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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표해록』(김찬순 옮김)

kabbala 2010.06.16 02:52

1. 끝없는 바다에 표류하다

원문의 서문을 속표지(도비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해놓으면, 이 내용이 편집 상 집어넣은 글인지, 원문인지 매우 헷갈리게 된다. 아니면 원래 북한 번역물에 없던 내용을 어중간하게 집어넣은 것일까? 얼마 전에 본 『남환박물』(푸른역사, 2009)에서도 그렇던데 이게 요즘 유행인가보다.

상인(喪人) 신(臣) 최부는 탐라에서 바람을 만나 바다를 떠돌다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 우리 나라로 살아 돌아와, 이제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일지를 적어 올립니다. (11쪽)

過越南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 喪人臣崔溥 自耽羅遭風漂海 泊甌東 生還本國承命撰日錄以進 (286쪽)

喪人臣崔溥自濟州漂流泊甌東過越南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到靑坡驛敬奉
傳旨一行日錄撰集以進 (다른 판본)

그리고 이 책 자체가 서문에서 보이듯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쓴 일지인데, (돌아온 직후 왕명을 받고 청파역에서 8일간 썼다고 한다) 번역을 개인의 일기(또는 기행문)처럼 했다. 내 생각엔 왕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충분히 고려해서 번역했어야 할 거 같다. (더 읽어보니 글의 주어가 ‘臣’이다.)

조선시대 관리(또는 선비)들은 어떤 태도(즉 사상)로 이런 글을 썼을까? 그 태도는 현재의 어떤 문체로 옮기는 게 좋을까? 모른다. 전통이니 선비정신이니 운운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북한 번역이라서 그런지 한글 문장이 자연스럽게 잘 읽힌다. 원문과 대조하면서 보니 중간의 조사나 꾸미는 말들을 의역하거나 읽기 좋게 뜻을 첨가한 경우가 많다. 또 구성도 원문과 다르게 마치 일기처럼 날짜와 날씨를 앞으로 빼서 적은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런 구성 때문에 글 자체의 보고문으로서의 형식이 탈색되어있다. 이 번역이 최초이긴 하지만 완역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빼놓고 번역한 부분은 못 찾았다. (아니면 1964년판이 완역이 아니고, 1988년판은 완역인 것인지?)

북한말이 남한말과 모양은 같지만 뜻이나 문맥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읽으면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지 약간 의구심이 든다. 편집자의 해설이 아쉽다. ‘바람씨’ 같은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말이지만 매우 낯설고, 직관적으로 의미 파악이 안 된다. 원문의 ‘風’을 대체로 바람씨로 옮겼던데, 바람이라는 객관적인 현상을 의미한다기보다 바람의 기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이렇게 옮긴 듯 하다.

p.s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에 반하게, 이 책에서는 서풍(西風)이 불어서 중국으로 표류했다는 말이 많다:

낮이 지나서 서북풍이 또 일어나니 배는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밤새도록 떠돌고 있다. (윤정월 8일, 35쪽)

過午 西北風又作 舟復退流 向東南徹夜而行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서 배는 또다시 가없는 바다로 표류하여 들어갔다. (윤정월 13일, 52쪽)

西北風大起 又流入無涯之海

내게 항해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는데, 우선 이들이 방위를 정확히 몰랐었던 거 같다.

권산 등은,

“날만 갠다면 해, 달과 별들을 보고도 사방을 짐작할 수 있으련만 지금은 구름이 잔뜩 끼어 날마다 하루같이 새벽이든 저녁이든 낮이건 밤이건 도무지 보이는 것이 없어서 다만 바람의 변화만으로 사방을 어림할 뿐입니다. 그러니 방향을 옳게 분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어찌 알 수 있사오리까.”

하고는 서로 머리를 모으고 우는 것이었다. (윤정월 8일, 36쪽)

또 한편으로는, 이미 자신들이 서쪽으로 많이 표류했기 때문에, 다시 동북쪽으로 가야 (조선과 수교가 있는) 중국 땅에 도착할 것으로 여겼던 거 같다.

… 나는 권산, 김고면, 고이복 들더러,

“너희는 키를 잡고 배를 똑바로 가누되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보니, 우리 나라 흑산도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충청, 황해도이고 정북쪽으로 가면 평안도나 중국의 요동 등지고 서북쪽으로 가면 《서경》의 ‘우공(禹貢)’ 편에 나오는 중국의 청주(靑州), 연주(兗州) 지역이고, 정서쪽으로 가면 중국의 서주, 양주 지역이다. 송나라가 고려와 교통할 때 명주(明州)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하였는데, 명주는 양자강 남쪽 지방이다. 그리고 서남쪽은 옛날의 민(閩) 땅, 곧 지금의 복건 지방이고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좀 남쪽으로 치우치면 섬라(暹羅, 타이), 점성(占城, 지금의 베트남 남부), 만랄가(滿剌加, 옛날의 나라 이름. 말레이반도 서남쪽)가 되고 동남쪽은 대유구국(大琉球國)과 소유구국이고 정남쪽은 여인국(女人國)과 (35쪽) 일기도(一岐島)이고 정동쪽은 일본 대마도다. 지금 표류하여 다섯 낮밤 동안 서쪽으로만 왔기에 거의 중국 땅에 닿을 줄로 생각하였더니 불행히도 또 서북풍을 만나서 동남쪽으로 거슬러 떠가고 있으니 만일에 유구국이나 여인국에 닿지 않으면 반드시 끝없는 바다 밖으로 표류하여 나갈 것이다. 그리되면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너희는 내 말을 명심하여 키를 똑바로 잡고 가야 한다.”

하였더니, … (윤정월 8일, 36쪽)

아무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사실은 위도 막혀서 진짜 섬나라에 살면서 바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천안함 침몰 사건 덕택에 선박에 대한 지식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표해록의 표류 방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윤은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책이 있는 마을, 2000/바움, 2009)에서 봄에는 동풍이 불지 않는다 하며 이를 속칭 ‘대륙조선설’(;)의 근거로 삼는데, 좀 허황되게 느껴진다.

“나주가 고향이라 했는데 최부 선생의 연대에 나주는 영파 부근일 겁니다.”

— 김종윤, 「『표해록』의 진위에 대하여」『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바움, 2009), 276쪽.

… 그런데 『표해록』 원문 맨 앞쪽의 6쪽 내지는 7쪽 안팎의 인쇄상태를 보면 활자의 반 이상을 바꿔치기했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활자의 크기가 두세 가지로 땜질을 한 거이다. 다른 것은 뒤로 미루고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은 진본이 아닌 것이다.

— 김종윤, 「『표해록』의 진위에 대하여」『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바움, 2009), 277쪽.

… 최부 일행이 탄 배가 나주를 향해 제주를 떠난 것은 1488년 윤 1월 3일(성종 19년)이었다. 배가 바다에 이르자 동풍이 크게 불어 이미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고 씌어 있다. 그러니까 원문이나 최옹의 번역으로는 제주에서 목포 쪽으로 항로를 꺾어야 하는데 폭풍이 불어 배가 서쪽으로 그대로 내쳐 떠밀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상학이나 한반도의 해풍에 관한 자료를 보면 음력 정월, 겨울에서 봄까지는 동풍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반대로 북풍이 분다고 한다. 최부 일행의 배가 1월 3일부터 16일까지 13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한 기록이니까 13일 동안 동풍이 불었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당시의 기상조건일 (278쪽) 수가 없으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기록이다. …

— 김종윤, 「『표해록』의 진위에 대하여」『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바움, 2009), 278~279쪽.

활자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뒤섞여 있는 『표해록』. 일제는 대륙조선을 한반도에 옮겨 심기 위해 이렇게 원문을 긁어내고 멋대로 고쳤다. 한문 문헌은 지명과 문맥 속에서 몇 자만 바꿔치기 해도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되어 버린다.

— 김종윤, 「『표해록』의 진위에 대하여」『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바움, 2009), 279쪽 그림 설명.

사진은 윤정월 초나흘 부분이다. 확실히 크고 작은 두 가지 활자체로 되어 있다. 두 그림의 순서가 위아래가 바뀌어 있다. 내용을 보지 않고 배치한 듯.

김종윤의 이러한 지적이 맞다고 해도, 제주가 글자 하나 같은 산동성 제령이고, 최부 일행은 경항운하로 나주에 가다가 양자강에서 바다로 나와 (계속 운하로 가지 않고?) 상해 앞에서 표류했고, 명나라 군인이 아닌 왜구 들에게 잡혔던 것을 일본인이 고친 것이고, 같은 조선이지만 지방의 일이라 특별히 임금에게 글을 썼다는 주장은, 좀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제주 서남쪽에 백해(白海)가 있다는 말도 흥미롭다. 지금 확인할 수 방법이 있을까?

… 물결은 용솟음치고 바다 빛은 희다. 예전에 정의 현간 채윤혜(蔡允惠)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제주 늙인이들이 말하기를, 맑게 갠 날 한라산 꼭대기에 오르면 멀리 서남쪽으로 아득히 떨어진 바다 밖에 백사장 같은 것이 보인답니다.”

지금 보니 한라산에서 보인다던 그것인가 싶은데 이는 백사장이 아니고 백해(白海)다. … (윤정월 7일, 32쪽)

2. 천신만고 끝에 중국 땅에 닿다

처음엔 좀 밋밋했는데, 읽을수록 흥미진진하다. 성종19년 무신년 윤정월 초사흘에 별도포(제주도 동쪽)를 출항해서 표류하다 12일에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고 16일에 다시 다른 해적을 만났다 17일에 해변의 민가로 탈출한 것도 드라마틱하다. (세계 3대 기행문이라고 불러도 될 지는 좀 더 봐야 겠다)

이리하여 나는 그 말대로 일행을 데리고 떠났더니 왠일인가,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나 검을 가졌고, 징을 치기도 하며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앞길에서 징소리, 북소리를 들은 자들이 또 구름같이 몰려들어 모두 고함을 지르며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앞에서 뒤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몰아갔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음다음 우리를 넘겨주어 호송자들이 계속 바뀌었다. 군중의 위력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방법은 뒷마을에서도 앞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50여 리를 몰아가니 벌써 밤이 깊었다. (윤정월 17일, 67쪽)

왜구 때문인지 마을에 이런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중국에서 은근히 이런 식의 마을 단위의 자위를 하는 문화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거 같다. 한반도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을까? 제도가 정비된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거 같고, 농악이 아마 이런 풍습의 남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사흘을 걸어 도저소(挑渚所)에 간다.

중국 여행기에 언제나 등장하는 중국인들의 희귀한 물건 요구, 조선의 군사정보 탐문, 관리들의 공문서 위조. 이에 대한 최부의 대답이 굉장히 조리있다. 옛날이야기로 전해내려오는 답을 잘해 한반도를 외교적으로 구한 조상 중에 최부도 포함되어야 할 거다. 대명(大明) 황제를 섬긴다거나 하는 얘기는 좀 부끄럽다. 과거 등급을 가지고 서로 잘난 체 하는 모습도 좀 우습다.

성리학자들의 합리적인 주장같은 것도 엿볼 수 있다. 『열하일기』 같은 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고려 이후 성리학의 전통 속에서 자연스래 나온 것 같다. 『제주풍토록』도 문장이 대단히 현대적이다. 성리학의 전래가 한반도의 중국어 수준을 확실히 높이긴 한 거 같다. 그전에 최치원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박지원의 벽돌처럼, 최부도 수리시설에 대해 세밀히 관찰하고 조선에 돌아와 이를 다시 제작하기도 한다. 사서삼경을 볼 게 아니라 조상의 재미난 글부터 먼저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이 완역이 아니라는 말은 아마 작은 글씨를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3. 양자강과 회하를 지나

옛글을 읽다보면 내가 시를 모른다는 게 아쉽다. 경전의 내용이야 논리적으로 짐작하면 되지만, 시에 대해선 즐길수도, 가치를 평가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사실 난 현대에 한시를 제대로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제딴에는 지었다고 하지만 대개는 어떻게 알았는지 운자와 자수(字數)만 맞춰놓았을 뿐이다. 고시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시를 약간만 바꿔놓은 것도 유치하긴 마찬가지다.

표해록 자체가 분명히 번역되어야 할 훌륭한 글이지만, 왜 북한에서 이걸 굳이 번역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엔 저자의 왕에 대한 충성심, 표류한 사람들의 결집력, 민중의 생활상과 명나라 관리의 부패상, 민족적 자긍심 등이 북한의 체제이념과 호응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게 단순히 북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이걸 앞뒤없이 한민족의 우수성이나 동방예의지국 이쪽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태도에 대해선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을 ‘작고’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하고는 반문하기를

“귀국에서는 무어라고 하나요?”

하여,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144쪽)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물고란 무슨 뜻인가요?”

“물(物)이란 것은 일을 의미하고 고(故)란 것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죽은 자는 다시 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월 18일, 146쪽)

‘물고’라는 말이 지금도 남아있다. 근데 주로 ‘물고를 내다’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물고라는 말을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일없다’라는 북한말과도 연관된 거 같아 재미있다.

오마이뉴스에 표해록의 코스를 따라간 여행기가 있다. 기사에 실린 지도는 한길사에서 펴낸 표해록의 화보를 옮긴 거 같다. 지도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은데, 이동경로가 바로 경항운하다.

표해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로는 박원호의 『최부 표해록 연구』와 『최부 표해록 역주』(고려대출판부, 2006)을 꼽는 모양이다. 한번 읽어봐야 겠다.

사람들이 표해록의 방대한 내용과 인명등을 보고 최부가 메모를 해와서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거 같은데, 내 생각엔 그냥 외워서 쓴 거 같다. 우선 자신의 짐에 대한 묘사에 메모 얘기가 없고, 필담 후 종이를 버렸다는 얘기도 나오고, '잊었다'는 말도 자주 나온다. 장원급제 할 정도의 선비라면 글 외우는 데는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거다. 필담이 어짜피 글 아닌가.

일제 때 집안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했다는 국사 교육이 정확히 유교적 전통 교육과 동일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부의 간략한 역사관이 일제 때 우리의 기초적인 국사 인식과 너무 닮아있다.

강남(양자강 이남)을 다닌 기행문은 없다는데, 운하로만 순풍에 다니니까 좀 심심하다. (수리시설에 대한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아버지의 상을 못 치른 것, 어머니가 아버지 상 중에 아들마저 잃었다고 생각할 것을 계속 걱정하는 것이 극적인 긴장감을 준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나는,

“우리가 귀국에 온 이래 이곳 사람들이 다 우리를 가리켜 ‘따훠디냐오(大大的烏也機, 높으신 오야지)’라고 (168쪽) 하니 이 무슨 말인가요?”

부영은,

“별것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대인을 그렇게 부르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는가 하여 그런 말들을 했겠지요.” (3월 8일, 169쪽)

… 나는 또,

“덕왕이 다스리는 산동은 몹시 중요한 땅인데 거기서 정사를 마음대로 하고 명령할 수도 있는가요?”

물으니, 부영은 또,

“그야 왕부(王府) 각 아문의 장관이 모두 정사를 맡아보지요. 그리고 교수라는 관직과 호위라는 관직이 있어서 왕은 그들과 시서나 강론하고 활쏘기나 말달리기를 함께 할 뿐이랍니다. 명령이나 주요정책은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모두 황제의 조정에서 내립니다.”

하였다. (3월 18일, 181쪽)

조선의 왕 개념과 헷갈리고 있다.

“옛날 가우(嘉祐, 1056~1063) 연간에 고려에 속한 탁라도(托羅島) 사람이 배를 탔다가 폭풍에 표루하여 귀국의 소주 곤산현(崑山懸)에 (186쪽) 표착하였는데 지현 한정언(韓正彦)이 술과 밥을 접대하고 배의 돛대가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목수에게 다시 다듬어 회전축을 만들어 넘어진 것을 일으키는 법을 가르쳐 주니 탁라도 사람이 기뻐 고마워했다고 전합니다. 탁라는 지금의 우리 제주도입니다. … ” (3월 23일, 187쪽)

“당신이 보신 것은 분명 발로 밟아 돌리는 수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방법이 가장 편하니 혼자서도 운용할 수 있습니다.” (187쪽) …

“소나무는 가벼워서 안 됩니다. 틀은 위아래 다 삼나무를 쓰고, 중심되는 뼈대는 느릅나무를 쓰고, 판자는 녹나무를 쓰고, 수차의 중심은 참대쪽을 써서 앞뒤를 묶습니다. 그리고 네 기둥은 커야하고 가운데 기둥은 좀 작게 하며, 바퀴와 복판의 길고 짧은 것, 넓고 좁은 것은 알맞게만 하면 됩니다. 삼나무, 느릅나무, 녹나무 따위를 구할 수 없거든 나뭇셜이 굳고 질긴 것을 쓰면 됩니다.” (3월 23일, 188쪽)

4. 황성으로 들라는 부르심을 받고

•3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의 기록은 번역이 빠져 있어서 싣지 못한다. 원문을 보면 최부 일행은 3월 28일에 북경에 들어왔다. … —편집자 주 (192쪽)

… 하므로, 나는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를 보여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선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도들이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고 있으니 오직 한 가지 경서만을 전공하는 사람은 유생 축에 들지도 못합니다.”

하였다. (4월 8일, 200쪽)

그래서 대입시험 과목이 그리 많은 건가? 아무튼 경서 하나만 연구하던 나라들이 지금은 조선의 후손보다 잘 산다.

또 왕능(王能)이라는 사람이 우리 나라 말을 잘 아는데 그는 나더러, (202쪽)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요동 동팔참(東八站) 지방에 살면서 의주를 오갔지요. 실은 나도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열셋에 아버지가 작고하여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돌아보니 서른한 해가 되었네요. 나와 어머니는 돌궐족에게 겁탈당하여 달단국에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서 여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의 사신이 들어왔다면 찾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지요.”

하고는 곧 가지고 온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와 아랫사람들을 위로하였다. (4월 11일, 203쪽)

… 하기에 나는,

“그게 어찌 우연이겠느냐. 상이란 원래 공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너희가 이 나라에 무슨 공이 있느냐. 사지에서 다시 살아나 고국에 돌아가게 된 것도 이 나라 황제의 은혜이거든 하물며 미천한 너희가 대궐에 들어가 이렇듯 상을 받았으니 너희는 그것이 누구의 덕인지를 아느냐?

우리 나라의 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이 나라 황제가 주신 물건을 소중히 여겨 못 쓰게 만들거나 잃거나 남에게 팔지도 말고 너희 자손들에게 대대로 이를 물려주어 우리 나라의 큰 은덕을 생각하도록 하기 바란다.”

하였다. (4월 20일, 214쪽)

명 태고 고황제가 도읍을 남경에 정하였나니 남경은 곧 금릉으로 일찍이 육조1) 제왕의 도읍지였다.

태종 문 황제가 도읍을 북평부로 옮기고 이를 북경이라 하였다. 그러나 남경의 통치 기구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북경의 이모저모」, 4월 23일, 218쪽)

북경은 순 임끔 때에는 유주(幽州) 땅이었고 주나라 때에는 연경과 계주의 경계 지점이었다. 후위(後魏) 이래로는 오랑캐 풍속에 무젖은 데다가 그 뒤 또 요가 남경을 삼았고 금이 중도를 삼았고 원이 또한 대도를 삼는 등 미개 족속의 왕이 뒤를 이어 여기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풍속이 모두 미개 족속의 것을 물려받게 되었다. (220쪽)

그러나 명나라가 통일한 뒤로 민간에는 미풍양속이 바뀌고 조정에는 문물제도의 발전이 과연 볼만해졌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아직도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고 유학을 숭상하지 않으며 장사만 좋아하고 농사를 싫어하며, 또 옷들이 짧고 좁은 것은 남녀가 같다. 음식 조리 방법도 불결하거니와 윗사람, 아랫사람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이는 아직 예전의 습속이 가시지 않은 것으로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산들은 민숭민숭하고 냇물은 흐리터분하고 땅은 모래흙으로 먼지가 일어 하늘을 덮는 것이 특징이니 곡식도 잘 안 된다.

그리고 주민들의 번성함과 누대의 훌륭함과 물화의 풍부함이 소주나 항주에는 미치지 못한다. 성안에서 쓰는 물품은 대체로 남경과 소주, 항주에서 온다. (「북경의 이모저모」, 4월 23일, 221쪽)

5. 반가울손, 압록강!

계면(戒勉)이라는 중은 우리 나라 말을 잘하였다. 그가 나더러,

“저는 중인데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 중이었던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왔으며 지금 이미 삼대째입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지 천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를 세워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전통을 잊지 않습니다. 새가 날면 고향으로 가고 토끼가 죽으면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언제나 본국이 그리워 돌아가고 싶지만, 본국에서는 나를 도리어 중국 사람이라 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로 탈출한 죄를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구륵 ㅔ되겠으니 마음은 가고 싶어도 발이 주저합니다.” (5월 24일, 251쪽)

최부는 범생이 유학자 답게 중에게 면박을 줘서 보낸다, 오랜만에 보는 동포인데도.

6. 내가 본 중국 땅 중국 사람

이 장에선 일지 형식을 벗어나 전체적인 문물이나 산업을 논한다.

또 재미있는 건 중국 강남(양자강 이남)과 강북의 비교이다. 강남은 도둑이 물건은 훔쳐가도 목숨은 빼앗지 않고, 창주는 수괴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전체적인 문물이나 경제활동도 강남이 뛰어나다고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강남이 평등하지만, 공무에서는 더 철저한 모습이다. 불교와 도교의 숭상은 강남과 강북이 같아 아쉬워한다.

창주부터 북쪽은 여자들의 옷섶을 바로도 달고 외로도 달았으나 통주서부터는 다 바로 달았다. 산해관 동쪽 사람들은 다 추잡스럽고 의복도 남루하다. 해주, 요동 등지에는 중국 사람, 우리 나라 사람과 여진 사람 등이 서로 섞여 살고 있으며 석문령 남쪽 압록강까지 모두가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의복, 날씨, 여자들 머리 차림 등이 다 우리 나라와 같다. (「살림살이와 옷차림새」, 4월 23일, 273쪽)

책을 대략으로나마 다 읽고나니, 왜 이제서야 이런 책을 읽게 되었나 아쉬움이 든다. 한문을 가르친다는 곳에서도 어린이에게는 한자능력시험이나 소학을 가르치고, 어른들에게도 사서일경만 외우라고 가르치니, 생동감도 없고 무엇보다 우리 조상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고 한다. 내용이 사실 좀 단조로운 부분도 없지않아 있으나, 15세기라는 시대나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임을 고려해볼 때 흥미있는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 번역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원문의 내용을 약간 벗어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다른 번역과 해설을 또 읽을 필요가 느껴진다. 일단 한길사에서 나온 표해록과 박원호의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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