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독서

『언어와 비극』(1989)

kabbala 2010.05.13 01:08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강연 모음집이다. 1984~88년 사이 주로 와세다대학 문학연구회(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에서 이루어진 15개의 강연과 인터뷰들은, 그 형식 때문인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던 『은유로서의 건축』(隠喩としての建築)(1979)이나 『탐구 1』(探究I)(1986)보다 쉽게 읽힌다. (사실은 이 책들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었다) 옮긴이도 이 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 책은 강연문이나 인터뷰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저작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고진 자신이 쓴 최고의 고진 해설서라고 해도 좋다.) 둘째, 이 책은 본래 ‘글’이 아니라 ‘말’이었기 때문에 글로 썼다면 생겼을지 모르는 자기검열이 최소화되어 있어서, 당시로서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사고들(이를테면 제4기, 제5기에서 본격화될 사고의 단초들)도 날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 한마디로 이 책은 가라타니 고진 ‘종합선물세트’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느 걸 먼저 골라 읽든지 관계가 없다.
— 옮긴이 후기, 513쪽.

그럼에도 일반인이 보기엔 현학적인 내용이 여전히 많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코의 소설이 필독도서가 되는 한국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일 수도) 그러나 그 현학이 사실 그리 또 전문적인 건 아니다. 더 읽어봐야 주장과 면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학문적 파편들을 단초삼아 적극적으로 내성(內省)하고, 그 속에 자기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인 거 같다. 그 과정에서 서양사상은 그저 생각의 실마리일 뿐이므로, 그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학구열 높은 한국이라면 이 정도의 작업을 할 인물 정도야 흔할 거 같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두번째로 이 책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옮긴이다. 원문에 없는 주와 틈틈이 ‘보충’이라는 이름으로 본인의 해설을 실었다. 또 그 주석과 해설이 일반적인 비평과는 달리 매우 가볍다는 것이 특징이다.(비주류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기존 문단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쓴 거 같다) 그쪽을 잘 몰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옮긴이 조영일은 젊은(?) 문학 비평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거 같다. b라는 출판사 역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 같다.

1장에 나오는 니체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가라타니 고진 자신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뭔가 장황하게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나오는 얘기들은 대충 수긍이 가지만, 가라토니 고진의 핵심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도 뭔가 내외(內外)와 관련된 고민인 거 같다.

니체는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개개의 글들이 모순적입니다. 니체의 글쓰기에서는 어떤 주장이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에 의해 끊임없이 넘어가는 형태로 텍스트가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정리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 10~11쪽.

맘에 드는 챕터 몇 개만 읽고 도서관에 돌려주고, 다음엔 좀더 특정한 주제를 다룰 거 같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日本近代文学の起源)(1980)이나 『일본정신의 기원』(日本精神分析)(2002) 같은 책을 읽어야 겠다. 아예 조영일의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2008)을 읽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문학 비평 부분은 비교적 내용이 명료하다. (1장 「소세키의 다양성」(漱石の多様性), 5장 「에도 주석학과 현재」(江戸の注釈学と現在) 등) 내가 조금 기본지식을 갖고 있는 부분이 나오니, 가라타니 고진의 이해가 일반적이지 않고, 표피적인 부분(그러니까 깊이 설명하지 않은)이 있어서 글을 읽는 데 방해된다. 『은유로서의 건축』을 보면 주류 학계에서 자신을 배척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이 나오는데, 그럴 거 같기도 하다. 표류하는 글쓰기는 데리다를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패턴 같다.(이런 분들은 한국에도 있다)

대화에서 파생되는 변화하는 의미에 천착하는 것도 이 계통 사람들의 특징인데, 과연 대화라는 것을 그렇게만 이해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연극 등의 예술에서 발생하는 대화 등은 꼭 그렇게 이해할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들뢰즈와 데리다로 해석하려는 것이 이 사람들의 경향이다. 한국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자신이 시간을 들여 저술한 연구를 너무 간략하게 이야기해서, 감질만 난다. 처음에 말했던 이 책의 장점이 바로 단점이 된 셈이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