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子夏問曰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謂也
子曰繪事後素
曰禮後乎子曰起予者商也始可與言詩已矣

이 구절에 대한 주자느님의 해석은 이렇다:

“선생님, ‘저 여자 입술도 곱고 눈도 참 곱구나, 흰 바탕을 쓰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시는 대체 무슨 뜻인지요, 흰색 화장품을 덧 발랐다는 뜻인가요?”, “그림은 흰색 물감을 바탕으로 먼저 칠했기 때문에 화려해 지는 것이다.”, “아, 예(禮)도 흰 바탕을 갖춘 연후에야 배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군요?”, “너도 이제 뭘 좀 아는구나.”

이 대화에서 감동이 느껴지는가? 나는 별로. 이 구절에서 동양미학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던데, 나로서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유치한 교리문답 정도로 느껴진다. “쓰나미로 사람 죽은 게 왜 기독교 안 믿어서인가요?”,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계하신다.”, “아하~ 그렇구나. 아이티에 지진난 것도 믿음 때문이로군요!”, “아멘!”

내 생각에 이 문장은 감동의 연속이어야 한다. (1) 우선 내용이 모호한 싯구가 등장한다, 보통 사람은 지나칠 수 있는(우리도 유행가 가사 안 따지잖나). 이 때 관객에게 호기심과 의문을 던진다. (2) 선생님의 해석은 이 구절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3) 자하의 한발자욱 더 나아간 깨달음은 선생님 또한 감동시킨다.

주자의 해석에 이런 구석이 있는가? 그저 평평한 도덕교과서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현재의 우리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말에 무한도전 본방사수 하려고 테레비 앞에 앉아있다 치자. 선전이 길어지는데, 중학교 다니는 자식 놈이 불쑥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빠, ‘춘래불사춘’이 뭐야?”

놀랍지 않은가? 애기인 줄 알았던 자신의 자식이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아버지의 정신 상태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노조 새끼들은 봄만되면 파업이나 하려고 하니 최루탄 냄새가 나서 봄을 즐길 수 없다는 뜻이지” 혹은 “일제 때 나라를 잃으니까 사람들은 봄이 와서 날씨가 화창해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걸 이르는 말이지.” 등등 자신의 경험과 비유로서 자식과 대화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교육비에 등골 휘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빚을 내서라도 자사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자식과 뭔가 소통했다는 느낌에 뿌듯할 것이다. 거기다가 자식의 대답이 이렇다면? “아, 그거 씨물라씨옹이네요.”

아빠도 모르는 말이 자식의 입에서 나왔다면, 아버지는 아 나도 이제 자식에게 배울 나이가 됐구나 하며 인문학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식 눈치를 볼 거다.

바로 이런 상황이 공자와 자하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제 간의 끈끈한 소통을 넘어 자하의 재기발랄함이 드러나야 하는 해석이어야 한다.

이 구절을 해석하려면 ‘素’의 의미와 비유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근데 난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소박함? 일단 이걸 그냥 X라고 하겠다.

“선생님, 이 싯구절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웃는 입술 귀엽구나/아름다운 눈동자 섹시해/XXX하니까 아찔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나중에 XXX를 하는 법이다.”, ”아하, 공부 역시 배운 후에는 XXX를 해야겠군요?”, “너 이자식 이제 내가 너에게 배워야겠구나, 허허.”

X에 대체 뭐가 들어가야 극적인 구성이 이루어질까? 잘 모르겠다.

2.

논어를 처음 배울 때, 조금 어렵다 싶은 글자에는 읽는 법과 뜻이 주석에 적혀 있어서 아 이거 참 공부하기 편하라고 신경 많이 썼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르치던 선생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소한 글자에 붙어있는 주석은, 바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옛글이라서 그냥 옮기긴 했는데, 지금은 그 뜻이 분명치 않은 것을 주석가들이 적어 놓은 것이다. 즉 이 글자들은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명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거. 그러니 이런 글자들의 해석을 주석에 얽메일 필요가 없다.

‘倩’이니 ‘盼’니 하는 말에 무엇인가 깊은 공자의 사상이 숨어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주석가들의 문화적 배경을 유추하는 자료가 될 뿐이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