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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8일 토요일

이거 분명히 한국의 독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일텐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인기가 상승하니 무리해서 옮긴 것일 듯.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한국판에서 한국의 상황과 거리가 있는 「나의 독서일기」를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런 책을 그대로 옮겨왔으니, 지은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서문에 아마 나오겠지?

지은이가 인기 있어서 그런지 가격도 비싸다. 일본 원서 가격보다 비싸니 앞으로는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책은 일본어로 읽어야 할까?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도서관에서 빌림.

다치바나 다카시를 처음 접했을 때,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었다.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한 것을 정리해도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그 뒤로 약간 팬이 된 듯하다. 뭐 근데 다치바나 다카시는 동대에 문춘 출신이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이 책은 「주간문춘」(週刊文春)의  「나의 독서일기」(私の読書日記) 코너에 연재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이 연재물을 묶어서 출간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1. 『ぼくはこんな本を読んできた—立花式読書論、読書術、書斎論』(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1999) — 1992~1995년 연재분
  2. 『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내가 읽은 책・재미없는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경이의 속독술)(2003) — 1995년 11월 30일~2001년 2월 8일자 연재분
  3. 그리고 이 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ぼくの血となり肉となった五〇〇冊 そして血にも肉にもならなかった一〇〇冊)(2007) — 2001년 3월 15일~2006년 11월 2일자 연재분
이 3권 모두 단순히 「나의 독서일기」를 묶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은이의 독서관을 적은 인터뷰나 글이 앞에 실려있다. 이 내용도 나름 길어서 서비스가 좋다는 인상이 든다. 이 책에도 240페이지(30~272쪽)나 할애되어 있다!

이 「나의 독서일기」는 일종의 신간소개이기 때문에, 한국 출판시장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한국에는 첫번째와 두번째 책에서 '나의 독서일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모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미디어, 2001) 한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왜 이번 판은 이 부분을 그대로 옮겼는지 불만이다. 일본 출판 시장 탐색을 위해서? 두고 볼 일이다)

1부 「피가 되고 살이 된 500권, 피도 되고 살도 되지 못한 100권」은 지은이의 서재인 '고양이 빌딩 안에서 마이크를 달고 서가 앞을 걸으면서 눈앞에 있는 책들의 추억을 마구 늘어놓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적으로 제작된 것이지만 '나중에 꼼꼼히 손을 대었다.'(11쪽)

앞서 발간된 『ぼくはこんな本を読んできた—立花式読書論、読書術、書斎論』『ぼくが読んだ面白い本・ダメな本 そしてぼくの大量読書術・驚異の速読術』(이 두 권의 책 이름을 일본어로 적은 것은, 한국에는 이 두 권이 하나의 책으로 합본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의 1부는 많은 양의 책을 읽는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전달하기 위한 내용이 많았는데, 이번 책은 내용은 중복되는 게 많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과 감정, 개인사가 더 자세히 드러난다. (동거 얘기도 나옴;;; 책에 18금 딱지 붙여야 할 듯? 간행물 윤리위원회는 일을 한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간문춘을 그만 둔 이유를 '책을 더 읽고 싶어서'라고 적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좀 더 자세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자들이 시간이 쫓기면서 건성건성 아는 척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독서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참지 못했던 거 같다.

취재에서는 듣는 이야기 중에 잘 모르는 게 나와도 음~, 음~, 하며 알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듣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대목은 나중에 서둘러 조사합니다. 다음 사람을 취재할 때는 서둘러 조사한 설익은 지식을 꽤나 오래전부터 알아온 지식인 양 상대에게 던지면서 취재를 더욱 심화시켜 갑니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할 수 있는 능력, 즉 '반가통(半可通) 능력'을 익혀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9쪽)

어쨌든 반가통이라면 기본적인 일은 굴러가는 곳이 저널리즘 세계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도 마음도 망가져 버려서, 반가통이라도 큰소리만 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역겨운 인간들이 저널리즘 세계에는 너무 많습니다.
'내 자신이 반가통에 불과하다.'라는 자각이 있으면 아직 가능성이 있지만은, 그런 자각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가통 세계 저편에 있는 '전가통(全可通)' 인간에 대한 존경심도 없을 뿐더러 스스로도 전가통 인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져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거죠. (49쪽)

심히 공감되는 이야기. (뒤에 자신이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출력비(입력대 출력의 비율)가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9쪽)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24세부터 34세까지의 10년간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를 쓰기 이전의 10년간이라 할 수 있다.
이 10년간은 약간의 출력물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시간을 입력에 바친 시기였다. (13쪽)

달리 표현하자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이후, 그 연장선상에서 한 작업은 대부분 형편 닿는 대로 부득이하게 한 일이었다. (중략) 지적인 내용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이전에 부지런히 축적했던 자산을 까먹으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쪽)

내가 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자위해보자;;; 뭐랄까 자신의 직업과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치관. 일본식인 거 같기도 하고. 약간 보수적인 느낌도 든다.

그가 대학생 때 읽은 책들 목록을 보니 벌써 30년 이상 전 이야기고, 지금에 그 책들이 다시 출판된다면 과연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상계(?) 또는 출판시장도 은근히 많이 바뀐다. 한편으로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인기를 끈 책이 많은데, 일본 출판 시장과 한국 출판 시장의 공명이 일어난 것도 흥미있다. (따라한 거 겠지)

번역자가 언급된 책들의 번역판 제목을 확인하지 않은 거 같다. 예를 들어 Thor Heyerdahl(1914~2002)『Kon-Tiki ekspedisjonen』(Kon-Tiki Expedition)(1948)의 경우 국내에 '콘티키호 탐험기'(32쪽)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국립도서관 자료를 검색해 보면 모두 '콘・티키' 또는 '콘티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다치바나가 문춘을 그만 둔 뒤에도 생계를 꾸릴 수 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일본 잡지사에서 기사를 구입해주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물론 '자유기고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런 시장은 그리 발달해있지 않다.

또 일본 잡지는 널리 알려진 작가들에게 높은 고료를 주며 기사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해외 취재 같은 것. 한국에서 작가들이 신문 지상에 정치 얘기를 써대는 게 이런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학가가 아닌 기사를 작성하는 라이터에 대한 대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문춘에 재직하던 무렵, 문필가로서 '선생'이라 지칭되는 사람은 소설가뿐이었습니다. 논픽션 작가로서 '선생'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만년의 오야 소이지 정도였죠, 아마. 《주간문춘》에 톱 기사거리를 파는 일을 하던 가지야마 도시유키 같은 사람은 인기 작가가 된 뒤에도 문춘 사내에서는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조금 윗세대 편집자들로부터 기껏해야 동료 취급을 받았을 뿐, 대다수는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37~38쪽)

이러한 상황은 곧 바뀐다.

이런 상황이 급속히 변한 것은 주간지 등장에 의해서입니다. 주간지에는 연재소설도 있었지만 연재소설만으로는 주간지를 팔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매력적인 특집 기사가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쪽이 훨씬 중요합니다. (39쪽)

이러한 현장의 연장선상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문예춘추》(1974년 11월호)의 「다나카 카쿠에이 연구」였습니다. 그 당시 선전 문구에 "잡지 저널리즘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조사를 바탕으로"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39쪽)

다치바나의 성공 역시 그러한 조류와 관련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책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일본 출판계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치바나가 학사입학한 동경대 철학과를 그만 둔 배경에 당시 학생운동이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만든 것, 즉 창작물'을 싫어합니다. 나도 한때는 픽션을 쓰겠다는 뜻을 품은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창작물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서 처음 한 일이 주간지 취재, 그러니까 리얼한 세계 그 자체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 이면으로부터 그리고 정면으로부터, 또 삐딱한 시선으로부터도 샅샅이 검증해내는 그런 일이었잖습니까?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 점차 리얼한 세계의 재미에 눈을 떠간 겁니다. 그와 함께 창작물의 세계가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픽션의 세계, 창작의 세계는 밑바닥이 너무 얕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것은 아무리 애써봤자 빈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구상력과 상상력이 그만큼 빈약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70쪽)

사람이 만든 '창작물의 세계' 이외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크게 말하자면 첫째는 자연세계입니다.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자연세계 전체 말입니다.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의 세계입니다. 또 한가지는 인간 혹은 인간집단이 만들어낸 사회적 존재물 전체입니다. 사회과학의 대상이 되는 것 전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70쪽)

나는 포퍼를 좋아하고 대단히 열심히 읽었어요. (중략) 내가 생각하는 '사회과학, 인간과학, 역사학 등의 대상세계 전부'는 포퍼의 '세계2' 및 '세계3'과 미묘하게 겹치면서도 또 미묘하게 다른 것입니다. (71쪽)

내가 말하는 '리얼한 세계'란 말하자면 '신께서 지으신 자연세계' 플러스 비코가 말하는 '인간이 만든, 그러므로 인간 인식에 적합한 객관세계'를 말합니다. (73쪽)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다치바나가 일본의 무교회파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기독교를 상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니 그 영향이 적지 않은 거 같다.

우리 귀에까지 들리는 일본 필자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거 같다. 그래야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는 거 같고. 그러나 그 보수성에도 각각의 다양한 방향성 같은 게 있다.

일본 책들을 읽다 보면 사상을 단순 명료하게 정리해서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사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언제나 든다. 일본 문화 혹은 언어의 특징인 거 같기도 하고. 반대로 한국은 너무 감춰놓아서 알고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 어쩌면 언어로서 단순하게라도 왜곡을 무릅쓰고 정리하고 그 의미를 보충하는 것이 발전의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코의 정신이 모든 인문과학을 떠받치고 있다는 이야길 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자연과학과 기술도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비코 철학의 정수는 뭔가 하면 "진리는 만드는(짓는) 곳에 존재한다(verum ipsum factum)."(혹은 만들지(짓지) 않는 한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현대과학과 현대기술을 그 근저에서 떠받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요컨데 자연과학은 실험정신, 즉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기술이란 것도 '우선, 만들어보자.'라는 호모 파베르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모두 "verum ipsum factum" 정신 위에서 진행됩니다. 현대문명의 바탕을 데카르트 정신이 아니라 비코 정신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86쪽)

다치바나는 지식인이나 학자라기보다 르뽀라이터이다.

개인적인 경험담이 주를 이루다보니 좀 질린다. 대충 훑어보고 접는 게 좋을 거 같다.

1부에서 소개하는 책들이 대부분 좀 유행이 지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책 자체를 참고할 일도 없을 듯. 어쩌면 이 책은 일본책 어떤 걸 번역할까 고민하는 출판업자를 위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참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이 서평을 쓰기 적당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팀블로그 형식으로 신간 위주로 서평을 쓰면 출판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생각있으신 분?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책 역시 다른 쟝르의 예술처럼 감상 시기와 당시 유행이 중요한 거 같다. 다치바나가 감동 받은 책을 지금 본다고 의미있을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감동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른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감독들마다 어린시절 봤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다른 것처럼.

책 추천이라는 게 생각만큼 의미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댓글
  • 프로필사진 singularity 문예춘추 2008년 12월호를 보면 다치바나와 사토 마사루란 사람이 대화하면서 꾸민 "21세기 도서관--필독의 교양서 200편"이란 대담이 실려있습니다. '이런책을읽어왔다'를 대충 보고 이번에 '천황제와 도쿄대'를 부분적으로 읽어봤는데 일본역사 개론서 사이사이를 메꾸어주는 정보량과 더불어 한국인이 체감하기 힘든 사회적 배경에 대한 부분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사람은 글은, 대체 이글을 쓰는 사람이 참고도서를 읽었을까 싶은 논문들보다 실제 책읽고 글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일본책이나 미국책을 '편역'하는 거 질색합니다.
    보통 편역하면서 이 상황은 '한국적인 상황과 맞지않아서'라거나 '번역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는데
    그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거 아니겠습니까.
    굳이 한국적인 상황만 맞는 것만 알고 싶다면 왜 외국책을 가지고 와서 떠드는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외국의 낯선 상황을 보며 한국이 가고 있는 과정도 알 수 있을텐고,
    일단 원본 그대로 번역해 놓으면 나중에라도 정보의 차원에서 써먹을 길이 생기게 마련인데
    원본을 짤라 원천적으로 봉쇄해놓으면 그 책을 다시 번역할 수도 없고 참 딱한 처지가 됩니다.
    2009.01.16 00:17 신고
  • 프로필사진 kabbala 책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오리지널리티(?)가 상실된 채 소개되는 외국 문물을 보면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피가 되고 살이 되고...)의 경우는 한국 시장에서 일반 독자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이 독서방법 지도서나 추천 서적 목록의 역할, 즉 일종의 실용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보니 그런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 지은이의 일대기나 일본의 사회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네요. 앞서 발간된 두 책이 독서 지도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책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고 믿었던 거 같습니다.
    2009.01.16 02:17 신고
  • 프로필사진 사과소녀 안녕하세요. 검색을 통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꼭 읽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있었는데
    이 서평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전 안 읽어도 될 것 같네요^^;)
    그래도 좋은 부분이 있어서 출처 밝히고 퍼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개인블로그에 두고 보려고 합니다..^^
    2011.05.18 14:12 신고
  • 프로필사진 kabbala 사과소녀님께서 글을 쓰시기 위해 제 글을 부분 인용하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단순히 보기 위해서라면 링크를 하시고 제 블로그에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2011.05.18 13:06 신고
  • 프로필사진 사과소녀 알겠습니다.. 2011.05.18 14: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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