로를 거쳐 서대문까지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동대문에서 종로쪽을 바라보고 찍힌 사진들을 보면 그것은 왕이 사는 도성이라기보다 밀집된 (50쪽) 대촌(大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서울은 근세조선의 오백년 왕도인가」, 51쪽)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낡고 초라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찬란한 건축물 옆에 움막이 있었던 곳도 있고, 그런 건축물마저 한 때만 존재했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 자료로 과거를 추정해 볼 때 지금의 눈으로는 매우 규모가 작은 곳이 많다.

나는 그냥 우리 바로 이전 나라인(대한제국을 어찌봐야될지 모르겠지만,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조선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양은 같은 시대 에도나 북경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거 같고, 개경이나 서라벌보다도 못한 점이 있는 거 같다. 사실 이런 조선에 대한 불만이 우리의 고대사를 확대하려는 사람들이 생긴 이유 중에 하나일텐데, 이게 돌고돌아서 조선 자체가 작지 않았다는 주장을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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