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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일요일

해제

실학 계열(?)의 인물로 유명한 병와 이형상이 제주 목사 퇴직 직후 쓴 제주 박물지. 효언 윤두서의 제주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책을 썼다는 말이 서두에 있으나, (해제, 10쪽) 아마도 당시 실학자(?)들처럼, 정확한 지리 정보 제공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한 기초가 되길 바랬던 것이리라.

효언(孝彦)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탐라의 고적에 대해서 편지글로 묻기에, 또한 말하였다.

무릇 널리 다른 것을 듣고서, 《남환박물》 1만 3청 8백 50여 말로 써서 증정합니다. (속표지, 21쪽)

孝彦書問耽羅古蹟且曰將以廣異聞作南宦博物一萬三十八百五十餘言書贈

이상하게도 번역문에는 이 문장이 없다. 편집자가 이걸 그냥 속표지(도비라?)로 처리한 거 같다. 큰 실수라고 본다. 게다가 이건 원문에서는 이어진 문장이다.

이형상의 제주에 관한 저술은 『남환박물』 이외에도 『탐라순력도』(탐라순력도로 만든 관광 안내 홈페이지가 있다: http://tamnamap.jejusi.go.kr), 『탐라장계』, 『탐라록』(병와전서) 등이 있다. 『남환박물』의 필사본은 2종류가 남아있는데, 책 말미의 「황복원대가」가 빠진 것 외에는 큰 차이는 없다. (해제, 11쪽) 1978년에 나온 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인 있다. 이형상이 제주도에서 만들었다는 거문고를 포함한 그의 유물은 경북 영천의 병와유고에 있다.

내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역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나는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일반독자가 보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사실 이런 번역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우선 번역어 선택이 어렵다. 옛말로 할 것인가, 현대어로 할 것인가 골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학술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약간 아쉽다. 한자말이 많은데, 이게 원문이 아니라 번역어다. 번역어를 원문으로 착각하기 쉽다. 전반적으로 학술서도, 일반서도 아닌 것이 아쉽다.

또 중간중간 삽입한 그림들이 내용 이해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주도의 현재 사진이나 지도, 특히 『탐라순력도』는 충분히 더 이해하기 쉽게 배치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또 주석이 미주로 되어 있어서 참고하기 힘들다. 이런 책의 주석은 각주나 중간중간 해제로 삽입하면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주를 바라보는 역사관이 너무 피해자, 이방인의 눈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옛날 박물지의 객관적인 모습을 상술하기만 해도 충분히 이국적이다. 이런저런 사료를 모으면 꽤 재미있는 제주 역사 답사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5. 계절(誌候)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말하기를, “이 고을의 풍토는 따로 한 구역이나, 모든 일이 유다르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며 변화가 어긋나 일정함이 없다. 기후는 따뜻하 것 같으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히 첨리(尖利)하다. 의식의 절제가 어려워 병이 나기 쉽다. 더구나 운무가 항시 음침하게 끼고 습하여 끓은 듯 답답하다. 지네·거미·지렁이 등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은 모두 겨울을 넘겨도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계절」(誌候), 46쪽)

한유(韓愈)의 조주 시(潮州詩)에서 말하기를, “한 겨울에도 날개를 쳐 혹 움직이고, 한여름에도 혹 두터운 가죽옷을 입는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헛말이 아니로다. (「계절」(誌候), 47쪽)

제가 느낀 제주도 이랬습니다;;; 조선시대 글 답게 인용이 많습니다.

6. 지리(誌地)

—제주 방언에 악(岳)을 일컫기를 ‘오롬(兀音)’이라 한다.— …

— 제주 방언으로 숲(藪)을 곶(花)이라고 한다.— (「지리」, 48쪽)

어떤 것은 음차하고 어떤 것은 뜻으로 적었다. ‘藪’(수)라는 말 자체도 ‘숲’을 음차한 거 처럼 느껴진다. 왜 편한 언문 놔두고 이렇게 적으셨습니까, 조상님들.

때는 늦은 봄이라—이때가 임오년(숙종 29, 1720) 3월 25일이다.— 바람은 빠르고 조수는 급하니—심히 배가 빠르게 가는데, 뱃사람이 말하기를 “총알도 반드시 뒤로 떨어진다.”라고 하기에 이를 시험하여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사시(巳時) 말(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술시(戌時) 초(오후 7시)에 닻을 내리니 곧 이른바 제주이다. 집집마다 귤나무와 유자나무가 있고 곳곳마다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있다. 기이한 암반과 암초는 즐겁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다만 돌 색깔이 추악하다. 토질은 부조(浮燥)하고 구릉은 둑이 되고 평지도 되어 있으니 가증할 따름이다. (「지리」, 50쪽)

해남에서 출발해서 8~10시간 정도 걸렸으니, 꽤 빠르다. 근데 정말 총을 쏴 본 걸까?

《남사록》에는 겁회(劫灰)에 비교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생각하건대 아마도 극한(極寒)과 극열(極熱)로 구름이 증발하고 안개가 끓어서 토맥(土脈)이 자연히 그 성질을 잃은 것이다. (「한라산 산행」「지리」, 52쪽)

화산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듯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말하기를, “산의 전체는 물러가는 듯하다가 도리어 높이 서 있다. 그 겉모양을 쳐다보면 둥글둥글해서 높이 험준하지 않은 것 같고, 바다 다운데 있는 섬이어서 높게 솟아나지 않은 것 같다. 마치 벌판 속에 우뚝하게 선 뫼와 같아서 특별히 험난할 것이 없을 듯 하다. 그러나 나아가 기어오르면서 그 속을 다녀본다면, 높고 날카로운 바위와 낭떠러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비틀어진 골짜기와 동학(洞壑)이 어둡고 침침하여 곤륜산의 터(崑崙之墟)와 판동의 골짜기(板洞之谷)과 한가지지만, 세속을 떠난 정결하고 위기(偉奇)한 맛이 많이 난다. … (「한라산 산행」「지리」, 53쪽)

한라산의 이중성이랄까, 멀리서 보면 어머니 같이 아늑한데, 가까이서 보면 험한. 500년 전 감상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것이 놀랍다. 조상님들과 이런 교감을 하고 싶은데,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 『제주풍토록』은 나중에 찬찬히 읽어봐야 겠다. 이게 좀 대단한 책 같다.

다만 이상하 것은 못 곁에 조개껍질이 있는데 모두 말하기를 해조(海鳥)가 물어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 울음소리가 공공(貢貢)하는 까닭에 그 새를 공조(貢鳥)라고 부른다. (「한라산 산행」「지리」, 55쪽)

이거 혹시 화석 아닐까;;

기타 샘(泉)—섬에는 모두 물맛이 좋은 샘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안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긴다. 멀리 있는 샘은 혹은 4~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이 지망 사람들은 익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 사람들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목성의 가락쿳물이 성 안에 있고 돌구멍에서 혹 솟아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 전하건데, 이는 김정이 귀양살이 할 때 판 것이라고 한다. … (「탐라의 샘·소·개」「지리」, 52쪽)

이 책이 장절 구분이 좀 명확하지 않다. 사실 옛책을 현대의 목차로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는데, 그래도 전체적인 조망을 먼저 세워야 한다.

—이것은 과대하게 포장된 말인 듯하나, 맛과 느낌에 대한 표현을 다한 것이다. 지금은 거주하는 스님은 없고 단지 헐린 온돌 몇 칸만 있다. (「수행골·존자암」, 68쪽)

조선시대 선비들이 좀 신화적 감각이 떨어지고, 객관적인 면이 있는 거 같다. 이형상의 이 이야기는 ‘수행굴’이라고 표현한 존자암 존재의 마지막 기사로 알려져있다.1993~1994년에 발굴작업이 있었고, 현재는 존자암으로 추정되는 곳에 절이 들어서고,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도 43호) 이 존자암은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돌아보며 따라온 수령들에게 말하기를, “산이 높고 정수리가 움푹 들어갔으며 지면이 오목하고 발쪽(바닷가에 접한 쪽)이 들렸는데, 이 한라산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묻 뫼들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져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였다면 ‘연잎 위의 이슬 구슬 형태’라 하겠거늘,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또한 천지가 개벽할 때에 모든 사물들이 소진되고 융해되어서 강한 게 바뀌어 유약한 것으로 되고 유약한 게 뒤바뀌어 강한 것으로 되었을 터이니, 이를 판별해 낸다면 높은 산과 커다란 골짜기가 대저 어찌 섬과 뭍 사이에 구별될 리 있으리오! 생각하건대 그 산의 다리가 뭍으로부터 들어왔을 터이나, 바람이 때로 파도가 삼켜서 아주 옛적부터 무너지고 뚫어졌을 것이리니, 지금 비록 바닷물이 들고 날 사이라 하더라도 기맥이 이어져 있다고 하니, 이를 본다면 가히 알 수 있는 것이오.”라고 했다.

요리를 맡은 이들 가운데 포작한(鮑漢)이 있었는데,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이 바다의 칼돌들인데 옹기종기 가까운 바다와 갯가에 꽂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온 섬에 배를 댈 항구가 없습니다. 석맥들이 서로 이어지고 얼크러져서 큰화탈섬과 족은화탈섬으로부터 추자도와 백도에까지 이르며 그리하여 육지 고을들에 도달하게 됩니다. 회화나무 뿌리, 열 아름 더 넘는 것들이 여 태 바다의 바닥에 (71쪽) 있습니다. 분명히 바다로 아직 바뀌기 전에 땅이었을 때 심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행골·존자암」「지리」, 72쪽)

조선 선비들은 신화보다 오히려 과학적인 추론을 즐긴 거 같다. 여기저기 오름이 올라와있는 제주도 전체의 지질학적 조망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화산으로 여기지 않고, 육지의 산맥이 바다에 끊긴 것으로 여긴다. 아래사람들도 바다 속에 땅의 흔적이 있다며 동조한다. (근데 목사 말에 동조 안 하면 어쩔텐가.) 포작인(포작한)도 제주에서 중요한 직업인데, 아직 그리 연구가 되어있지 않은 듯 하다. 이들은 제주와도 또다른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7. 경승(誌勝)

「경승」에 등장하는 장소는 지금도 관광지인 곳이 많다. 제주 여행하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걸. 다음에 또 제주에 갈 일 있으면 다시 읽어봐야 겠다.

8. 사적(誌蹟)

『고씨세계록(高氏世系錄)』을 근거로 고부양씨 이후의 제주 역사를 정리한다. 그들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3군데로 나눠서 산 곳을 ㄴㆍㅣ라고 부른다.

9백 년 뒤에 세 사람이 각자 돌에 화살을 쏘아 용맹한 힘을 겨루었는데, 고(高)가 상(上)이고 양(良)이 중(中)이고, 부(夫)가 하(下)였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이 모두 고씨로 돌아서니, 고씨로써 군장(君長)을 삼고, 양씨로써 신하를 삼고, 부씨로써 백성을 삼았다. 나라 이름을 탁모(乇牟)라고 했는데, 보리 곡식이 무성한 까닭이다. 지금 제주 성 안을 세 곳으로 나누어, 일ㄴㆍㅣ·이ㄴㆍㅣ·삼ㄴㆍㅣ라고 하는데, 도(徒) 자는 도(都) 자의 잘못 아닌가 의심된다. 그러나 방언 발음으로 도(徒)를 ㄴㆍㅣ(乃)라고 말하는데, 아마도 이 발음은 그때 부르던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86쪽)

이 『고씨세계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역자는 『동문선』에 실린 「성주고씨가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주 157) 이 「성주고씨가전」을 94~98쪽에 따로 실었다. 또, 『고려사』 혹은 『고려사절요』의 내용과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형상은 계속 인용한다.

‘성주(星主)’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신라 이후로 제주도의 대빵을 이르는 말이다. ‘왕자(王子)’는 ‘군(君)’ 아래의 작위를 일컫는다.

8장 성씨(誌姓)과 9장 인물(誌人)도 역사적인 기록이 이어진다. 한가지 몰랐던 사실은, 원나라 때 정착한 성씨 이외에도 명나라가 집권 후 운남의 북요 황실의 후예를 제주로 보냈다는 것. (99쪽)

11. 풍속(誌俗)

『지지』(『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지』일 것으로 추측, 주 37)를 인용해 지금도 전해오는 흥미로운 제주의 풍습 몇 개를 소개한다.

11.1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지지(地誌)》에,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가 8~90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옛날에는 120여 세의 사람도 많았는데, 을병(乙丙)의 해(1695~1696)에 전염병으로 거의 사망하였다.”라고 한다. 노인잔치에 온 사람이 102세가 1인, 101세가 2인, 90세 이상이 29인, 80세 이상이 211인이었는데, 근력이 장건(壯健)하려 꺽이고 무너지는 기세가 거의 없었다. 충암(김정)의 말한 바와 같이 수성(壽星)(노인성)이 비치는 곳이니, 그것이 헛말이 아님을 믿을 수 있다. (103쪽)

11.2 여자는 많고 남자가 적다.

매년 배가 패몰(敗沒)하여 죽는 사람이 매우 많은 까닭에, 남자는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천하게 여긴다. 아주 잔약한 사람도 또한 두셋의 아내를 거느리게 되고, 혹은 십여 명의 아내를 둔 사람도 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곧 고래의 밥이라 말하면서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여자아이를 낳은 뒤에야 기뻐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우리를 봉양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러한 사정이 슬프다. (104쪽)

11.3 풍속은 어리석고 검소하지만 예의와 겸손함이 있다

의복과 음식이 소박하고 검소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이 없다. 부유한 사람도 칡의 섬유로 짠 베로 옷을 지어 입으니, 역시 화려하지 않다. … 관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비록 용렬하고 어리석은 하천(下賤)이라 하더라도 또한 예를 잘 차린다. 길에서 관인을 만나면 재빨리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혹 피하지 못한 사람은 길가에 엎드려 감히 머리를 들지 않는다. (104쪽)

이건 정복지라서 그런 거 아닌가?

11.4 혼례는 문 앞에서 절하여 예를 표한다

《지지》에 의하면 … (104쪽) 혼인하는 저녁에 사위될 사람이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를 배알한다. 음식을 조촐하게 차리면 여자(신부)가 나오지 않는다. 술에 취한 뒤에 신랑이 신부 방에 들어간다. 지금도 이러한 풍속이 있다. 또한 같은 성과 가까운 친족과는 간택하지 않는다. 또 교배례(交拜禮)는 행하지 않는다. 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깨닫도록 일러주었다. 또한 남녀의 예복을 향청(鄕廳)에 내려주었다. 그런 즉 문 앞에서 절하는 일과 술·고기를 갖추는 일은 과연 곧 중도에서 그쳤다. 교배의 예는 신랑과 신부가 모두 부끄러워하여, 심지어 우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 습관을 익힌 뒤에는 사람들이 이를 좋게 여겼다. (105쪽)

11.5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다.

내가 제주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105쪽) 시끄럽게 뒤섞여 들려서 마치 일본 사람의 말과 거의 비슷하였다. 문자는 섞어서 써서 중국의 말과 매우 유사하다. 보통 때 묻고 답하는 말이 《노걸대(老乞大)》와 같았다. 소 모는 소리에 대해서는 역관이 말하기를, “더욱 분별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관임들이 말한 바로는, 대개 서울의 말과 같다고 하였으나, 자기들이 주고받는 말 가운데 전연 이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시골 여자들이 관문에 고소(告訴)하는 것은 재두루미의 소리 같기도 하고 바늘로 찌르는 소리 같기도 하여 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서리들로 하여금 번역하게 한 뒤에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풍속은 중국과 더불어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원나라 목자드리 서로 섞여서 전해온 풍습 때문에 그런 것인가? (106쪽)

아 그래도 같은 나라 말인데, 중국말 같다고 하니 대략 난감. 조선 유학자들이 음운학이나 외국어에 밝은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11.6 토질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11.7 밭을 밟고 바령을 한다

밭을 밟아 주지 않으면 씨를 뿌리지 못하고, 거름을 하지 않으면 이삭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나 말을 몰고 나와 종일 달리게 하고 짓밟는다. 이것을 ‘밧ㅂㆍㄹ리기(밭 밟기)라고 한다. 그들의 소나 말을 담을 쌓은 밭 안에 가두어 밤낮으로 밭에 똥오줍을 싸게 한다. 이것을 ‘바량(八陽)’이라 한다. (107쪽)

제주도 밭의 담이 높은 이유일 듯.

11.8 여자의 부역이 매우 무겁다

관의 부역이나, 공물을 여자에게 부과한다.

제주지방 풍속은 짐을 등에 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지는 않는다. 물을 길어올 때도 나무통을 지고 다니는 사람은 있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또 치마가 없어서 단지 삼노(麻索)로써 허리를 두루 메고, 몇 자의 굵은 베를 바늘을 이용하여 삼노의 앞면에 얽어매었으니, 오직 그 음부(陰部)를 가릴 뿐이다. 옷과 치마를 벗고 몸뚱이와 볼기짝을 (107쪽) 드러낸 것이어서 참담하여 차마 볼 수가 없다. 고을 안에 사는 사람이 출입할 때를 당하면 혹 의상을 뚫기도 하는데, 옛 풍속의 습관에 젖어 부끄러움을 모른다. 매번 서리와 백성을 대할 때마다 그것이 불가한 이유를 말하고, 그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였다. 그런 뒤에 영(令)을 내려 금지하였다. (108쪽)

11.9 그물과 덫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산이 험해서 덫을 놓을 수 없고, 바다가 험해서 그물을 칠 수 없기 때문

11.10 서울 벼슬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진무(도지관), 즉 제주 관아의 아전이 되는 것이 짱이라는군요.

11.11 돌을 모아 담을 쌓는다

《지지》에 “예로부터 밭두렁이 없어서, 몹시 우악스럽고 사나운 사람이 남의 땅을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 제주 각지에 영을 내려 담을 쌓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지금은 밭두둑과 집 옆에도 모두 각기 담을 쌓았으니, 다만 밭 경계를 정한 것일 뿐 아니라 목장의 말을 막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09쪽)

11.12 집에는 정자와 온돌이 없다

그러나 새를 엮거나 뜨거나 하지 않고 새를 쌓아서 두텁게 덥고서 문지도리로써 빽빽하게 맺는 것은 바람이 두렵기 때문이다. 굴뚝이 없는 것은 ㅈㆍㅁ수하는 무리들이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피부가 갈라지고 살이 문드러져서 반드시 큰 병을 얻기 때문에 땅바닥에 잠자는 풍습은 예로부터 습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부모가 있는 사람은 간혹 작은 온돌이 있으나, 또한 천백의 하나일 뿐이다. 정지(부엌)은 오직 솥만 놓고 밥을 해 먹는다. (109쪽)

11.13 다듬잇돌도 없고 절굿공이도 없다

남방에(나무 방아)를 쓰고 다듬이질은 손으로 한다. 풀무질도 손으로 한다.(방아가 없으니까)

11.14 저자에서 사고 팔지를 않는다

행상만 있다. 근데 이것은 제주도의 경제규모의 문제이기도 했다.

11.15 조리희

11.16 밭머리에 묘를 만든다

11.17 절도 없고, 중도 없고, 비구니도 없다

절터는 남아있는데, 비구가 하나도 없음. 그나마 억불정책으로 있던 절도 헐리는 판.

11.18 음사를 숭상한다

《주기(州記)》에 의하면, … 매년 정월 초하루에서 정월 보름까지 무당과 박수가 같이 신독(神纛)을 만들어 나희(儺戱)를 한다. (114쪽)

죽기살기로 없앴다는...

11.19 마을에는 도적이 없다. 가상하고 놀랍다

근데 지난번 제주도 갔을 때 지역 뉴스에서 절도 얘기 나오던데;;;

2010년 6월 7일 월요일

12. 문예(誌文)

제주도에 남아있는 문화재 중 가장 삐까뻔쩍 한 것이 향교였다. 항교는 여러번 개수되었고, 그 규모가 관아보다 컸다. 드라마 「거상 김만덕」에 상인의 집이 고대광실처럼 나오던데, 제주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 거 같다. 성리학자의 유교 전파는 마치 종교적 열정에 빠진 사람 같다. 또한 그 대상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한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 전파와 비슷하다. 아마 한나라 때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던 거 같은데, 정신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 하겠다. 조선의 경우는 권력과 성리학을 같은 것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들의 맹목이 남달랐을 거 같다.

14장 전답(誌田), 15장 토산물(誌産), 16장 날짐승(誌擒), 17장 들짐승(誌獸), 18장 풀(誌草), 19장 나무(誌木), 20장 과수원(誌果), 21장 목장(誌馬牛), 22장 물고기(誌魚), 23장 약재(誌藥) 등은 당시 동식물의 현황을 옅볼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귤과 물고기, 말의 품종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 연구는 물론이고, 현재의 상품 개발, 과학 연구 등에 참고할 만한 정보가 될 거 겉다. 이 장들의 이름은 단순히 소재로 이름으로 번역되었는데, 내용은 그에 관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번역이 아쉽다. 예를 들어 ‘誌果’라는 것은, 귤을 포함한 각종 과수의 생태와 과수원 운영에 관한 것이므로, ‘과수원’이라 번역할 수 없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36. 고적(誌古)

36.1 삼성혈

너희는 명색이 선비들이다. 처음에는 미혹됨을 풀지 못했지만, 그 깨달은 뒤라면 분연히 분기하여 음사를 절훼하고 입묘(入廟)하려 삼을나(三乙那)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고후(高厚) 등 3인을 배향함으로써 민속이 이에 비로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아뢰니 본주로 하여금 그 제수(祭需)를 돕는 뜻으로 이미 임금님의 명이 있었다. 음사 위전(位田) 전체 수를 획급(劃給)하려 향사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뒤에 관(官)에서 무익하다고 여겨서 강제 명령으로 훼철하려 하자 도민 3천여 명이 주야로 호곡(號哭)하려 겨우 (195쪽) 파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물과 곡식, 전복은 아울러모두 관공서로 예속시켰고, 위전도 이속하였으며, 또 음사도 환원하였다. (196쪽)

어떤 부분에서는 합리적이고, 민중의 고통을 덜고자 노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남을 무시하고 독단을 부리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어떤 때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도들이 부린 오만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 조선의 유학을 숭상하는 사람들도 이런 모순적인 정신세계를 어느정도 물려받은 거 같다. 이형상 정도 되는 선비야 원칙을 지켰겠지만 그 외의 제주목은 그보다 못한 야비한 자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근데 37장 誌名宦을 보면 훌륭한 관리가 많네요?)

조선시대 글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것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다 촌이라는 거. 제주도는 물론이고, 강원도는 거의 아마존. 평안도만 해도 완전히 풍습이 다른 이국적인 관광지 정도로 여긴다. 심지어 사대문 밖만 나가도 굉장히 벽지인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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