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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나의 독서 역사

kabbala 2009.01.16 22:42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고 나도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서 역시 매우 개인적인 경험인 거 같다.

1.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책들은 대부분 10대에 만났다: 『엔트로피』, 『색채심리학』,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장자』(안동림) 그리고 물리 교과서(Halliday, Resnick 등) 정도가 기억난다.

내용보다는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내가 감동 먹고 학교 교사나 주위 어른들에게 저 책들의 내용을 물어도 뭐 뾰족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때부터 세상 좀 우습게 보기 시작한 듯?)

그 뒤에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좋은 책이나 요긴한 정보를 주었던 책, 추억에 남는 책(이성에게 선물로 받았다거나)이 없는 건 아닌데,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싶은 책은 없다.

책 내용보다 그냥 10대 때 본 책이 기억에 남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 본 TV 만화가 평생 남는 거처럼. 저 책들을 지금 다시 본다고 좋아라 할 거 같지도 않다.

2.

20대 초반 대학에서 남들 다 읽는 책들을 읽기도 했는데, 머리에 남은 건 없다.

우선 내용은 없고 너무 감정에 치우친 책들이 많았다. '미제는 나쁜놈이다'같은 내용.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거꾸로 보는 세계사』 따위) 원서 자체가 정치적인 색이 짙은 경우도 있었다. '철학책'이라고 돌아다니는 것이 쏘련이나 중공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만든 것이니 뭘 제대로 배우기는 불능. (쿨가이의 대명사 진중권도 그때는 쏘련 미학책 번역)

이런 종류의 책(최근 생각나는 건 우석훈)이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고, 그런 책들의 저자(유시민이라던가)가 지금도 인기 있는 걸 보면 무슨 불량식품처럼 인간이 언제나 갈구하는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번째로는 정확하게 읽지 못 했다. 기초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크고, 당시 번역 수준을 비롯한 학문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도 했다. (학문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조용히 교수실에 앉아 있어서 나같은 사람이 알 수 없었을 듯)

적당한 독서 지도(?)를 해줄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었던 것도 이유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선생에게 맞추는게 더 빠른 일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제대로 책 읽고 산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사회가 왜 이모냥인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3.

오히려 어떤 책을 읽었나보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

첫번째는 명상(?)하며 읽는 법. 끈질기게 선교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글에 환상을 더하면 무궁한 해석이 나온다. 종교 경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역사, 철학책, 문학작품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옳다고 보기 어려운 독법이다. 잘 모르시는 분들께는 70년대 미국의 신비주의 책들을 추천한다, 『요가난다』 정도. (종교를 가지고 계시다면 이미 실천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두번째는 희곡 읽는 법. 연극을 배우면서 희곡은 연극이 될 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古代)로 갈 수록 서사문학은 책이 아닌 공연으로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글이 실제 의식(儀式)의 단면이나 메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공연을 떠나 소설로만 본다면 그 가치의 10분의 1도 못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어찌보면 이게 공부하는 방법일 것이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다, 말 그대로 공부 중이다. 정말 매우 늦게 알게 되었다. 그 시초는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였다. (책 자체는 비추) 책 첫머리에 고전적인 삼단논법(모든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비판이 짧게 언급되는데, 그걸 읽고서부터 논리와 현실세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거 같다. 언어 논리(?)라는 게 기계적일 거 같으면서도 주관적인 아리송한 세계다. 아무튼 이쪽으로는 지금도 고민 중이다. 내가 컴퓨터 때문에 형식논리에 너무 익숙했던 것도 이걸 늦게 알게 된 원인이 된 거 같다.

마지막은 상품으로서의 책, 잠깐 편집자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책이나 글과 관련된 일은 이전에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보니 책에 대한 관점이 180도 바뀌었다. 책은 철저하게 편집자가 생산해내는 상품으로, 작가는 그저 재료 중에 하나일 뿐이다. 책의 내용은 순수한 작가의 의도도 아니고, 필요에 따라 가감될 수 밖에 없다. 독자는 책이 하나의 상품임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마치 TV 비평하듯) 상업적인 출판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책은 정치적인 도구인 경우가 많았다. 책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 뒤로 책을 구입해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 현저하게 줄었다.

4.

나는 문학작품은 잘 안 읽는다. 정보 전달량이 적으니까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소설은 가끔 열심히 보기도 하는데, 순전히 재미로 본다.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반이상은 무협지나 SF소설. 재미까지 없는 소설도 있다. 이문열, 확성영이 재미있는가?)

시는 거의 안 본다. 소설은 재미라도 있는데 시는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김소월 정도만 진짜 시인거 같고, 윤동주, 기형도만 해도 짧게 쓴 산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나는 시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미탑재된 거 같기도)

나는 왜 시를 모를까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는데,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나요? 같은 얼빠진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시를 100번 읽으라던가, 마음 어쩌고 하는 알 수 없는 말들 뿐이었고. 내 마음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에 시가 없었다는 생각. (한민족의 혼을 일깨울 수 있는 진정한 문학은 안 나타났어! 뭐 이런 거랑 통할 수도) 한국의 문학을 만든 작가들이 일제 때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한국 문학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거 같다. (오히려 대중가요(랩이라던가)가 더 한국 문학에 접근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쪽 책들도 늦게 보기 시작했다.

5.

그래도 내가 즐겨 읽었던 작가들을 고백해보자면:

우선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을 즐겨 읽고 자란 것이 잡다한 지식을 갈구하는 바탕이 된 거 같다. (이 팀이 일본 거를 많이 베꼈다는 걸 알고 급실망하기도 했지만)

다음으로 은근히 김용옥 영향을 많이 받았다. 꾸준하게 글을 써서 대중에게 학문세계를 소개하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다. (근데 이분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자기 생각이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직 없다가 답인 거 같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중이신 듯)

글쟁이 중에는 고종석을 좋아한다, 뭔소린지 도시 모르겠는 기사가 난무하는 언론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다. (아이디어도 살짝 마음에 들고)

막스 베버에 충격 먹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집요해? (난 막스 베버가 꼴통 보수 우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객관적으로 썼다고 본다. 내가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약간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정치성향은 한나라당 골수분자인데 사회에 대한 글은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매일같이 황거를 향해 절할 거 같은 사람인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는 사람 같은 거)

이부영(정신과 의사)도 기억난다. 융이나 프로이트를 번역판 책만 봐서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 사람 글을 통해 기준을 삼는다. (한국사람이 공부해온 걸 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마땅히 구체적인 책들을 적시(敵視)해서 글을 썼어야 하는데, 읽은 책들 생각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고 해서 여기서 마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왜 자기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글을 썼는지 알 것도 같다.)

근데 대충 정리한다고 정리하긴 했는데 큰 의미는 없는 듯. 시간이 흐른 뒤에 볼 추억거리 정도? 그냥 내가 그때 그랬지 정도 생각할 수 있는 마일스톤으로 생각하자.
댓글
  • 프로필사진 singularity '김용옥밑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에서 그곳이 도올서원이라면 혹 마주쳤을 가능성도^^
    저도 짧게 스쳐지났더랬지요.
    2009.01.18 00:00 신고
  • 프로필사진 kabbala 예전에 도올서원 응시해볼까 고민해 본 적은 있습니다;;; 전 다른데서 아주 잠깐;;; 2009.01.18 05: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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